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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백미를 찾아, 갑사(甲寺) 황매화와 노거수
도시는 들끓는다.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글피도 숙명처럼 들끓을 것이다. 이제 이 도시의 삶이 지겹다 못해 염증이 돌고, 때론 환멸이 든다.
황매화黃梅花와 노거수를 만나러 나서는 길이다. 이렇게 길을 나서는 것이 들끓는 도시에 눈을 내리는 한 방편이라 말하고 싶다. 푸른 산천의 품에 안겨 맑은 한줄기 바람에 더워진 가슴을 식히며 꽃과 살가운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천안삼거리를 지날 즈음,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난다. 홀연한 길에 한 잔의 커피가 미각을 유혹하며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행려의 길은 그만큼 더 여유로워 지고 달달하지 않던가.
정안휴게소로 들어가니 상춘 인파 탓일까. 이미 밀물처럼 밀려든 문명의 철갑 행렬들에 숨이 막힌다. 잠시 안겼던 달달한 생각들이 썰물처럼 사라지는 순간이다. 발도 딛지 못한 채로 길을 달린다.
고찰 갑사(甲寺)다.
법계(法界)의 시공에 발을 딛는다. 아늑하고 조용한 풍광이 내 마음의 풍경으로 들어와 세상이 차분해 진다.
연륜이 깊을 대로 깊어진 노거수의 넉넉함 속에 가지들마다 생명의 향유를 뿌린듯 윤기나는 연둣빛 이파리들이 반기듯 나부끼고 나뭇가지의 곡선들은 사방으로 어우러져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휘어지고 비스듬이 굽은 가지의 곡선들은 온화하고 부드러워 여유와 배려가 있어 편안해 진다.
산의 만년 명상 속에서 구도자가 걸었던 이 길엔 둥근 달이 뜨고, 새벽 이슬 내리고, 눈이 내려도, 육신을 때리는 범종소리가 끓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졌어리라. 석양이 내릴 쯤, 산사의 법고가 자지러지게 울고, 은은한 범종소리 저 숲속을 지나 산그리메를 그리며 깊은 그리움과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으리라. 그 아득한 세월 속에 숱한 구도자와 중생들이 한 줌 육신을 묻고, 바람처럼 스러져 갔으리.
그래서 이 법도法道는 이 모호한 삶과 인생을 영원 속에 띄우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황매화(黃梅花)다
화려한 황금 법의를 두르고, 길을 밝혀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연꽃(蓮花)이 합수와 정진과 깨달음을 거친 자비와 열반의 꽃이라면, 황매화는 해탈(解脫)과 자비(慈悲)의 꽃이다. 저 화려한 법의를 두르고, 그 위에 환희와 희열에 찬 생명의 향유를 뿌리고 있다. 갑자기 정신이 몽롱하다. 꽃을 보고 정신이 몽롱해지다니, 나의 지나친 감성 탓일까.
봄날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법계의 길이 환상인 양 황홀하게 느껴진다.
한 가닥 실바람 끝에서 황매화의 고혹한 꽃향기가 진하게 묻어온다.. 사람을 애잔하게 하는 향기랄까. 사람을 사무치게 하는 향기랄까. 그 향기가 유혹한다.
이 향기를 사무치는 여인의 사랑 향기라 했던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봄바람 살랑이는 꽃향기에 실려 법도法道를 따라 간다. 길 우측에 돌올하게 선 시비詩碑가 눈에 들어 잠시 마음을 모은다.
<지비紙碑>
대적광적大寂光殿 오래 기두렸던 달이나 떠오를 양이면 체온이 스민 돌 하나를 남기고 멀리 떠나는 그윽한 새벽이거라
법계法界에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고 중생 구원의 그 영원을 안고 열반涅槃에 든, 어느 고승高僧의 생生을 집약한 시로 여겨진다. 삶과 그 깨달음의 문과 열반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차가운 돌에 음각으로 새겨진 명싯구의 여운이 내 삶의 속기와 얼룩과 때를 잠시 씻어 주는 것 같다.
본당을 좌로 돌아 계류가 흐르는 길 우측에 <탑> 하나가 눈이 든다.
순박성과 간결성이 돋보이는 삼층석탑이다. 탑신을 보니 공우탑(功牛塔)이라 표기되어 있다. 더없이 순수하고 질박한 느낌이다. 오랜 풍상에 이끼가 돌고 검버섯이 피어 그 풍상에 윤곽조차 희미하게 무너졌다.
불완전한 인간의 염원들이 모이고 모여서 저 석탑으로 환생한 것일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인간 소멸의 유한한 한계성의 한 자락을 붙잡아 저 탑신으로 염원의 영원을 일으켜 세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돌을 깎아 온기를 불어 넣고, 피를 돌게 하는 인간의 염원은 산의 저 깊은 골짜기 보다 더 깊고, 흐르는 강물 보다 더 깊고 깊은 것이다.
황금빛 법의를 두르고 길을 밝혀 세상을 환하게 하는 황매화. 해탈(解脫)과 자비(慈悲)의 꽃이다.
이에 어우러진 깊은 연륜이 묻어나는 노거수의 넉넉한 배려와 여유가 묻어나는 고찰 갑사(甲寺)가 이 봄날의 백미가 아닐까.
오늘도 달이 뜨면, 저 천황봉과 삼불봉 관음봉과 살개봉 연천봉을 넘어 달빛은 봉오리 봉오리를 건너 계곡을 비추리라. 그리고 천지를 환하게 밝히고, 언젠가 풀잎 위의 이슬처럼 사라질 인간 만상을 비추리라.
돌아서는 이 불객의 발길에, 해탈(解脫)한 황매화가 환한 웃음으로 합장한다. 이끼가 끼고 검버섯이 돌던 석탑이 영원의 세계를 향해 기구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은다.
저 합수(合手)는 삶의 숱한 고뇌와 고통과 상처와 번민들을 다 견디며 세상을 겸허하게 살아라는 염원의 기도가 아닐까. 한나절 머문 산사의 차분한 시공에서 한자락 나를 벗고, 봄바람에 실려 길을 돌아선다.
별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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