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바로 "나" 였다!
어제 저녁(2022. 10. 21.) 7시부터 2시간동안 "경향신문"사 5층에 있는 여적향 강당에서 책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쓰신 중앙대학교 독문과 김누리교수님의 3주차 시민인문학 강의 중 첫번째 강의가 있었습니다.
주체측에서는(후마니스타 연구소) 강의 청강자들을 위한 단톡방을 열고 제1강의에서 있을 사전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도 김누리교수님의 책을 전달 받아 읽었는데요,
책의 1장 표제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
부연설명부터 말씀드리면 탈북자인 저에게 가장 목마른 민주주의의 이해를 돕는 이 제목의 문구에 욕구가 활활 타올랐습니다.
제가 제출한 질문은;
왜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라고 하셨습니까?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가 한국의 민주주의 사회라고 함은 ... 그렇다면 민주주의 참된 진보를 위한 민주주의자 혹은 민주주의 세력은 어떻게 찿아내고 길러야 합니까?
여러 질문 중에 저의 질문이 첫번째로 선택을 받아 많이 뿌듯했고 그래서 깨알 자랑질을 하고싶습니다.
솔직히 저는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라는 이 표제를 읽으면서 어떤 특정의 정치인 또는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대상일 것이고 시민 특히 '나'는 동조자라는 인식으로 풀이하고 질문을 냈던 것입니다.
김누리교수님께서는 이미 책에서도 쓰셨던 독일의 명망있는 철학자이자 인문학자의 글로 말머리를 시작하셨습니다.
※ 저는 외국어에 약해서 그 꼬부랑 이름을 외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외국인 명사의 이름을 곁들이며 하는 강의자 분들이 마냥 경의롭고 멋있고 부러워 합니다.
북한에서 배움의 그시절에 배울 기회 조차도 주지않은 그들을 탓하면서 말입니다. ㅎㅎ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가장 약한 자아이다!
이 자아라 함은 심리학의 도움이 필요한 부문이다.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이 약한 자아라고 함은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그 자아의 주인공인 시민 한사람, 한사람 바로 '나' 자신이라고 지적한다.
교수님께서 살짝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큰 목소리로;
나는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박정희인 줄 알았다.
나는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전두환인 줄 알았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바로 "나" 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이 약한 자아라고 했으니 그 자아를 알아 보자.
심리학의 기본 대상인 자아를 말하자면 맨 먼저 "성"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성의 차별, 성의 착취와 구속 등등 이 성교육은 인간 자아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원초적인 본성을 올바르게 갖게하는 일이다.
때문에 독일에서는 이 성교육을 어린 나이 때부터 진행하며 그 성교육의 긍극적인 목표는 자기 성에 대한 무한한 자유를 인정해주고 보장해 주는데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자기 성에 대한 강력하고도 의식적인 책임감을 함께 가지게하고 지킬 수 있게 교육한다.
이렇게 자기 성에 대한 완전한 자유 의식과 강력한 책임 의식을 동시에 지닌 사회 구성원인 시민은 모든 사회 환경과 흐름을 주도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우리 한국은 어떤가?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평화로운 시위자 한사람일 때는 그 누구나 다 민주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그 촛불시위 현장을 이탈하는 순간 그 누구나 다 평등하지 않은 "갑"이 된다.
가정으로 돌아오면 아빠와 남편이 되여 기부장적인 사람이 되여 있고, 아들, 딸들이 경쟁 교육에서 뒤쳐질세라 자식들의 감시자로 변하는 엄마가 된다.
한번 쯤 내가 낳아 키우는 자식이 상전으로 보여 함께하는 시간들이 조금은 지겹게 느껴진 적이 없는가?
이런 현상은 가정이라는 테두리 밖, 즉 우리의 사회, 회사, 거리에서 매일 매 순간마다 반복의 연속이라는 일상속에서 살고 있다.
나는 너보다 어른이기 때문에, 너는 자식이고 나는 부모이기 때문에,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님이기 때문에, 너는 여자이고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등등 그 위계질서라는게 없어지면 우리 한국사회가 당장이라도 무너지기라도 할 듯 누구나 이 경쟁적이고 강압적이고 무게감 있는 "위계 질서"에 충실하며 또 잘 지키는 "갑"으로 사는데 너무나도 익숙해진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런 구태한 "생활과 삶의 의식"이 깨지지 않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사람들 각자의 자아, 즉 자기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교육이 부재한데 있다고 본다.
어려서부터 자기 성의 정체성의 자유와 책임의식 교육을 제대로 받고 성장한 시민이 되면 바로 성에 대한, 다시말하여 자기 자아에 대한 자유와 책임감이 사회의 징표로 되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올바른 진보적 영향을 끼친다고 그는 보았고 나도(김누리교수님) 그의 이론에 충격을 받았고 그것이 옳다고 인정했다.
때문에 또 다른 학자는;
"올바른 성교육은 바로 올바른 정치적 의식을 위한 교육이다!" 고 말했다.
기본이 바로 선(자아의 원초적 본성인 자기 성에 대한 자유와 책임감) 사람이, 즉 시민이 없다는 것이 곧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혹자는 "자기 성에 대한 자위행위를 즐기는 사람, 그는 가장 고급화 된 자기 성의 자유와 책임을 인식한 사람"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 성에 대한 올바른 자유와 책임의식의 교육이 없는 사람들이 성에 관한 그릇된 일로 인해 한순간에 자기의 인생을 망치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아 왔다.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에서 "나"는 없고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을 염두에 두고 그에 대해 많이도 궁금해했던 바로 "나"가 그처럼 범접하기 어려워했던 "민주주의자" 였다는 사실을 아주 쎈 충격으로 배웠습니다.
김누리교수님은 인간은 기초적 근원인 자아를 간직하고 있고 그로부터 자기 삶의 모든 것에 대해 뿜어내고 펼치고 있기때문에 "자아"가 강한 사람이 될 때 비로서 민주주의를 위한 민주주의자가 된다고 강론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쓰는 이 글은 교수님 강의를 토씨 하나 틀린게 없이 쓰는 게 아니구요, 현장에서 직강하면서 제가 얻은 배움과 느낌을 곁들인 글로써 사례깊게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저는 올바른 성교육이 곧 정치적 의식을 깨우치는 교육이 된다고 말씀하실때, 순간 너무 크게 "악!"하고 소리를 질러서 교수님의 시선은 물론이고 모든 청강생들의 "따뜻한 시선"(?)을 받았습니다.
다음 2강은 우리 한국에서의 68혁명의 부재와 86혁명, 그리고 통일부문을 다룰텐데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년전에 제가 독일통일 30주년기념 국제학술세미나에 중앙대학교 김누리교수님과 함께 한국에서 딱 두분의 교수님으로 참석하신 서울대하교 인문학연구소 안성찬교수님께(현재 성프란시스대학에서도 철학을 가르치고 계심) 통일 된 독일, 특히 동독출신의 주민들이 "자본주의 화"가 되였는가고 물었었거든요.
제가 이렇게 질문한 것은 탈북자로서 한국 생활 20년이 되였지만 아직도 이 한국사회의 일원으로써의 내가 맞는가? 라는 정체성 혼돈의 복잡함에 갇혀서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안성찬교수님 답편은;
아니요. 그들 동독인들, 특히 통일이후에 태여난 2030세대들은 '우리는 통일을 당했다.' 고 말 했습니다.
가장 약한 자아가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이라면 그토록 부러운 통일 독일, 특히 동독 출신 주민들의 이 "약한 자아"에 대하여 또 질문 드려 볼 생각에 벌써부터 충분히 흥분됩니다.
저는 부러움의 대상인 통일독일에 대하여 가장 약한 자아인 "성의 문제"로 풀어보며 배울 생각입니다.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가장 약한 자아를 지닌, 그래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한 바로 "나" 자신이였음을 깨닫는 좋은 교육을 받고 이렇게 함께 나눕니다!
2022. 10. 22.
첫댓글 김누리교수님은 인간은 기초적 근원인 자아를 간직하고 있고 그로부터 자기 삶의 모든 것에 대해 뿜어내고 펼치고 있기때문에 "자아"가 강한 사람이 될 때 비로서 민주주의를 위한 민주주의자가 된다고 강론 하셨습니다.
명언입니다...적극 공감도 되구요.
제가 지금 무지 즐겁고 행복한 것은 사평역님이 맨 먼저 달려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ㅎㅎ
좀더 편히 민주주의 누리고 싶습니다 ^^
"약한 자아"를 깨치고 나와서 "강한 자아"를 지닌 시민 민주주의자가 많으면 진정한 민주주의의 사회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그렇게 해 볼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