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구원하는 믿음 갑자기 문득 하늘나라는 내가 그렇게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그런 실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천사가 귀띔해 줬다는 표현이 더 옳을 거 같다. 하느님, 하늘나라, 구세주,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거의 매일 하루 몇 번씩 말하고 설명한다. 하지만 말하면서도 잘 모르거니와 안다고 해도 실제로는 바닷가 모래 알갱이 하나 정도밖에 안 될 거다. 이는 지나친 자기 비하가 아니다. 사실이다. 한두 시간만 노력해 산에 오르거나 육지를 지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정말 개미 같은 집들과 자동차들이 지나다니고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하느님께 내가 바로 그런 존재다. 이사야 예언자도 그렇게 표현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 41,14)
이리저리해서 신은 있고 없고, 하늘나라는 이렇구 저렇구 하며 치열하게 논증하고 논쟁하는데, 아이들 소꿉놀이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아니라고 해도 하느님은 늘 그 자리에 그렇게 계시고, 반대로 믿는다고 해도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분이시다. 철학자고 신학자였던 안셀모 성인 말 대로 하느님은 항상 그보다 더 큰 존재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그 엄청난 신학대전, 아직도 제대로 번역했는지 아닌지 말이 있는 그런 대작을 저술하는 중 하느님을 환시로 보고서는 그것을 지푸라기 하나도 못 된다고 말하며 저술 작업을 중지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그 지푸라기 하나를 이해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있으니 하느님은 도대체 얼마나 큰 분인가. 불가지론자들 주장대로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게 솔직한 걸지 모르겠다. 무신론자들의 마음도 이해하겠다. 그런데도 지푸라기 하나와 같은 믿음이라도 있어야 그리고 그래야만 내 영혼을 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노예 생활을 하던 이집트를 기적적으로 탈출하고 홍해를 마른 발로 건너는 체험을 하면서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후대에 바빌론과 아시리아 강대국으로 끌려가 또 노예로 살다가 다시 기적적으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느님 말고는 의지할 분이 없음을 깨닫고 고백하게 됐다. 바로 그분이 지금은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런 하느님이 나를 죽도록 사랑하시고 매일 목숨까지 내놓으신다. 믿을 수 없다. 그래도 믿어야 한다. 믿고 또 믿고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해야 한다. 이해가 아니라 믿음이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는 권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사랑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하느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거다. 힘들어도 싫어도 미워도 사랑해야 한다. 그 하느님이 사람의 말로 알려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계명을 안 지키면 벌받는다는 게 아니라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뜻이다. 참으로 가당치 않은 말이지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긴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믿음의 승리이다.’(1요한 5,4)
예수님, 많이 말고 아주 조금만 알게 해주십시오. 아니 그냥 믿게 해주십시오. 조금이라도 깨달았다가는 숨이 멎거나 살아있다고 해도 오금이 떨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예수님이 왜 어머니를 저희에게 붙여주셨는지 알겠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