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녀다. 매장으로 들어선 그녀는 자연스레 쟁반과 집게를 들고 빵을 고르기 시작했다. 고른 빵을 들고 그녀가 계산대로 왔다. 내가 빵값을 말하자 그녀는 휴대폰을 내밀었다. 할인과 포인트 적립을 하고 카드 승인을 받는 동안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그저 내 말을 듣고 휴대폰과 카드를 주기만 했을 뿐이다. 빵을 담은 봉지를 받아들고 그녀는 매장을 나갔다.
결국, 오늘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마스크 밑으로 드러난 턱 부분을 본 게 전부다. 그곳의 피부는 뾰루지가 다닥다닥 돋아 있어 불그스럼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가 오는 날이면 뭔지 알 수 없는 갑갑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왜?'라는 의문부호가 소용돌이쳤다. 나름대로 추리를 해봤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여드름이 많아서일까. 그도 아니라면 대인기피증일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 얼굴은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그저 옷차림 정도로 그녀 나이가 많지는 않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그녀가 매장에 드나든 지는 삼 년 정도 된다. 처음에는 감기에 걸렸나 생각했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까만 마스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크고 넓은 마스크가 그녀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었다. 초여름이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는 얼굴 성형 수술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한여름이 되어도 마스크는 벗겨지지 않았다. 여전히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빵을 사러 왔다. 매번 말 한 마디 히지 않고 행동할 뿐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가 매장에 들어서면 나는 가슴이 턱 막혔다. 그렇게 그녀는 거의 삼 년에 걸쳐 빵을 사러 왔다.
그런데 몇 달 전, 그녀 얼굴을 살짝 볼 기회가 있었다. 올여름은 폭염으로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야구모자 대신 플라스틱 썬 캡을 쓰고 왔다. 두 겹으로 된 모자의 챙 하나를 턱밑까지 내려서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실내에 들어오면서 챙을 턱까지 내리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녀인지도 몰랐다. 옷을 보고야 그녀라는 걸 알았다. 더위에 그녀도 대책이 없었던 듯 까만 마스크를 벗어버린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살짝 그녀의 옆모습을 봤다. 얼굴에 트러블이 심했다.
그리고 다음에 왔을 때는 얼굴을 빈틈없이 가려주는 자외선차단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숨쉬기도 힘든 여름날, 실내에 그런 모습을 하고 들어오는 건 무슨 이유일까. 빵집은 말을 하지 않아도 계산이 가능한 곳이지만 만약 병원이나 다른 곳에서라면 어떻게 할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마치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말고, 쳐다보지도 말고 계산이나 똑바로 하라'는 듯, 그녀의 행동은 거칠고 단호했기 때문이다. 올여름을 보내면서 나는 그녀가 얼굴을 쉽게 드러내놓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폭염으로 얇은 옷도 거추장스러운데 더 꽁꽁 싸맸으니 말해 무엇하랴.
날이 조금 선선해지자 다시 검은 마스크를 하고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를 보면서 문득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 씨가 떠올랐다. 지선 씨는 2000년, 음주 운전사가 낸 사고로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40여 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고, 생명은 건졌지만, 얼굴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젊고 아름다웠던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지선 씨,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놓고 삶 앞에 용감하게 맞섰다.
고통을 이겨낸 그녀가 아름다운 건 그녀의 당당함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의지의 대명사가 되어준 지선 씨는 자신의 현재 모습이 좋다고 했다. 물론 지선 씨처럼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불안과 우울증, 대인공포증과 같은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다.
한때 나도 얼굴을 가린 채 다니고 싶을 때가 있었다. 타인이 날 바라보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사람들 없는 곳을 골라 다녔다.특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집에서 조그만 큰소리가 나도 가슴이 철렁했다.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마음이 위축되자 삶에 자신감이 떨어지고 생활은 폐쇄적이 되었다. 밖에 나갈 때는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땅만 바라보고 다녔다. 불행한 환경에 나는 스스로를 몰아넣어 버린 셈이었다.
그러다가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서서히 착각 속에서 빠져나왔다.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은 나를 감출 수 없게 했다. 가정이 조금씩 안정되어 가자 자신감도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내 삶에 관여할 만큼 그리 한가하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했다.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건 내 마음의 문제였다. 내가 타인의 삶에 끼어들지 않듯이 타인 또한 내 삶에 무심하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얼굴이 잘났든 못났든, 예쁘든, 그렇지 않든 얼굴은 한 사람의 인생이다. 시대가 변할수록 사람들은 얼굴을 몸과 마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몸을 챙기고 마음을 가꾸는 것보다 얼굴에 투자하는 일에 더 열성적이다. 그만큼 얼굴은 한 사람의 존재의미이기 때문이다.
'마흔이 되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얼굴은 그 사람의 살아온 이력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리라.
'얼굴'의 우리말 뜻은 얼(넋)이 들어 있는 굴( cave)이라고 한다. 얼이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라는 뜻일 게다. 얼은 정신이나 영혼 혹은 마음을 뜻하니 얼굴에 그 사람의 생각과 인격, 건강 등이 모두 담겨 있기 마련이다.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나 외상으로 인해 자신을 드러내놓지 못할 고통 속에 처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스크를 쓴 그녀를 본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아닌 마음을 감추는 건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니 나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음의 마스크다. 감정노동이 주 업무인 나는 내 감정과 상관없이 항상 정중하고 친절해야 한다. 손님이 어떤 요구를 해도, 최선을 다하야 하는 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은 울고 있지만 얼굴은 웃고 있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럴 때 나는 분명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타인에게 보이는 셈이다. 진정한 내 마음은 마스크로 가려버리고 꾸며진 내가 그들을 상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음의 마스크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부득이 마음의 마스크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해를 입히기 위한 목적으로 마음을 감추는 건 지탄의 대상이 되리라.
보기 싫거나 답답하다고 해서 그녀의 마스크를 강제로 벗겨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요하게 여길 때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그녀의 삶에 드리워진 그늘에 햇살이 스며들기를 나는 그저 바랄 뿐이다.
첫댓글 이지선 교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pekrosa&logNo=223053131305&proxyReferer=https:%2F%2Fm.search.daum.net%2Fnate%3Fw%3Dtot%26thr%3Dmnaf%26q%3D%25EC%25A7%2580%25EC%2584%25A0%25EC%2595%2584%2520%25EC%2582%25AC%25EB%259E%2591%25ED%2595%25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