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오십대라면 후줄근한 ‘쉰 세대’ 또는 ‘젖은 낙엽’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중앙SUNDAY가 50대 남성 50명을 인터뷰·전화·e-메일로 설문한 결과 이는 선입견이었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긴장을 느끼면서도 의욕과 희망을 강하게 보였다.
특히 신체적 나이와 무관하게 젊은 기운과 마음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설문에서 응답자 대부분이 기분상의 나이를 30~40대로 써냈다. 영화감독 이준익씨는 18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이를 굳이 의식하고 살진 않는다는 뜻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내 나이가 벌써…” 하며 혼잣말을 하는 사람도 적잖았다.
장래에 대해선 긍정적이고 수용적인 자세를 보였다. 나이 오십을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주문에 응답자들은 대개 밝고 적극적인 단어들을 썼다. 건축가인 이한종 이일공오 대표는 당당히 ‘전성기’임을 선언했다. 조정묵 아시아나항공 선임기장도 ‘황금기’라 했다. 이 대표는 “내가 하는 일을 이제 제대로 잘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뭔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작’을 키워드로 삼는 응답자도 많았다. 한대화 한화이글스 감독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규정하며 “나이 오십에 감독을 시작하면서 모든 게 새롭고 중요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배재규 삼성자산운용 상무도 ‘인생의 시작’이란 표현을 썼다. “어떤 일을 하든 축적된 연륜으로 시행착오를 피해가면서 시작과 마무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또 노재영 서울대 농업생명과학정보원 팀장은 ‘즐거운 인생을 살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낙관론을 폈다. 그는 “지금이 인생의 클라이맥스 같아 주변 눈치도 덜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나이 오십은 인생의 중요한 상승 국면이다. 새로운 지평을 열거나, 목표 지점에 안착해 뿌듯한 달성감을 얻는 수확의 시기이기도 하다. ‘활주로’ ‘정상에 오르는 마지막 베이스캠프’ ‘후반전의 시작’ ‘즐거움’ ‘개안(開眼)’이라는 답변도 그런 맥락이다.
‘65세까지 돈 벌겠다’ 35%
오십이 돼 좋은 점도 많다. 연륜과 여유가 생긴 덕이다. 주호영 한나라당 의원은 “세상을 헐떡이지 않고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도 “어떤 일을 할 때 ‘나이가 적어 아직 이르다’는 말을 안 듣게 돼 편하다”고 했다. 고진 갤럭시아커뮤니케이션즈 대표는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으로 디테일을 챙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50대는 구조조정·명퇴·정년을 의식해야 할 나이이긴 하다. 그러나 결코 뒷전으로 물러나거나 은퇴할 때는 아니다. 이는 중앙SUNDAY와 인터넷 여론조사 전문회사 마크로밀 코리아의 공동조사에서 확인됐다. 조사는 지난 7일 수도권의 50대 남성 300명(직장인 또는 자영업자)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퇴직 후 뭘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인생 2모작으로 새 일이나 직장을 찾겠다’는 응답이 44%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럼 언제까지 일해 돈 벌 수 있겠느냐는 질문엔 ‘65세까지’가 35%로 가장 많았다. 이어 ‘60세까지’가 26%, ‘70세까지’가 19.3%의 순이었다. ‘80세 이상’이라고 답한 사람도 5%나 됐다. 대체로 소득이 높을수록 근로가능 연령이 길게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퇴직 후에도 일을 함으로써 사회적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계속 받는 게 좋다”고 권한다. 세계보건기구(WHO)도 ‘경제활동을 하면서 남에게 짐이 되지 않는 사람’은 노인의 범주에서 제외한다.
물론 불안과 스트레스도 적잖다.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오십 된 남자가 짊어져야 할 짐은 무겁기만 하다. 사회적 지위에 따른 책임감, 퇴직·전직에 따른 스트레스, 노후에 대한 걱정…. 또 집에 돌아오면 노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직 독립하지 않은 자녀도 챙겨줘야 한다. 그렇다고 아내와 깨 쏟아지게 지내는 것도 아니다. 여러모로 낀 세대다.
그래서 갑자기 외롭고 쓸쓸해져 방황하기도 한다. 이른바 ‘사추기(思秋期)’다. 인터뷰 과정에서 노후 걱정이나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땐 실명을 밝히길 꺼리는 응답자도 있었다. 부인과 더 애틋한 사이가 됐다는 사람이 많았으나, 평소 배려해 주지 못한 데 대해 “미안함만 쌓여간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 또 한 응답자는 “주도권이 아내에게 자꾸 넘어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며 서운해 하기도 했다.
여자에게 50은 성숙,자유,도전
비로소 내가 되는 나이, 지천명(知天命)이 아니라 지자유(知自由)가 되는 나이, 내 삶이라는 호텔에서 가장 전망 좋은 방, 늘 오늘 같기만 하라고 바랄 만큼 좋은 나이, 두려웠지만 다다르니 평온함이 느껴지는 나이, 온전히 내 생각으로 살 수 있는 나이, 자신과의 불화를 마감하는 시기….
2년 전 중앙SUNDAY가 막 50대에 접어든 1959년 60년생 여성 50명에게 50세의 의미를 주관식으로 물었을 때 돌아온 답변 가운데 일부다. 당시 중앙SUNDAY는 30대 초반~40대 초반의 여기자 5명으로 취재팀을 꾸려 ‘여자 50세’ 특집을 마련했다. 여성이라는 점에서 취재팀은 응답자들과 기본적 공감대를 갖고 있었지만 누구도 50세라는 나이 자체는 겪어 보지 못한 터였다. 그래서 각계 여성 50명이 10여 개 항목에 답해 준 설문결과는 더 놀랍게 여겨졌다. 50세가 돼보지 못한 취재팀이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이들의 답변에는 나이 들어가는 일에 대한 두려움 대신 성숙·도전·자유·자신의 발견 등 긍정적 에너지가 넘쳤다.
응답자들은 물론 육체적 변화에 따른 힘겨움도 토로했다. 때이르게 시작된 갱년기 증상의 고통, 친구들과 모이면 자녀교육 대신 주요 화제로 떠오르는 건강관리, 커피 한 잔에도 잠 못 이루게 된 밤, 굽 낮은 구두에 대한 선호 등을 솔직하게 들려줬다. 여성으로서 외면적인 매력은 20~30대 시절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인정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내공을 더한 원숙한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양한 질문항목에서 외모든, 일이든, 가족이든 외부의 잣대로 스스로를 얽매고 증명하려 하던 데서 벗어나 스스로의 주관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고, 그래서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답변이 거듭 등장했다.
현재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가족’을 꼽은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특히 배우자에 대해서는 친구·동반자로서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시각이 많았다. 나이 들어 갈수록 친구의 소중함을 새로이 깨닫는다는 답변도 여럿 나왔다. 한 응답자는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명예·승진·감투·성공·돈이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미래에 해보고 싶은 일로는 ‘봉사활동’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또 그림, 악기 연주, 외국어, 나 홀로 여행, 소설 집필 등 이제부터 새로운 것을 배워보거나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응답도 많았다. 새로운 일을 이들은 즐겁고 여유로운 도전으로 여겼다. 한 응답자는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일단 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봉사활동에 대한 관심은 노년의 롤 모델에 대한 답변에서도 드러났다. 늙어가는 모습이 닮고 싶은 사람을 묻는 질문에는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활동을 했던 배우 오드리 헵번을 꼽은 응답자가 50명 중 6명을 차지했다. 전체적으로는 어머니, 시어머니, 이웃 노부부 등 주변 어른들을 닮고 싶은 사람으로 꼽은 답변이 50명 중 11명으로 가장 많았다.
2년 전 중앙SUNDAY가 조명한 ‘여자 50세’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중심으로 살아온 그 어머니 세대의 50세 무렵과는 분명 달랐다. 이들은 한국전쟁 직후 시작된 베이비붐(1955~64)의 한가운데에 태어났고, 높은 교육열 속에 자랐다. 직전 세대 여성들이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 최초’라는 테이프를 끊은 데 이어 각계각층에서 본격적인 사회적 활동의 물꼬를 텄다.
이에 착안해 국회의원·기업인·문화예술인·주부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응답자들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취재팀은 이들이 겪어온 벽도 뜻하지 않게 확인했다. 설문에 응해줄 50세 여성 임원을 찾기 위해 문의한 기업들에서 ‘50세는커녕 여성 임원이 아예 없다’는 답변을 듣곤 했다.
건강.아내.돈.친구.취미.퇴직 5友를 꼭 챙겨라
경기도 안양에 사는 조태영(51)씨는 4년차 전업화가다. 그는 매일 집 부근 화실 겸 작업실에 나가 그림을 그리고, 인근 백화점 문화센터 세 곳을 돌아다니며 유화와 누드 크로키를 가르친다. 그는 미대 출신이 아니다. 서울의 한 명문 사립대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다. 1985년, 사회 첫 출발은 식품업계의 대기업이었다. 인정받는 회사 생활이었지만,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대학 시절 서양화 ‘서클’(동아리)에서 잡았던 붓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회사 책상 서랍 한구석엔 늘 유화 붓 세트가 꿈틀대고 있었다. 이후 몇 개의 관련 중소기업을 거치면서 공장장(이사)까지 지냈지만, 그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2008년 우리 나이로 48세이던 그해 봄, ‘더 늦기 전에…’라는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전업화가를 선언했다. 그간 취미생활로 이어온 그림 작업도 있었지만,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가 그의 꿈과 열정을 이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업화가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문화센터 한 달 수입은 고작 30만원. 화실에서 회원을 가르치는 것을 합쳐 한 달 수입 100만원이 안 된다. 화실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교통비ㆍ점심값을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새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내와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며 “늘 미안하고 때로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코 후회하진 않는다. 꿈에 그리던 삶이기도 하거니와 화가로서의 생활에 대한 묘미도 느끼고 있다. 그는 소박하지만 여전히 꿈을 품고 있다. 화단에서 인정받아 그림을 그리면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이 50세 언저리에 시작한 새로운 삶이지만 60세 이후 삶의 질은 어느 누구보다 풍족하리라고 생각한다.
도전과꿈
화가 조씨의 삶엔 50세 남자의 도전과 꿈, 불안이 모두 들어 있다. 지천명 남자의 꿈은 오색 무지개다. 그중 가장 많은 ‘색(色)’은 세계여행이다. 물론 여행이라고 다 같은 여행은 아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여행을 떠나고 싶다’(이주민), ‘퇴직 5友(건강ㆍ아내ㆍ돈ㆍ취미ㆍ친구)와 여행을 떠나고 싶다’(김철환), ‘지금까지 가족들과 세상을 보면서 여유를 갖지 못했다. 가족과 여행 다니고 싶다’(임재무·조정식·박중욱·양승호·박천일·조정식), ‘배낭여행으로 세계일주’(고진),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며 최고급 와인을 마시고 석양을 즐기고 싶다’(배재규), ‘아내가 원하는 터키 여행을 하고 싶다’(김수곤), ‘내가 지나온 모든 장소를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다’(고철현) 등 다양하다. 익명을 요구한 답변자 중에서는 ‘못 가본 곳에 가보고 싶다’‘백두대간 종주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대답한 사람들도 있다.
전원생활(김한영·조정묵·권영진·조태영·안판석) 또는 휴식(김경문)을 누리고 싶다거나, 봉사활동(홍석용·강신우·황성윤·송기동·임봉수·김시곤·김연규)을 하고 싶다고 말한 사람도 많았다. 이 밖에 ‘책 쓰기’(곽승준·이주철·오대영), ‘악기 배우기’(송기동·이한종·허진호),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서연종),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고 싶다’(김형수)는 등의 다양한 꿈이 있었다.
휴식ㆍ여행ㆍ취미가 아니라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더 많은 우승과 역사에 남는 명승부(윤성효), 창의적인 사업 아이템을 찾고 싶다(신철수), 성공한 창업(고인수), 가족 상담사(오영호), 고교 상담교사(김경준), 국가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이홍균), 몸짱(김대진), 비영리 소극장 운영(이준경), 스크린 골프장 운영(노재영), 자영업 성공, 실버타운 건설ㆍ운영 등 구체적인 꿈이었다.
걱정과 불안
미래는 여전히 ‘꿈과 도전’이지만 현실에선 50대 이후의 ‘걱정과 불안’도 있다. 기업에 다니는 50세에겐 은퇴가 몇 년 앞으로 다가온 게 현실인 탓이다. 전문직이나 교수 등 안정적이고 정년이 긴 직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십이 되면서 가장 큰 걱정 거리는 뭔가’는 사생활 보호와 솔직한 답을 얻기 위해 익명으로 물었다. 가장 많은 답은 노후와 건강ㆍ자식 걱정이었다
특히 생활 속의 고민이 많이 묻어났다.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못한 것 같은데 전반기 인생을 마감하도록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지적하며 ‘시간이 별로 없다’고 초조해 하기도 했다. 또 ‘아내와 성(性)생활 유지’가 걱정되는가 하면 ‘돌봐야 할 사람들을 오래 돌보지 못하고 먼저 죽지 않을까’ 하며 죽음이 추상적 단어가 아니라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데 눈을 뜬 사람도 있다. ‘이뤄놓은 게 별로 없다’거나 ‘내가 안정된 자리에 있어야 딸아이가 좋은 가문으로 시집을 갈 텐데’ 하는 불안감도 눈에 띄었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아내의 우울증을 걱정하기도 했다.
아내와의 사이는 ‘오십 남자’의 ‘결혼 적금통장’ 같은 느낌이다. 살아온 삶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다. 하지만 대부분 애틋함과 미안함, 연민을 얘기한다. 솔직한 답을 이끌기 위해 역시 익명으로 ‘50세가 되면서 아내와의 사이는 어떤가’라고 물었다.우선 결혼 적금통장을 잘 관리한 경우다. ‘인생의 친구ㆍ동반자ㆍ여동생ㆍ이모 등 다용도 패밀리’ ‘오래된 친구’ ‘여자에서 친구로 변하는 느낌’ ‘둘만의 행복’ ‘서로를 위하는 보이지 않는 배려’ ‘이제야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새롭게 연애하는 느낌’ ‘진짜 내 편’ 등의 답변이다. 단둘의 시간이 많아지고, 서로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며, 아내를 더 존중하게 됐다는 사람이 많았다.
나의 아내
아내와의 삶이 녹록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섹스가 없어져 간다’고 호소하는가 하면 ‘항상 아이들보다 뒷전으로 취급하니 서운하고 서먹하다’ ‘아픈 데 없이 잘 살고 있어 고맙지만 무언가 섭섭하기도 하다’는 불만도 토로했다. ‘좋다가 싫다가 밉다가 한다’며 오락가락하거나 ‘뜨겁거나 차가운 시기를 보내고 이제는 미지근한 사이’처럼 적당히 타협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져주고 산다’고 아예 물러서거나 ‘내 복이거니 내 팔자이거니 하며 산다’처럼 달관한 이도 있었다.
또 중앙SUNDAY와 마크로밀 코리아가 50대 남성에게 부부관계의 빈도를 물어본 결과 ‘보름에 한 번’인 사람이 전체의 25.7%로 가장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이라고 답한 사람도 21.3%에 달했다. 하지만 ‘안 한 지 6개월이 넘었다’는 답도 19%나 됐다.‘현재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는 질문도 익명으로 물었다. 가족의 건강, 가족과의 행복 등 표현의 차이는 조금씩 있었지만 ‘가족’이라고 답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음으로 많은 답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거나 ‘입신양명’이라고 말한 경우도 있었다. 교수들은 주로 ‘학문적 성취’를 꼽았다. ‘건강 또는 성(性)생활’이란 답도 있다. 이외에도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사람들과의 관계ㆍ신의’ ‘바르게 행동하면서 사는 것’ ‘이상과 현실의 조화’등을 꼽기도 했다.
“버리고 비우고 낮춰 보세요, 젊음이 다시 찾아옵니다”
-아닌 척해도 50이 되면 몸과 마음 모두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가수 인순이가 부르는 ‘아버지’라는 노래에 눈물을 흘렸다는 중년들도 꽤 있습니다. 남자는 50대에 들어서면 왜 약해지는 걸까요.
“여성의 부담이 크다는 목소리가 많지만 실제론 남자들의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아들로, 남편으로,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무겁지요. 50세까지는 돈도 벌고, 사회적 지위도 있지만 50대 중반부터 하나씩 없어집니다. 반면 아내와 아이들 목소리는 커지고. 이럴 때 정년퇴직하면 남자도 갱년기에 빠집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고, 화도 잘 내고, 괜히 울고, 잘 삐치고, 안 하던 취미생활을 갑자기 해 식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50대 남성은 위아래로 끼인 세대라 더 힘든 것 같습니다.
“나이 든 어르신은 계속 모셔야 하고, 다 큰 아이들은 독립할 생각 안 하고 자꾸 손 벌리죠. 그러니 짜부라지고 어깨가 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생활에서도 젊은 세대에 치이는 느낌을 받는 50대가 많습니다. 권위도 잃는 것 같고.
“어른 노릇은 힘드니 오히려 하지 않는 게 더 현실적입니다. 50대가 되면 눈에 보이는 게 많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자꾸 야단치거나 가르치려 들기 쉽습니다. 하지만 요즘 30대는 20년 전 30대에 비해 훨씬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아요. 50대가 자기 30대 시절 생각하고 ‘예전엔 말이야’ 하고 얘기하면 먹히질 않지요. 그들에게 상명하복이나 권위를 내세우면 직장에서도 외로워지니 조심해야 합니다. 나이나 계급 다 무시하고 동등하게 대해주는 게 자신에게도 좋습니다.”
-나이에 따라 쌓이는 연륜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50세가 넘으면 생산성이 조금씩 떨어지게 됩니다. 대신 직장이나 직업에 대해선 더 충실해지지요. 책임감도 커지고요. 또 세세한 디테일은 잘 안 보이지만 큰 그림이 눈에 들어오는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디테일에 매달리다 큰 그림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나이 들면 노안이 오는데, 이는 작은 것은 보지 말라는 신호예요. 그러나 자신이 없으면 작은 것을 자꾸 챙기려 하지요.”
-그런 상황은 다 비슷할 텐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좀 추상적이지만 비워라, 버려라 하는 조언을 하곤 합니다. 비울 때는 겁나겠지만 비우면 저절로 채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어요.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거죠. 결국 도를 닦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자기를 찾으려는 분들이 많은데 찾으려 하면 못 찾고, 버리면 찾을 수 있는 게 바로 자기 아니겠습니까. 찾으려는 ‘자기’는 없을 수도 있지만, 버리면 진짜 자기를 찾을 수도 있지요.”
-그게 말처럼 쉽나요. 젊어지려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사회생활에서 마지막 고지에 오르기 위해 더 치열하게 일하게 되는데.
“부질없는 일이지요. 젊은이보다 더 그악스럽게 놀거나 억척같이 운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다 심장마비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운동도 지나치면 오히려 노화를 촉진시키지요. 또 직장에서 무리한다고 바라는 대로 성취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회사에서 잘나가 임원이 된다 해도 3년 지나면 난감해지죠. 반면 만년 과장, 만년 부장은 악착같이 안 살기 때문에 노후 준비할 시간적 여유도 있고, 가족에 대한 배려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각자 얻은 것과 잃은 것으로 비교하면 주관적 행복은 비슷할 수 있어요. 원래 행복이란 게 주관적인 거 아닙니까.”
-나이가 더 들어도 일은 해야 할 텐데, 그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합니다.
“일이란 것도 자기를 비우는 과정입니다. 일을 안 하면 잡념이 많아지고, 이게 심신을 괴롭히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람을 늘 만나 버릇해야 합니다. 이를 의식하고 퇴직하기 3년 전쯤부터는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많은 이가 어떻게 되겠지 하며 지내고 있어요. 이 또한 자기부정입니다.”
-배우자와의 관계도 젊을 때와는 달라진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를 어떻게 잘 유지할 수 있나요.
“건망증에서 답을 찾아 보세요. 상처받은 건 잊고, 좋은 기억만 간직하는 식으로 말이죠. 망각을 잘 이용하면 배우자를 새롭게 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지금의 배우자를 불륜 상대로 생각하면 의외로 괜찮게 보일 겁니다. 그렇지 않고 내 소유다, 일심동체다 하고 생각하니 되레 불편해지지요. 그리고 20~30년 같이 살았다고 부인을 다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결혼 때의 배우자와 지금의 배우자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거 모르고 함부로 대하면 큰일납니다. 우리나라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배우자에겐 칭찬이 박한 것 같습니다. 있을 때 잘해야죠. 혹시 배우자 때문에 상처가 있다면 나를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 배우자를 고른 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지요.”
-자식과의 관계도 다시 정립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인과 유대인은 둘 다 총명하고 근면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독립심입니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독립심을 키우는 교육을 하지만, 우리는 자꾸 감싸고 챙겨주려 하죠. 그러다간 아이들의 독립심이 저해돼 경쟁력도 떨어집니다. 지금 50대는 어려웠던 시절을 겪은 덕에 그나마 경쟁력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20대는 50대의 과보호 속에 커 그렇지 못합니다. 그 탓에 50대는 80대까지 일해야 할지 모릅니다.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지요. 게다가 일부 상류층에나 있던 가족 이기주의도 중산층으로까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이건 중국이나 일본도 엇비슷하지요. 그래서 독립심이 약한 젊은이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자녀에게 너무 베풀려고만 하면 독립심이 약해집니다. 과보호로 큰 젊은이들은 나중에 부모 봉양 안 합니다. 자녀에겐 독립심을 키워주고 나중에 그들 도움 없이 쿨한 노후를 보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남자가 가정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무엇부터 하는 게 좋을까요.
“부엌을 사수하라고 권합니다. 어느 집이나 부엌을 차지하는 사람이 제일 발언권이 센 법이지요. 남자도 집 안에서 일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창하게 요리까지는 못해도 먹을 만하게 밥상 차릴 줄은 알아야 하지요. 나이 들어 부인에게 밥 안 차려주느냐고 투정하는 것만큼 처량한 모습도 없답니다. 또 본인이 행복하고 유머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같이 놀러 가고 싶다, 옆에 있으면 재미있겠다 하고 가족들이 다가오지요. 매일 화 내고, 볶아대고, 간섭하면 누가 옆에 가겠습니까. 결국 집안에서 본인만 외로워져요.”
-젊어 보이고 멋있게 나이 드는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수많은 위인전을 읽으며 그 위인들이 50대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유심히 봤더니 거의 비슷하더군요. 그들 역시 요즘 50대가 하는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문제는 그런 고민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고민을 통해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두렵고 무섭긴 다 마찬가지죠. 그냥 나이 들면 나이 드는 거지, 하고 생각하는 게 편합니다. 또 외관상의 젊음에 집착하는 것도 안 좋습니다. 죽지 않는 세포란 없어요. 그런데도 젊어진다며 뭐 먹으라, 어디 고쳐라 하는 건 제약회사·의료계·식품업계의 농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타고난 체질대로 사는 게 가장 젊게 사는 법입니다.”
-생각을 바꾼다고 자신이 처한 객관적인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자신이 처한 여건이 바뀌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과 마음을 바꿈으로써 삶의 질은 확 달라집니다. 병에 걸렸을 때 현실로 못 받아들여 분노하는 바람에 병을 더 키우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적응해 사는 사람이 있듯이 말입니다. 마음이 바뀌면 상황을 바꾸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잊고 살았던 나를 찾아범생이 아빠들 아름다운 일탈
인터넷을 통해 배낭여행 정보를 교류하며 의기투합한 안종구 울산대 교수 등 50대 또래들이 지난 7월 광활한 몽골의 버르노르 초원에서 말을 타고 있다. |
#1. 박재균(57)씨는 50대 중반에 뒤늦게 배낭족이 됐다. 2008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박씨는 전역 직후 새 직장을 잡는 일이 맘대로 풀리지 않아 적잖은 마음고생을 했다. 육사 33기로 1977년 임관해 31년을 군에서 보낸 그로서는 낯선 사회생활에 대한 불안감도 꽤 컸다. 그러다가 우연히 TV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접했다. 은퇴한 뒤 여행 오는 사람이 많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순간 ‘저기 가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이 없는데’라며 잠시 망설임도 있었지만 이내 맘을 먹고 준비에 나섰다. 박씨는 “막상 배낭을 메고 공항에 도착하니 왠지 젊은 사람들 보기에 쑥스러운 맘이 들더라”고 했다. 하지만 현지에서 60대, 70대, 심지어 80대 노인들까지 순례길을 찾아 걷는 걸 보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박씨는 “길을 걸으면서 새삼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니 혼란스러운 생각이 정리되고 도전의식도 솟아났다”고 말했다.
그 뒤 박씨는 1년에 두 번 정도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한 달 정도 일정이었다. 시베리아도 다녀왔고 인도와 네팔도 경험했다. 인도 여행부터는 부인도 동행했다. 처음엔 박씨를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부인도 배낭여행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그는 “여행을 다니면서 마음도 자유로워지고 욕심도 많이 버리게 됐다”고 소개했다. 그 덕인지 재취업 문제도 풀려 지난해 초 한 계측기제조회사의 고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박씨는 요즘 다음 달 부인과 함께 떠날 남미 배낭여행 준비로 바쁘다.
#2. 대기업에서 4년 전 퇴직한 구교광(55)씨는 한동안 허전한 맘을 달래기가 어려웠다. 그런 그에게 한 영화가 자극제가 됐다. 미국 영화 ‘버킷 리스트’(2008년 국내 개봉)였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라는 뜻이다. 자동차 정비사(모건 프리먼)와 재벌 사업가(잭 니컬슨)가 우연히 한 병실을 쓰게 되면서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고 ‘버킷 리스트’를 실행하기 위해 병원을 뛰쳐나가 여행길에 오르는 내용이다.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문신하기, 카레이싱, 스카이 다이빙, 눈물 날 때까지 웃어 보기 등. 이들의 버킷 리스트는 보태지기도 지워지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본 구씨는 배낭여행을 결심했다. 그러곤 배낭 하나 둘러메고 인도로 출발했다. 처음 해본 배낭여행이라 제법 힘들었지만 정신적 위안과 격려가 되는 알찬 경험이었다. 그 뒤 종종 배낭여행을 떠나곤 한다. 그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 한국을 잊고 여행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된다”며 “일상에서의 일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일탈이 엔도르핀을 분출시켜 주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외국에 나가서 제대로 의사소통하고 배우려고 영어공부를 꾸준히 한다”며 “배낭여행을 함으로써 그런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낭 하나 메고 훌쩍 해외로 떠나는 50대가 늘고 있다. 20~30대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배낭여행계에 조용한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형 여행사인 하나투어에 따르면 올 상반기 유럽 지역의 에어텔(비행기와 호텔 숙박권만 포함된 상품) 상품을 구매한 50대 고객은 160여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60명)보다 크게 늘었다. 미주 지역도 비슷하다. 에어텔은 경비를 아끼려는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상품이다. 하나투어의 조일상 대리는 “자유여행객 수치를 기준으로 50대의 비중이 매년 상승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해외 호텔 예약 전문 사이트인 호텔자바의 김형렬 이사는 “실제로 외국에 나가보면 예전에 비해 중년 배낭여행객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혼자서 모든 계획을 짜고 비행기와 호텔을 직접 예약하는 ‘자립형 여행자’까지 감안하면 50대 배낭족의 수는 더 늘어난다.
요사이는 경험을 나누고 안전도 지키기 위해 소그룹을 이뤄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많다. 울산대 안종구(58) 교수는 지난 7월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다른 50대들과 몽골로 말타기 여행을 다녀왔다. 2006년부터 매년 몽골로 말타기를 다녀온다는 조모(52)씨가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지난해 처음 정보를 얻었다. 안 교수는 “새로운 형태의 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막상 혼자 나서기에는 경험도 없어 망설여졌다”며 “경험자와 함께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조씨와 다녀온 몽골 여행은 그에겐 신선함 그 자체였다. 광활한 초원에서 나흘간 말을 타고 게르(몽골식 천막)에서 잠을 자는 생활은 점차 무기력해지던 자신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올해도 말타기에 다시 나섰다.
과거와 달리 50대 배낭족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서강대 김영수(사회학) 교수는 “예전보다 사회가 풍족해지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늘어나다 보니 나도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예전 세대의 제1 가치가 자식농사였다면 지금 세대는 ‘자식도 중요하지만 나 스스로가 즐기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도 큰 이유”라고 말했다.
충남대 장휘숙(심리학) 교수는 중년기의 과도기적 역할과 더불어 ‘정체감의 탐색’을 꼽았다. 장 교수는 “중년기엔 지금까지 살아온 날에 대한 회의와 함께 남은 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시기”라며 “그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 ‘나를 찾는 여행’이 필요하게 되고, 배낭여행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배낭여행 전문 여행사 블루의 최윤준 과장은 “50대는 패키지 여행에 염증을 느끼는 것 같다”며 “이미 짜인 일정에 질린 중년층 여행객들이 자유여행으로 많이 갈아타는 추세”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섣불리 배낭족에 합류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박재균씨는 “먼저 어느 곳을 여행하더라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며 “인터넷과 책을 통해 현지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짜야 고생을 덜 수 있다”고 조언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비상계획도 짜두는 게 좋다. 블루의 최윤진 과장은 “배낭여행은 패키지 여행과 달리 철도나 버스 등 현지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며 “현지의 복잡한 교통 시스템을 미리 잘 파악해 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