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지금도 여행 중
문희봉
여행은 우수를 느끼게 하는 것인가? 십대 때는 어디 간다면, 무조건 좋아라 따라 나섰던 나이였다. 내 생각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여행이었다. 그렇더라도 따라 나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집을 나서면 이것저것 먹을 것이 많았다. 먹는 기쁨보다 더 나은 기쁨이 또 어디 있으랴. 발품을 팔아도, 짐짝 싣듯 실어대는 시내버스라도, 몸을 맡기는 자체만으로도 기쁨은 배가 되었다. 옥수수를 먹고, 고구마를 먹고, 얼음과자를 먹는 그 기쁨은 십대 때의 최고의 기쁨이었다. 자치기를 하며 철없이 뛰놀던 옛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이십대 때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면 행선지를 고집하지 않았던 나이, 인생은 데이트 그 자체였다.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던 시절, 둘이 하는 여행은 달콤한 눈깔사탕이었다. 이성을 알만한 나이가 되어서 손잡고 팔짱 끼고 걷는 길은 아니었어도 대도시로 나가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슬그머니 아내 될 사람의 손을 잡고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걷는 맛이란 정말 세상이 우리 둘만의 세상 같았다.
삼십대 때는 어디 한 번 가려면 애들 챙겨야 하고, 이것 저것 걸리는 게 많지만 꼭 한 번 가보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나이, 이때의 인생은 해외여행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래도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해외여행뿐이었으랴. 국내여행도 재대로 못했다. 시골 고향에서 대도시로 나와 직장생활을 하던 때였다. 아이들 둘도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여행은 무슨 여행이었겠는가? 가까운 곳으로 자가용도 없이 완행버스를 타고 몇 번 다녔던 기억밖에는 없다. 텔레비전도 낡아 주인집 거실로 컬러텔레비전을 보러 두 아이가 나가고 나면 어찌나 미안했던지. 나의 삼십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사십대 때는 종착역이 얼마나 남았나, 기차표도 챙겨놓고, 놓고 내리는 물건이 없나 이것 저것 살피는 나이, 인생은 기차여행이었다. 기차를 처음 타본 것이 1960대 초반이었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어 가까운 역으로 나와 기차를 탔는데 멈출 때마다 정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 덕분에 기차에서도 구토를 했다. 종착역은 무슨 종착역, 그런 생각은 아예 할 수 없었다. 사는 것이 바빠 기차표 챙기고, 놓고 내리는 물건이 없나 챙기는 일도 어려웠다. 전직을 하고 나서 그곳에서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으니 여행이란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아이들하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래도 운이 좋았던가 승진이란 큰 선물을 받고 사십대 후반이 나로서는 알차게 보낸 시절이었다며 자위하고 있다.
오십대 때는 어딜 가도 유서 깊은 역사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나이, 인생은 고적답사 여행이었다. 그렇다. 고적답사 여행의 시절이었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더 높은 곳을 향한 나의 집념이 나를 무사안일의 상태로 놓아주지 않았다. 일밖에 모르는 천치 같은 천치, 가정에서의 나에 대한 평가는 바닥점수였다. 그래도 아이들이 제 앞길을 잘 개척해나가니 나에게도 힘이 축적될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직종에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니 그 후광은 모두가 아내와 아이들이 제공해 준 선물의 영향이었다. 이제야 외국으로 눈을 돌려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육십대 때는 나이, 학벌, 재력, 외모도 상관없이 어릴 때 동무를 만나면 무조건 반가운 나이, 이때는 순수한 수학여행이다. 육십대에 반세기에 가까운 시절 몸담았던 정든 곳을 떠나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시기에 도달해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영광보다는 상처뿐이었구나 하는 자책이 든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나를 오십 년 가까이 큰 어려움 없이 정년을 맞게 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정년을 맞을 때 그간 수고해 준 아내에게 따뜻한 마음의 선물이나마 재대로 전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는다.
칠십대 때는 이제는 누굴 찾아 나서기보다는 언제쯤 누가 찾아올까, 기다려지는 나이, 인생은 추억여행이 아닐까 생각되는 나이다. 그렇다. 추억여행이다. 나이 들어 가장 어려운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질병, 그리고 외로움이 아닌가 한다. 매달 일정액의 돈이 내 통장에 꼬박꼬박 입금되고, 맘에 맞는 친구들과 취미생활도 하고, 내 건강을 위해 그간 하지 못했던 여러 운동까지 할 수 있음은 영광 중의 영광이다. 시간이 난다고 해서 빛 바랜 앨범을 들추지는 않으려 한다. 추억여행이란 명목 하에 들추게 되는 앨범 속에서 허무함과 후회막급함을 느끼게 될 터이니 말이다. 단체사진 중 군데군데 빠진 이빨 자국은 현대의학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고질병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보이지 않는 승차권 하나 달랑 손에 움켜쥐고 멀리 떠나는 기차여행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그러나 그 기차여행은 왕복표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여행이다. 한 번 왔던 길을 되짚어 갈 수 없는 것이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후회 없는 기록을 남길 일이다.
여행도 준비를 어떻게, 얼마나 했느냐에 따라서 즐거움의 차이가 크지 않을까.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일까 꼼꼼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