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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28주일설교 참된 지혜(고린도전서2:6-16)
본문: 고린도전서2:6-16
제목: 참된 지혜
오늘은 고린도전서2:6-16의 말씀을 가지고
“참된 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참된 지혜”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성령님과 관련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무언가는 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그것은 헛수고이고 어리석은 것이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도록 애써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말씀을 따라 행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1.참된 지혜
우린 지난 주의 계속된 말씀에서 바울은 의도적으로
‘말이나 지혜’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속적 지혜와 그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그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던 고린도 신자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정말 말이나 지혜와 반대가 될까요?
사실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도
역시 바울의 입으로 “말해야”는 “말씀”입니다.
“말”과 “지혜”는 뜻을 전달하고
삶의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과 지혜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아예 ‘어리석음’이라 부르는 강수를 둡니다.
이런 도발을 통해 그는 신자들이 기대했던
세상의 “지혜”란 실상 복음의 능력과 무관한
세속적 욕망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런 세속적인 지혜의 추구는
결국 무가치한 것들에 대한 자랑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 행한 결과 신자들은 세속적 욕망에 뿌리내린
서로 간의 분쟁과 분열뿐입니다.
그렇다고 복음이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입니까?
복음은 어떤 세속적 가치나 조건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실질적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복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단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여주고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
곧 멸망하는 자들에게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구원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십자가의 말씀은
진정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말과 선포 역시 다름 아닌
지혜를 말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에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숙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그렇습니다.
바울은 현재 고린도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로 비유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고린도 신자들은 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합니까?
그들은 교회 안에서 분쟁과 분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기와 분쟁은 한 분 그리스도 대신
여러 인간을 지도자들을 내세우는 모습으로 드러냅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지혜를 찾고,
세속적 가치관에 따라 행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말하는 구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분명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어린 신자들은 다 자란 사람이 먹는
딱딱한 음식을 소화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젓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초신자였던 그들에게 젓을 먹였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여전히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었지만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에서 통하는 그런 지혜가 아닙니다.
한순간에만 통용되는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통치자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을 포함합니다.
(빌라도, 바리새인, 제사장 등)
그렇다고 이들은 독자 세력은 아닙니다.
이들의 배후에는 더 큰 초월적 세력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간적 얽힘의 경계를 넘어서 공중의 영역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들입니다.
이는 영적 존재로서 인간 세상에
각종 영향력를 행사합니다.
에베소서2:1-3에 나오는 불순종의 아들로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는 악한 영의 통치자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 통치자를 자처하며
하나님의 선한 통치에 대한 순종을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사탄의 사주 아래 있는 세상 통치자들이 추구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 대신 자기 존재감을 키울 뿐입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힘을 발휘하는
권력과 사회적 지위나 배경 등을 쫓아 삽니다.
갑이 갑질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을들이 해바라기처럼 갑을 부러워하는 세상,
그것이 이 세상에서 통하는 지혜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런 세상의 종말을 예고합니다.
이런 통치자들은 결국 사라질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대단하게 여기는 지혜 역시
이 세상에서 잠시 그럴듯해 보일 뿐,
결국 그 허망함이 폭로될 무상하고 무익한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말씀과 세상의 가치를 뒤바꾸는
강한자를 버리고 약한자를 선택함으로
세상 지혜자들의 소유를 폐기 처분하십니다.
그것은 세속적 조건과는 거리가 먼
고린도 신자들을 부르셨다는 사실 자체가
이런 창조적 역발상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그와 하나가 되었다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세속적 가치에 집착한다면
이런 부르심의 비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씨앗이 세속적인 돌짝밭에 걸려
제대로 뿌리지 내리지 못했고,
세상에 대한 걱정 근심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누구의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이 지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구원대신
영광이라는 말을 선택했습니다.
세속적 의미의 지혜나 힘, 곧 세상에서 영예에 매혹된
신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사람들의 사회에서 그 사회 나름대로
바람직한 가치로 통하는 영예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광의 효력은
사람들 사이의 경쟁에 국한됩니다.
그 시효라는 것은 죽으면 끝이 납니다.
이런 사라질 가치들은 구원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가치들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구원을 향한 여정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 곧 이 세상을 지나 영원으로 이어질 참된 영광이란
세상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라질 것들에 집착하는 삶은
그 영원한 영광을 놓치는 길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몸으로 두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구원과 생명으로 가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들에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합니다.
고린도 신자들의 세속적인 형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지혜로 보이는 그들의 지혜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진 비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은밀한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꽁꽁 숨겨두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행보가
사람들의 기대와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엉뚱한 곳에 있기에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 때문에 감추어져 있게 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이 비밀은 더는 비밀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속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이 지혜는 여전히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비밀로 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처음부터 정해 두신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 통치자들이 생각하거나
필요로 하는 지혜와 다릅니다.
애초부터 지향하는 방향이 다르기에 그들 눈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지혜가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구체적으로 확증해 줍니다.
자신들의 사고와 자신의 행동 방식에
붙들려 있는 인간들에게는 우리를 구원하러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행보 자체가 수수께끼입니다.
이를 확신하려고 성경을 인용합니다. 9절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사64:4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진”비밀입니다.
아무도 이를 보거나 듣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이를 고안해 낸 적도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비밀이 언제나 숨겨진 채로 머물지는 않습니다.
이 비밀스러운 지혜는 사실 하나님이 애초부터
“우리의 영광을 위해 미리 정해 두신 것”
그러니까 구원의 부르심을 받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뭘 모르는 세상과 달리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자기 지혜를 드러내십니다.
2.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10절을 읽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이것이 바로 바울이 선포한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멸망하는 이들, 사라질 존재들에게는
이 복음이 더없이 어리석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로 다가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 지혜로운 계획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게 십자가의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또 그분을 사랑하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논증 중간에 불쑥 불쑥 사랑이야기를 꺼냅니다.
그의 복음은 사상이나 추상적이거나
개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를 사랑함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지식보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심오한 지식도 다 무가치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예정하여 부르신 것도
사랑으로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며,
이들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자기 자녀가 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로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묵상은
계시의 결정적인 통로인
성령에 관한 또 하나의 묵상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로운 영을 통하여
자신의 지혜로운 구원의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탐색하여 알아내시기 때문입니다. (10절)
사람의 일도 그 사람 속에 있는
영 말고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 곧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역설적 수단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하나님의 영 이외에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11절)
물론 우리가 어떤 영을 받았느냐에 따라 깨닫거나
생각하거나 선택하는 방향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았다면 세상의 지혜에
눈이 밝아지고 그런 지혜를 추구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지혜 대신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일들,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지혜로 가르친 말로는
하나님의 비밀 이 은혜의 선물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의 영에 관한
비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은,
이 땅의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14절)
영과 관련된 것들은 영이 가르친 말로 전해집니다.
영적인 말들을 영적인 일들을 해석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으로 사태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람은 다른 누구에 의해서도
판단을 받거나 비교당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사람은
가장 지혜로운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기에
다른 어떤 기준이나 가치에 의해
평가받거나 비교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이 논점을 뒷받침합니다.
16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원래 이 구절은 바빌론으로 유배를 당해 불순종의 대가를 치렀던 유대인 포로들에게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곧 바빌론의 화려한 문명에 놀라고
바빌론 신인 마르둑의 위세에 짓눌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되새기고
그분을 향한 믿음을 일깨우려는 호소의 일부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천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비견할 존재가
이 세상에 그 어디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께 조언을 할 수 있을 만큼
주의 생각을 잘 아는 존재는 지금껏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이후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아니 이 세상의 통치자들에게는
여전히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으로 이것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성령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이 대목에서 바울의 과감한 주장은
쉽게 오해받기도 합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모든 것을 분별하지
타인의 판단에서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우리는
우리의 판단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자유를,
그리고 타인의 비판에 대해서는
무한한 면책 특권을 받았다는 의미인가요?
실제 이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를 변명과
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삼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바울의 특수한 논증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 상황에 끼워 맞추려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 곧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하는 말은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황이
그리스도인이 자동적으로 그러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고 육체로 마치려 했던
갈라디아 교회들처럼, 지금 고린도 교회 역시
총체적으로 일탈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성령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 자체이지
성령을 받은 개인이 아닙니다.
바울은 신자 개개인이 다른 사람의 검증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심지어 하나님의 영으로 예언하는
사람조차 비판적 검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면책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세속적 기준으로 돌아선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 관한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봅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하나님의 지혜로 안다는 의미는
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의 말씀으로 드러난
성령과 능력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말과
성령으로 가르친 말의 결정적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전부가
성령에 발을 맞추는 삶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신다는 말은
우리가 이 생각을 따라 생각하고,
그 성령의 생각과 의도에 이끌리며 그 성령을 따라가고
성령으로 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육신 혹은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는
그에 맞는 삶의 방식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교리를
인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동체나 삶의 현장이
십자가로 드러나는 능력을 보여 달라는 말입니다.
분열을 보이는 고린도 교회에서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비밀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말해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비밀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고 있습니까?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신 그 지혜를 따라 살고 있습니까?
그것이 참된 지혜이고
세상의 지혜는 헛된 것임을 믿고 행동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