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분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죠. 충무공 말고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이란 분이 따로 계셨습니다. 바로 임진왜란 때, 충무공과 같이 싸운 분이에요. 한자를 다르게 쓰죠.
다음은 백과사전의 내용입니다.
▶이순신 李純臣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입부(立夫). 본관은 전주(全州).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 의주판관 등을 지내고 귀향하였다. 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막하의 중위장으로 옥포(玉浦)·한산(閑山)·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충청도수군절도사 등을 지내고, 98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노량해전(露梁海戰)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청도수군절도사·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인조 때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
이 분은 난중일기에도 여러번 나오는 명장입니다. 첫등장하는 임진년(1592년) 1월의 일기 중에서-
1월 초10일 [양력 2월 22일]<신미> 종일 비가 내렸다. 방답(전남 여천군 돌산면)에 새 첨사로 이순신(李純信)이 부임하여 들어왔다.
충무공이 파직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왔을 때도 이 분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합니다.
정유년 4월 (1597년 4월) 초1일 [양력 5월 16일]<신유> 맑음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더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 (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봤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이순신(李純信)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류성룡)이 종을 보내고 판부사 정탁 (鄭琢)·판서 심희수(沈禧壽)·우의정 김명원(金命元)·참판 이 정형(李廷馨)·대사헌 노직(盧稷)·동지 최원(崔遠)·동지 곽영 (郭嶸)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그밖에도 난중일기에 참 많이 등장하죠. 전투때도 참 용감히 싸운 명장이었어요. 옥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었고, 노량해전때는 충무공이 총사령관인 수군통제사로, 무의공 이순신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활약했습니다.
그 공훈에 비겨 너무 안알려져 있어 이분에게 송구스럽기도 하군요.
한국 해군의 1200톤급 7호 잠수함의 이름이 뭔지 아세요? 바로 이순신함입니다. 그런데 충무공 이순신이 아니라 무의공 이순신의 이름을 붙였어요. 왜?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은 뒷날 우리 해군이 이지스급 순양함이나 항공모함을 가지게 될 때 거기 붙일려고 아껴 놓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