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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파도가 넘실거리는 변산 해변 |
어디로 떠날지 생각만 해도 즐겁다. 겨울다운 여행을 위해 눈꽃 피는 겨울산으로 떠날까, 포근함이 솜털만 큼이라도 전해지는 남해안으로 떠날까, 그것도 아니라면 뜨끈한 온천과 온돌방이 있는 시골집 방구석에서 뒹굴어볼까. 신해철의 노래처럼 묻고 또 묻는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직업의 특성상 여행이 일상과도 같지만 개인적인 의지를 담은 여행이 아닌 독자를 위한 사전답사 역할이 크다. 여행지가 결정되면 기사의 목적과 의도, 방향에 따라 일정을 만들고 충실히 따른다.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길 만한 사진을 찍기 위해 화창한 날을 선택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한다.
돌발변수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때마다 재빠르게 대처할 플랜B도 마련해야 마음이 놓인다.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는 여행, 가야 할 곳으로 떠나는 출장, 여행과 출장의 차이는 이처럼 극명하다. 그런 데, 이번 여행은 조금 다르다. 마음대로 떠나보란다. 목적지도, 볼거리와 즐길 거리도 온전히 내게 맞춘 여행.
어딘가에 앉아 하루 종일 멍을 때려도 좋고, 요즘 유행하는 브이로그를 찍으며 먹방을 즐겨도 좋다. 출장을 가장한 자유로운 일탈, 누구나 꿈꾸는 1박 2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민 끝에 결정한 여행지는 전라북도 부안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영화 <변산>에서 주인공 학수가 그리워한 변산의 노을이 보고 싶었고, 지난 호 취재 기획에서 탈락해 아쉬움이 컸던 부안 별미 바지락죽도 먹고 싶었다. 부안의 청정 해수를 사용하는 뜨끈한 해수찜으로 겨울감기를 물리치고 싶었고, 채석강 해식동굴을 배경으로 멋진 기념샷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물론 계획은 계획일 뿐, 뭘 하나 놓친다 해도 발을 동동 구르며 플랜B 마련에 골몰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순간순간을 즐기면 되니까.
굵고 실한 바지락이 통으로 들어 있는 바지락죽 |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부안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이 ‘새만금바지락죽마을’이다. 맛있는 한 끼 식사를 위해 점심도 굶은 터, 소문난 맛집을 검색해 들어가니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부안 특산물인 바지락을 재료로 만든 바지락죽을 주문하자 테이블 위로 김치와 깍두기, 젓갈, 미역초무침 등이 단출하게 깔린다. 살짝 맛만 보려 들었던 젓가락은, 어쩌지? 끝까지 내려놓지 못했다. 단맛과 짠맛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김치는 입 안에서 매콤하게 퍼지고, 잘 익은 깍두기는 알싸한 뒷맛으로 자꾸만 침샘을 건드렸다. 여기가 진정 반찬 맛집이로구나!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등장한 바지락죽 역시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든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에 굵고 실한 바지락이 통으로 들어 씹는 맛 또한 예술, 게 눈 감추듯 바지락죽은 그렇게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와 보니 부안에서는 실패한 식당이 하나도 없다. 바지락죽을 시작으로 갑오징어무침, 꽃게탕, 젓갈정식 등 손맛 자랑하는 부안 대표 음식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특히 곰소항의 젓갈정식은 바지락젓, 오징어젓, 꼴뚜기젓, 낙지젓, 창난젓, 어리굴젓, 가리비젓, 청어알젓 등이 푸짐하게 펼쳐져 공기밥 추가는 기본이다. 곰소 염전에서 생산되는 국내 최고의 천일염으로 곰삭힌 젓갈이니 그 맛이 오죽하랴. 뜨거운 밥 위에 바다 향 가득한 젓갈을 얹어 한 입 먹을 때마다 부안에 오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하얀 물결이 튀어 오르는 변산해변 |
새만금방조제를 지나 도착한 변산해변. 하얀 거품을 머금은 파도가 마음을 줄 듯 안 줄 듯 간을 본다. 모래 위에 뒹구는 작은 돌멩이들을 건드렸다가 껍데기만 남은 조개를 건드렸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은근슬쩍 내뺀다. 귀여운 파도의 유혹에 손을 내밀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겨울은 겨울인 거다. 맑고 투명한 만큼 바닷물은 얼음장같이 차갑고 시리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는 더 커지고 거친 소리를 내며 날 붙잡았다. 쓸쓸한 계절에 바다도 친구가 필요한 모양이다.
변산해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팔각정 |
2km에 이르는 백사장도 멋지지만 길게 뻗은 송림과 해변 끄트머리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등장하는 조각공원도 볼만하다. 특히 조각공원의 팔각정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겨울 바다가 저리 예뻤나. 은빛으로 튀어오르는 반짝임에 눈이 부시다. 따뜻함이 넘친다.
부안에는 해안코스와 내륙코스로 나뉘는 총 13개의 변산 마실길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걷는 총 66km의 해안코스는 조개미 패총길, 노루목 상사화길, 적벽강 노을길, 해넘이 솔섬길 등으로 연결된다. 그중 성천마을에서 적벽강, 채석강, 격포항으로 이어지는 3코스 적벽강 노을길이 인기 높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이라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적벽강이냐 채석강이냐, 노을을 어디에서 볼 것인지 한 곳을 골라야 한다.
어떤 이가 써놓은 글을 읽어보니 적벽강은 붉은색 암반과 절벽으로 원석 그대로의 야생미를 풍기고, 채석강은 수천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 조각가가 망치와 정으로 잘 빚은 조각작품 같단다. 두 곳 모두 보고 싶은데, 벌써 해가 질 시간이다. 서둘러야 한다.
(좌) 채석강 격포방파제에 위치한 하얀 등대 (우) 채석강 격포방파제에서 바라본 붉은 노을 |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영화 <변산>의 주인공 학수의 짧은 시에 모든 것이 담겼다. 영화 속 노을 장면은 변산 대항리의 어느 펜션 근처에서 촬영되었지만 내 선택은 채석강이다. 붉게 물드는 노을과 해식동굴에서의 기념샷을 동시에 즐기려는 계산.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밀물이 들어온 거다. 찰랑찰랑 물에 잠긴 채석강은 절벽만 우뚝 서 있다. 갯바위를 걷거나 해식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밀물과 썰물 시간표를 체크하곤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이 여럿 보인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려니. 채석강 대신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격포방파제를 걷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하늘을 새하얀 뭉게구름이 뒤덮고 있다. 파란 빛깔 하늘은 어느새 은은한 주홍 빛깔로, 그리고 붉은 빛깔로 바뀐다. 방파제 끄트머리에 자리한 하얀 등대에 올라 뻥 뚫린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에이, 노을밖에 없다니요!
부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숙소에서 바라본 바다는 말없이 고요한데, 머릿속이 복잡하다. 자꾸만 채석강이 맴도는 게 그냥 떠나선 안되겠다 싶다. 결국 밀물과 썰물 시간표를 체크해 다시 채석강으로 향한다.
썰물 때가 되면 채석강 너른 갯바위 위를 산책할 수 있다 |
어제 찰랑거리던 물은 온데간데없고 파도와 바람에 의해 깎이고 다듬어진 절벽 아래로 너른 갯바위가 드디어 속살을 드러냈다. 수천 년간 퇴적과 침식을 반복해 나무처럼 나이테가 고스란히 남은 바위는 자연이 만든 예술작품. 암반에 작은 돌이 들어가 파도에 휩쓸리며 깎아낸 돌개구멍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좌)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의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채석강 (우) 누구나 작품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는 채석강 해식동굴 |
절벽을 파먹은 듯한 해식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인스타그래머 사이에서 핫한 풍경이 펼쳐졌다. 음영 깊은 동굴 너머로 보이는 바다, 사람들이 앞다퉈 기념샷을 찍는 이유가 있다.
천년 수령의 느티나무 주변에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은 오색빛깔 등이 가득하다 |
부안의 마지막 여정은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 승려 혜구 두타가 창건한 내소사다. 언젠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가을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겨울도 그때만큼 좋을까? 내심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숲향 진하게 올라오는 600m 길이의 전나무 숲길을 지나 도착한 그곳엔 여전히 천년 넘은 거대한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보물 제291호 내소사 대웅보전이 사람들을 맞이했다.
단아하고 아름다운 내소사 대웅보전 |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끼워 만든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보전은 팔작지붕 다포식 기와집 형태로 단청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은은한 나뭇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대웅보전의 단아한 멋은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는 정교한 조각의 공포와 8개 문짝을 가득 채운 꽃살 문양에서 뿜어져 나왔다. 특히 내소사 꽃살문은 현존하는 사찰의 꽃살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오색단청은 이미 사라졌지만 고고한 아름다움만은 변함없다.
한국 불교예술의 정수로 꼽히는 꽃살문 |
나무를 깎아 내소사에 꽃밭을 만든 이는 누굴까. 하나하나 땀으로 피워낸 그의 꽃들이 이토록 오래 사랑받을 줄 알았을까. 사랑을 준 만큼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다시 전나무 숲길을 따라 걸어 나왔다. 내소사가 ‘다녀가는 모든 사람이 새롭게 소생한다’는 의미를 담아 올 래(來), 되살아날 소(蘇) 자를 쓴다는데, 한 번 믿어보련다. 새해도 밝아오니까.
1박 2일의 부안 여행, 계획한 모든 일을 실행하진 못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뜨끈한 해수찜도 하지 못했고, 부안 갯벌이 창밖으로 펼쳐지는 예쁜 숙소도 예약 마감으로 포기했다. 그래도 괜찮다. 바다 전망의 언덕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즐겼고, 부안 명물이라는 찐빵도 맛봤다. 얼마 전에는 안도현 시인이 변산바람꽃이 예쁘게 피는 장소를 알려주겠노라 약속도 했다. 봄이 사뿐히 내려앉을 그날에 다시 갈 핑계가 생겨 좋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부안으로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