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악지 도청 역사이야기 남도에서도 광주 상무신도심과 남악 새 도청 터가 마련됐다. 1896년 전라남도(1목 32군)의 출발과 더불어 광주읍성 안에 새 치소(治所)가 정해진다. 482평의 양식 목조건물인 전남도청사는 1930년 광산동 13번지에 김순하(1901∼1966)의 설계에 따라 붉은색 벽돌구조 2층으로 회의실과 함께 새로 지어진다. 광복 직후 백색 건물이 되고, 본관은 1975년 3층으로 증축되었다. 도청회의실은 1981년 광주유형문화재 제6호가 되고, 설계도는 한국인이 설계한 최초 지방 건물로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본관도 2002년 등록문화재 제16호로 올라 아시아문화전당에 남게 되었다. 2005년 10월 4일 전남도청은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南岳里)로 이사를 시작했다. 문민정부가 도청이전을 발표하고, 1993년 말 전남발전연구원이 당시 풍수학자의 명당론을 바탕으로 적지로 꼽았고, 국민정부가 가시화시켜 이전이 이뤄졌다. 남악리는 노령의 끝자락에 솟은 오룡산(225m)에 안겨 있으며, 영산강 하구가 내려다보인다. 노루목과 암소머리로 내린 좌청룡과 초당산으로 긴 우백호와 함께 큰대섬(大竹島)이 안산을 이뤄 일명 ‘오룡쟁주(五龍爭珠)’ 형국으로 풀이하고 있다. 새 도청터는 본디 나주 땅이었다. 고려 때 임성(任城)·군산(群山)·극포(極浦)부곡이었다가 조선시대 삼부곡을 ‘삼향(三鄕)’이라 칭하면서 1906년까지 나주목의 월경처였다. 소속읍에서 멀리 떨어져 타 군현에 들어 있는 땅을 월경처라 한다. 삼향은 나주읍성에서 90리 거리인 무안 땅에 있는 나주 관할 지역으로 화살촉의 산출지였다. 18세기 당시 700여호 2천여명이 살고 있어 나주목 관내에서 읍성안 다음으로 많았다. 갯벌(干潟地)을 개간하여 농토를 일궈 원남악(남메기)을 비롯하여 회룡(구래·천마·남산·죽도), 신흥(응동), 오룡, 안동(안골, 밭재, 마하, 부흥, 해창)마을이 들어섰다. 1910년대 해주오씨의 땅이 3할이 넘었고, 김해 김·밀양 박·연안 차·안동 권씨 순으로 땅을 소유했다. 1930년대에는 초정 김성규와 아들 우진·철진 소유가 1/3 이상이었고, 현준호와 차성술도 4만여평을 갖고 있었다. 7만여 평에 1천700억원을 들여 23층으로 지은 신전남도청터에는 김철진(1905∼1971)의 1천평 대지에 99칸 집과 1941년 소작인들이 세운 빗돌이 서 있었다. 의회동 동편 남악호수는 1935년 축조한 저수지로 4만2천톤의 관개용수를 담았다. 도청주소가 된 1000번지는 687번지에 살았던 박대진 소유 밭 645평터다. /김경수(사)향토문화진흥원장 (해주오씨인 우리 외할머님 또 바로 안동권씨 집안이 나의 외가 이다. 그래 우리어머님의 댁호가 남메기댁이다. 초정 김성규의 아들 김우진이 윤심덕과 현해탄 사의찬미 의 노래말이 유명하다, 우리 어린시절 그 큰집을 김정승댁 이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