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빌 2 : 5 - 11
교회라고 하는 기관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는 곳입니다.성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재능도, 학식도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된 교회의 일원이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모이는 곳입니다.
예 화 1. 하와이에 있는 몰로카이 섬의 성자 다미엔에 대한 이야기를 아십니까? 우리나라의 소록도처럼 나환자들만을 격리 수용하는 섬에 들어갔다가 그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그 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봉사하기로 결심하였지만 그들이 마음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 너는 건강한 사람으로 우리를 동정하고 돌아보는 것이 당신의 기쁨일 거라고 취미일 거라고 사치한 행위가 아니냐 고 비아냥 거리가까지 하였습니다. 다미엔은 하나님께 나아가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문둥 병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여 마침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 때에야 그들이 다 미엔을 신뢰하고 그 사랑을 받아드리더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문둥병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과 동등되신 예수 그 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겸손한 마음에서 우러 나온 것입니다.
무엇이 다미엔 신부님을 문둥병도 무서워하지 않는 강한 전도자로 만든 것일까요?
그것은, 다미엔 신부님은 예수님과 천국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분명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우리들의 상상의 세계가 아닌 확실히 존재하는 곳입니다.
천국의 열쇄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열수 있습니다. 문둥병자가 될지라도 함께 가고 싶은 나라, 그 기쁨의 나라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제목으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1. 겸손의 마음입니다.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이니예수님은 겸손한 마음으로오셨습니다.
본문 6절과 7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근본'이라는 말은 '존재'를 의미하는 말로써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존재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여기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자신의 신성을 내놓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에서 떠나 자신을 낮추신 비하의 신분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는 곧 이전의 존귀와 영광된 모습을 버리고 인간 본성의 누더기를 입으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 17절에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되심이 마땅하도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졌는데 이는 겉모양만 종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종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다 취하셨다는 말입니다.
만유를 통치하시는 주께서 종이 되셨습니다.
만 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종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죄가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 지옥의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던지시므로 메말라버린 우리 생명이 영생으로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철저히 가난해졌습니다.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말구유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머리 둘 곳도 없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강단도 산이요, 해변이요, 빌려 탄 배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들어가실 때에도 다른 사람의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고, 최후의 만찬석도 빌려 사용하셨고,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고 장사지낼 때에도 부자의 무덤을 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까지 버리시고 사람의 형상을 입는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고아원 원장(죠지 뮬러가 설립한)이었던 '프레드 버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젊은 형제들에게 가서 말해 주시오. 그들이 너무 작아서 하나님이 못쓰시는 것이 아니라 너무 커서 쓰실 수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교만과 싸워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첩경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인 겸손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본문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명예와 영광과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희생을 통하여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겸손이 복종의 삶을 살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순종은 즐거움으로 하는 것이지만, 복종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복종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완전한 복종입니다.
신앙에는 순종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입니다(삼상15:22).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시면 순종할 뿐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시니 순종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니 서로 사랑할 뿐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시니 기도할 뿐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니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배워야 됩니다. 힘이 들어도 부단히 배울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 "그(예수)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습니다.
길들여진 말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기수에 의해 내려치는 채찍으로 명마가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는 성도는 순종할 줄을 모릅니다.
소는 코를 뚫고 멍에를 메는 고통이 있을 때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닥친 고난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순종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이 고난의 훈련장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기까지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마귀의 속삭임에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요구에 끝없는 복종만이 있어야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개척 교회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고난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고난 없이 편하게 예수님을 믿으려는 생각으로 큰 교회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소망의 식구들은 남들이 회피하는 고난을 감사함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의 훈련장에서 아픔을 함께 나누고, 눈물로 씨를 뿌리며, 전우애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닥치는 고난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그 고난이 나를 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없이 다가오는 고난들이 나의 모난 성품들을 깎아내고, 교만한 마음을 겸손케 만들고, 불순종의 사람을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변장된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에는 순종하는 자의 축복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1:19-20).
3. 희생의 마음입니다.
본문 8절에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철저한 희생입니다. 이 희생은 대속의 죽음으로서 죄인을 위하여 지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자신이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극악한 죄수로 죽음에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는 말씀 때문에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고, 당시 십자가는 노예들이나 강도들, 반역자들 같은 죄수들의 처형대였기에 십자가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였습니다(고전1:23).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의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픔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결코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 4절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희생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6장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의 분열과 다툼을 없이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복종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희생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
이것은 높아지심의 전주곡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였습니다(9절). 이것은 곧 최고의 높은 자리로 올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보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에 끓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 세계가 예수님께 경배하며, 복종하는 것을 나타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낮아집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죽기까지 복종합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철저히 교만이 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낮아지므로 기독교 선교역사에 전무후무한 샛별이 되었습니다.
첫댓글 2024.3.3
시온성 주일 강단
주님 마음을 닮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