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하르-베후코타이
배움과 함께 살아가는 삶
파라샤 베후코타이(בְּחֻקֹּתַי)는 토라가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에게 평화와 생계를 베풀어 주실 조건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너희가 내 규례를 따르고 내 계명을 지켜 행할 때.”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토라를 지키는 것과 관련된 세 개의 별도 절을 사용함으로써 반복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각 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라시는 미드라쉬를 인용하여 구절의 첫 부분을 설명하며, "너희가 내 규례를 따를지라"라는 말은 아멜루트 베토라(עֲמִילוּת בַּתּוֹרָה: 토라에 힘쓰는 것)를 가리킨다고말합니다.
두 번째 부분인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은 첫 번째 부분을 바탕으로 하여, "너희는 토라를 지키고 이행하기 위해 토라에 힘써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토라가 먼저 우리에게 상을 받기 위해서는 토라에 힘써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힘쓰는 행위가 토라를 지키려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고 덧붙인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설명에는 중대한 난점이 있습니다.
즉, 실제로 토라를 지키려는 의도 없이도 '토라에 정진한다'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정진'이라는 개념 자체가 토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여, 토라에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일 정도로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형태로든 토라를 공부하지만 이를 지키려는 의도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토라를 그토록 깊이 존중하여 그 정도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토라에 정진한다'라는 수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토라에 정진하는 사람에 관해서는, 토라에 정진하려는 사람이 어떻게 토라를 지키는 데 관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은, 토라를 연구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반드시 그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고하지만 미쯔바를 이행하기 위함이 아닌'이라는 개념은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토라를 배울 수는 있지만, 자신이 배우는 토라가 사람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배움과 하나님에 대한 경배 사이의 연관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토라를 배우는 것이 위대한 미쯔바라는 점은 잘 알고 있을지 모르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배우는 토라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토라가 '이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암시하는 바로 그 종류의 '수고'일 것입니다.
사람이 토라를 배우는 데 있어 가능한 여러 동기를 다루는 『피르케이 아보(Pirkei Avoà)』의 미쉬나에서도 같은 개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르치기 위해 배우는 자에게는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주며, 실천하기 위해 배우는 자에게는 배우고, 가르치고, 지키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주석가들은 미쉬나가 "실천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만이 실제로 토라를 지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지적하며,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미쯔보트를 지키는 데 관심이 없음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사람은 더 많이 공부하고 가르칠 자격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토라를 지키려는 의도 없이 공부하는 사람은 가장 엄중하게 여겨진다는 랍비적 근거가 많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위와 같은 맥락으로 답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분명 토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공부한 대가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실천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만이 자신이 공부하는 토라가 자신을 한 사람으로서 변화시키고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공부의 개념이 실생활의 율법 공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공부 시간은 모든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게마라(גמרא) 공부에 더 집중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요점은 모든 형태의 배움이 올바른 접근을 통해 사람을 더 고상하고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킬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파트 에메스(Sfat Emes)는 비르하트 하토라(ברכות התורה: 토라 공부를 위한 축복문)의 일부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통해 이 사상의 중심성을 더욱 명확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베하레브 나 하쉠, 엘로헤누, 에트 디브레이 토라테하...”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보통 “여호와, 우리 하나님, 토라를 달콤하게 해 주소서...”라는 뜻으로 번역됩니다.
※ 스파트 에메스(Sfat Emes): 문자 그대로 "진리의 언어", 예후다 아리예 라이브 알터가 저술한 하시딕 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
스파트 에메스는 ‘베하레브(וְהַעֲרֶב)’라는 단어가 어근인 아인(ayin), 레쉬(reish), 베이트(beis)로 구성되어 있어 ‘에레브(עֶרֶב, erev)’라는 단어를 이룬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섞다'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녁'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에레브'인데, 이는 저녁이 어둠이 빛과 섞이기 시작하는 시간임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파트 에메스는 우리가 배우는 토라가 표면적인 지식으로만 남지 않도록, 우리 존재 속에 토라를 섞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위대한 토라 학자들은 토라가 사람의 존재 전반에 스며들어 일상적인 행동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점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라브 모쉐 파인스타인(Rav Moshe Feinstein)은 한때, 소년들이 배우는 게마라의 첫 번째 트라크타트(Tractate: 탈무드 문헌 내에서 특정 주제를 다루는 하나의 '권(Volume)'이나 '편'을 지칭)가 왜 기도 법규를 다루는 ‘베라코트(’בְּרָכוֹת)와 같이 겉보기에는 더 실용적인 트라크타트가 아니라, 손해 배상 법규를 다루는 ‘바바 카마(בָּבָא קַמָּא)’인 경우가 많은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 바바 카마(בָּבָא קַמָּא): (בָּבָא קַמָּא)는 "첫 번째 문" 이라는 뜻으로, 탈무드에 나오는 민법, 불법행위, 손해배상을 다루는 세 개의 논문 중 첫 번째 논문
그는 아이들이 인생의 초기 단계부터 타인의 재산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라브 파인스타인 랍비에게 있어 아이들의 학습 목적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그들을 더 사려 깊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머릿속에 담은 토라가 마음속으로도 스며들어 우리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아왔습니다.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배우는 토라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고, 실제로 그런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능한 접근 방식은, 토라의 한 부분을 배운 후, 그 토라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지 생각하고, 그 태도를 자신의 세계관에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한 부지런한 토라 학생이 한때 자신의 랍비에게 샤스(ש"ס, Shas) 전권을 다 읽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랍비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샤스가 너를 다 읽었느냐?!"
※ 샤스(ש"ס): 히브리어로 Shisha Sidrei Mishna(미슈나의 여섯 가지 순서)의 약자
우리 모두가 말 그대로 온전히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Rabbi Yehonasan Ge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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