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평은면 군자정(君子亭)은 1570년(선조 3)에 지은 건물로,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 선생이 공부하던 정자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영주 군자정(君子亭)
정자의 앞쪽에는 군자당(君子塘)이란 연못이 있고, 서쪽에는
이덕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오계서원이 있다.
이덕홍선생은 10여 세에 이황의 제자로 들어가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군자정
이덕홍은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는 거북선을, 육지에는
거북선 모양의 수레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백성을 구제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군자정 측면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이다.
지중추부사 이현보(李賢輔)의 종손자로 영주 녹동에서 태어났다.
퇴계와 금난수의 문인으로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등용할 때 제4위로 뽑혀 집경전참봉이 되었다.
종묘서직장 역임시 종묘방화사건으로
평은역에 유배되었다가 사옹서직장으로 복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세자익위사부수로 세자를 호종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우계서원(迂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군자정
저서로는 간재집(艮齋集), 주역질의(周易質疑), 사서질의(四書質疑),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 등이 있다.
이외에도 논어질의(論語質疑), 맹자질의(孟子質疑). 중용질의(中庸質疑),
대학질의(大學質疑)는 스승에게 물어보고 대답한 것으로서
그의 사상은 물론 퇴계 이황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군자당(君子塘) 표석
이덕홍의 간재집은 12권 7책(본집 7권 4책, 속집 5권 3책)과
필사본 9책. 목판본으로 현손 이장진, 5세손 이경태 등이 1766년 간행했다.
그후 전해 내려오는 초고를 바탕으로 1829년에는 속집까지 간행했다.
군자당 표석과 오계서원
1636년의 대홍수로 인해 1711년(숙종 37) 이덕홍을 배향하고 있는
오계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군자정도 함께 옮겨 지었다.
오계서원과 앞의 우물
오계서원(迂溪書院)은 간재 이덕홍이 1570년(선조 3) 학문연마와
심신수련을 위해 건립한 오계정사(迂溪精舍)가 임란으로 퇴폐해지자
장남 이시(李蒔)가 1600년(선조 33) 다시세워 오계서당이라 하였다.
그뒤 1636년(인조 14) 대홍수로 대부분의 건물이 유실되자,
1665년(현종 6) 다시세워 이덕홍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사를 올리다가
1691년(숙종 17) 사림의 공론으로 오계서원으로 승격(昇格)되었다.
오계서원 정문
1699년과 1707년의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서원이 침수되어
1711년(숙종 37)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724년(경종 4)에
그의 장자(長子)인 선오당(善迂堂) 이시(李蒔)를 함께 배향하였다.
오계서원에서 보는 군자정
오계서원 측면
오계서원 강당
오계서원(迃溪書院) 편액
오계서원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강당 오른쪽의 험위료(驗爲寮) 편액
강당 왼쪽
강당에서 보는 동.서재
도존사(道存祠, 사당)
간재 이덕홍과 선오당(善迂堂) 이시(李蒔)의 위패를 봉안
오계서원 위에서 보는 군자정
오계서원 사당과 강당
군자정 풍경
군자정과 오계서원 앞 토일천 강가의 왕버들
토일천
군자정과 오계서원 진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