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1101
#신앙고백 #아타나시우스 28-29.
#예수그리스도 #성육신
28. Sed necessarium est ad aeternam salutem, ut incarnationem quoque Domini nostri Iesu Christi fideliter credat.
Furthermore it is necessary to everlasting salvation that he also believe rightly the incarnation of our Lord Jesus Christ.
더욱이, 永久한 救援을 받기 爲해서는 또한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成肉身을 올바로 믿는 것이 必要합니다.
성육신, 즉 육신을 이루었다는 말의 어원은 ~안에라는 전치사인 in과 육신이라는 뜻인 carne의 합성어로서 라틴어로는 incarnatio, 영어로는 incarnation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하셨다는 뜻은 하나님의 세 위격 중 아들 위격이신 성자께서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서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육신 안에 거하시며 사람의 육신과 연합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육신 전에는 존재하지 않으셨다가 성육신 때에서야 존재하셨다는 그릇된 고정관념과 편견을 전제로 한 고백이기 때문에 온전한 성경적 진리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여러 근거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육신 전부터 존재하셨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영원 전부터 성자와 연합하신채로 성부의 독생자로서 성부께로부터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 더 엄밀한 용어를 쓰자면 비로소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이라는 말 보다는 지극히 높으신 하늘의 영광의 인성이 이 땅의 비천한 인성으로 낮추셨다는 의미로 성천육(成賤肉) 또는 비천육(卑賤肉)이라고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서 존재하셔왔다는 진리가 교부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오랜동안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려져왔다 하더라도 제한된 지성으로나마 최대한 성경의 진리를 밝혀내고자 각고의 노력을 한 것이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한 진리를 고백해왔다고 해서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원 전부터 존재해오셨다는 진리가 보편적이 되기까지 얼마간은 지금처럼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어쨌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때에 비로서 사람이 되셨건 영원 전 영광의 인성이 이 땅의 인성으로 낮아지신 것이건 이 진리를 붙잡고 고백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유일한 구원자로 세우시고 보내신 분이 바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지를 반드시 검증해봐야 한다고 하였다.
29. Est ergo fides recta ut credamus et confiteamur, quia Dominus noster Iesus Christus, Dei Filius, Deus et homo est.
For the right faith is that we believe and confess that our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is God and man.
바른 信仰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심을 믿고 告白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일한 존재 안에 참 하나님이신 성자의 위격과 참 사람이신 인성이 연합되어 계시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방식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라는 존재방식처럼 사람의 지성으로는 이해와 판단이 불가한 것이고 오로지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탁월한 지성과 논리의 말과 글이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정하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심을 부정한다면 이는 복음도 아니고 그리스도교도 아니며 단지 참람된 이단사설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 전부터 사람이셨으므로 사람의 영과 혼과 육을 가지고 계셨다. 물론 영원 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이 땅에서의 비천한 인성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지극히 영광스러운 인성이셨다. 주님의 인성 전체는 성자 하나님과 불가분의 연합을 하셨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을 위해서 인성의 영에는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시는 성령께서 완전충만하게 거하시며 혼으로는 영과의 교류를 통해 아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이행하고자 하시는 참된 의지를 가지시고 육의 입으로 말씀을 발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전지전능하게 역사하신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에 하나님의 세 위격과 더불어 누구를 성도삼아 구원하실지,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실지에 대해 논의하시고 협약을 맺으셨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맺으신 구원협약의 일환으로써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고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으신 사람들이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서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훗날에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실 것을 예표하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에만 계시지 않으시고 때때로 하늘의 영광을 조금 가리우셔서 이 땅에 잠시 내려오셔서 몇몇 택하신 성도들을 만나주시기도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두 천사와 함께 여행객으로 접대를 받으신 사람,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소돔과 고모라를 습격한 다섯 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포도주와 떡을 제공하고 축복을 내린 살렘 왕 멜기세덱,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얍복 강가에 혼자 있던 야곱과 밤새 씨름을 하신 사람, 여리고로 진격하는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서 칼을 들고 서있었던 사람, 기드온과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나셔서 예언과 명령을 주시고 제물과 제사를 받으신 사람이 바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시다. 뿐만 아니라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하늘의 모든 영광을 보이시고 지나가시며 등을 보이신 사람, 이사야와 스가랴 같은 선지자들을 환상 중에 셋째 하늘로 불러올려 보좌에 앉으신 모습을 보이신 사람, 에스겔과 다니엘 같은 선지자들에게 영광 중에 강림하신 사람이 모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시다.
#20211101
#여호수아 #Joshua 2:8-11
#라합
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여호수아가 보낸 이스라엘의 정탐꾼 두 명은 지금 적진인 여리고 성에 침투해 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리고 왕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되기 직전까지 가는 아슬아슬한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도 그 정탐꾼들은 창녀 라합이 마련해 둔 은거지에서 누울 준비를 하려고 했었는데 이는 아마도 잠을 자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통상적으로는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언제든지 다시 발각되어 잡힐지도 모르기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거나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 상책일텐데 정탐꾼들은 밤을 새우려 하지도 않았고 라합의 집을 떠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그 지붕의 허술한 풀섶에서 잠을 자려고 하였는데 이는 사람의 관점으로는 이해가 안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신앙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그 정탐꾼들의 행동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호와의 약속 위에 굳게 선 담대한 믿음의 행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여호와의 돌보심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잡혀도 진작에 잡혔을 것이었다. 따라서 정탐꾼들은 그 상황에서 발각되지 않은 것은 자기들이 그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눈동자 같이 자신들을 지켜주셨음을 알았고 어쩌면 기록은 되지 않았지만 여호와의 영이 그들에게 그 곳을 떠나지 말 것을 특별하게 지시하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한 가운데에 있어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그들이 적진 한가운데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는 것은 솔로몬의 가르침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의 실례라고도 할 수 있다. 사도 베드로도 복음을 전하다가 헤롯에게 잡혀서 투옥되어 당장이라도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천사가 발로 차서 깨울 정도로 깊은 잠에 들었었다. 솔로몬은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다고 했는데 동물 중에서 감히 사자를 건드릴 동물은 없기 때문에 사자는 어디서든지 편하게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누워 잘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사망이나 핍박이나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심지어 천사들이라도 우리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고 확언하였으므로 우리는 성경과 성령을 따라 살아가면서 맞게 되는 온갖 위기와 어려움들을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창녀 라합의 증언은 거짓도 허위도 과장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라합은 여리고 주민들이 40년 전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시고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신 것에도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2년 후 가나안 땅을 처음 정탐했을 때 가나안 족속들은 네피림 같이 크고 장대해서 이스라엘의 정탐꾼 열두 명이 돌아다녀도 그저 메뚜기 보듯이 하찮게 취급하고 관심도 주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여리고 주민들이 40년 전부터 간담이 녹을 정도로 두려워했다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자기들을 정복하기 위해 나아오자 그제서야 40년 전의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여호와께서 여리고를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신다는 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확실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서 절망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여리고 주민들은 라합의 증언대로 여호와께서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여리고 성이 멸망 당할 것을 알고 믿었지만 이는 구원을 받는데 효력있는 믿음이 아니라 단지 사실에 대한 인정에 불과하였다. 거라사인에게 지핀 군대귀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라고 고백했으나 죄사함을 받을만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쫓겨나 돼지떼에게나 들어가게 될 운명이었다. 어떤 여종에게 지핀 점치는 귀신은 사도 바울을 보고 주님의 사도라고 외쳤으나 이는 사도 바울을 번민하게 할 뿐이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은 그의 호령으로 여종에게서 쫓겨나게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마귀들도 주님의 이름을 듣고 떤다고 질책하였다. 짐승의 인을 받은 자들은 1260일 동안 하늘의 두 증인에게서 하늘의 재앙을 당하고서도 그것이 주님의 능력임을 알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두 증인들의 죽음을 기뻐하며 즐거워했다. 또한 그들은 세 무리의 일곱 천사들이 두루마리와 나팔과 접시의 재앙을 퍼붓자 그것이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임을 알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그저 산들과 바위들이 자기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줄 것만을 바랐다. 이처럼 악인들의 특징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자기들의 삶은 주님께로 절대 돌이키지 않는다. 성경과 성령에 의해 불순종에는 반드시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양심의 가책만 받을 뿐 전혀 돌이키지 않는다. 죄를 짓고도 한동안 아무런 징벌이 없는 것에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하지만 심판의 날이 코앞에 이르게 되더라도 간담이 녹을 정도로 두려워하기만 할 뿐 회개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여리고 주민들이 정탐꾼을 잡으려던 것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온갖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방법들을 총동원하여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이런 경향은 심지어 교회와 목사와 장로를 자처하는 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심각한 비리나 부정이나 불법이나 범죄가 발생했어도 바로 인정하고 회개하기는 커녕 온갖 변명과 술수와 은폐와 시간끌기와 회유와 협박 등의 방법으로 무마되기만을 바라는 짓이 바로 여리고 주민들처럼 행하는 것이다. 아니, 그런 교회와 목사와 장로들은 여리고 주민들만도 못한 것은, 적어도 여리고 주민들은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려워 떨기라도 했으나 저들은 그 양심이 불에 지진듯이 무감각하게 되어 그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보시기에 죄악이라는 인식조차 없어서 잡혀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없는 짐승마냥 결국에는 멸망의 지옥불로 스스로를 내던지고 있는 것이다.
#20201101
#느부갓네살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금은철흙으로 된 신상은 물론 자신을 비롯한 후대 왕국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난 이 신상이 여전히 역사적으로도 강대국들의 흥망성쇠, 더 나아가서 기독교회의 상태와도 매우 잘 맞아들어간다고 생각된다. 오늘날엔 단연 미국이 신상의 흙에 해당되며, 한국교회 또한 마찬가지로 보인다. 둘다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태산같은 뜨인돌에 부서져 먼지처럼 사라질 뿐.
#민수기 #Numbers 5:5-10
죄에 대한 값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7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8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척이 없으면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숫양과 함께 돌릴 것이니라
9 이스라엘 자손이 거제로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모든 성물은 그의 것이 될 것이라
10 각 사람이 구별한 물건은 그의 것이 되나니 누구든지 제사장에게 주는 것은 그의 것이 되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끼리의 범죄는 사람들끼리 해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은 이웃에게 범죄하면 사람에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백성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금전적인 해를 끼치면 그것을 당신께 대한 죄로 여기신다. 그래서 그 범죄한 백성은 피해액에 2할을 얹어서 상대에게 배상해야 하며 더불어 여호와께 범죄한 것에 대한 죄사함을 받기 위해 속건제물을 드려야 했다. 그나마 이는 범죄한 백성이 재판에 의해서건 어떤 계기로 인해서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이다. 그러지 않고 끝까지 자기 범죄를 부인하는 자는 피해액의 너댓 배를 배상해야 했다. 오늘날 교회는 용서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가볍게 여기고 피해자더러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만약 가해자가 목사나 장로 등의 교회 지도자일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서 피해를 받은 교인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무너뜨리는 마귀 취급을 받고 적절한 보상이나 일말의 사과도 받지 못하고 교회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상황들은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배상의 규례를 잘 살펴서 교회 내 교인들 사이에서 어떤 분쟁이 벌어졌을 때는 시시비비를 잘 판단하여 가해자에게는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진심어린 사과를 할 수 있도록 하고 피해자에게는 가해자에게서 받은 것으로 종결하고 다른 악감정을 남기지 않고 용서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한다. 만약에 어떤 신자가 오래 전에 다른 교인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끼쳤는데 시일이 많이 지나서 자기 잘못을 깨닫기는 했지만 더이상 직접적인 피해보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다며 안도하지 말고 우선은 상대 교인의 가족을 수소문 해서 피해액을 대신 보상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피해액에 2할을 얹어서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다시는 그런 피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신앙의 다짐 차원에서 해볼만 하다.
예수님 당시에 이런 배상의 규례를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은 단연 세리장 삭개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선천적인 단신으로 인해 가족에게나 동족에게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멸시와 천대를 당하여 그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렴주구를 해서 세리장이 되었으나 자기 영혼의 곤고함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삶의 의미를 고민하던 차에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전적으로 회심하게 되고, 그동안 자기를 짓눌렀던 동족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심을 내려놓으며 그들에게 저질러왔던 가혹한 세금 징수에 대한 보상을 위해 4배나 갚고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기부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재산 헌납을 공로로 삼아 구원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회개가 진심인 것을 보시고 구원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교회나 신자들이 모든 잘못을 돈으로 해결하려 해서도 안되고 그럴수도 없겠지만, 적어도 금전적인 잘못에 대해서만큼은 금전적으로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회개는 영혼없는 몸과 같이 죽은 회개에 불과하다.
#민수기 #Numbers 5:11-31
아내의 간통을 밝히는 절차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탈선하여 남편에게 신의를 저버렸고
13 한 남자가 그 여자와 동침하였으나 그의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도 아니하였어도
14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 그 아내를 의심하였는데 그의 아내가 더럽혀졌거나 또는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 그 아내를 의심하였으나 그 아내가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든지
15 그의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헌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죄악을 기억나게 하는 기억의 소제라
16 제사장은 그 여인을 가까이 오게 하여 여호와 앞에 세우고
17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물에 넣고
18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그의 머리를 풀게 하고 기억나게 하는 소제물 곧 의심의 소제물을 그의 두 손에 두고 제사장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자기 손에 들고
19 여인에게 맹세하게 하여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네 남편을 두고 탈선하여 다른 남자와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
20 그러나 네가 네 남편을 두고 탈선하여 몸을 더럽혀서 네 남편 아닌 사람과 동침하였으면
21 (제사장이 그 여인에게 저주의 맹세를 하게 하고 그 여인에게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네 넓적다리가 마르고 네 배가 부어서 네가 네 백성 중에 저줏거리, 맹셋거리가 되게 하실지라
22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를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를 마르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
23 제사장이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그 쓴 물에 빨아 넣고
24 여인에게 그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을 마시게 할지니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의 속에 들어 가서 쓰리라
25 제사장이 먼저 그 여인의 손에서 의심의 소제물을 취하여 그 소제물을 여호와 앞에 흔들고 제단으로 가지고 가서
26 제사장은 그 소제물 중에서 한 움큼을 취하여 그 여자에게 기억나게 하는 소제물로 제단 위에 불사르고 그 후에 여인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할지라
27 그 물을 마시게 한 후에 만일 여인이 몸을 더럽혀서 그 남편에게 범죄하였으면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의 속에 들어가서 쓰게 되어 그의 배가 부으며 그의 넓적다리가 마르리니 그 여인이 그 백성 중에서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28 그러나 여인이 더럽힌 일이 없고 정결하면 해를 받지 않고 임신하리라
29 이는 의심의 법이니 아내가 그의 남편을 두고 탈선하여 더럽힌 때나
30 또는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자기의 아내를 의심할 때에 여인을 여호와 앞에 두고 제사장이 이 법대로 행할 것이라
31 남편은 무죄할 것이요 여인은 죄가 있으면 당하리라
의심의 소제물은 아내의 간통을 의심하는 남편이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드리는 제사이다. 그래서 남편이 데려온 아내가 제사장이 주는 저주의 쓴 물을 마셨을 때 간음을 저질렀다면 실제로 배가 부어오르고 허벅지가 말라서 흉측하게 돼버리는 형벌을 당하였고 단지 남편의 의심에 불과했다면 까닭없이 의심을 받은 대가로 임신하게 되는 복을 받았다. 혹자는 아무리 수천년 전 구약의 율법과 규례라고 하더라도 여자에게만 의심의 법을 적용하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태초에 하와가 먼저 범죄하고 남편인 아담을 꼬드김으로써 자기 죄에 동참시킨 것에 대한 보편적 징벌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의심의 소제 규례에서는 간음한 아내에 대한 즉각적인 저주의 형벌만 나와 있지만 정황상으로 본다면 간음녀가 자기 혼자서만 죄를 뒤집어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자기가 받은 저주의 형벌로 인해서 간통남을 고발할 것이고 이로 인해 간통녀와 간통남 모두를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유부녀와 간통한 자는 둘 다 죽이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아마도 그 간통녀는 신체적으로 수치스럽고 흉물스러운 형벌을 당한 상태에서 사형을 당했을 것이고 간통남 또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한편 이 의심의 소제 규례를 악용하는 남편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까닭없이 아내를 의심한다거나 아내가 싫어져서 헤어지기 위해 부당하게 누명을 씌우려고 의심의 소제를 악용하는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런 이유로 인해서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끌려나온 여인에게는 임신하게 하셔서 악한 남편의 입을 틀어 막으신다. 정결한 아내가 저주를 당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사람들 앞에서 여인의 정결함이 입증되고, 임신하게 됨으로써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못하고 아내와 더불어 자기 아이를 부양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된다. 여호와께서 남편은 무죄하다고 하신 것은 만약에 남편이 이를 악용했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형벌은 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비록 이런 의심의 소제로 인한 신체적 형벌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을 경홀히 여긴 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혼수 상태를 비롯한 여러 신체의 질병을 저주로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횡는 물론 이런 의심의 소제에 해당하는 저주나 형벌은 하나님의 은혜로 폐지 되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근친상간을 저지른 자는 출교시키라고만 하고 더이상의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형벌은 지시하지 않는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근친상간자가 나중에 회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를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고 그가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하라고까지 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 이후에는 간음죄를 비롯한 모든 죄에 대한 용서가 얼마나 넓고 깊게 확대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는, 마치 의심의 소제 규례를 악용하는 악한 남편들처럼, 간음죄에 대한 육적인 형벌이 없다고 해서 죄 자체를 가벼이 여기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도 교회에 있다 하면서 간음을 저질러놓고도 눈에 보이는 형벌이 없으니 당당한 자들이 없지 않다. 그런 자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형벌을 피한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자기들의 심령을 스스로 우둔하게 하고 죄에 팔리게 함으로써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