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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 광경. 오로지 아무것도 없는, 밤이라는 시간이 낳은 피조물인 어둠의 광경이었다. 보이는 건 오직 끝도 없이 계속되는 칠흑과 같은 어둠뿐. 그것은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무서운, 어린 시절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두려워하던 밤의 어둠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감촉도, 보이는 것도 없는 오로지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 그런 곳에서 왠지 모르게 무거운 몸을 이끌고 노엘은 일어섰다.
“하아.”
서늘한 기운.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느껴졌다. 그 한기에 노엘은 떨리는 두 손을 입김을 불어가면서 추위를 덜어 보려했지만 추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긴 뭐야?”
어디까지 이어져있는 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끝도 없이 보이는 검은 빛. 어떠한 사물도, 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있는 것은 어둠과 한기뿐.
오직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공포.
‘분명히 방금 전까지 그때의 광경을 보고 있었어. 부서질 것 같았던 홍옥의 눈동자의 카인을―. 과거의 나 자신을―.’
8년 전, 겨울. 되살아난 붉은 장미의 꽃밭에서 만난 카인과의 기억. 맞닿아졌던 두 손. 선명할 정도로 뇌리에 다시 새겨진 기억. 소중하게 간직한 그 기억 속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자신.
아직까지 뇌리에 선명한 기억에 노엘은 카인에게 내밀었고 카인이 잡았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너져 내리던 눈동자. 아픔, 절망. 처음엔 그저 카인이 진정으로 웃을 수 있기를 바랐어. 그저 친구로서.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카인에 대한 내 마음은 연민과 우정 같은 감정 이었어. 하지만 계속 함께 해오고 헤어지게 되면서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었어.’
붉은 장미 펜던트와 이름 모를 뱀파이어. 헌터로서 그 기억 속 아이와 같은 종족을 죽여 가며 그 피로 손을 물들이면서도 그리워하고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꿈꾸어왔다.
심지어 헌터로서의 훈련을 받으면서도, 그들이 뱀파이어와 싸워나가고 죽어가는 것을 봐오면서도 자신은 추억 속의 뱀파이어 소년을 만나기를 꿈꾸면서 싸워나갔다. 하지만 아버지와 동료들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가족처럼 더 이상 죽어가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라며 싸워나갔다.
“정말 이기적이야. 아버지도, 동료들 모두를 배신했어.”
자신이 정말 우습다는 듯이 노엘은 피식 웃었다. 주먹을 꽉 쥐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짓누르면서 노엘은 고개를 숙였다.
“누구시죠?”
그러나 또각 거리며 다가오는 발소리에 노엘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암흑. 빛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소리의 주인이 보일 리가 없었다. ‘하아’하는 한 숨을 내쉬고는 노엘은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노엘은 발걸음을 떼고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또각.
자신이 발걸음을 옮기는 간격에 맞춰 점점 더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키고는 노엘은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안고서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어디까지 옮겨야할 지 모를 어둠속에서 발걸음을 더 옮겼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빨라진 발걸음에 맞춰 들려오는 발소리 또한 빨라져갔다. 노엘은 숨막혀오는 긴장감에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발소리는 똑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벗어나야 돼.…….’
반대편으로 돌아섰지만 발소리는 여전히 노엘을 추적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런 노엘을 우습게 여기기라도 하듯 발소리는 노엘의 코앞에 다가왔다.
죽어. 죽어. 죽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별을 알 수 없는 소름이 끼치는 저세상의 목소리. 생명을 가지러 왔다고 고하는 목소리. 그렇게 검은 어둠의 목소리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투로, 아무런 느낌도 없이 감정도 없이 죽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저……저리가!”
얼굴빛이 새하얗게 변하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꽉 붙잡고는 노엘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암흑 속에서 그녀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인 마냥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명령이다. 명령장에 적힌 바대로 행해라.
어둠이 형태로 변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존재.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숙명을 안겨준 존재. 그리고 붉은 장미 펜던트의 이름 모를 뱀파이어와 자신과의 관계를 확실히 상기시켜주고 괴롭게 만들기도 한 존재로. 헌터협회의 간부인 그녀의 아버지로.
그 서늘한 눈빛이 무섭도록 그녀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말이 칼날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싫어. 난 죽기 싫어.’
그녈 죽이려드는 어둠의 조각인 존재가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 차가운 물체를 들이대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과는 다른 행동을 취했다. 그렇게 그녀는 죽음을 받아드리려는 듯 눈을 감았다.
‘안 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굳어져버린 몸으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눈앞의 환각인지 실체인지 알 수 없는 어둠의 존재가 방아쇠를 서서히 당기는 것을 맛보아야만 했다.
탕.
그리고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겨울의 추위 탓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 고요한 어둠이 소리도 없이 쌓여있는 분위기의 묘하게 밀폐되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진, 왠지 모르게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이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곳.
심지어 어두운 곳을 비추는, 은빛의 초승달의 빛조차 그 빛이 바랜 듯 비추지 못하고 있는 광경. 빛이 들지 않아 묘하게 암흑 그 자체임을 연상시키는 광경.
“헉. 헉.”
그런 곳에서 노엘은 약간은 거친 숨을 내쉰 채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어둠의 광경에 노엘은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그녀는 약간 밀려오는 어지럼증에 일어나려던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비틀거리고는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피곤해서 잠이 든 것치고는 무겁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 식은땀이 범벅이 된 몸. 거기다 점점 크게 밀려오는 어지럼증에 노엘은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노엘은 머리를 감싼 손 이외에 다른 손으로 목덜미를 의식하듯이 만졌다.
‘왠지 느낌이 느껴져. 뱀파이어의 송곳니가 닿은 듯 한 느낌.’
약간은 무섭고 거부감이 드는 느낌. 그 느낌에 이틀간의 기억이 떠올라 노엘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피를 내놔.」
「피를 줘. 오랫동안 굶주린 내게 피를 주겠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거야. 오랜만에 직접 인간의 목에서 피를 빠는 거라고. 영광으로 생각해.」
조용히 비치는 달빛아래, 붉게 물들어가던 그의 붉은 눈동자, 그리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나던 송곳니. 피를 탐하고 피를 마시는, 아름다운 마력을 가진 일족. 뱀파이어―.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또다시 그녀의 뇌리를 스쳐지나 가고 있었다. 노엘은 그때와 같은 공포심에 떨리는 두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코트를 꽉 쥐었다.
“뭐……뭐지?”
하지만 자신의 손이 꽉 쥔 그것은 자신의 코트가 아니었다. 그제야 노엘은 자신을 배려한 듯 덮어준, 다른 코트를 눈치 챘다.
‘이건 분명히―.’
자신의 앞을 막아선―. 자신의 겨눈 많은 총알을, 헌터들을 막아선.
선명해져오는 오늘의 기억에 노엘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오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노엘?”
어둠 속에서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노엘은 이제야 어둠이 눈에 익어 앞에 있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칠흑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 연한 붉은 빛의 눈동자.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고결한 붉은 장미의 펜던트.
“괜찮아?”
걱정스러운 듯 눈높이를 맞추어 숙인 채 날 바라보는 따스한 눈길. 8년 전, 추억속의 붉은 장미 펜던트의 이름 모를 뱀파이어. 카인 폰 크로스―.
“잠깐 현기증이 난 거 뿐이야. 난 괜찮아.”
아까의 표정을 억지로 감춘 채 노엘은 전과 비슷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에서 느껴지는 거짓에 카인의 표정은 싸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억지로 참을 필요 없어. 그 정도라면 내 능력으로 치료할 수 있으니까…….”
현기증을 억지로 참고 미소를 짓는 노엘을 보며 카인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괜찮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는 열이 있는지 살피려는 듯 노엘의 앞머리를 들추어서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열은 다행히…… 노엘?”
그 다정한 마음과 손길에 노엘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본인이 억지로 억누른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듯이 그녀의 눈가에서 한 줄기의 눈물을 흘러내려왔다.
“죽고 싶지 않았어. 사실은 살고 싶었어. 총을 겨누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 "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진심. 마지막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고 모든 상황을 받아들인 것처럼 행동함으로서 감춘 진심.
죽고 싶지 않다는, 삶에 대한 욕구. 좀 더 좀 더 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순수한 본능.
“아버지가 날 믿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데……. 믿어주시지 않았어. 아버지가 설령 날 믿지 않는다 해도……. 난 살고 싶었어. 헌터로서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난…….”
헌터로서의 마음. 그것은 언제라도 닥쳐올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헌터라는 것을 기망하는 것.
그래선 안 된다고 머릿속으로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쳐오자 냉정함을 잃었다. 그리고 살고 싶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 했다. 그것이 헌터로서 범하는 죄라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어. 그런 너의 마음. 살고 싶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야. 네가 설령 진심으로 죽고 싶다고 했을 지라도 난 너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내가 모두 짊어질게.”
쉴 틈 없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카인은 울부짖는 노엘을 감싸 안았다.
자신으로 인해, 자신이 상급 뱀파이어를 처리하는 것에만 급급해, 노엘을 지키는 것에 급급해 주변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만약 누군가 지켜보는 것을 알았다면, 그래서 기척을 읽고 기억을 지웠다면―. 그랬다면 노엘이 괴로워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모두 짊어질게. 괴로워 할 필요 없어.”
자신의 탓이라고 책망하며 카인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품속에서 노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그래도 괴로워했을 너한테 그런 짐을 더 안겨줄 수는 없어. 난 이제 괜찮으니까…….”
눈물을 훔치며 의지가 담긴 강한 눈을 한 채로 노엘은 카인의 품에서 벗어나서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더없이 약하지만, 그녀는 이런 면에서 강했다. 어제는 울고 있었지만, 오늘은 다시 눈물을 그치고 일어선다. 빛을 잃었다가도, 금세 다시 빛을 되찾는다.
‘절망에 휩싸이고 끝없는 어둠속에 빠졌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서는 태양과 같은 강인함. 어째서 너는…….’
그 강한 눈동자를 보며 카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 눈을 했다.
자신의 반 이상을 지탱해오던 자라왔던 곳, 헌터협회와 아버지. 그로부터 배신당하고 죽음을 요구받았다. 그런데도,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겪고 나서도 그녀는 밝게 미소 짓는다.
어두운 밤의 시간을, 고독의 시간을 보내온 그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째서 그럴 수……있는 거지? 아버지에게, 함께 해온 그들에게 배신당하고 죽음을 강요받았으면서도 왜 원망하지 않는 거야!”
아니, 다른 누군가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미소를 짓는 노엘을 보던 카인은 끝끝내 큰소리로 소리치며 노엘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노엘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 강한 힘에 의한 아픔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협회 사람들은 나에게 많은 무언가를 주었어. 말로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주었어. 그래서 난 원망하지도, 미워할 수도 없어.”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사형이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노엘은 그 존재를 미워할 순 없었다. 카인만큼이나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었고 붉은 눈동자의 그들에 대한 것을 알게 해주었고, 검은 머리카락의, 왠지 모를 슬픔을 띤 붉은 눈동자의 그 아이, 카인에 대해 알게 해주었기에, 그랬기에 미움이라는 감정을 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잘못한 건 나야. 헌터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헌터가 되어서도, 나는 다른 헌터들과 달랐어. 네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언젠가 너를 만나길 꿈꾸고 너와 같은 동족을 죽여 왔어. 뱀파이어에 의해 가족을 잃고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자신과 같은 사람이 없기를 바라면서 총을 잡고 자신의 손을 피로 물들이면서까지 그런 동료들을 한편으로 배신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세게 깨물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노엘은 쉴 틈 없이 흐르는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을 죽이려한 아버지와 동료들의, 뱀파이어를 사냥할 때와 같은 표정을 한 모습이 생각나 가슴이 아파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네가 그렇게 괴롭다면 모든 걸 잊어도 좋아. 아니, 잊게 해줄게. 그들과의 추억도, 그들과의 괴로움도 모두 지워줄게. 너의 기억 속에서.”
노엘의 어깨를 세게 잡은 두 손에서 힘을 뺀 후 노엘의 눈을 바라보고 카인은 확고한 투로 말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노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면서까지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통을 이기려하고 있었다.
“이건 대가야. 아버지와 동료들을 배신한 대가.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이 고통의 대가를 치루고 있지만 넌 만났으니까―.”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카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노엘은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카인은 자신의 감싸는 따스한 손길을 잡으려했다. 그런데―.
“카인?”
자신의 손을 향하던 손길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보고는 노엘은 카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얼굴을 감싼 카인의 손. 거친 호흡소리. 그리고 손의 틈새 사이로 보이는 짙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는 눈동자.
“나한테서 떨어져.”
걱정스러운 듯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려는 노엘을 밀어내고는 카인은 떨리는 손길로 얼굴에서 손을 뗐다.
‘타는 듯 한 갈증, 목마름. 이건……. 또 인가? 그때 내 피를 마신 것으로 진정된 줄 알았는데……. 지난번보다 더 심해. 이러다간 나 자신도 모르게 피를…….’
카인은 오랜 기간, 억지로 피를 마시지 않아왔다. 인간을 습격하고 피를 마시는 동족을 처리하는 노엘을 어둠속에서 지켜봐오며 억지로 피를 탐하는 본능을 힘으로써 억눌러왔다.
하지만 인간의 피가 한 방울도 없는 순수한 혈통의 뱀파이어의 그로서는 인간의 피가 섞인 상급의, 혼혈의 뱀파이어보다 더 피를 필요로 하고, 강한 힘을 사용하는 대가로 피가 필요한 법.
그런데 카인은 그리하지 않았다. 피를 마시지 않고 순수혈통 특유의 강한 힘을 사용했다. 노엘을 구하기 위해서 두 번이나. 그래서 오늘 밤 쓴 힘은 그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이다.
“설마? 카인. 피를 마시지 않은 거야?”
헌터였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보아온 그것. 피에 대한 고갈로 인한 굶주림. 카인의 행동을 보고 노엘은 한 눈에 그것을 눈치 챘다.
“다……다가오지 마…….”
저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타는 듯 한 갈증에 카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노엘이 다가오려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뱀파이어의 본능이 가득 담긴, 자신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노엘의 피를 마셨을 혼혈 귀족의 뱀파이어와 이성을 잃은, 본디 인간이었던 뱀파이어와 같은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 본연의 피를 탐하는 추악한 맹수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기 않아서였다.
두 눈 가득 뱀파이어에 관한 공포에 서려있던 노엘의 눈동자. 공포에 차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내가며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끝끝내 도망치려던 모습.
그것은 본인과는 다른 존재인 뱀파이어에 관한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두렵지? 피를 탐하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한 맹수인 내가…….”
카인은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경고했다. 위태로운 피를 탐하는 욕망을 그녀에게 범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뱀파이어임을 숨기고 그녀 앞에 섰던 시절처럼 그녀가 자신을 두렵게 느끼지 않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
“카……카인…….”
카인의 홍옥같이 아름다운 빛깔의 눈동자가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진한 핏빛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격하게 넘실대며 피를 탐하는 오싹한 분위기의, 뱀파이어 특유의 빛깔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노엘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 자신의 인간 특유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뱀파이어가 널 죽일 거라고, 도망가라고.
그리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노엘은 어둠속에서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붉은 빛을 발하는 카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해도 나의 이런 모습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 인간들의 눈에 우린 그저 피를 탐하는 맹수, 괴물일 뿐이니까.’
마음 속 깊이 번져가는 이름 모를 아픔에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치는 ‘공포’라는 감정은 무척이나 그의 가슴을 쓰라리게 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처음으로 내밀어진 손길. 어린 시절의 짧았던 유희가 산산조각 나고 고독만이 존재하는 밤의 어둠 속에서 존재했던 유일한 빛. 그리고 본인의 지위가 아닌, 복종과 경외의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을, 본인이라는 존재를 똑바로 바라봐주었던 존재.
그랬기에 순수혈통의, 자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해왔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이에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그래서 그토록 인간이 되기를 소망하고 바랬다.
하지만 사실을 바꿀 순 없었다. 자신이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라는 것을.
“노엘…….”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카인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연민의 감정으로 카인은 본능적으로 노엘이 있는 쪽으로 한 발자국 걸음을 뗐다.
한편, 발자국 소리에 ‘공포’가 가득한 눈동자로 카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지조차 못하고 있던 노엘은 다가오는 카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일렁이는, 피를 탐하는 자의 짙은 붉은 빛 눈동자. 격하게 넘실대는 피를 향한 욕구가 담긴 눈동자.
‘뱀파이어의 눈동자. 피를 마시고, 피를 탐하는 아름다운 마력을 가진 밤의 일족.’
공포에 사로잡혀 가녀리게 몸이 떨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엘은 카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두 다리를, 움직임을 거부하는 두 다리를 억지로 힘을 주어 움직여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두려워.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가―. 하지만 카인은? 본인이 그토록 원하지 않아도 피를 탐하는 본능을 거부할 수 없어. 카인은, 카인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카인의 고통을, 아픔을 조금이나마 없애주고 싶어.’
카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노엘의 눈동자에서 공포심이 사라졌다. 노엘은 카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서글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차가운 유리벽으로 자신을 감싸고 혼자서, 그 고독 속에서 넌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렇게 카인을 가슴 아픈 눈으로 바라보고 두 눈을 살짝 감고서 노엘은 그 자리에 섰다.
뱀파이어이기에, 헌터인 자신에게 악영향을 끼칠까봐 숨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지켜준 카인. 그날 밤,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의 피를 마실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을 위해 그러지 않고 자신이 부서질 것 같다는 것같이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뺨을 애타게 만졌던 카인. 그런 카인의 손길에서 느껴진 아픔과 안타까움.
그 모든 기억에서, 행동에서 전해져오는 감정에 노엘은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카인.”
그의 아픔과 고뇌를 느끼곤 노엘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는 카인을 향해 다가갔다.
“노엘?”
한 걸음 한 걸음 서슴없이 다가오는 노엘을 카인은 조금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굶주림에 사로잡힌 자신을 보고 공포심을 품었던 그녀. 하지만 지금의 그녀의 눈에는 공포심의 감정은 없었다. 오직 강한 의지만이 보일 뿐이었다.
“함께 가자, 카인. 고독만이 존재하는 길고 긴 어둠의 시간 속으로. 내가 지독한 같은 피의 굶주림에서, 지옥과 같은 고독에서 구해줄게. 함께 하자.”
카인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노엘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카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그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지.
“무엇을 하겠다는 거야?”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그녀의 얘기에 카인은 언성을 조금 높이고서는 말했다.
“내 피를―. 내 피를 마셔. 카인.”
따스한 미소. 하지만 확고한 결심이 담긴 그녀의 눈동자. 카인은 노엘의 그런 모습에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카인은 슬픈 표정을 지어보이며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더욱 깊게 찔렀다. 손톱에 찔린 손바닥에서는 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의 정적이 흐른 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인간은 너무나도 허무해.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을 살아가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들이 결코 바라볼 수 없는 빛을 바라볼 수가 있어. 그렇게 빛 속에서, 인간은 살아가. 하지만 우린 달라. 우린 빛에 다가갈 수도 없어. 아니, 멀리서 바라볼 수조차 없어. 영원히 길고 긴 시간을, 어둠 속에서, 고독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거야. 피를 탐하고 피를 갈구하는 굶주림 속에서. 그런데도 나와 같은 존재가 되어 깊고 깊은 어둠만이 존재하는 기나긴 시간을 함께 살아갈 거란 거야?”
“알고 있어. 이것이 어떤 선택이라는 건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 카인의 송곳니가 자신의 목을 파고드는 것의 의미. 순수혈통의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를 마신다는 것.
헌터인 자신이 결코 모를 리 없는 사실. 노엘은 카인의 마지막 경고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심했기에. 어둠의 긴긴 시간 속 고독의 아픔과 절망으로 얼룩진 외로운 그와 함께 하고 싶다고.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다고.
“난 후회하지 않아. 카인.”
짙은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노엘은 어둠 속에서 가는 목선을 드러냈다. 눈을 감은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편안해보였다.
이윽고 그런 그녀의 결심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듯이 카인은 노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너를 나와 같은 존재로 만든 내 자신을 용서 하지 못할 거야.”
“이건 내가 스스로 택한 길이야. 네 자신을 책망할 필요는 없어. 비록 이것이 해서는 안 되는 행위라 해도 난 후회하지 않으니까.”
마지막까지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노엘의 마음에 카인은 노엘을 안아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이고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본능을 깨우며, 그의 홍옥처럼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목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뜨거운 숨결과 함께 그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이윽고 마지막 자제력을 놓아버린 카인의 송곳니가 가는 노엘의 목에 깊숙이 박혔다. 카인은 마음 속 깊이 잠자고 있던, 그동안 억누르고 억누른 본능을 깨우며 붉은 빛의 액체를 삼켰다.
그렇게 카인은 그녀의 가늘게 떨리고 있는 노엘의 몸을 더 거세게 안고는, 너무나도 달콤한 향기의 액체를 마시고 또 마셨다.
자신이 마음속 바라고 또 바래왔던 노엘. 어둠 속 한줄기 빛과 같던 그녀의 피는 그만큼 가치가 있었다.
“하아.”
그녀가 목각인형처럼 미끄러져 쓰러지자 그제야 카인은 그녀의 목덜미에서 멀어져갔다. 이윽고 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지탱하고는 자신의 입가에 흐른 붉은 피를 손으로 훔쳤다.
‘결코 이래야만 했던 내 자신을 저주한다. 그녀를 빛이라는 곳에 있지 못하게 하고 어둠의 장막에 끌어들여 어둠이라는 저주의 시간을 살아가게 한 내 자신을……. 그리고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크로스의 피도…….’
한순간 불어온 거센 미풍으로 열린 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은빛 물결에 이끌려 카인은 노엘은 안은 채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카인은 특유의 차가운 은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저주하며 결심했다. 깊고도 깊은 어둠에서 그녀를 보호하며 지키겠다고.
그렇게 둘은 은빛 달빛 아래, 아련한 핏빛 바이올린의 선율을 들으면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끝이 없는 영원의 어둠의 나락 속으로.
안녕하세요? 은빛카린입니다~!
이번으로 노엘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다음부터는 다시 본편으로 돌아가 Two Night가 연재될 예정이니
많은 호응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이번에는 시점이 다시 본래 쓰던 시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닌 현재로 돌아왔
습니다. 장장 10페이지 가량 되오니 마음껏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카린은 몇 주후 찾아뵙겠습니다. 이윽고 two night엔 노엘을 지키기위해 앞을 가로선 카인과 그녀를 처형하려
는 그들간의 뒷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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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엄청나게 빠른 덧글-ㄱ-;; 쪽지도 배달전인데...
아아...
와앗 /ㅅ/ 6분에 시작해서 이제서야 잘읽었습니다 라는. ㄷㄷㄷ
저도 이렇게 많이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쓰다보니 어느새 10페이지...[...]
오오오. 드디어 올라왔군요.
로아님의 소설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훗.
우오....역시 피의노래는 ... 항상 이렇게 길면... 너무, 정말 좋을텐데 ㅠ.ㅠ 장난아니게 재밌었습니다! 제 딴엔 베소에선 카린님 소설이 가장 좋아요.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필 받아서 며칠만에 적은 겁니다. Two Night. 붉은 장미의 도시, 크로스는 아직 아주 초반밖에 적지 않았습니다. 내용 구성을 해야해서요. Two Night 많이 적도록 노력해볼께요.^^
허어억? 노엘도 뱀파이어...가 된건가요?! 오랜만에 엄청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ㅡㅡ..........아 너무재밌네요 ㅠㅠ진짜 부럽삼삼삼..
노엘도 그닥 딱히 부러운 인물은 아니라는...-ㄱ-; 솔직히 말해... 피의 노래에서는 그닥 부럽다 할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다들 각자 아픔과 고뇌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엥..노엘이 부럽단게 아니궁 .. 재밌게 쓰셔서 부럽단거[..]
아,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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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니 고맙다는...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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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앗. 아주 미세한 오타 지적 감사!
우이잉 왠지 카인이 변태가 된것같..<퍼펖ㄱ
에이. 그건 다... 굶주려서....<-퍽. 우리가 굶주리면 미친 듯이 음식 먹는 것과 비슷한 원리...
와우 !! 이번편은 전에서 볼수 없었던 둘의 심리가 자세히 되어있어서 머리속에 그런마음이 연상이 되고 그 상황이 생각납니다 !! 역시 카린씨가 쓴 소설은 중독성이 있어요 !!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
중독성이라... 언제나 오랫동안 제 소설 봐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