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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디랙, 파울리, 뉴트리노 |
1927년 제5회 솔베이 회의에 초대된 물리학자들. 앞줄 오른쪽에서 5번째에 아인슈타인이 보인다. 아인슈타인을 동경했던 디랙은 그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고(가운데줄 오른쪽에서 5번째) 파울리는 절친 하이젠베르크 옆에 서 있다(오른쪽에서 4번째) 예전 한 대학입시에서 학생 다수가 물리 주관식 문제('한 원자 속에 4가지 양자수가 모두 똑같은 두 전자가 있을 수 없다'는 원리는 무엇인가?)의 답을 '파울리의 베타원리'라고 써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정답은 '파울리의 배타원리'). 배타(exclusion)를 베타(beta), 즉 그리스어 알파펫으로 착각한 결과다. 내용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건성으로 용어만 외운 교육의 일면으로 한자를 제대로 배우지 않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파울리는 베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로 그가 1930년 원자핵의 베타붕괴에서 전자뿐 아니라 중성인 미지의 입자도 함께 나온다고 주장하며 이 입자를 뉴트론(neutron, 중성자)이라고 부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2년 뒤 우리가 지금 중성자라고 알고 있는 또 다른 중성 입자를 발견한 채드윅이 이를 뉴트론이라고 명명하면서 혼동이 생겼다. 결국 1934년 이탈리아의 저명한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파울리의 입자를 뉴트리노(neutrino, 중성미자), 즉 작은 중성자라는 뜻의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로 하면서 정착됐다. 아무튼 파울리는 뉴트리노의 아버지인 셈이다. 1900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볼프강 파울리는 어릴 때부터 천재소리를 들었고 불과 21세 때 독일 뮌헨대에서 최우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만났고(1년 연하) 그 뒤 둘은 평생 우정을 나눴다. 파울리는 그 유명한 배타원리와 중성미자 예측 등 양자역학의 성립에 큰 기여를 했다. ●숙명의 라이벌 디랙 파울리가 태어나고 2년 뒤 영국에서 태어난 폴 디랙은 말이 없는 소년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브리스톨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지만 별 흥미는 없었다. 결국 졸업 뒤에도 취직을 하지 못해 한 교수 밑에서 좋아하는 수학을 공부하며 지냈다. 디랙의 수학 재능을 아까워한 이 교수는 팔방으로 힘을 써 그를 케임브리지대에 장학생으로 보낸다. 사실 디랙은 독학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양자역학을 접하며 지적으로 급성장한다. 디랙은 1926년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에어빈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 같은 내용이라는 걸 일반화해 증명해 일약 주목을 받았고 1928년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접목해 상대론적 양자론, 즉 디랙 방정식을 만들어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사람들은 뉴턴이 환생했다고 평가했다. 이 식을 풀 때 나온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1931년 '반물질'의 개념을 생각했고 이듬해 미국의 실험물리학자 칼 앤더슨이 우주선에서 반전자(양전자)를 발견함으로써 물리학계를 경악시켰다. 책을 펴냈는데, 훗날 '현대물리학의 성서'라고까지 불리게 되는 명저다. 그 역시도 이 책에 애착을 보여 1958년 4판을 펴낼 정도였다. '기인'으로 통했다. 과학사가 그라함 파멜로가 2009년 펴낸 디랙의 전기 'The Strangest Man(가장 이상한 사람)'(아쉽게도 한글판은 아직 안 나왔다)를 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여럿 등장한다. 책 제목은 닐스 보어가 말년에 자신의 코펜하겐 연구소를 방문했던 수많은 과학자들을 회상하면서 디랙에 대해 한 말이다. 보어에게 디랙은 '완벽한 논리적 천재'였으면서도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디랙 어록'까지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며 좋아했다고 한다. 한 그림을 보고 디랙은 "이 그림이 마음에 듭니다. 묘사의 부정확한 정도가 전반적으로 균일하기 때문이죠" 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디랙이었지만 유일하게 파울리와는 껄그러운 관계였다. 둘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특히 상대방이 뭔가 새로운 이론을 내세울 때마다 냉소적으로 대응했다. 전자의 에너지가 일정하지가 않다는 문제점을 발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한 가상의 입자가 바로 뉴트리노. 즉 방출된 전자와 뉴트리노의 에너지를 합치면 예측되는 붕괴 에너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뉴트리노 가설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다. 원자 모형의 원조인 보어는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했고 디랙은 '그냥 틀린 얘기'라며 무시했다. 뉴트리노의 실체는 1956년에야 미국 연구진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다른 물리학자 대다수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1933년 반물질이 검출된 뒤에도 태도에 변화가 없었다. 이해 보어의 코펜하겐 연구소 모임은 양전자의 발견에 촛점이 맞춰졌는데 파울리는 디랙이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고 남프랑스로 휴가를 떠나버렸다. 디랙은 상을 거부하려고 했으나 러더포드의 설득(그러면 더 주목을 끈다는 말)에 스웨덴으로 향했다). 반면 파울리는 1945년에야 배타원리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해 12월 5일 대학에서 강의을 마친 파울리는 갑작스런 복통에 다 음날 병원을 찾았는데 검사결과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수술에 들어갔다. 개복해보니 이미 췌장암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있었고 결국 그는 수술 뒤 이틀만에 사망했다. 그나마 뉴트리노를 발견(1956년)한 걸 보고 죽은 게 위안이다. 디랙은 1984년 82세로 사망했다. 단 한 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실제로 아인슈타인과 디랙의 삶은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주로 혼자 연구하는 스타일이었고 특히 만년으로 갈수록 주류 과학자들과 떨어져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디랙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양자이론을 가장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했다"며 극찬했다. 그는 늘 이 책을 끼고 다니며 틈틈히 읽곤 했는데 책이 안 보이면 "우리 디랙이 어디 있더라…"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디랙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는데 한 친구에게 "디랙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네. 천재성과 광기 사이를 오가는 현기증나는 길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가 없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또 디랙과 파울리를 비교해 평가하기를 " 이 분야에서 디랙은 누구보다도 앞서 있다. 그 다음이 파울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독일 괴팅겐대의 막스 보른은 "그는 아인슈타인과 견줄 만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순수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아인슈타인보다 더 위대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럼에도 그는 너무 영특했기 때문에 상상력과 직관을 펼칠 수가 없어 동시대의 하이젠베르크나 디랙에는 미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강연한 뒤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분도 알다시피, 아인슈타인 선생이 말한 것은 그리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디랙이 파울리를 싫어했던 이유도 그의 이런 안하무인적인 태도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 물리학자들은 이 천재의 미성숙함을 꾹 참고 넘어갔지만. 뉴트리노의 속도를 정확히 측정해봤더니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탈리아 라퀼라까지 732km의 거리를 빛보다 0.00000006초 먼저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 관찰이 사실이라면 빛보다 빨리 움직이는 물체는 없다는 특수상대성이론의 전제가 무너지는 셈이다. 이를 두고 지동설의 충격과 맞먹는다고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물론 물리학자 다수는 측정오차 쪽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지켜볼 일이다. 만일 아인슈타인, 디랙, 파울리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