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가난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너무나 주관적이라, 객관적으로
더 아프고 덜 아프고를 말하기가 참 어렵다.
내 기억 속의 아픔도 남이 들으면 그 정도가
무슨 아픔이라고...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속의 아픔이었고, 그 아픔들이 옹이로
내 가슴 어딘가에 박혀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요즘 먼 길 다니다가 문득 생각 나 찾아보았더니
옹이가 있던 그 자리엔 뻐꿈한 구멍만 남아있고,
그곳에선 바람이 지나다니며 내는 소리인지
멀리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났다.
**
휘파람 소리가 된 옹이 첫째 <공납금>
누구에게나 있는 기억이 아닐지...
교무실 앞에서 몇 번을 서성거렸다.
종례가 끝난 직후라 선생님들 여러분이 모여서
한가롭게 말씀들 나누고 계셨다.
고등 1학년. 국민학교 1학년 때 살던 집을 판 후
8번의 이사 끝에 드디어 우리 집을 가지게 되었다.
은행 융자를 많이 끼고 산 집이라 집으로 들어오는
돈이란 돈은 거의 융자를 갚는 데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공납금을 제달에 낸 적은 한 번도 없고,
늘 한 두 달을 미루어서 냈다. 선생님이 내일까지
미룬 친구 중에 내일까지도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지만 들지 않았다.
아침에 아버지 봉급이 며칠 늦어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손을 들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은 좀처럼 혼자 계시지 않았다.
계속 이 책상 저 책상 옮겨 다니시면서 다른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셨다.
교무실 문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고 서성대다가
결국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봉급이 제발 오늘 나왔으면...
다음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넘어가지 않는 밥을
몇 술 넘기고 간 학교의 조회 시간.
'약속을 못 지키면 미리 말하라고 했잖아. 인마~'
출석부로 머리를 몇 대 맞는 동안 나는 정말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사춘기... 불만과 아픔들이 하나로 뭉쳐 옹이로
박혀있었는데, 그 빠져나간 빈자리에서 휘파람
소리만 들려오니 세월이 약이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구나 싶다.
**
휘파람 소리가 된 옹이 둘째 <닭고기와 쇠고기>
재수시절 가뜩이나 부모님께 죄송한 판에 맹장염
수술을 받았다.
참다가 참다가 결국 못 견디게 아파 받은 수술이라
속에 염증이 생겼다.
은행 융자는 여전히 우리 식구들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은 상태였고, 고름제거 치료를 하던
대학병원의 레지던트가 빨리 고름을 제거하고
상처가 아물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익아~ 엄마가 고기 사 왔다 많이 묵어라~'
상위에 놓인 통닭 한 마리를 미안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남기려들면 어머닌,
'니 다 묵어라~ 어여 묵고 빨리 나아라~'
다음 치료 날,
'와 이래 진도가 안 나가노? 고기 묵었더나~?'
'닭고기 묵었심더...'
'닭고기 묵어가 되나~ 쇠고기 묵으란 말이야~ 쇠고기~!'
'......'
'알았나~?'
'......'
내 속에 옹이로만 남기고 말걸...
그날 저녁에 어머니에게,
'쇠고기 묵으라 캅디다. 닭고기는 잘 안 아문다고...'
난감하고 미안해하던 어머니의 그 표정...
옹이로 내 가슴에 박혔다.
어머니 가슴엔 더 깊이 박혔을 것이다.
**
늘 가난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픔들은 세월이
지나면 웃으며 돌아보는 추억거리로 남지만
더러 가슴 한구석 옹이로 박혀 쉬 지워지지는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런 옹이들조차도 이젠 먼 휘파람 소리가 되어
버렸는데 의문 하나가 남는다.
내 아픔은 그나마 받지 못해 생긴 아픔이라
그렇게 세월 따라 지워졌지만, 주지 못해 생긴
어머니 가슴에 박혔던 수많은 옹이들은 어찌 되었을까?
하늘나라 사시면서 그 옹이들 다 빼셨을까?
오늘 쏟아붓듯 큰 비가 내렸는데... 어머니가
이승에서 못 빼고 가신 모든 옹이들이 다 빠지는
비였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첫댓글 가슴에 박힌 옹이..빼내지도 못하고 곪아 터졌을 ㅠ
어무이~~하고
가만 불러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옹이가 아니고
몸과 마음 여기저기 흉터를 새기고
살으셨던 것 같아요.
마음자리님은 옹이 같은 것,
가슴에 두고 있지 않을 분 같아요.
항상 마음자리가 정이 흐르고
반듯한 생활을 하시는 것 같아서...
어머니께 옹이는
장성한 형제들이 사회에서 바르게 살아가시면,
어머니의 옹이도 사라지고 말지요.^^
긍정의 마인드로 살아가는 이에게는
옹이도 지나서 보면,
살아가는데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시절은
국민의 80~90% 가난했으니까요.^^
이번 주는 일정이 바쁘게 돌아가서
미루어 둔 글과 댓글을 주말인
이제야 집에서 편히 쓰고 답니다.
이제 제 속에 남은 옹이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ㅎ 건방을 떱니다).
알게 모르게 제가 가족이나
타인에게 박았던 옹이를 하나 둘
찾아서 빼내야 할 때 같아요. ㅎㅎ
2000 년 경에 제가 써서 어느 허름한 책에 실렸던
시를 잠시 옮깁니다.
어머니는 우신다
미안하면 눈물 짓는다
괜찮다며 나는 괜찮다며 손 내젓는다
소작농의 아내로 70을 넘긴 어머니는
.................(후략)
아버지와의 불화 탓에 그런 어머니께 효도를
다하지 못 한 것이 못내 커다란 옹이로 가슴에
남았습니다.
가난했던 그 시절의 심정 이해합니다.
그러게요.
몸과 마음으로 가진 것 다 내어주시고도
뭐가 그렇게 더 미안한 게 많으셨던지...
생각하면 그저 몸 전체가 먹먹해집니다.
저도 국민학교때 기성회비를 못내어
복도에서 무릎꿇고 손들고 벌스던 생각이 나네요
어머니는 하늘에서 아드님이 잘살고
계시는것을 지켜보며 흐믓해 하실겁니다
복도에 무릎 꿇고 손 들고 벌 받을 만큼
기성회비 못 낸 것이 잘못한 일은 아닌데요...
선생님에게나 학생에게나 참 힘들었던
세월이었습니다.
울어머니의 옹이를 더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게 기여도가 컸었던 수피는 울엄니가 곁에 안계신 작금에 이르러서야 때늦은 후회를 하며 살아갑니다.ㅎ
저는 엄마 속을 많이 썩혀드려서
지금은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해드립니다.
엄마 돌아가시면
후회될 것 같아서요.ㅋ
@제라
아주 잘 하고 계십니다. ^^
누구나 그런 후회가 한 가득일 겝니다.
좀 더 일찍 알면 좋은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제라 귀에 딱지가 앉을만큼
많이많이 하세요~ ㅎㅎ
마음자리님에게
그런 옹이가 있었다니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시골 오두막집에서 살아도
집걱정을 한적 없고
보리밥이라도 굶어본적 없기에
그것이 가난인지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납부금을 제때에 못 낸 기억은 없는데
납부금을 못 내서
혼나는 친구들은 있었던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도시에 산다고 해서 다
생활고가 없지는 않았겠다 싶네요.
각자 나름의 애환을 안고 추억하며
이제는 이렇게
웃으며 얘기할 수 있어서 즣습니다.
그땐 밥 굶은 친구들도 참 많았어요...
도시 변두리가 시골보다 더 못한 곳이
많았지요. 살림도 궁핍하고 위생도
더 못하고...
저는 막내라 ㅎㅎ 어릴 때 서러움도
아주 잘 탔습니다. ㅎㅎ
가난이라는 옹이.
공납금 미납으로 인해 아픈 기억이
있군요. 제때에 아들의 공납금을
못 주신 어머니의 마음에는 옹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리고 수술한 아들에게 소고기 대신
닭고기를 사주신 어머니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지요.
그때는 다들 참 가난하게 살았던것
같습니다.
시골마을 치고는 엄청 큰 마을이었고
제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스무명 정도 된 걸로 짐작이 가는데,
중학교에 진학한 여자 아이들은
불과 서너 명이었지요.
마음자리 님 어머님 가슴 속 옹이도
이제는 다 빠졌을 거예요.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지금에 와서
돌아보는 지난 날은 그렇게 슬프지 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구나 싶은 것은
그때는 꿈과 희망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때였으니까요.
수정 전의 댓글도 읽었답니다.
초1학년, 학생저축 안 한다고
뺨 맞고 집에 왔다가 터덜터덜
다시 학교로 돌아가던 날이 떠올랐지요.
생각이 말짱해서 입학식 날, 엄마가
선생님께 '야는 형도 같은 학교에 다니니 형에게로 몰아서 저축금 내겠습니다' 하는 말 다 듣고 알고
있었는데도, 집에 다녀오는 그 시간만이라도 교실밖에 있고 싶어서
괜히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같은 설명 또 듣고 돌아가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집성촌에서 사셨다고 하셨지요.
성주로 시집간 고모도 계셨으니
짚어보면 또 먼 친척 인연일 수도 있겠습니다. ㅎㅎ
@마음자리 어린아이에게 오리길은
상당히 멀게 느껴지더군요.
일찍 철이 들었던지 돈이 없는 엄마의 사정을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아무말도 안 하고 다시
학교로 갔지요.ㅠ
그 모욕감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 친구는 고등학교때 공납금 미납했다고
선생님께 뺨을 맞았다고 하더군요.
참 슬픈이야기지요.ㅠ
그러게요 세월이 약이겠지요 하는 말은 언제나 진리였어요.
가슴에 옹이 막힌 어머니를 잊지 못하는 맘자리 님 이야기를 듣다보니 모정의 세월이란 노래가 떠 올랐어요.
나무랑님 수정 전 댓글도 읽었습니다.
GOD의 '어머님께'.
아들이 이야기 해주어 알게 된 노래인데 실화가 바탕이라구요.
댓글 보고 다시 한번 새벽에 그 노래를
들었는데... ㅎ 시원하게 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자리 눈물나는 노래죠.
큰딸이 god 팬이라 그들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자식들 먹이려고 먹고 싶어도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던 우리들의 어머니~
@이베리아 오늘 휴일 토요일 점심을
간짜장 주문해서 먹었습니다. ㅎ
@이베리아 저도 god노래 좋아해요^^
@마음자리 그렇죠 들으면 울컥 해져서 울 수밖에 없어요.
제가요 특별하게 맘자리 님을 위해 god노래
한 곡 더 놓고 갈께요.
길 이란 노래도 함 들어보세요.
(넘넘 마음에 와 닿았거든요)
지금이라면 많지 않을 학비입니다만
당시 제 기억에도 조례시간마다 담임선생님이 불러 세우는
아이들이 절반 가까이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어려웠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강한 마음자리님이 존재하지 않나~~이런 생각 잠시 해봅니다.
지금 돌아보니 그때의 선생님들도
다 이해가 되니... 우리들이 참 힘든 시대를 잘 버티고 이겨내며 살았구나 싶습니다.
위에 올려 놓으신 가을이오면님의
친한 형님, 얼른 건강 회복하셔서 다시 운동 즐기시는 생활로 돌아오시기를 기원합니다.
누구나 옹이가 몇개씩은있지요.
이젠 추억이된 옹이일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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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기억이야 남았지만 아픔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남아있지
않더라구요.
오늘 여긴 일요일인데
거기도 좀 한가한 주말인가요?
살아가다가 가끔은 옛일들을 들춰보게 되지요.
잘 견뎠어요.
전 금.토가 한가하답니다.
모든 분들이 다 잘 견뎌내셔서
지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세대에서는 많이 겪었음직한......^^
몇 해 전 수락산 산행중 고딩친구들과 이야기중에
서울서 태어났지만 중학교 들어가서야 '점심'이란걸 알았다고 말하니
마음여린 한 친구가 갑자기 눈물을 보여서 다같이 웃던 기억이 납니다.
요즈음은 그 힘든 시기에 날마다 자식들 끼니를 걱정했을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보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