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이라는 만화가가 있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 극작가로 되어 있으나 많은 만화를 그렸기 때문에
나는 그가 만화가로 인식되어 있다. 나는 맨 처음 그의 작품 심자군 이야기를 읽고 깜짝 놀랐다.
대단히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후 왕의 귀환을
읽었으며 최근에 한겨례신문에 주말에 르네상스 미술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꼭 읽는다.
거기에는 단순한 미술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곁들여 놓았는데 올곧은
그의 글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이든지 확연하게 깨닫게 한다. 불편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서 여기 한 글을 그대로 옮겨 소개하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천안함 사건등과 북한에 관한 그의 이야기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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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까요?
비법을 알려 드릴게요. 주인공을 정하세요. 그리고 그 주인공을 궁지에 몰아넣으세요!
오해 때문이건 성격 탓이건 주위 사람들과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만드세요. 해결할 수
없는 갈등 속으로 주인공을 던져 넣으세요.
옛날 그리스 비극부터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와 ‘막장 드라마’까지 두루 쓰이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이야기가 수습이 안 되면 어쩌죠? 정 막히면 라틴어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즉 ‘기계 장치를 타고 나타난 신’에게 맡겨보세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연극에서는 신들이 무대 위로 기중기를 타고 내려와,
이야기 꼬인 것을 풀어줬대요. 요즘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던 인물이 우연히 사고를
당하거나 뜬금없이 병에 걸리는 것처럼요. 이런 식의 해결을 싫어하는 분도 적지 않겠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 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나왔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정작 <시학>을 찾아보니 “기계 장치(그리스 말로는 메카네, mechane)”라는 말만 있네요.
고전학자 에라스뮈스는 옛 글을 추적하여 ‘기계 장치에서 나온 신’이라는 말이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틸로스> 이래 10여가지 고대 문헌에 등장함을 확인했어요.
인터넷 검색도 안 되던 르네상스 시절에 어떻게 저걸 다 찾았을까요?
아무튼 이렇게 여러 문헌에 등장할 정도라면, 서투른 작가만 이용하던 편법은 아니었겠죠?
대작가의 손을 거치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뼈대가 된다더군요.
신이 찾아와 문제를 해결해 주다니, 작가 입장에서 어찌나 편한지요!
그러나 방심은 금물, 마음 놓고 쓰다가는 어설픈 이야기가 되기 십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렇게 꼬집어요. “사건의 해결은 플롯 자체에 의해 이루어져야지 …
‘기계장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훗날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도 경계했지요.
“사건의 갈등이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상 신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호라티우스 <시학>, 191~192행).
요컨대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남발하면 감동도 없고 설득력도 없다는 말씀.
이런 의미에서, 요즘 인터넷에서 “데우스 엑스 부카나”라는 농담이 유행하는
사정을 미루어 짐작하실 줄로 압니다. 감당 못할 여러 문제들이 북한의 소행이라면,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 참 편하긴 할 거예요.
다만 우리 정부 주장대로라면 북한은 참으로 신묘한 능력을 갖춘 셈.
북한을 미워하자던 어르신들이 북한 정권을 갑자기 데우스(deus, 신)처럼 치켜세우는 이 상황에,
저 같은 일개 시민은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김태권의 르네상스 미술이야기에서 옮겨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