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디시 보게 된 건, 도서관에서였다. 빌린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계단에서 그와 마주쳤다. 그는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가 좀 달라 보였다.
그동안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생기가 있었다.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일하다 보니, 많은 아르바이트생을 만난다. 길게는 몇 달, 짧게는 며칠 사이로 사람이 바뀌기 때문이다. 사 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르바이트생이 그였다. 그는 요즘 보기 힘든 통바지와 칙칙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서른 중반이라는데 아픈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그와 함께 일을 했다. 그는 행동이 느렸다. 빵집 오전은 굉장히 바쁘다. 기계처럼 손이 재발라도 쉴 틈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가 서툴다 보니 내 피곤함에는 가속이 붙었다. 답답함을 넘어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가 상처를 받을까 봐 염려되어서였다.
그의 가정환경은 참으로 딱했다. 그는 임대아파트에서 산다고 했다. 그런데 가족 중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매일 절에 가서 천 원짜리 밥을 사 드시고 남은 반찬을 가져온다고 했다. 어머니도 경제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동생은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않는다고 했다. 사회성이 부족해 직장생활을 못 한다는 것이다. 남의 집 사정 이야기에 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데도 그는 담담했다. 꿈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살다 보면 때로는 자본주의를 철저히 인식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그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걸 망각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가 얼마나 무기력함에 길들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길든다는 것, 폭력에 길들고, 가난에 길들고, 게으름과 의존에 길든다는 건 포기와 회피를 부른다. 그의 행동이 그의 정신상태를 말해 주었다.
그는 먹을 걸 탐했다. 먹을 것에 대한 그의 절실함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그는 내가 주는 음식을 신성하게 받아먹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게 그에게는 참으로 신성한 의식 같아 보였다. 그동안 피로를 가중한다는 미움도 잠시, 그의 모습은 연민을 자아냈다. 그는 나와 함께 일할 때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주 잠깐, 내가 그의 무능을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챙겨줄수록 의지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에는 결핍이 숨어 있었다. 가정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아 안쓰러웠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속한 계층을 가늠하는 잣대로 '수저 계급론'이란 게 화제라고 한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로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빗대어 계급을 정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집안 환경을 탓하지 않고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는 신념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희망이 점점 깨어지고 있다. 부모의 재산이나 사회적 배경이 성공의 발판이 된 것이다. 이는 젊은 세대의 취업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부의 불평등에 대한 젊은 층의 반감이 투영된 것이리라.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되어 버린다는 건, 참으로 맥 빠지는 일이다. 스스로 흙수저라 자처하는 젊은이들은 자조 섞인 자기 한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도 그런 열등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잔인하게도 그에게 결혼계획을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의 눈빛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입가에는 자조적 웃음이 스쳤다. 과연 그에게 자존감이란 게 남아 있을까 싶었다.
그는 결국 희망 대신 절망과 가까워졌을 테고, 합리화로 현실의 답답함을 달래려 했을것이다. 그가 더는 삶의 이면으로 숨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픈 채찍이 필요했다. 에둘러 말하기보다 직설적인 화법이 필요함을 느꼈다. 정신차리라는 내 말에 그는 서운한 맘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벽을 깨야 했다. 현실에 안주해 버리면 그나마 탈출구조차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도 두 아들을 키우다 보니, 그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젊음은 활기차고 생기 있어야 한다. 비록 캄캄한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눈빛마저 빛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좌절할지라도 패기는 잃지 말아야 한다. 무기력해지지 않으려면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에게 그런 말들을 했던 것 같다. 그는 어느 날,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등을 두드려 주는 거로 그를 응원해 주었다.
가난에 억눌리고 현실에 좌절해서 꿈을 잃어가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은 그저 희망일 뿐인가. 금수저 은수저가 보장된 미래를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금이나 은으로는 파릇한 싹을 틔울 수 앖다. 새로운 생명은 흙속에서 꿈틀대며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흙이야말로 진정 가능성을 가진 최고의 물질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많은 흙수저가 신비로움을 깨닫고, 그 속에서 가능성을 찾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첫댓글 흙수저: dirt spoon
동수저: bronze spoon
은수저: silver spoon
금수저: gold sp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