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29.土. 맑음
서울 도심都心 걷기, 서울역에서 강남역까지.
지리산에도, 제주도에도, 서해안에도, 그 어느 곳이든지 숲이 있고, 물이 보이고, 길이 있는 곳이라면 각 지자체마다 앞장서서 둘레길 걷는 코스를 개발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에 분주하다. 부산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한적閑寂과 여유餘裕를 맛보고 즐기면서 산과 바닷가를 끼고 걷는 일은 현대인들에게 기분전환뿐만 아니라 치유의 효과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걷는 일이란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자 가장 완성된 행동의 모습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인데 그래서 사람은 걸어야하고, 걸을 때 신체에 내재되어 있는 생체리듬도 원만하게 운용되리라고 본다. 걷는 일은 그 효능이 비단 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걸을 때 몸의 기운과 함께 마음 작용도 활발해져서 머리가 균형 잡힌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보다 걸을 때 많은 창의력이 솟아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걷기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코스 개발은 분명 생산적인 일이지만 그런 둘레길 걷기에 집착하여 꼭 그 길을 걸어야만 걷기가 제대로 된 듯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사람이 땅과 나무와 바람과 호흡을 맞추고 상호相互간 교감交感을 하는 원래 의미의 걷기로부터는 조금 멀어진 셈이 된다. 본래 걷기란 계획이나 호화스러운 여행이 아니다. 걷기는 어디서든, 언제든, 숨쉬기만큼이나 편안하고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울 시내를 걷기로 한다. 따지고 보면 이곳만큼 볼거리, 생각거리, 추억거리가 많은 곳도 드믈 것이다.
서울내기가 아닌 다음에야 지방에서 올라온 촌놈들에게 서울역은 서울에 들어서는 관문이자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 고속버스가 없던 시절에 서울로 틈입闖入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차를 타고 서울역이나 용산역에 도착을 한 뒤 역사驛舍 밖으로 나와 시끄럽고 복잡한 버스 타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서울 시내 출발 기점은 언제나 서울역이라는 생각이 기억 속에 단단히 박혀 있다. 이것이 서울역에서부터 걸어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던 유일한 이유다.
서울역사에서 나와 남영동 쪽으로 걸어가면 예전에는 작은 가게나 여인숙들이 많이 보였는데 지금도 길 건너편인 후암동 쪽 가로街路에 비해 낡고 작은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회색灰色 혹은 빛바랜 남색藍色의 이층, 삼층 건물들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조그마한 가게들이나 후미진 사무실들이 옛 기억을 도와준다. 이 부근 어디엔가 곡마曲馬라는 꽤 유명한 술집이 있었는데... 그렇게 걷다보면 청파동과 숙대방향으로 들어가는 쌍굴다리가 나오고, 나는 그쯤에서 지하철 통로를 통해 길 저쪽으로 건너간다. 삼각지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면서 ‘흔들어주세요, 해태 써니텐~ ’으로 유명했던 해태음료, 지금은 해태제과로 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건물을 지나면 길고 붉은 벽돌 담장길이 나타난다. 그 붉은 담장 안을 들여다보면 ’70년대 고등학교 교사校舍처럼 생긴 붉은 벽돌 2층 건물이 가지런히 서 있다. 그 건물이 예전에는 미8군 조달청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미문화공보처인가로 바뀌어 있다. 길 건너편을 쳐다보면 담장 안의 회색 건물에 USO(미군위문협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이쪽의 예전 조달청이나 길 건너 저편의 USO나 ’70년대까지만 해도 수많은 차량들이 들어 다니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던 곳들이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변하자 그 용도가 바뀌어버렸거나 그 역할이 시들해져 버린 모양이다. 그곳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삼각지 로터리 입구 왼편으로 미8군 영내 Gate #1이 있다. 출입구 옆에 작은 초소가 있고, 근무자가 서 있는 걸로 봐서는 아직도 그 문 안쪽에서 무언가 일이 행해지고 있는 듯하다.
예전에는 삼각지 로터리에 원형의 고가도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디든가, 아마도 이탈리아에선가 건축가를 불러다 설치했다는 그 원형 고가도로가 오히려 교통흐름에 방해를 주어 교통난을 부추긴다고 해서 언젠가 그 콘크리트 구조물을 철거 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단순한 삼각지의 삼거리에 왜 그리 복잡한 원형 고가도로를 설치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삼각지를 끼고 돌아가면 예전에는 육군본부가, 지금은 그 자리에 전쟁기념관이 들어선 넓은 장소가 보인다. 건너편에는 회색의 국방부 건물이 국방부 장관처럼 그렇게 부동자세로 서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공공기관 이름들이 몇 개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전쟁기념관戰爭記念館과 저 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이다. 왜 하필이면 길이길이 기념해야 할 기념관 이름이 전쟁이고 독립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그 독립 이전에는 우리에게 자주독립自主獨立이 없었다는 말이고, 또 강대국들에 등 밀려 피를 흘린 동족상잔의 전쟁을 기념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사안을 보는 관점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아니라면 상상력이 부족한 것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듣기 위한 국민 청문회라도 열어보았으면 싶다. 그 기념관을 지나면 미8군 영내 Gate #5가 왼편으로 보인다. 그런데 Gate #5 위를 넘어서 저 건너편 영내를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고가도로가 설치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왕년의 미8군 영내 주 출입구였던 Gate #5가 무용지물이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다. 상전벽해桑田碧海까지는 아니지만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변화라 할 수 있다. 씁쓸한 추억거리이지만 미8군 영내에서 Gate #5를 나서면 바로 사거리 정면에 큰 게시판이 있었고, 거기에는 붉은 글씨로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교통사고로부터 위험한 길로 나서고 있습니다.’
그 길을 곧장 올라가면 우측으로 녹사평 지하철 출입구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쳐 건널목을 건너서면 거기서부터는 이태원에 들어서게 된다. 이태원이 희고 검은 미군들과 누르스름한 한국 사람들로 북적이던 옛날의 이태원이 아니다. ‘한물 간’이라는 표현이 이처럼 적절할 수 없을 만큼 한물 간 동네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태원 1동우체국과 파키스탄 대사관을 지나고, 해밀턴 호텔을 지나면 이제는 이태원도 더 이상 볼 것이 없다. 계속 걸어 올라가다 작은 고개에서 다시 내려가고, 그리고 다시 올라가면 약수동 고갯길에 이른다. 여기서 돌아다보면 내가 이태원을 지나 넘어온 길과 약수동 고개로 올라서는 길, 오른편 고개를 넘어 신라호텔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과 남산으로 빙글빙글 오르는 길, 그리고 한남동으로 가는 길 등 오거리가 한눈에 드러나 보인다. 거기에는 왕복 15차선은 충분히 됨직한 넓은 도로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그곳에서 크게 U턴을 해서 한남동 방향으로 걸음을 돌린다. 스페인 대사관을 지나고 나서 횡단보도를 건너 순천향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나면 호랑이 석상이 웅크리고 있는 한남대교가 보인다. 한강다리를 건너면 신사동이다. 신사동, 논현동, 강남역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현실現實이자 현재現在이다. 강남 교보문고와 건너편 길 극장 간판을 쳐다보며 걷고 있노라면 금세 강남역이 나온다.
한강다리를 사이에 두고 과거過去와 추억追憶이, 현재現在와 현실現實이 상존常存하는 서울도심 걷기는 꾸준히 가로수와 길 언덕과 한강을 보며 걷는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통해 인생을 성찰해본다는 점에서, 지리산 둘레길이나 제주도 올레길 걷기에 비해 거의 부족함이 없는 걷기라 생각이 된다. 북촌北村과 인사동 길, 성북동이나 우이동牛耳洞 길뿐만 아니라 언제고 어디든 내가 원해서 한적하게 생각을 돌돌 굴려가며 걷는 길은 그곳이 바로 둘레길이고 올레길인 셈이다. 본래 걷기란 거창한 계획이나 큰 여비가 들어가는 호화로운 여행이 아니다. 걷기는 어디서든, 언제든, 숨쉬기만큼이나 편안하고 당연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서울 도심都心 걷기, 서울역에서 강남역까지. -)
첫댓글 어느 수필에서 읽었습니다. "옛날 어머니와 지게를 지고 걷던 불티재가 이제 내겐 순례길이다" 그 글에 크게 감동했었습니다.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만이 꼭 순례길은 아니겠지요. 그러고 보면, 누구나 마음을 가라 앉히고 자신을 성찰하며 걷을 수 있는 순례길을 저마다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곳이 도심 한복판의 아스팔트 위든, 집으로 오는 골목길이든, 뒷산의 등산길이든....
걷기의 생활화가 필요한 사람이 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직은 작은 공 갖고 하는 운동이 좋아서 걷기는 . .
긴울림님의 사유가 있는 건강한 행보가 참 부럽습니다. 감사합니다. *^^*
서울 집이 있는 남산기슭에서 쪼르르 내려오면 서울역이든 남영동이든 걸어서 15분 거리죠.
긴울림 님이 그려준 스케치를 보고있으니 동네 구석구석이 지도가 되어 펼쳐집니다.
저의 엄니가 미8군에서 정년퇴직을 하였는데 어릴 적 저녁외식이라도 하려면
몇 번 Gate 에서 만나서 가 곤 하였답니다.
내일은 구정이라는데 괜히 서울생각나게 하시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