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입고 있는 체인메일이 무거워 미칠 지경이었고, 사막의 열기와 더위 속에 탈진할 것 같았다. 그러나, 멈출수는 없었다. 갑옷을 벗을수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방금전 머리가 있던 부분에 창이 휘둘러졌다. 나는 몸을 틀어 달려오던 방향을 꺽어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나타난 바위틈으로 몸을 숙였고, 창을 휘두른 기병은 욕을 하며 말을 돌렸다.
이런 식으로 추격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십여 차례 피하고 보니, 이제는 내가 이런 회피의 달인이 된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접는게 좋을 것 같았다. 이미 그런 어설픈 자만 덕분에 반나절이 넘는 도주 중에 나와 같이 짝이 되어 도망치던 어느 이름모를 리엔을 따라 남은 체스요원이 눈앞에서 목이 날아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이름도 모르는 그 요원은 나를 밀치고 대신 칼을 받았고, 나는 그의 시신 수습은 커녕 그가 누군지도 모른채 도망쳐야 했다. 눈물이 흘렀다. 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준 사람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나 자신이 수치스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상념에 잠겨 있기에는 상황이 너무 다급했다. 적들은 집요하게 우리를 추격하며 눈에 불을 켜고 쉴틈을 주질 않았기 때문이다.
어제밤에 우리는 참패하였다. 샷텐야거를 잡기 위해 소수정예로 와일드위즐 작전을 계획하고, 기다렸으나 적들은 우리보다 한수 위에서 놀고 있었다. 우리가 우리를 경계해서 샷텐야거가 공격을 중단한게 아닌가 하는 되도 않는 망상을 하는 동안 그들은 포착된 지도부와 소수 병력을 보고 한수에 우리를 털어버릴 기회로 여기고 전 병력을 동원해 공격을 펼쳤다.
다행히도 살라딘은 적의 돌격이 시작하자 마자, 이미 승산이 없단걸 판단하고 각개 도피를 명령했다. 그리고 혹시나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우리는 동쪽에 다소 험한 산악 지형으로 대피할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이동을 하였고, 살라딘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리 훈련받은 사람처럼 동쪽의 산악 지형으로 도주를 감행하여 간신히 큰 피해를 입는 건 막을 수 있었…을까? 나도 모르겠다.
결국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모두 뿔뿔히 흩어져서 끝까지 우리를 추격하는 템플기사단의 경기병대와 샷텐야거에게 쫓겨 숲과 바위틈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행방은 알수 없었다. 다들 무사할까 고민해보았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 가장 위험한건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아마도 충분히 백여명은 되는 병사들이 바위틈과 나무사이로 요리조리 기병이 못가는 곳으로 도망치고 있는 나만을 노리고 추격을 감행하고 있었으니깐.
결국 그러다 나를 따라오던 그 요원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숨이 턱 밑에 도달했지만… 나는 다시 움직여야 했다. 방금전 따돌렸다고 생각한 시간도 잠시 다른 방향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다시 이를 악물고 이제는 정말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것도 곧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산악지대에서도 다소 장애물이 별로 눈에 안띄는 고원 같은 곳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뒤로 십여명의 기사들이 나를 발견하고 다소 말이 움직이기 힘든 길을 꾸준히 낮은 속도로 추격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뿔피리를 불어 주변의 동료들을 불러모았다. 곧, 나를 쫓는 병력은 백여명이 넘게 몰려들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한계가 다가왔다. 말을 몰아 달려온 어느 기사가 내 어께에 슬링샷을 날렸고, 날아온 돌의 기세에 나는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일어서서 도망치려 하였으나… 무의미한 짓이 되었다.
어느새 기사들은 나를 둘러싸고 원을 그리듯이 포위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끝인건가? 나는 어울리지도 않는 하나 얻어 차고 있는 검을 칼집에서 뽑아들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서 비웃음이 퍼져나갔다.
"쥐새끼처럼 도망치더니, 이제야 왕족의 명예라도 생각난거냐? 더러운 마녀의 자식놈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조금전 달리던 고원에서 한쪽은 낭떠러지, 그리고 다른 3면은 적들의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주춤주춤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싶은 낭떠러지로 뒷걸음치며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종종 이야기 속에 나오는 호수나 강이 흐르는 기가 막힌 지형은 아니었다. 그저 뾰족뾰족한 바위들이 난립한, 그리 높진 않지만 거친 지형만이 있었다. 아, 그렇지… 여긴 사막이었지…
나는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며 다시 뒤를 돌아보았고, 나를 비웃으며 조롱하던 기사들은 이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그들중에 한명이 창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죽일 생각인건가? 그가 말을 몰아 창을 앞으로 내밀자 순식간에 속도가 붙은 그의 창이 나에게 날아왔다. 나는 겨우 몸을 틀어 스쳤으나… 그 스친 충격도 어마어마 했다. 마치, 거대한 충차가 스치고 지나간 그런 중압감과 통증이 일었다. 그자가 말했다.
"오래전 앙주에서 마녀의 수하인 그 에라드 자식이, 내 아버지를 이런 식으로 뭉게버렸다. 맛이 어떠냐? 앙? 너도 한번 당해봐라. 이게 어떤 기분인지를…"
그는 거칠게 여러 차례 말을 몰아 나에게 거창돌격을 가했고, 그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스치거나 창대에 몸이 부딪쳐 날아가는 상황을 연출했다. 나는 기사들의 더미인형처럼 무력하게 나뒹굴어지고 하늘로 솓구쳤다, 떨어졌다. 그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치도록 고통스러운 이 시간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바랬다. 그리고, 순간 뒷편이 허전한걸 느꼈을 때 나는 내가 낭떠러지의 끄트머리에 서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어지간한 그도 낭떠러지의 돌격은 무리였는지 나를 조롱하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몇몇 병사들이 말에서 내려 나를 체포하러 걸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검을 들고 그들에게 맞서려 하였으나… 아마도, 그건 무의미한 행동일 것이다. 이대로 끝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찰라… 누군가 소리쳤다.
"비켜!"
"어? 어어어… 안돼!!!"
나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말에서 내리자 뒷편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달려 그들을 내려치듯이 난입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은… 에스더였다. 오… 나의 주님 감사합니다. 나의 눈에 그녀는 마치 나를 구하러 온 여신과도 같아 보였다. 그녀가 소리쳤다.
"어서 잡아요!"
나는 당황하는 그들을 뚫고 나에게 달려와 뻗은 그녀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말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의문이 들었다. 여기… 낭떠러지인데? 어? 어어어어…. 나의 여신님은 거침이 없었다. 나를 말에 태우자 마자 그대로 낭떠러지로 몸을 날렸다. 나는 그녀의 어처구니 없는 무모한 기동에 경악하였으나 너무 놀라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에 납짝하게 뭉개질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신기에 가까운 승마 실력으로 말이 중간에 돌출한 기암 기둥을 한번 디디고, 다시 다른 기둥을 디디며 속도를 줄이게 해서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하는 마치 서커스단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바닥에 도달하자 마자 그녀는 말배를 걷어차 그들을 뒤에 남겨두고 앞으로 달려갔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녀의 난입에 당황하였지만, 곧 차분하게 다시 말에 타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부는 낭떠러지로, 그게 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낭떠러지를 우회하는 길로 향해 우리를 다시 추격하기 시작했다. 하… 역시 낭떠러지로 몸을 던지면 추격을 멈추는 것도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구나.
우리는 바위 기둥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달렸다. 그리고 곧이어 적들도 우리의 뒤를 맹렬하게 추격하기 시작했다. 좁은 가도의 바로 뒤에서 추격하는 사람, 그리고 저멀리서 우회해서 우리를 가로 막으려는 사람 두 무리로 흩어진 병력은 이제는 거의 3백명은 되어 보였다. 나는 내 앞에서 말을 모는데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따라붙었어요. 곧 우리 뒷덜미를 잡을만큼 가까워졌어요."
"빌어먹을… 집요한 놈들…"
그녀는 다시 한번 말의 배를 걷어차며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우리 말의 속도는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다. 말 한마리에 두명의 사람을 태운 우리가 그들보다 느린건 어쩔수 없는 것 처럼 보였다. 나는 결국은 우리가 잡힐 것이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릴께요. 혼자라도 도망쳐요."
"뭐요? 지금 제 정신이에요? 지금 내렸다가는 당장 저놈들의 손에 잡힐게 뻔한데 무슨…"
"하지만, 나는 무능해도 이 작전의 최고 책임자예요. 그리고 제국의 여제의 아들이기도 하구요. 그들도 당장은 나를 어떻게 하진 앟고 나를 이용하려들꺼예요.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당신은 저들에게 별 의미가 없을것이고, 당신 같은 미인이 저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저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하기도 싫어요. 말의 속도를 늦춰져요. 내려서 동굴틈으로든 어디든 혼자 도망칠 방법을 찾아볼께요."
"이런 썅! 닥치고 내 허리나 잘붙들고 있어! 이 병신 같은 자식아! 내가 우습게 보여? 비잔틴의 마지스트리아노스가 저런 템플기사단 놈들에게 돌림빵이나 당할만큼 우습게 보여? 넌 아무것도 몰라 죤! 그러니깐, 닥치고 가만히 있어. 내가 처리하겠어. 저 자식들은 내 손으로 처리할꺼야. 넌 그냥 보고만 있어!"
그녀는 뭐가 화가 났는지 알수없었지만 엄청나게 화를 내며 뒤를 한번 돌아보고 주변의 지리를 파악하였다. 그리고 곧 몸을 숙여 말고삐를 뒤로 넘겨서 나에게 잡으라는 듯 고삐 사이로 몸을 집어넣고 고삐를 쥔 손을 놓았다. 나는 다급하게 말고삐를 잡았고, 그러자 두손이 자유로워진 그녀는 팔을 돌려 그녀가 항상 차고 다니는 위스키보틀 같은 것을 조작하여 벨트 부분에 뭔가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 벨트에서 연결된 것으로 짐작되는 소매밑에서 뽑아낸 무슨 대롱 같은 것을 꺼내서 항상 들고 다니던 금속제 채찍에 손잡이 끝에 연결시켰다.
그리고 왠지 보란듯이 채찍을 빙빙 휘두르며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녀의 알수없는 행동에 나는 물론 우리를 추격하는 적들까지도 의문에 휩쌓인듯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적들은 당장이라도 우리를 말에서 끌어내릴 만큼 다가왔다. 그러자 그녀가 다가오는 그들에게 채찍을 휘둘렀고, 어떤 기사는 채찍을 말고 낙마하기도 하였다. 곧 기사들은 그녀의 공격이 중거리에서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 판단하고 그녀의 채찍을 휘감아 봉쇄하려 창을 내밀고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뭔가 기이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팔에 연결된 대롱과 이어진 채찍은 그녀가 그것을 흔들때마다 그 끄트머리에서 뭔가 알수없는 것을 뿜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저게 대체 뭐지? 나는 그것을 알수 없었으나, 뭔가 그녀가 노리고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닭았다. 그녀는 연신 채찍을 휘두르면서도 주변을 황급하게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았다. 그리고, 곧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나는 그녀가 찾아 헤매던 것이 뭔지 알아챘다. 그것은 바로 작은 폭풍이었다.
사막에서 종종 부는 작은 용오름이 날씨가 흐려지며 기암 지대의 중심에 드믄드믄 목격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쪽으로 손을 가리켰고,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적들도 맹렬하게 우리를 따라붙었다. 곧, 용오름에 다가가자 그들은 우리를 따라잡았다. 그녀는 연신 채찍을 휘두르며 그들의 접근을 막으려 했으나 이제는 그들은 여유까지 부리며 적당히 채찍에서 거리를 두고 원을 그리듯이 우리를 포위하며 달렸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사나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나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지금 내가 신호하면 당장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요."
"아… 알았어요."
그리고 우리는 작은 용오름으로 난입했다. 거센 바람이 우리를 덥쳤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채찍을 휘둘러대었다. 그리고 적들 또한 우리를 둘러싼 포위를 늦추지 않고 그녀의 채찍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바람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작은 용오름의 중심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였다. 그녀가 소리쳤다.
"지금이에요."
나는 당장 말을 멈추고 뛰어내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그녀가 뭔가 주문을 외우듯 소리쳤다.
"키리에(Kyrie : 주여)!"
그리고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엎드리며, 채찍에 장치된 작은 스위치 같은 것을 '타닥' 튕겼다. 그리고 이어서 소리쳤다.
"일레이손(Eleison :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그녀의 채찍 끝에서 '파밧!' 하는 불꽃이 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믿을수 없는 것을 보았다.
"어? 어어어어… 이… 이게 뭐야? 안돼!!!!!!"
적들의 경악은 나 역시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불기둥이었다. 그녀의 채찍의 끝에 발생한 점화장치인듯한 곳에서 발생한 불꽃이 일어난 곳은 폭풍의 눈에 들어온 우리와는 달리 아직 폭풍의 영향속에서 거쎈 바람을 밪고 있던 어느 기사의 측면이었다. 불꽃이 튀자 그 불꽃은 허공중에서 뭔가 촉매라도 만난듯 어마어마한 화염으로 변화하였다. 그 화염은 용오름의 바람을 타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에게 파도처럼 쏟아부어졌고, 그 열기와 열폭풍이 몰아치자, 말들은 놀라 날뛰며 통제를 상실하였다.
그리고 그 불꽃은 보통 불꽃이 아닌듯 엄청난 열기로 닿은 모든 것을 살라버리고도 죽지 않고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 불꽃의 파도는 용오름을 타고 올라가 마치 대지와 하늘의 사이에서 거대한 불꽃의 기둥인 것처럼 우리를 제외한 우리를 포위한 모든 것들을 살라버렸다. 나는 폭풍의 눈에서 바짝 엎드려 도저히 믿을수 없는 이 광경, 성경에서나 나올법한 상황을 보며 할말을 잃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비잔틴이 가진것으로 알려진 아직까지도 세상을 두렵게 만들고 있는 어마어마한 무기… 절대 해외에는 유출하지 않는다는 그것이 이것인걸까?
나는 그저 두려운 마음을 품고 신에게 순종하는 나약한 인간처럼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그 광경을 보았고, 그 불꽃, 마치 주님의 형벌인듯 보이는 그것은 오만하게 땅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 모든 것을 처참하게 태워 없애고 용오름을 따라 저 하늘로 사라져 올라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일으킨 화염폭풍에 우리를 추격하던 대부분의 템플기사단원들은 형체도 알수없이 소각되었다. 그리고 그 일대가 완전히 검게 그을려 마치 아궁이에 들어온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다행히 누군가 놓치고 간 말을 붙잡을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 일이 있은 직후 추격당하던 그 순간보다 더 당황한듯 보였다.
"물을… 어서 물을 찾아야 하는데…"
그녀는 몹시 초조해하며 주변을 돌아보며 갑자기 수원지를 찾았다. 뭔가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녀는 그런 나의 의사를 무시하고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수원지를 찾아 헤매는 것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잠시후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저거… 왠지 버려진 카나트의 수원지 같아 보이지 않아요?"
내가 가리킨 곳은 암벽사이에 난 작은 동굴 같은 곳이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이곳을 돌아다니며 눈물겹게 제 위치에 있기를 바라던 장소인지라 특색은 눈에 익었다. 그녀는 내가 가리킨 곳을 보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갔다. 동굴속으로 들어가자 겉에서 보이는 입구와는 달리 안에는 제법 넓은 공간이 펼쳐져있었고, 군데군데 외부와 연결된 높은 천장의 바위틈으로 빛이 새어들어와 그리 어둡지도 않았다.
그리고 잠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다행히도 그곳에는 수원지가 있었다. 아니, 이 정도 규모면 수원지라기 보다는 작은 저수지 같은 규모였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버려진 카나트에 우기가 이어지면서 물이 다시 보충된 것 같았다. 큰 저수지 외에 별도로 물을 받기 위한 작은 연못 같은 웅덩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주변에 깔린 고운 모래가 일종의 필터 기능을 하는 전형적인 방식의 카나트였다.
"이제 물을 찾았군요. 대체 왜 그렇게 물을? 마실 물이라면 여기 수통에 여분이 있는… 어? 지금 뭐하는 거예요? 으아아악!!!"
그녀는 다짜고짜 말에서 나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당황하는 나를 연못에 발로 걷어차 처박아 버렸다. 나는 나뒹굴어져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처럼 되었다. 조금 화가 나서 뭔가 한마디 하려는 찰라, 그녀도 물로 뛰어들어 나에게 다가오더니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벗어요."
"지금 이게 무슨… 네? 벗으라고요? 아니, 갑자기 왜…"
"닥치고 좀 하라는 대로 하라구요! 벗어! 지금 당장 옷을 벗으라고! 갑옷은 물론 속옷까지 걸친건 남김없이 벗으라고! "
그렇게 히스테릭하게 소리친 그녀는 내가 행동하길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나를 덮쳐서 강제로 갑옷과 겉옷을 벗겼다. 거칠게 내 옷을 벗기던 그녀에게 나는 당황해서 어찌할바를 몰랐고, 나중에 옷이 잘 안벗겨지자, 아예 칼을 뽑아들고 옷을 갈기갈기 찢으며 벗겨버렸다. 속옷까지 남김없이 옷을 벗겨 완전히 알몸이 되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황당한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내 옷을 벗기자 마자, 자신도 엄청나게 다급하게 옷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물론, 나와 마찬가지로 갑옷은 물론 겉옷과 속옷까지도… 어? 어? 대체 이거 뭐야? 무슨 상황인거야? 나의 당황스러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다급하게 무슨 원수라도 되는양 옷을 찢어 벗어 던졌다. 곧, 그녀 역시 알몸이 되었다. 나는 동굴의 틈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 그녀의 몸을 볼수 있었다.
구릿빛으로 빛나는 피부에 여윈 근육질의 몸에는 군데군데 화상과 창상들이 눈에 띄였다. 그러나, 그 늘씬한 몸매는 뭐랄까나… 정말 신화속에 나오는 아르테미스의 재림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멍때리고 있는 내게 다가와 그대로 내 머리를 눌러 물에 다시 처박았다.
"어푸어푸… 이게 대체 뭐하는 겁니까?"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다급한 얼굴로 손으로 내 몸을 거칠게 물로 닦아내며 소리쳤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물질을 뒤짚어 쓴건줄 알고 있어요? 이건 앱실론 타입과 오미크론 타입을 섞은 물건이라고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우리 몸에는 상온에서도 충격만 가하면 어마어마한 화염을 만들어내는 물질과, 불이 붙으면 사람의 살에 파고들어 촛농처럼 타들어가며 절대 꺼지지 않는 물질을 유증기 상태로 왕창 뒤집어 쓰고 있다고요. 어서 씻어내야 해요. 안그러면 언제 웰던 스테이크가 될지 모른다고요!!!"
뭔가… 이해는 잘 안가지만 위험한걸 뒤집어 쓴건 알 것 같다. 그녀가 휘두르던 채찍에서 나온 뭔가 희미한 분무같은게 우리만 피해가지는 않았을테니깐. 그러나… 그녀의 패닉에 빠진 모습은 더 보고 있기 힘들었다.
"괜찮아요. 이제 괜찮으니깐 그만 진정해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당장 씻어내야 하는데… 아아… 너무 늦은 거면 안되는데… 어디 거친 솔 같은 게 좀…"
그녀는 나의 만류에도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진 사람처럼 우왕좌왕했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킬 방법을 생각하다가,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래서, 물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그녀를 붙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고, 그때 그녀에게 키스했다.
"……!!!!!!"
효과는 있었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것을 그만두었으니깐. 하지만 대신 얼음처럼 굳어버리는 패닉에 빠져버렸다. 나는 금방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고 사는건 주님이 정하신 일이니 이제 그만 진정해요. 나 안죽어요. 당신과 같이 살아갈 꺼예요. 지금 뭔가 위험한 물질을 우리가 뒤집어 쓴 것 같은데… 일단 차분하게 씻어내도록 하죠. 요령을 알려줘요. 그대로 할테니깐. 그러니깐, 이제 그만 진정해요."
그녀가 한참동안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키스한걸로 목숨을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진정하더니, 곧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어? 저… 저기… 이건 남자들은 어쩔수 없는… 그리고 자신의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들짝! 남자 앞에서 알몸인거 이제야 인식? 그리고 손으로 다급하게 입을 가렸다. 아, 이제야 키스가 생각났나? 그리고 얼굴이 확 빨개지더니…
"헉! 커헉! 윽윽윽!"
인중에 한방, 명치에 두방, 로우킥! 그리고 나뒹굴어지는 상황에 복부에 한방. 물에 처박히고 나서는 거기를 발로 밟… 으악! 사… 살려주세요!!! 왠지 템플기사단보다 더 확실하게 악의를 가지고 죽일 기세로 밟아대는 그녀의 공격이 이어졌고, 나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조금전 느낀 입술의 부드러움과 눈호강에 만족하며, 왠지 그냥 죽어도 별 여한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소동이 있은 직후… 나는 그녀의 설명대로 몸에 남았을지도 모르는 그 알수없는 물질을 세척하고 나왔다. 나와보니 그녀가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려서 다시 입기는 무리였다. 그리고 말의 등짐에 발견된 템플기사단의 옷은, 그녀가 역시 위험할수 있다고 말하며 물에 푹 담궈서 여러 번 행궈내고 나서 말리려고 걸어둬서 역시 당장 입기는 무리였다.
어느새 해가 지고 동굴 너머의 광야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느낀건데 사막의 밤은 대단히 춥다. 단단히 옷을 챙겨입고 모포를 두르고 있어도 오한이 느껴지는 날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다 젖은 상태에 마른 옷 한벌 없는 우리는 그제서야 얼어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이며 말했다.
"모닥불을 지피면 어때요?"
"동굴틈으로 새어나간 빛으로 놈들이 몰려올지도 몰라요."
그러면 어쩌라구…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면 눈알을 파버리겠다는 섬찟한 경고를 한 그녀 역시 난처한듯 등짐에서 걸칠걸 찾아보았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카나트의 한구석에서 물단지를 싸는 보따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넓은 광목천을 발견했다.
"이건 어때요? 이거라면 망토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나마 추위를 피할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군요. 두르도록 하세요."
"당신은요?"
"천이 하나 밖에 없잖아요. 반으로 가르면 두르기엔 부족하고… 난 괜찮으니 왕자님이나 두르고 있어요."
"에이, 그게 그렇게 되나요. 나만 살자고 어떻게… 당신이 사용해요. 그래도 이런건 여자가 두르는게… 그리고 알몸도 가려야 하잖아요. 계속 보여줄 생각이 있다면 나야 좋지만… 하하하, 그 말 취소할 테니 칼좀 치워주지 않을래요?"
그녀는 칼을 내 등줄기에 겨누고선 내가 뒤로 내민 천을 집어들었다. 겨우 동의해 주는 건가? 그러나 그녀는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 날 돌려앉히더니 내 무릎위에 앉았다. 그리고 천을 둘러 둘이 같이 둘둘 싸매었다. 어? 이거 둘이서 너무 알몸으로 밀착인데, 이거… 그때 그녀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며 말했다.
"앉은 자리에 아래에서 뭔가 밀고 올라오면, 그거 잘라버리고 다시 앉을거예요. 주의하세요."
잔… 잔인해… 이 상황에서 그게 통제가 되면 그건 리엔이지. 난 왠지 어디선가 리엔이 '나까지 마세요!' 라고 외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애써 그녀가 불쾌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내 다리 위에 앉아 내 시야에 구릿빛 피부의 탄력있는 목선을 보이고 있는 뒷덜미가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칠흑 같은 윤기가 나는 검은 생머리가 어께를 타고 앞으로 흘러내리를 것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콤한 이국적인 향기가 마음을 쉽게 진정하기 힘들게 하였다.
이것 참 잔인한 상황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매혹당한 아가씨가 두번이나 목숨을 구해주고, 그리고 내 무릎위에 알몸으로 천하나만 두르고 있는 상황이라니… 근데 진정을 하라니, 이건 대체 무슨 지옥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의 그런 기분과는 달리 그녀는 조금 침울한듯 먼곳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같이 살갗을 밀착하고 있다 점점 밤의 한기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왠지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걸 애써 떨쳐내기 위해 다른 화제를 꺼냈다.
"긴 하루였군요. 다들 무사할까요?"
"아마도, 우리보다는 사정이 나을 것 같군요. 누구 덕분에 현재 우리가 적의 추격망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을꺼예요. 나도 상당히 돌아와서 당신을 만났으니… 한가닥 하는 그 사람들이라면 요리조리 잘도 피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우리를 따라온 병사들까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건 무리겠지만."
나는 조금 침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와줘서 고마워요. 틀림없이 당신은 아그네 공주님과 도주하고 있을꺼라고 생각했는데,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정말 여신이 강림한줄 알았어요."
그녀는 나의 찬사에 조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그네 공주님은 리엔이 따라붙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리엔한테 공주님이 따라 붙었다는 게 맞는 말일까요? 뭐 그쪽은 별로 걱정안해도 될꺼라고 생각해요. 참고로 멜리장드는 케두스 왕자와, 에라드는 살라딘공과, 루치아 시녀장은 라와드와 같이 이동했어요. 괜찮은 조합들이라고 생각해요. 나름 티격태격하는 사이도 있지만, 서로의 보완이 되는 인물들이 같이 이동했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꺼예요. 늘 그렇듯 항상 당신이 제일 문제라구요."
나는 그녀의 핀잔에 다소 머쓱했지만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당신이 따라와 줬잖아요. 벌써 두번째군요. 내 목숨을 구해준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
"보답은 필요없으니 제발 죽을 자리에 뛰어드는 일만 하지 말아요. 이제 이런 일이 크게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에 놀랄 지경이군요. 목숨의 여분이라도 있는건가요? 왜 그렇게 죽지 못해 안달인 사람처럼 여기저기 뛰어드는거죠? 분명히 말하건데… 이제 더 이상은 없어요. 세번째로 구해주는 일은 더 이상 안할꺼예요. 세상에 절대 바꿀수 없는 지엄한 사람, 설령 황제 정도가 아닌 한에야, 세번이나 목숨을 같은 사람에게 구조 받는 짓은 할 도리가 아닌거예요."
"명심하죠. 더는 당신을 걱정시키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할께요."
그리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나는 문득 오늘 있었던 생각난 것을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오후에 보여줬던 그 불기둥… 그거 혹시 그건가요? 비잔틴에서 절대 외부에 내보내지 않는 다는 그 전설의 무기…"
그리고 그런 나의 생각을 반영하듯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스의 불, 압축 분사된 유증기를 통해 광범위한 영역의 적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는 앱실론 타입이죠. 우리 마지스트리아노스 특수작전팀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수 없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무기를 보며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지옥의 두려움을 경외하라는 의미에서, 이것을 므깃도 인페르노(Megiddo Inferno)라고 부르지요."
"우와… 사용 원리가 유출이 되서 언젠가 1차 십자군 당시에 무슬림 측에서도 사용하였다고 들었는데, 그때 듣기로는 그냥 화염이 방사되는 그런 물건으로 생각했는데… 엄청난 오산이었군요. 이건 그냥 허접한 화염방사기가 아닌데요? 거의 군단이나 함대를 한두개 쓸어버리고도 남을 물건이더군요. 왜 이런 물건을 가지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고전한거죠? 당장 세계정복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되던데요.?"
"유출된 적 없어요. 우리 물건에 당하고도 살아남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행운아들이 우리 물건을 흉내내서 휘발유를 뿜는 애들 장남감을 만든걸 가지고 그리스의 불이란 언급을 한건, 당신들 프랑크인 역사가들이죠.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한다면 정말 세상에 종말이 온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만들어줄수 있는 물건이 우리 그리스의 불이죠.
근데 왜 우리가 이 지경으로 몰리다가 겨우 제국의 도움으로 숨을 돌렸느냐? 그건 간단해요. 이 물건 너무 엄청난 위력 덕분에 사용이 엄청나게 제한이 많이 붙어요. 그리고 동시에 가장 기밀인 이유로 인해 이 물건은 외부인들에게 알려진바와 달리 군대에서는 사용을 할수 없어요. 완전히 마지스트리아노스 특수작전부 소속 극소수의 요원들만 사용가능하죠.
그리고 그 요원들도 아무나 사용할수 있는건 아니고, 각종 특수무기 사용 훈련을 오랫동안 받고, 그 기밀 엄수를 맹세하며 담보로 가족들의 생명을 걸고, 한가지 조건을 더 충족해야 비로서 사용이 가능한… 근데, 내가 왜 지금 우리 비잔틴의 비밀 무기에 대한 설명을 당신에게 상세히 하고 있는거죠? 미안하군요. 왕자님, 기밀 엄수를 위해 자결해 주시면 안될까요?"
그녀는 왠지 혀를 차며 다시 살짝 돌린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 다소 애매한 시간이다. 적들의 추격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동굴속에 홀딱 젖은 남녀가 같은 모포를 두르고 체온을 나누며 밤의 추위를 피하고 있다니… 어떻게 생각해보면 위급하고, 촉박한 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그녀와 둘만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이것저것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깐, 에스더, 당신은 왜 마지스트리아노스를 하는건가요?"
"그게 왜 궁금하시죠?"
"그야 뭐… 좀 이색적이랄까요? 제국에도 물론 마틸다 아주머니 같은 여성 첩보관이 없는건 아니지만, 당신처럼 현장에서 무력을 동반한 위험한 작전에 투입되고, 이런 엄청난 무기의 사용권한을 가진 여성분은 보기 드물어요. 비잔틴이 의외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곳이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런 일을 나와 동갑인 당신이 하기에는 나름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이 보였다. 그러다,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그리 대단한 이유는 아니예요. 오히려 비잔틴에서는 흔한 이야기죠. 나는 나름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오… 과연, 역시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어요."
"사생아로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말했다.
"사연이 좀 복잡했죠. 내 선조들은 집안을 오랫 시간 번영으로 이끈 걸출한 분들이셨죠. 그러나 아버지는 유감스럽게도 그분들의 업적을 이어받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뒤를 이었을 때 아버지는 너무 어렸었죠. 그래서 할머니가 집안을 다스렸는데, 그런 할머니의 행동에 반기를 든 친척들이 많았어요.
결국 할아버지의 사촌인 어느 망나니 친척이 침입해서 아버지를 감금하고 집안의 실권을 빼았았어요. 그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난리와 마침 수도에서 발생한 전염병 때문에 가문의 남자들이 너무 많이 죽었고, 당시 자식이 없던 그 친척은 자신이 죽고 나서 가문이 멸문되는 것은 두려워 했죠. 그래서 아버지를 구금한채로 살려뒀어요. 대신 더 치욕을 주는 방법을 생각해냈죠.
아버지의 정혼자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린거죠. 아버지는 절망했지만 무력한 그분이 할수 있는 일은 없었죠. 결국 아버지의 정혼자는 새로운 가문의 주인의 아내가 되고, 아버지는 점점 실의에 빠졌죠. 그런데, 상황이 미묘하게 흘러갔어요. 비록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정혼자는 개념이 있는 여자였고, 그 결혼의 조건으로 절대 아버지를 해쳐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결혼 이후로도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애썼죠.
그리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하녀를 아버지에게 보내 보살피게 하였는데, 아버지는 자신을 돌봐주는 그 하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하녀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죠. 그게 바로 저예요. 이 정도면 뭔가 배신감을 느낄만도 했을텐데 아버지의 정혼자는 제 어머니와 저를 끝까지 보호하셨고, 다행스럽게도 저는 무사히 태어날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사생아인 사실이 변하는건 아니었죠. 아버지의 정혼자는 이미 새로운 가주의 아이를 몇해전에 낳았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어요. 세상 일이란 알수 없는 것이, 가문을 빼앗은 그자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노환으로 사망하였고, 아직 어린 여자 아기를 가주로 세울수 없던 가족들은 결국 제 아버지를 감옥에서 꺼내 다시 가주로 모시게 되었어요. 물론 수치스러운 조건은 붙었죠.
다른 남자에게 빼앗겼던 정혼자를 아버지는 다시 정식 아내로 맞아들여야 했고, 내 어머니의 존재는 부정당해야 했죠. 다행히도, 아버지의 정혼자, 그때는 정식 아내, 내게는 새어머니는 여전히 개념잡힌 사람이었고, 그 상황을 바꾸진 못했지만, 나를 친딸과 다름없이 아껴줬어요. 하지만 내게는 그곳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는 잠시 상념에 잡힌듯 말을 멈추고 먼 곳을 응시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도 당신은 다시 집안을 되찾은 아버지의 딸로 출신에 뒷담화는 들었을 지언정 나름 명가의 레이디로 성장할수도 있지 않았던거 아닌가요? 왜 하필이면 마지스트리아노스에서도 마치 군인과 다름없는 일에 종사하게 된거죠?"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 말이없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뭐랄까요…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내가 가진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많이 겪었어요. 명가의 가주의 사실상 유일한 딸이지만, 동시에 새어머니를 통해 집안에 남은 언니, 아니 촌수로는 고모가 되겠죠. 그녀의 존재와 더불어 나의 비천한 출생 신분 등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자연히 내가 가진 여자라는 사실에 대한 혐오감을 가졌어요.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남편의 적에게 안기고 돌아온 새어머니의 행동, 그리고 언니인지 고모인지 알수 없는 정식 혼인을 통해 태어난 가문의 적통 후계자 자격을 가진 존재,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정적인건 친어머니의 재혼이었어요.
친어머니는 가문에서는 내쳐졌지만 새어머니의 배려로 성실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죠. 엄마를 눈물로 떠나 보내고 나서 몇 년후에 다시 엄마를 만나러 갔을 때,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지만, 그녀의 집에는 그녀가 낳은 아이들과 그 아이의 자상한 아버지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쯤에 내게 선택의 시간이 왔어요. 대부분 비잔틴의 귀족가문의 딸들이 그렇듯이, 정략 약혼을 하게 될지, 아니면 수녀원으로 보내질지에 대해 나는 택일해야 했죠. 사실 후자에 대한 압력이 강했어요. 가문의 일부 기득권을 가진 친척들은 나보다는 내 고모가 후계자가 되길 바랬죠. 하지만, 나는 그 어느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어요. 세상을 한 남자의 부속품으로도, 신앙의 시녀로도 살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건 내 안에 있는 여자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만든 결과인지도 몰랐죠. 그때 내게 뜻밖의 제의가 들어왔어요. 바로 마지스트리아노스의 길이었죠. 그때가 멜리장드와 같은 12살, 4년전의 일이었죠. 내가 그것을 수락했을 때 아버지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힘없이 손을 흔들어 주셨어요. 아마도 다시는 딸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체념을 하신듯 하더군요. 나 역시도… 그렇게 살았어요. 사망자가 속출하는 훈련에 가장 정열적으로 뛰어들었고, 최단기로 교육생 자격을 마치자마자 각종 비잔틴을 위협하는 적들과 대적하는 최전선에 섰어요.
내게는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없었어요. 그냥 이대로 어디선가 죽어도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없을꺼라고 생각하고, 무감각하게… 무덤덤하게… 무념으로 적을 제거하고, 미션을 달성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죠. 이상하게도, 삶에 대한 욕망이 없으면 없을수록 생존의 가능성은 높아지더군요. 덕분에 지난 2년 동안 상당한 공을 세울수 있었죠. 하지만… 나는 계속 공허해져만 갔어요.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잘듣고 있던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당황했다.
"네? 나요? 내가 뭘 어쨌길래?"
"당신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우리 비잔틴의 구원자인 위대한 여제의 장자… 하지만 그 성정이 모자라고, 품행이 방정맞아 도저히 후계자로서는 낙점인 왕자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죠. 그리고 하필이면 그자가 내가 새로 부임하게 된 예루살렘에 가문에서 폐출되어 귀양당해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죠. 공허한 시간 속에서 처음으로 분한 마음이 들었어요.
아크레에 당신이 도착했던 그때부터 나는 이미 당신을 기다리고 그 소문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나를 처음 발견하였을 때, 나는 내가 들은 소문이 거짓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할수 있더군요. 내가 누군지 알고 꽃을 주나요? 나는 그 자리에서 당신을 죽이고 무사히 돌아갈수 있는 존재였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나한테 꽃을 줘서 당황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을 장기적인 비잔틴과 제국의 미래를 위해 제거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어요."
헐… 나 그날 꽃다발 안기지 않았다면 웰던 스테이크 될뻔한겨? 그러나 그녀의 말을 이어졌다.
"왜 당신은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위대한 제국을 건설한 여제의 장자로서, 그분이 나름 열심히 모친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로서 모자라기 그지 없는 행동만을 일삼는거죠? 나였다면,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그러지 않았을꺼에요. 나는 내 개인의 야망이 아니라, 정해진 순리를 밟아가며 부모에게 믿음직한 자식이 되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을 꺼예요.
당신에게는 그런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하군요. 그러니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얼간이라고 조롱하고, 당신을 만만하게 보고, 당신에게 이처럼 터무니 없는 계획에 돌멩이 대신 책임질 아무 실권없는 지도자로 내세우는 거겠죠. 난 그 사실이 화가 나요. 자신에게 주어진 훌룡한 조건을 다 걷어차고, 바보처럼 세상에 조롱당하는 일에 익숙한 당신의 존재에 열받아요. 결국, 그러다 보니 어영부영 당신과 황제폐하의 농간에 휘말려 여기까지 온거죠."
나는 잠시 한숨을 쉬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뭐… 내가 왜 이 모양이냐고 물으신다면… 뭐 그냥 나기를 못나게 태어났다고 밖에는 할말이 없군요. 뭐, 어쩌겠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내 귀에는 국가간 외교관계와, 행정부서의 조직 구성, 군대의 사열 같은 것들이 들어오질 않는 걸요. 그냥, 흥겨운 노래와 춤, 그리고 그걸 보고 즐거워 하는 사람들이 좋으니… 당신을 실망시킨건 어쩔수 없는 내 본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요. 다행히, 어머니에게는 나 말고도 나보다 훨씬 유능한 다섯 동생들이 있고, 걔들은 다들 출중한 재능을 가졌고, 정식으로 성과 작위도 받은 가문의 자랑들이니 제국의 미래에는 별일 없을꺼예요.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당신에게 감사해요."
"응? 뭘 감사한다는 거죠?"
"내가 세상에 바보취급 당하는 걸 분하게 생각해 줬잖아요. 그건 아마도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나는 그런 당신의 상냥한 마음에 감사해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되요. 나는 말이죠… 확실히 세상에 큰 도움이 안되는 삼류 음유시인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거나 조롱하곤 하지만, 그게 그리 싫지 않아요. 그들은 나를 조롱함으로 인해 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내가 도움이 되고 있는거 아닐까요?
언젠가 한번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차피 내 재능에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될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나를 아는 친구나 이웃들에게 있어서, '아! 맞아, 그 녀석이 있어서 다행이야.'라는 말을 들을수 있다면 나는 그것에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별로 대단할게 없는 삶이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인생이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어울리는 삶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나를 위해 나를 놀리는 사람들에게 화내준 당신에게 감사해요."
그녀의 목덜미가 더 붉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조금 흐믓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딱히, 당신의 편을 들려고 그런건 아니고, 당신이 너무 한심해서 그런거니깐요."
에고… 이런 모습만 보면 참 평범한 아가씨랑 별 차이도 없는데… 그리고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칭찬하지 말아요. 날 지금까지 수작부렸던 여자과는 다르니깐, 자꾸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면 정말로 화낼꺼예요. 어차피 여자로 보이지도 않을꺼면서…"
"에? 그건 무슨 섭섭한 소리를? 내가 왜 당신을 여자로 안본다는거죠? 당신처럼 매력적인 숙녀분이 또 어디있다고 그러는거죠? 누가 당신을 매력없다고 헛소리를 했나요?"
"수백명의 적부대와 함선들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겠죠. 내 실체를 본 사람들은 다들 나를 괴물 보듯이 쳐다보죠. 그리고, 그런 일이 아니라고 해도, 객관적으로 난 내가 그리 미인이 아닌건 잘알아요. 미인이라는 건, 살라딘 공이나 루치아 시녀장, 아그네 공주님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죠. 그리고 아직 어리지만 멜리장드와 아이샤도 내 나이가 되면 지금보더 훨씬 더 성숙한 미인이 되겠죠. 몸에 거친 상처자국과 화상자국, 그리고 보기 흉한 근육들만 붙어 있는 몸에, 그리 매력적이라고 하기 힘든 얼굴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건 어떤 남자라도 무리가 아닐까요?"
"아니예요. 확실히 우리 데네브에 미인 멤버들이 많은건 사실이지만… 내게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매혹적인 여성이예요. 그리고, 다른 멤버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매력 포인트도 있고…"
"훨씬 더 우월한 매력 포인트? 그게 뭔데요?"
"아… 예를 들면… 아! 가슴… 실물을 본 입장에서 최고라고 말해줄께요."
"하하하… 가슴…"
"하하하…"
"키리에!!!!!! 일레이…!!!!!"
"으악! 제발 진정해요. 동굴안에서 사용 금지!"
그녀는 눈을 째리면서 말했다.
"정말이지… 말을 해도 아주 그냥… 쳐 맞을 소리만 하는 재주가 있어… 그리고 벌벌 떨지 말라구요. 꼴사나우니깐. 이제 그거 더는 없어요."
"에? 다쓴건가요?"
"우리 비잔틴이 세계를 정복하지 못한 이유죠. 생산량이 너무 절망적이라 전술전략에 써먹을 기회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 그래서 이런 전략 병기를 타그마타가 아닌 우리 마지스트리아노스에서 관리하는 거예요."
"아, 그럼 다행… 그럼 아까의 얘기로 돌아가서…"
"더 가슴 소리 했다가는 아주 죽여버리는 수가 있을줄 알아요."
"아뇨, 그런게 아니라… 매력 문제에 대해서… 잠시만요. 저기를 좀 봐줘요."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뭐가 있다는… 에…"
나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안고 그녀의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아까전보다 더 오랫동안 키스했다. 당장이라도 칼을 휘두르리라는 우려는 다행이도 기우로 끝났다. 왠지 그녀는 가만히 내 입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입술을 떼고 바라보자… 그녀가 물었다.
"왜…"
"그러니깐, 당신이 매력적인 여성이란 걸 알려주고 싶어서요. 자신을 가져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눈에는 당신이 나의 여신이에요. 당신은 괴물이 아니예요. 무도한 이들과 맞서서 물러서지 않고, 세상을 불로 정화하는 불꽃의 여신… 그리고 부탁할께요. 자신의 안에 여성을 죽이지 말아요.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나는 봤어요. 이 세상에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군주는 너무나 상냥한 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여성은 그 스스로 약하지 않아요. 그러니, 나는 당신이 자신을 죽이며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평소처럼 화가난 표정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조용한 관조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나를 차분하게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그런 방식으로 꼬셨죠? 1차 십자군 시절 성지 드립치던 기사들이나 쓸법한 수법을 말이죠?"
"음… 어디 보자… 대략 20명, 아! 예루살렘에 와서 꼬신것도 감안하면… 아! 아! 아! 잠깐 스톱! 칼박혔어요. 피난다고요. 농담! 농담! 한번도 못꼬셔봤어요. 당신이 처음이에요. 악! 악! 악! 정말이라고요. 나 의외로 연애관은 보수적인 남자라고요. 아무 여자나 놀아나는 거 못하는 남자라고요. 아아아! 솔직히 말할께요. 써먹어 보려다 한번도 안통했어요. 싸대기만 맞았어요. 두자릿수로… 그러니깐 그만 칼뽑아요."
그녀는 왠지 모르게 대단히 화가 난듯 격렬한 반응을 보이다가 내가 싸대기만 맞았다는 항목에서 좀 김이 빠진듯 칼을 집어넣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긴… 안젤모 그라치아니가 그랬다면 뭐 그 정도 미남이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당신 얼굴로는…"
"우와 상처 받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어. 난 자기 미모 칭찬했는데.. 허걱!"
그녀는 칼을 뽑아 내 목에 들이대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셧업!"
그리고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살짝 흘러내린 모포틈으로 그녀의 실루엣에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답게 오늘 우리가 나눴던 말은 밖에 나가서 떠드록 다니지 말기를 바래요."
"그리스의 불 때문에 그런가요?"
"뭐, 그뿐만 아니라, 내 개인적인 이야기도요."
"네에네에… 근데 맨입에 비밀 지키라니 좀 너무하지 않아요? 자기가 다 떠들어 놓구선… 어? 으흡…"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예상치 못한 공격이 이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쭉 빼고 내 입술에 그녀가 먼저 키스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기습 키스에 할말을 잃었다. 입술을 뗀 그녀가 나지막히 말했다.
"이걸로 다 잊기를 바래요. 함부로 떠들고 다니면 남은 여생을 앉아서 소변보게 만들어 줄테니깐. 이만 자요. 옷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내일 저녁에 어둠을 틈타 미리 계획했던 합류지점으로 이동하도록 하죠."
"당신은요?"
"기습당할 우려는 좀 낮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몸에 배인 습관 덕에 이런 상황에서 난 숙면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그냥 불침번을 설까 하는데요."
"그러지 말고 같이 자요. 어어어… 칼다시 내려놓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무짓도 안할 테니 당신도 수면을 하도록 해요. 그래야 다시 힘을 내서 일행과 합류하죠."
"하지만 그렇게 쉽게 잠들수가…"
"그러면… 내가 잠들기 전까지 은은한 발라드를 불러줄께요. 그 노래를 들으면 잠은 못들더라도 마음은 조금 릴랙스 될거라고 생각해요."
"뭐, 밖에서 들리지만 않을 정도라면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하세요."
잠시후 나는 왠지 모를 희열과 좌절을 동시에 맛봐야 했다. 모포를 두른 자세 덕분에 같이 옆으로 드리누운 나는 그녀가 머리를 배고 잘수 있도록 팔배개를 해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녀의 장담이 무색하게 내 품에서 완전히 골아떨어졌다. 뭐야 이거… 아무리 감미로운 발라드라도 그렇지, 내 노래를 듣고 잠들어버리다니… 음유시인으로서 좌절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의 끈을 놓고 내 팔을 배고 잠든 그녀를 애써 깨우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며시 그녀의 어께에 모포를 덮어주었다.
정신을 차려보자, 어느새 동굴의 저너머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보였다. 나는 어느새 내 품에서 사라진 그녀의 모습에 당황해서 일어섰다. 그러자, 동굴입구에서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 차렸어요? 세상 모르고 자더군요. 밖에 나가서 흩어진 군마와 떨어진 물자들을 좀 수거하고, 야생 열매와 사막 토끼를 좀 찾았어요. 다행히 어제 불로 지져버린 곳에는 수색이 집중되었는지 이곳 근처에는 사람들의 인적이 없더군요. 그래도, 아직 위험하니, 저녁까지 기다렸다, 이동하도록 하죠. 낮이니 모닥불을 피워도 상관없으니 불을 피워요. 난 토끼를 손질할 테니…"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나에게 옷가지를 집어던졌다. 그녀는 어느새 일어나 조금 커보이는 템플기사단의 여분 옷을 수선해서 맞춰입고 있었다. 가운데에 붉은십자가가 좀 어색하긴 했지만 하얀 옷을 입은 그녀는 왠지 모르게 청순해보였고, 오늘 아침 기분도 좋아보였다. 나는 아무리 봐도 종자는 커녕 하인의 옷으로 보이는 그녀가 던져준 옷을 입으며 식사를 준비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우리를 하룻동안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토끼와 야생 딸기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새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그녀가 밖을 한번 둘러보고 들어왔다.
"하아… 유감스럽군요. 구름이 잔뜩 낀 날이길 바랬는데, 달이 밝은 편이에요. 그래도 더 지체할 수는 없으니 이동하는게 좋을 것 같군요. 짐을 챙기고 말에 올라 출발할 준비를 하세요."
나는 왠지 모르게 적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면서도 이곳에서 보낸 하룻동안의 일에 대해 벌써부터 평생 잊을수 없는 추억이 될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금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언젠가 한번 그녀와 함께 이런 시간을 보낼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녀가 나를 재촉하자, 나는 밖으로 말을 몰아 나갔다.
그녀의 말처럼 달이 밝아 훤한 밤이었다. 한동안 계속된 샷텐야거의 사냥을 위한 시간은 어느새 끝난듯 보였다. 근데 왜 하필이면 우리가 몸을 숨겨야 할 시점인지… 나는 조금 눈물을 머금고 조심스럽게 별을 보고 방향을 잡는 그녀를 따라 광야를 달렸다. 한참을 달렸을 때,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느새 그녀에게도 익숙한 지형에 접어든듯 하였다.
"이제 저 좁은 암벽틈의 길을 지나면, 목동들이 쓰는 우물이 나올꺼예요. 거기서 물을 보충하고 잠시 쉬어가도록 하죠."
그리고 길이 끝나고 우물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기쁜 마음에 말에서 내려 근처의 나무에 말고삐를 묶고 우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다. 에스더가 멈춰섰다. 그리고… 나를 제지했다. 그 순간… 우물가의 나무그늘의 어둠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이런이런… 정말이지 뜻밖의 만남이군. 이런건 오늘밤의 예정에 없었는데 말이야…"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낯익은 목소리… 그리고 멈춰선 우리를 어디선가 나타난 십여명의 남자들이 퇴로를 막고 포위하듯이 둘러쌌다.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칼을 뽑아들었다. 그와 함께, 어둠속에서 그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첫댓글 기냥 보내줄려나요 죽음의 대탈주일까요?
알고보니 샤를 카페도 여자였다! 이렇게 되진 않겠지요?
안젤모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주인공과 비잔틴 여인은 살았으면 좋겠군요. ㅎㅎㅎ
최종보스가 눈앞에 있다니...
악마가 거래를 제안하겠습니다
설마 마지스트리아노스의 최후가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