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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 1. 제자들에게 - 마 23: 4. 어깨에 지우되
제 23 장 : 위선자들을 책망하심
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 23: 1-12. 막 12: 38-40. 눅 20: 45-47 )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 1. 제자들에게 -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전개될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셨다.
1] 이에
본장 초두에 언급된 '이에'(*,토테)는 마태복음에서 독특하게 사용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상관적 부사이다.
'이에'란 과거의 특정한 시점으로서의 '그 때'(then)를 의미하기도 하고, 단지 막연한 한 시점인 '그 때'(at that time)를 나타내기도 한다.
어떤 특정한 시점이 지난 '그 후', 또는 '그 다음', '그리고' 등의 뜻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문맥상 '그 다음', '그리고'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23장은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대화 장면을 다룬 22장에 바로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구절은 예수께서 누구를 상대로 하여 설교를 시작하는지 말해준다.
'무리'(*, 오클로이스)란 군중 이외에 민중, 백성, 평민, 서민(the common people)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특수 계층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및 헤롯 당원들과는 구분되는 일반 평민들의 군집(群集)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22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와의 대화에서 곤경에 처하여 더 이상 예수에게 질문을 하지 못했음을 미루어(22: 46) 볼 때, 바리새인들은 이미 예수를 떠나갔을 가능성이 많다.
마 23: 2. 모세의 자리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지도자들의 위치에 대한 충언을 살펴보자.
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질책하실 대상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다.
특히 '서기관들'은 구약 율법을 연구, 교육하는 일을 전담(專擔)했던 자들로(2: 4), 바리새인들은 독선적일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던 자들이었다.
* 마 2: 4 -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 바리새인들 중에서 서기관들이 배출되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선생'(teacher)과 같이 어떤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서 신학적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서기관이라는 말과 바리새인이라는 말이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바리새인으로서 서기관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지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질책(叱責)하신다기 보다는 하나의 왜곡된 신학적, 신앙적 입장을 비판했으며 또한 그것을 신봉(信奉)하고 전파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계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서기관들)은 율법에 남다른 열정과 열심 있는 연구를 통해 요한 힐카너스 시대(B. C.135-105) 이후, 150년 간 백성들에게 최고의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그들은 위선과 형식주의적(形式主義的)신앙 형태로써 이스라엘 종교 전반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2]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모세의 자리'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공식적인 율법 교사의 석재로 만든 자리로 모세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다.
* 신 34: 10-12 –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고 선포하고 전달하는 자이다.
당시 유대의 바리새인 또는 서기관들 중 가장 유력한 자가 회당에 마련된 이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해석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E. L. Sukenik).
예수께서도 이 관례에 준하여 가르치신 적이 있다.
* 눅 4: 20-22 -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사환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일반적 관념으로는 '어떤 사람의 자리에 앉는다.'라는 것은 보통 '어떤 사람의 권위를 계승(繼承)한다.'라는 의미로 이해됐다고 전한다. (Jos. Antiq. VII, 353, XVII,2).
* 왕상 1: 35, 46 – 35 그를 따라 올라오라. 그가 와서 내 왕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그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지명하였느니라. 46 또 솔로몬도 왕좌에 앉아 있고,
* 시 132: 12 -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율법 강론(講論)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았던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모든 권위를 전수받은 공식적인 모세의 법적 계승자들이라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권위의식을 통박(痛駁)하시면서 계속해서 언행(言行)이 불일치한 그들의 허구성을 고발하셨다. (3절 이하).
오늘날 목사도 그러하다. 비록 성경에 전적으로 의거해야 하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 선포자, 전달자의 자리에 있다.
마 23: 3. 행위는 본받지 말라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
1]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이 구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율법의 교훈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힐책(詰責)하신 것은 가르침과 행함이 일치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이율배반적(二率背反的)인 삶의 태도였을 뿐이다.
그들이 가르치는 율법 자체는 그들의 실행 여부와는 상관없이 참된 진리요 신앙인의 실천 강령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행하고 지키되'라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을 빌어 강력한 어조로 그들의 가르침을 준수하라고 명하셨다.
'행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사테'(*)는 상세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실행한다는 뜻이다.
'지키되'의 원어 '테레이테'(*)는 거의 몸에 배듯이 자연스럽고도 완벽하게 지킨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이 땅에 율법의 폐기자(廢棄者)가 아닌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인간이 마땅히 습관처럼 지켜야만 될 절대적인 진리임을 천명(闡明)하셨다.
참 진리는 어떤 구조적 모순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빛을 발하며 모든 인간의 삶을 인도하는 등불이 된다.
* 시 119: 105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2]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위선자들이었다.
위선자의 경건은 죽은 경건이다.
디도서 1: 16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라고 말하였다.
야고보서 2: 26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런 위선자의 말은 들을지언정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한다.
마 23: 4. 어깨에 지우되 -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
위선적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만 사람들의 어깨에 지운다.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법들에 근거했다고 주장되는 규칙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율법의 역할이 사람들로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여 그들로 절망과 좌절을 느끼게 하여 구주 예수께서 나오게 하는 것이지만, 종교가 외식에 떨어질 때 규칙들과 규례들만 많아질 것이다.
1]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3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바리새인들의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에 의한 위선적인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충하고 있다.
'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엄격성이나 막중한 의무(Alford)라 할 수 있다. 그보다는 바리새인들의 자의적 율법 해석에 따른 각종 규범과 전통적인 계율 및 아주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세분화된 규칙과 예법 등을 가리킨다.
그들은 율법의 생활 규범을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여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 적용토록 강요했다.
그들은 운반하기 곤란할 정도의 무거운 나뭇단이나 곡식 단처럼 성가시고 귀찮고 감당키 어려운 규칙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백성의 어깨에 지움으로써 이스라엘인들을 율법의 보지자(保持者)가 아닌 곡해된 율법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자기들의 의(義)에 도취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첫 번째 잘못이었다.
율법의 역할이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을 느끼며 구주께 나오게 하는 것이다.
* 롬 3: 19-20 –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롬 10: 9-10 –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종교가 생명을 잃어버릴 때 규칙과 규례만 무성해질 것이다.
2]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두 번째 잘못이다.
그들은 성가신 규칙들을 고의로 회피하거나 복종하기를 거절했던 것이 아니다. (Born-Kamm, Josef Schmid, Schweizer, Sand)
그들이 만든 힘겨운 규칙들에 눌려 쓰러져가는 자들을 위해 의무 규정을 가볍게 해주거나 실천할 수 있도록 그 짐들을 경감(輕減)시켜주는 등의 도움주기를 거절했다. (Manson, McNeile, Filson).
'손가락'이란 앞의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사람의 어깨'와 대조되는 말이다. 결국 '손가락으로 움직인다.'는 표현은 아주 사소한 도움이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자그마한 배려를 뜻한다.
그들은 율법이 근본 명하는 바 정의(義)와 긍휼(仁)과 믿음(信)에 관한 관심은 멀리한 채 오히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같은 미세한 규범을 크게 부각해 백성들의 어깨에 종교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짐을 부과하였다.
* 마 23: 23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행 15: 10 -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 갈 5: 1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들은 가르치고, 부과하고, 제한만을 일삼았을 뿐 그 짐을 대신 지거나, 나누어지거나, 가볍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 짐을 대신 지시고, 나누어지셨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 30) 말씀하시며 당신의 가르침에 동참하기를 요구하신다.
위선적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는 무거운 종교적 의무들을 부과해 놓고는 자신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그것들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위선이요 죽은 경건이다. 그러나 참 종교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라고 말하였다. (딤전 4: 12-13).
또 디도에게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명하였다. (딛 2: 6-8).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 (벧전 5: 3). 참된 경건은 모범 된 행위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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