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스 (외 1편)
이수명
이제 나는 혼자서 시간을 보낸다.
주머니에는 도시가스 사용 고지서가 들어 있다. 핸드폰은 무음모드
버스 정류장을 지나간다.
무를 나르는 사람을 본다.
그는 낮에 트럭에서 무를 내려 박스에 담았다가
밤에 박스에서 무를 내려 다시 트럭에 싣는다.
낮에 지나가는 트럭에게 무를 보이고
밤을 통과하는 박스에게 무를 보인다.
길은 낙엽으로 덮여 있다.
은행잎 단풍잎 벚나무잎 미루나무잎 떡갈나무잎을 밟고 지나간다.
썩을 때까지는 아직 며칠이 남아 있어서
가을잎들이 이곳저곳으로 뒹굴고 있다.
낙엽에 발을 빠뜨리지 않고 걸어간다.
오늘은 더 멀리 가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도시가스공사 고객센터가 저기 보인다.
그 앞에 멈춰 설 것이다.
잠깐 쉬는 것처럼 서 있다.
어제와 같은 장소에 몸이 놓이면 쉬는 흉내를 낼 수 있다.
가스공사 앞에서 생각한다. 둥글고 매끈한 무
한 다발씩 묶여 있던 무
이 구역에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좋은 날씨는 아니다.
바람이 나를 쓰러뜨린다.
어디서 불어온 바람인지 모르겠다.
무슨 바람인지도
겨울
그때 너와 나는 인사를 나누는 잘못을 한 것 같고 겨울이 오는 잘못을 한 것 같다.
겨울이 오면 우리는 잊었던 잘못을 한다.
거리에 서서 거리를 나란히 걸으면서 계속 똑같은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잘못을 좋아한다.
그러면 우리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너와 나는 조금 미친 것 같은 말을 햇살이 비친다는 말을 한 것 같다.
해가 짧아지는 충동적인 나무 옆에
처음으로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를 둘러싼 이 짙은 안개가 물러날 것이다. 그때 너와 나는 여기저기 생겨나는 안개처럼 보일 것이다.
다가오는 것인지 멀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건물들이 터무니없이
안개 속에 너무 깊게 박혀 있는 듯 보일 것이다
⸺계간 《청색종이》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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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 / 1965년 서울 출생. 1994년 《작가세계》에 시로 등단. 2001년 《시와반시》에 평론 등단.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붉은 담장의 커브』『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마치』 『물류창고』 등. 시론집 『횡단』. 비평집 『공습의 시대』『표면의 시학』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