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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엔 외국어, 청각장애인엔 수어 통역서비스가 당연한 거 아닌가요?”
몸이 아프면 병원을 방문해 의사에게 직접 아픈 부위를 설명하고 진료를 받게 되는데요.
이 간단한 절차가 청각장애를 가진 분들에게는 큰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게 바로 '수어(手語)'입니다.
*수어는 청각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수화언어(手話言語)의 줄임말입니다.
국내 상급종합병원 유일한 의료수어통역사로 근무중인 김선영 씨는
청각장애인 환자와 의료진의 명확한 의사소통을 담당하고, 병원 이용 전반을 돕고 있습니다.
위클리 공감은 지난 1월 8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을 찾아 그의 하루를 동행해 보았습니다.
“(의료수어통역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니에요. 부산성모병원에 두 분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다만 상급종합병원 중에는 제가 유일해서 의미와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선영 씨는 세브란스병원의 의료수어통역사로 청각장애인 환자와 의료진의 소통을 돕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병원의 외래 진료 시간에 맞춰 평일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시 50분까지 근무합니다.
대형 병원의 특성상 주로 예약제로 진료가 이뤄져서 스케줄 조율에 문제는 없지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응급상황,
환자들의 개인 면담 등 청각장애 환자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에 동행해야 하는 임무가 있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직업입니다.
“눈과 손으로 이야기하는 청각장애인들은 영상전화가 가장 편해요.
진료 이외에 병원 이용과 같은 대화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전용 영상전화기인 ‘씨토크’로 나눕니다.
카카오톡이나 문자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기도 하고요. 환자들의 성향이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채널을 이용합니다.”
가운 주머니에 있는 전용 태블릿 전화기를 꺼내 업무 프로세스를 설명하고 있는데 영상전화가 걸려왔습니다.
20분 후 진료 예약이 된 환자였습니다.
주사를 맞았는지 한쪽 팔을 걷어붙이고 솜을 누르고 있는 그는 나머지 한 손을 바삐 움직였습니다.
두 사람의 영상통화가 이어졌습니다.
“당뇨 정기검진을 받으러 온 환자예요. 당 수치가 높아서 피 검사를 먼저 했대요.
추가 검사를 해야 하는 것 같은데, 제가 가서 상황을 보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환자와의 영상통화가 이어졌습니다.
한 손으로는 태블릿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바삐 대화를 나누면서 걸었습니다.
내분비내과 차봉수 교수 진료실 앞에서 박노규 씨가 김 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화기를 들고 당황하던 얼굴이 김 씨를 보고는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김 씨가 담당 간호사에게 상황을 듣고 내용을 전달해줬고, 박 씨는 안심이 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차분하게 진료를 기다렸습니다.
김 씨를 통해 간단하게 대화를 나눠보았더니 박 씨는 수화통역서비스를 받는 것이 편해서 이 병원을 찾는다고 합니다.
사진=의료수어통역사는 진료 내용 뿐 아니라 병원 이용 전반에 대한 내용을 환자와 공유한다.│C영상미디어
“당뇨로 병원에 다닌 지는 8년 정도예요. 통역사가 없을 때는 소통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5~6년 전부터는 전문 의료수어통역사가 있어서 큰 도움이 됩니다.
필담을 할 때는 소통이 어려웠는데, 지금은 옆에서 바로 도와주니 이해가 쉬워서 편해요.”
도움이 필요할 때는 수화통역센터를 통해 자원봉사 신청을 받기도 하지만
그 과정이 번거로워서 적재적소에서 전문화된 통역사가 해주는 역할에 비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박 씨의 의견입니다.
잠시 후 박 씨의 진료가 진행된 내분비내과 외래 진료실.
담당의인 차봉수 교수가 “어때요? 체중 변화는 없네요” 하고 말을 건네니, 김 씨가 손짓말을 시작했습니다.
환자 박 씨가 손짓말로 화답하고, 김 씨가 의사에게 “요즘 식사를 잘 못하는 편입니다. 도통 잠을 잘 못 자요”라고 말합니다.
템포가 끊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고 재빠르게 소통이 이어졌습니다.
“혈당 수치가 높아져서 피 검사 결과를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은데, 오늘 검사를 못했으니 다음에 일정을 다시 잡아야겠네요”
라는 의사의 말을 전하자 박 씨가 내용을 다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진료실을 나온 두 사람은 검사 날짜를 조율했고, 박 씨는 병원을 나섰습니다. 이렇게 김 씨의 일정 하나가 끝이 났습니다.
사진=의사의 진료 내용을 환자에게 수어로 전달하는 것이 김선영 씨의 임무다. l C영상미디어
의료수어라고 해서 일반 수어와 다른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의료 지식과 병원 이용 전반에 대한 정보는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작년 3월부터 근무를 시작해 10개월 차에 접어든 김 씨는 직접 부딪혀보니
가장 중요한 것은 농인에 대한 인식과 소통하려는 노력인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청각장애인들이 통역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문자를 하면 되지, 카카오톡으로 하면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고요.
청각장애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그들 스스로도 손해를 감수하는 삶이 몸에 밴 것 같아요.
텍스트 문화에도 익숙하지 못한 분들도 많거든요.”
단순한 소통의 부족이 병원에서는 환자의 건강이나 생명과 직결되는 만큼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필담으로 진료를 하던 병원에서 소화제를 줘서 먹었는데 몸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검사를 받아보니 심장질환이 발견된 청각장애인 환자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오진이 아니라 소통이 제대로 안 된 상황인 거죠. 검사 중에 긴장을 풀기 위해 환자들에게 ‘아~’ 하고 소리를 내보라고 해요.
소리가 긴장을 이완시켜주는 기능이 있잖아요. 그런데 청각장애인들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통역을 했던 한 환자는 소리를 내는 게 뭔지 모르더라고요.”
사진= 수어는 눈과 손으 로 나누는 언어다. l C영상미디어
김 씨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조금만 더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인식을 품고 많은 부분에서 포기를 해버린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는
국민의 관심만 있어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브란스병원에 수어통역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는 분들이 많아요.
순천, 울산 등 전국에서도 많이 오고요.
그분들을 뵈면 전국 광역시 단위로 접근성이 좋은 곳에 한 명씩이라도 통역사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요.
일단 병원에 오면 하루 시간을 통째로 다 써야 하거든요. 실제로 소통만 제대로 돼도 덜 고생스러운 경우가 많아요.”
미대를 졸업한 김선영 씨는 미술교사였다고 합니다. 10년 정도 교사 생활을 하다가 수어교육원에 등록했고 직업인으로서의 삶이 지루해질 즈음 손으로 그리는 대화인 수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사진= 김선영 씨가 수어로 ‘사랑합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C영상미디어
“처음 배우는데 참 재미있었어요. 수어가 굉장히 신선한 언어예요.
시각 언어이다 보니,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무심코 했던 행동을 손짓말로 뽑아서 하는데,
‘아!’ 하고 무릎을 치는 경우가 많아요.
청각장애인들의 대화를 보면, ‘어떻게 저렇게 표현을 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때가 있어요.
굉장히 창의적인 언어예요.”
시간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피우던 담배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날씨가 너무 춥다는 것을 콧물이 얼음처럼 언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나도 저렇게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고 합니다.
“제가 미술 전공자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미술과 수어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림도 기본적으로 안목이 있어야 하잖아요.
안목을 키우는 기간이 필요하고, 모방이 필요하고, 어느 정도 내가 소화가 되면 내 방식대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죠.
내 방식대로 표현하는, 완성도를 높이는 기간까지 작가들이 고민하고 연습하는 것처럼 수화도 그런 과정이 필요해요. 그
런 과정이 비슷해서 개인적으로 그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뒤늦게 시작한 새로운 일에 김 씨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합니다.
경력도 짧고, 수화 실력이 뛰어난 편도 아니지만
하나씩 소통의 마음이 전해져서 사람들이
농인이 가진 근본적인 불편함을 해소하는 데
관심을 좀 더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전했습니다.
사진= 상급종합병원 유일 의료수어통역사 김선영 씨 C영상미디어
“저는 청각장애인을 도와주는 대상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하는 일을 ‘봉사’나 ‘나눔’이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도 반대입니다.
수어통역사는 외국어처럼 전문 영역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농인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언어 지원을 받는 것이죠.
외국인들이 오면 외국어 서비스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장애인들도 같은 프레임 아닐까요?
청각장애인들과의 소통도 그런 차원으로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계기로 의료수어통역이라는 전문 영역이 조금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더 많은 환자들이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본인의 임무를 다하겠다는 것이
김 통역사의 최종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