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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집(耳溪集)의 조선 땅, 반도(半島) 땅이 아닐세. 이를 어쩌나! [제1편]
2,026년 08월 22일
○ ‘18’세기(世紀) ∼ ‘19’세기(世紀)를 살다 가신 조선인(朝鮮人)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 1,724~1,802】」의 문집(文集)인 “이계집(耳溪集)”을 보면 : 이 분이 몸을 담고 있던 당시(當時)의 조정(朝廷)은, 조선왕조(朝鮮王朝)였음을 확실(確實)한 것인데, 그 조정(朝廷)은, 어디에 자리 잡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問題)는 전혀 다른 문제(問題)로 다가온다.
➥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 1,724~1,802】」는, 「판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는, 18세기의 대표적인 경세가이자 실학적 사유를 지닌 개명적 지식인이다. 더욱이 평생 관료의 길을 걸었다」라고 ‘한국고전번역원 DB의 해제(解題)’에서 “모”교수(敎授)는 말하고 있다.
《“출처(出處) : 한국고전번역원 DB” : “이계(耳溪)”는, 1724년(경종4) 4월 26일 서울 훈도방(薰陶坊)의 진고개〔泥峴, 지금의 충무로 2가〕에서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된 홍진보(洪鎭輔, 1698~1736)와 청송 심씨(淸松沈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초명은 양한(良漢)이다. 중년 이후 양호로 개명하였으며, 만년에 서울의 우이동(牛耳洞)에서 생활하였으므로 이계(耳溪)를 호로 삼았다.
‘이계(耳溪)’의 집안은 ‘소론계’로, 6대조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이 사헌부 대사헌으로 덕망이 높았고, 5대조 홍영(洪霙, 1584~1645)은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4대조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은 선조의 장녀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혼인하여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다. 증조 홍만회(洪萬恢, 1643~1709)는 장례원 판결사를, 조부 홍중성(洪重聖, 1668~1735)은 단양 군수(丹陽郡守)를 지냈다. 특히 홍중성은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다. 김창흡(金昌翁, 1653~1722)으로부터 시를 배웠고, 최창대(崔昌大, 1669~1720), 홍세태(洪世泰, 1653~1725), 조유수(趙裕壽, 1663~1741), 이병연(李秉淵, 1671~1751) 등과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교류할 만큼 시인으로서도 명망을 얻었다. 하지만 이계의 부친인 홍진보(洪鎭輔, 1698~1736)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이계의 나이 13세였다. 이계가 어린 시절 충청도 내포(內浦)로 내려가 살았던 것과 외가에서 수학한 것도 유년 시절에 맞이한 부친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반면, 이계(耳溪)의 외조부는 소론의 핵심인물로 영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심수현(沈壽賢, 1663~1736)이다. 이계(耳溪)의 집안은 당대 소론가의 유력 가문과 혼인할 만큼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이계의 어린 시절은 유복하지 못하였다. 10세가 되던 해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자랐다. 이때부터 외삼촌인 저촌(樗村) 심육(沈錥, 1685~1753)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이계(耳溪)는 1739년(영조15) 16세 때 동래 정씨(東萊鄭氏) 정석구(鄭錫耈, 1696~1755)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무렵 생계를 위해서 ‘계비(繼妃)’【繼妣 : 파평 윤씨 윤두천(尹斗天)의 딸, 계모(繼母)다. 그러니 홍명호【洪明浩, 1,736(英祖, 12) ~ 1,819(純祖, 19】가 태어나니 홍양호【洪良浩 : 1,724~1,802】의 동생이 되는 것이다.】와 부인을 거느리고 충청도 덕산(德山)의 전장으로 낙향하였다. 이곳에서 몇 년간 살다가 문과에 급제한 이후에 부인과 계비와 함께 다시 서울 진고개의 옛집으로 돌아온다. 중략(中略). “출처(出處) : 한국고전번역원 DB”》
【여담(餘談) : “홍양호(洪良浩)의 부친(父親)인 홍진보(洪鎭輔, 1698~1736)는 1,736년에 죽었다고 전해지며, 홍양호(洪良浩)의 동생인 홍명호(洪明浩 : 判義禁府事)는, 아버지가 죽던 해인 1,736년에 계모(繼母)에게서 태어났다”라고 전해진다.】
➥ 이렇게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 「분명(分明) 반도조선(半島朝鮮)의 조선왕조(朝鮮王朝)에 살고 있었던 조선인(朝鮮人)이었음을 확인(確認)할 수 있다.」 위의 설명(說明)은 : “20세기(世紀)∼21세기(世紀)의 인물(人物) 평가(評價)일 뿐이다.”라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고 살펴보아야 오류(誤謬)를 잡아낼 수 있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조선(朝鮮) 조정(朝廷)에 몸을 담고, 군주(君主)로부터 관작(官爵)을 수여(授與) 받고, 임지(任地)의 강토(疆土)를 다스렸다”라고 말하면서, 임지(任地)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설명(說明)하고 있음에 비춰보면 : 백번(百番) 죽었다 깨어나도 ‘조선(朝鮮)의 강토(疆土)’는 반도(半島)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홍양호(洪良浩)가 말하고 있는 조선(朝鮮)의 땅은, 「반도(半島) 조선(朝鮮)의 땅이 아닌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조선(朝鮮) 땅을 말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➊ 「‘AD 1,910’年 이전(以前)의 조선사(朝鮮史)는 :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전개(展開)되었다.」라는 것이고,
➋ 「‘AD 1,910’年 이후(以後)의 조선사(朝鮮史)는 : 조선반도(朝鮮半島)에서 전개(展開)되었다.」라는 것으로 “정리(整理)되었다.”하는 것으로 파악(把握)이 된다.
물리적(物理的)인 힘이 가해졌던, 아니었던 그렇게 전개(展開)되었다는 것은, 문집(文集)의 내용(內容)이 말해주고 있는바,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릴 일조차 없을 정도(程度)이다.
어떤 것이, 무엇이, 중원대륙(中原大陸)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하나하나 요약(要約), 정리(政理)해 보기로 하자.
○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 1,724~1,802】」 : 「오늘날 이계집(耳溪集)과 관련(關聯)하여 여러 이본(異本)이 존재(存在)한다.」라고 전(傳)해지는데, 이 명확(明確)한 이유(理由)는 알 수 없다?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DB]》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어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계(耳溪)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양호(洪良浩)【洪良浩 : 1,724~1,802】」는 : 영조(英祖)【1,724∼1,776】, 정조(正祖)【1,776∼1,800】, 순조(純祖)【1,800∼1,834】의 ‘3’대를 거친 인물(人物)인데… … ‘이 분’의 문집(文集) “이계집(耳溪集)”을 보면 : 정말 놀라운 기록(記錄)이 많다.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놀라운 기록(記錄)이 또 있을까! 몇 편(篇)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가능(可能)하면 요약(要約), 편집(編輯)하여 게재(揭載)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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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世紀), 조선(朝鮮)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主人公
(01) 이계집(耳溪集) 3권 시(詩) / 용만록(龍灣錄) : [癸未秋, 薦拜義州府尹 : 계미(癸未) 가을(1,763年) : 추천(推薦)받아 의주(義州) 부윤(府尹)에 임명(任命)되었다.]
• 離灣府 二首〔만부(灣府)를 떠나며 2수〕 : 《西來缺月未重弦, 行色飄然拂一鞭 : 서쪽으로 올 때 삭월(朔月)이 하현(下弦)도 안 됐는데, 가벼운 차림새로 채찍 하나 들고 떠나네. 十日龍灣何事業, 統軍亭上筆如椽 : 열흘 동안 용만(龍彎)에서 무슨 일을 했으랴. 통군정(統軍亭) 위에다가 글 한 편 남겼네. 중략(中略)》
➥ 「서래(西來) : 서(西)쪽으로 오다」라는 뜻이다. 반도(半島) 땅의 의주(義州) 곧 용만(龍彎)은, 도성(都城) 한양(漢陽)에서 북(北)쪽이지, 서(西)쪽은 결코 될 수 없는 방위(方位)다. 정확(正確)하게 말하면 서북(西北)쪽으로, 서(西)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리(無理)한 것이다.
‘용만(龍彎)=의주(義州)’에 대해 조선왕조(朝鮮王朝) 때의 다양(多樣)한 형태(形態)의 기록(記錄)에서 “서(西)쪽에 있다”라고 말한다. 오죽하면 임란(壬亂) 때 선조(宣祖)의 파천(播遷)도 ‘서(西)쪽’이라고 했을까!
여기에 “통군정(統軍亭)”이 언급(言及)되고 있는데 : 일제(日帝) 때에 찍힌 사진(寫眞)을 보면 : 직사각형(直四角形)의 모습에 이곳저곳에 있었던 누각(樓閣)과 별 차이(差異)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조선왕조(朝鮮王朝) 사대부(士大夫)들이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술 한 잔을 마시며, 읊은 시(詩), 또는 설명(說明)에 의하면 : 「통군정(統軍亭)의 지붕은 우산(雨傘)과 같은 원형(圓形) 형태(形態)의 독특(獨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런 사대부(士大夫)들의 설명(說明)과 비교(比較)하면 : 「반도(半島) 용만(龍彎)의 통군정(統軍亭)은, 특이(特異)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누각(樓閣)으로 짝퉁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當時)의, 「용만(龍彎)은, 조선(朝鮮) 강토(疆土) 서(西)쪽에 있었다」라는 것이고, 오늘날의 ‘반도(半島) 북(北)쪽 땅의 압록강(鴨綠江) 하류(下流) 남안(南岸)’에 있는 ‘용만(龍彎=義州)’은, “짝퉁”이라는 것을 확인(確認)시켜주고 있다.
즉(卽)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한반도(韓半島)에 없었다.”라는 뜻이다. 많은 역사서(歷史書)와 사대부(士大夫)들의 문집(文集) 속에서 이를 말해주고 있는데, 오늘은 난중잡록(亂中雜錄) 기록(記錄)을 예(例)로 들어보기로 하겠다. 【난중잡록(亂中雜錄)[山西 趙慶男]】
➊《庶 幾 梟 侵 鎬 之 兇. 慰 踰 梁 之 窘 : 서울[호경:鎬京]에 침범한 적을 무찔러 서(西)쪽으로 파천하신[踰梁] 군색함을 위로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랐다》라고 하였으며,
➋《初 三 日 賊 入 長 安 城 中. : 초 3일 도적(賊)이 장안성(長安城) 안으로 들어오다.》라고 하였으며,
➌《漆浦萬戶文貫道.聞大駕西巡.西向再拜.痛哭良久.兩南義之.出慶尙巡營錄 : 칠포만호(漆浦萬戶) 문관도(文貫道)는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서(西)쪽을 향해 재배하고 퍽 오랫동안 통곡하였는데, 호남과 영남에서는 그를 의리 있다고 여기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➍《車駕發松都.向海西,中略.痛矣哉.哀我小中華.介於東夷北狄之間.變亂之作何代無之.然而淪陷之慘.播遷之辱.豈有至於此極哉. : 거가가 송도(松都)를 떠나 해서(海西)를 향하였는데, 중략(中略). 비통하다. 우리 소중화(小中華)는 동이(東夷)와 북적(北狄) 사이에 끼어 있으니, 변란의 반발이 어느 대엔들 없었으랴. 그러나 함락의 비참과 파천의 치욕이 어찌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겠는가. 애석하다.》하였다.
➥ 결국(結局),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은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을 증거(證據)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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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이계집(耳溪集) 5권 시(詩) / 삭방풍요(朔方風謠) : 丁酉冬 黜補慶興府使 :정유년(丁酉年) 겨울【1,777, 正祖 1】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임(補任)됐을 때이다.
함관 평정〔咸關平〕[함흥부(咸興府)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큰 고개가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험준함은 철령(鐵嶺)에 버금간다. 태조(太祖)가 이곳에서 나하추(納哈出)를 대파하였다.]
《咸關平, 朔方淸 : 함관이 평정되자, 삭방이 맑아졌네. 納哈出猖狂, 侵凌北諸城 ; 납합출(나하추) 미쳐 날뛰어, 북방의 여러 성(城)을 침략했지. 중략(中略). 都連浦外無東漁, 韃靼城下始春耕 : 도련포 밖에는 동(東)쪽에서 고기 잡는 이 없고, 달단성(韃靼城) 밑에선 비로소 봄갈이 들어갔다네.》라고 하였는데,
• [주-D011] 달단성(韃靼城) : 함경도 홍원(洪原) 남쪽 30리 지점의 달단동(韃靼洞)을 가리킨다. 이성계가 함관을 넘어 이곳에 도착하여 나하추와 싸워 크게 이겼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8 咸鏡道 洪原縣》
➥ 이런 유형(類型)의 설명(說明)이 바로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의 대표적(代表的)인 설명(說明)이다.
「‘달단성(韃靼城)’이라면 : 이곳 땅이 ‘달단(韃靼) 거점(據點)이었다’라는 뜻과 같다.」 그러나 달단(韃靼) 종족(種族)은, 서방(西方) 종족(種族)으로 이들이 극동(極東)으로 이동(移動)했다는 근거(根據)나 논거(論據)는 없다.
「달단(韃靼)」은, 옛 몽고족(蒙古族)의 일파(一派)로, 이들은 색목종족(色目種族)이란 점을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은 간과(看過)하고 있다. 색목종족(色目種族)이 반도(半島) 함경도(咸鏡道) 땅에 거점(據點)을 두고 있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것이다. 오늘날의 ‘달단(韃靼)’ 설명(說明)을 보자.
韃靼人,中國及歐洲古代對歐亞草原游牧民族的統稱,源於蒙古語族群塔塔爾部的族稱
塔塔兒部,又稱塔塔爾部、韃靼部,公元12世紀時蒙古高原上的部落之一
黑韃靼,又稱生韃靼,宋、遼、金時代對漠北的蒙古諸部的稱呼
汪古部,又稱白韃靼或熟韃靼
韃靼斯坦共和國,俄羅斯聯邦的自治共和國
伏爾加韃靼人,俄羅斯人口最多的少數民族
韃靼語,一門突厥語系語言
塔塔爾族,當代中國的少數民族之一,伏爾加韃靼人後裔
克里米亞韃靼人,一突厥語族群
克里米亞韃靼語,一門突厥語系語言
西伯利亞韃靼人,一突厥語族群
西伯利亞韃靼語,一門突厥語系語言
楚利姆韃靼人,一突厥語族群
이렇게 ‘여러 달단 부족(韃靼 部族)이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事實)은 의외(意外)로 간단(簡單)하다. 즉(卽), 《옛 몽고족(蒙古族)의 일파(一派)로, 구라파(歐羅巴)와 아세아(亞細亞) 초원(草原)에 살던 색목인(色目人) 집단(集團)을 말하며, 막북(漠北), 아라사(鵝羅斯 : 러시아), 달단 공화국(韃靼 共和國 : 우랄산맥 西쪽), 서(西)시베리아 분지(盆地)에 살던 돌궐어(突厥語)를 쓰던 부족(部族) 등을 통틀어 “달단(韃靼)”이라고 했다》라는 것이다.
반도(半島) 땅과는 “십 원 한 장”의 관계(關係)도 없다. 조선사(朝鮮史)는 이렇게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어, 우리 곁에서 뻔뻔하게 숨 쉬고 있다.
➥ 위의 본문(本文)에서 말하는 함경도(咸鏡道) 홍원현(洪原縣)의 달단성(韃靼城)은, “1 만리(萬里)” 서(西)쪽의 막북지대(漠北地帶)로 옮겨놓아야 하며, 이곳에서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가 납합출(納哈出)을 격파(擊破)했다고 하면 : 무리(無理)가 없는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이 될 것이다. 21세기(世紀) 조선사(朝鮮史)는 웃긴 코미디와 같다. 아래를 보자.
《➊ 납합출(納哈出)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納哈出(蒙古語:ᠨᠠᠭᠠᠴᠦ,鮑培轉寫:Naγaču;?—1388年8月31日),元末明初大臣,官至太尉,屬蒙古札剌亦兒氏。為成吉思汗四傑之一木華黎裔孫,乃蠻台之孫,埜仙普化之子。➤ 「元朝滅亡後,納哈出駐兵開元 ➤ ‘金山’,計有二十萬之眾」,繼續抵抗明朝,與脫古思帖木兒呼應。有史料稱其為開元王。天元九年(1387年),➤ 明將馮勝進逼 ➤ ‘金山’,納哈出無力抵抗,於是投降。降後,封海西侯。次年,隨傅友德征雲南,途中病亡。後人獲罪,流寓閩南泉州,一般認為泉州的出姓即源於納哈出.》
《➋ 납합출(納哈出)의 부(父) / 埜仙普化 : 埜仙普化(?—?),譯名又作也先不花、野仙溥化,蒙古札剌兒氏,埜仙普化是木華黎六世孫、孛魯的玄孫、阿里乞失的曾孫,忽速忽爾的孫子,乃蠻台的兒子。元朝末年大臣,元順帝時中書平章政事。其子納哈出。》
➥ 「납합출(納哈出)은 원(元)이 망(亡)한 뒤(後)에, 금산(金山)에 20여만(餘萬) 무리의 병사(兵士)들을 주둔(駐屯)시키고 나라를 열었는데, 명(明)나라 장수(長帥) 풍승(馮勝)이 “금산(金山)”에 진격(進擊), 핍박(逼迫)하자 저항(抵抗)없이 투항(投降)하니, 해서후(海西侯)에 봉(封)해진 인물(人物)이다.」 여기서 “금산(金山)”을 보자.
《➌ 동사강목(東史綱目) : 제4상 / 〔戊辰, 新羅文武王八年。高句麗王臧二十七年。: 무진(戊辰) 신라 문무왕 8년, 고구려 왕 장 27년〕 : 是歲。高句麗亡。 : 이해에 고구려(高句驪)가 망하였다【唐高宗, 總章 元年, AD 668】 春正月。唐復遣李勣等。伐高句麗。使金仁問。徵兵新羅。二月。李勣拔扶餘城。破其救兵於薛賀水。: 춘정월. 당(唐)이 다시 이적(李勣) 등을 보내 고구려(高句驪)를 치게 하고 김인문(金仁問)을 시켜 신라(新羅)군을 징발(徵發)하게 하였다. 2월에 이적(李勣)이 부여성(扶餘城)을 함락(陷落)시키고 그들의 구원병(救援兵)을 “설하수(薛賀水)”에서 격파(擊破)하였다.
☛ 「설하수(薛賀水)」 : 어디에 있는 하천(河川)인지 ‘누구도 모른다’라고 한다. “단군조선(檀君朝鮮) 이래(以來), 5000년(年)을 이어오면서 그 땅에 있는 하천(河川)의 이름조차도 모른다”라는 말은, 「조선족(朝鮮族)이나 조선왕조(朝鮮王朝 : 總稱)는 없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이래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薛仁貴旣破高麗軍於 ➤ 金山。乘勝將三千人。將破扶餘城。諸將以其兵少止之。: 설인귀(薛仁貴)는 고구려(高句驪)의 군사를 ➤“금산(金山)”에서 격파하고, 승세(勝勢)를 이용하여 3천 인을 거느리고 부여성(扶餘城)을 격파하려 하자, 여러 장수들이 군사 적은 것을 가지고 말리니, 仁貴曰兵不在多。顧用之何如耳。遂爲前鋒以進。與高句麗戰。大破之。殺獲萬餘人。中略. : 설인귀(薛仁貴)가 말하기를, “군사는 많다고 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하고, 드디어 전봉(前鋒)이 되어 나아가서 고구려와 싸워, 크게 격파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1만여 인이었다. 중략(中略)》
《➍ 資治通鑑 唐紀 / 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中之上乾封二年(丁卯,公元六六七年): 辛未,李勣拔高麗之新城,使契苾何力守之。勣初度遼,謂諸將曰:「新城,高麗西邊要害,不先得之,餘城未易取也。」遂攻之,城人師夫仇等縛城主開門降。勣引兵 進擊,一十六城皆下之。龐同善、高侃尚在新城,泉男建遣兵襲其營,左武衛將軍薛仁貴擊破之。‘侃’進至 ➤ 金山,與高麗戰,不利,高麗乘勝逐北,仁貴引兵橫擊之,大破高麗,斬首五萬餘級,拔南蘇、木底、蒼巖三城,與泉男生軍合。》
《➎ 資治通鑑 唐紀 / 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中之上總章元年(戊辰,公元六六八年) : 春,正月,壬下,以右相劉仁軌為遼東道副大總管。 二月,壬午,李勣等拔高麗扶餘城。薛仁貴既破高麗於 ➤ 金山,乘勝將三千人將攻扶餘城,諸將以其兵少,止之。仁貴曰:「兵不必多,顧用之何如耳。」遂為前鋒以進, 與高麗戰,大破之,殺獲萬餘人,遂拔扶餘城。》
《➏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寶藏王 二十六年 : 秋九月, 龐同善․高侃尙在新城, 泉男建遣兵襲其營, 左武衛將軍薛仁貴, 擊破之. 侃進至 ➤ 金山, 與我軍戰敗. 이때 방 동선과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으므로, 천남건이 군사를 보내 그들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좌무위 장군 설인귀가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고간(高侃)이 금산(金山)으로 나와서 우리 군사와 싸워 패배하였다. 【高侃 : 당(唐) 고간(高侃)을 말한다.】
☛ 위의 글 “➊+➌+➍+➎+➏”에 등장(登場)하고 있는 ➤「금산(金山)」은 :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금산(金山)”이라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니 일방적(一方的)인 ‘21세기(世紀) 이야기’일 뿐이다.
● ☛「금산(金山)」 : 역사서(歷史書)에 등장(登場)하는 “금산(金山)”은, 아무 곳에 나 널려 있는 평범(平凡)한 야산(野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금산(金山)」은, 말 그대로 몽고어(蒙古語)로 “금산(金山)”이다. 「알타이(Altai) 산(山)=아이태산(阿爾泰山)【別盧哈山 : 4,506m • 友誼峰 4,374m • 奎屯峰 4,082m = 蒙古語 : 金山】=벨루하산[Belukha Mt]」을 칭(稱)하는 것이다. 「일반적(一般的)으로 ‘별노합산(別盧哈山)과 우의봉(友誼峰)’의 두 봉우리를 ‘금산(金山)’이라고 칭(稱)한다.」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阿爾泰山,➤ 古稱「金山」,蒙古和中國新疆交界處的一座山脈》에서도 확인(確認)되고 있다.】
이곳에 있는 “금산(金山)”【알타이(Altai, 山)=아이태산(阿爾泰山)=벨루하산(Belukha Mt)】을 “일만(一萬) 리(里) 동(東)쪽의 무주공산(無主空山)”에 이동(移動)시켜 놓고, 조선사(朝鮮史)를 해설(解說)하면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일부(一部) 땅에 처박히게 되는 것이고, 지금(只今), 그 시나리오대로 100% 실현(實現)되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역사무대(歷史舞臺)는 요녕성(遼寧省)과 반도(半島) 땅으로, 옮겨지고, 50배(倍)쯤 축소(縮小)되어, 약소국(弱小國)의 비애(悲哀)를 처절(悽絶)하게 느끼며 겪는 땅이 되어버렸다.”」 이건 팩트(Fact)다.
《資治通鑑. 唐紀 : 則天順聖皇後上之下垂拱四年.戊子,公元六八八年): 春官侍郎賈大隱奏:「禮,天子七廟,諸侯五廟,百王不易之義。: 춘관시랑(春官侍郞) 보대은(賈大隱)이 아뢰기를 : 「예(禮)는, 천자(天子)는 칠묘(七廟)를 모시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모시는 것은 역대(歷代)로부터 고칠 수 없는(변함이 없는) 의(義)입니다」하였다.」》라고 기록(記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 「조선사(朝鮮史)」에서는 : 亂中雜錄 / 壬辰年 下 [宣祖 25年-1,592(萬曆 20年) : 《敎諸道義兵書 : 각 도의 의병에게 내린 글은 다음과 같다. 皇天不造我家.島夷逞蜂蠆之毒.列郡賴有義士.王師奮貔貅之威.玆播一言.誕告有衆. :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지 않아, 섬 오랑캐가 방자히 만행을 부리고 있는데, 각 고을에서 의사(義士)들이 있는 덕분으로, 왕사(王師)가 위엄을 떨치고 있으니, 이에 한마디 말로, 여러 사람에게 고하노라. 言念小醜之匪茹.粤自孟夏而來侵.閫帥藩臣.蓋有坐而視之.鎭將邑宰.率多委而去之. : 생각건대, 분수도 모르는 오랑캐들이 초여름에 쳐들어오자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감사(監司)들은 대개 앉아서 보고만 있었고, 진장(鎭將)과 수령들은 거의 버리고 도망한 자가 많았다. 舊都之鷄犬無遺.忍見萬姓塗炭.故國之鍾簴不守.奈此七廟丘墟.鑾輿遠狩於一隅.賊鋒遍及於八路.龍灣何故.垂閱三旬. : 구도(舊都)에 개도 닭도 남은 것이 없으니, 뭇 백성들의 도탄을 어찌 차마 보며, 나라에 예악(禮樂)을 지키지 못했으니, ➤ 칠묘(七廟)가 폐허됨을 어이하랴. 대가(大駕)가 멀리 한구석으로 행차하시고, 적의 칼날이 8로(路)에 두루 미쳤네. 용만(龍灣)에 파천(播遷)하심 어인 일인가. 벌써 한 달이 되었구나》라고 하였으니… …,
➥ 「奈 此 七 廟 丘 墟 : 칠묘(七廟)가 폐허(廢墟)되었음을 어이하랴」라고 조선(朝鮮)의 세자(世子)였던 “동궁(東宮)”은 개탄(慨歎)하고 있다. 『칠묘(七廟)』란 말이 왜 중요(重要)한 것일까?
『예기(禮記) 왕제(王制)』 :《天 子 七 廟. 諸 侯 五 廟. 大 夫 三 廟. 士 一 廟 : 천자(天子)는 7 묘를 모시고, 제후(諸侯)는 5 묘를, 대부(大夫)는 3 묘를, 사대부(士大夫)는 1 묘를 모신다.》라는 뜻이니, 「“칠묘(七廟)”란 뜻은 곧 ‘천자국(天子國)=황제국(皇帝國)’」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칠묘(七廟)를 모실 수 있는 자(者)는, 천하(天下)의 천자(天子) 한 사람뿐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천자국(天子國)으로 칠묘(七廟)’를 모신 것은 당연(當然)한 이치(理致)일 것이다. 이를 증거(證據)하는 ‘문헌적(文獻的)=서지적(書誌的)’ 고증(考證)은, 이미 끝났다.
➥ 곧,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을 여러 문헌(文獻)이 이를 증거(證據)하고 있다. 문제(問題)는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 자세(姿勢)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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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이계집(耳溪集) 5권 詩 / 朔方風謠 : 丁酉年【AD 1,777, 正祖 1】: 丁酉冬 黜補慶興府使 : 정유(丁酉) 겨울,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임(補任)되었을 때이다.
• 마천령〔磨天嶺〕/ 《在磨雲之北。橫截端川,吉州之間。舊號伊坡嶺。: 마운령(磨雲嶺) : 북쪽에 있으며, 단천(端川)과 길주(吉州) 사이를 횡단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파령(伊坡嶺)이라 불렸다. 高峻危險。過于磨雲,鐵嶺,咸關。便是坦途。此乃北路第一嶺阨。: 가파르고 험준하여 마운령, 철령(鐵嶺), 함관령(咸關嶺)을 지나는 것은 평지를 걷는 셈이니, 이곳이 바로 북로(北路)에서 으뜸가는 영애(領阨)인 것이다. 上頂奇峰簇立。俯臨無地。惟見大海茫茫。: 정상에는 기이한 모양의 봉우리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면 땅은 없고 망망대해만 보인다. 鄭東溟詩所謂前臨有大澤。盖乃北溟云一句。描寫盡之。筆力可畏。: 정동명(鄭東溟)의 시(詩)에 이른바 「앞으로는 대택(大澤)에 임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북명(北溟)이라 하네」라는 한 구절이 이 광경을 남김없이 잘 묘사하였으니, 경외할 만한 필력(筆力)이다. 此嶺一帶。舊有九阨。中年並植木塞路。只通此嶺。: 이 고개 일대에는 옛날에는 아홉 군데의 협로(狹路)가 있었는데, 중엽에 모두 나무를 심어 길을 막아버리고 이 고개만 통하게 두었다. 而嶺脚入海處。有棧路。可通步行。置城津僉使守之。: 고개 기슭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잔도(棧道)가 있어 걸어서 다닐 수 있는데, 성진첨사(城津僉使)를 두어 지키고 있다.》라고 하였다.
➥ 위의 서두(書頭)는 “마천령(摩天嶺)”에 대한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 1,724~1,802】”가 그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자세(仔細)히 묘사(描寫)하고 있는데… …위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마천령(摩天嶺)”은, 반도(半島) 땅의 것이 아님을 분명(分明)하게 말하고 있다.
즉(卽), 「前臨有大澤。盖乃北溟云 : 앞으로는 대택(大澤)에 임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북명(北溟)이라 하네.」라고 했기 때문이다. 즉(卽), 「마천령(摩天嶺) 앞에는 대택(大澤), 큰 호수(湖水) 가에 임해 있다」라는 것이다.
☛ 「대택(大澤)」 : 큰 못을 말하는 것으로, ‘바이칼호 또는 청해(靑海), 동정호(洞庭湖), 포창해(蒲昌海)’ 등(等)을 대택(大澤)으로 표현(表現)한다. 오늘날의 함경도(咸鏡道) 동변(東邊)의 동해(東海)를 “대택(大澤)”이라고 표현(表現)할 수 있는 배포(排布)가 큰 인물(人物)은 없다.
• 「이계집(耳溪集) 본문(本文)」 : 《中略, 偉哉尹侍中, 仗鉞來何年, 提兵絶大漠, 一膊掃腥羶 : 위대할 사 윤 시중이여, 부월(斧鉞) 잡고 왔던 것이 그 어느 해였나. 병사를 이끌고서 대막을 횡단하여, 단박에 오랑캐 비린내 씻어버렸네∼ ∼六鎭疆土野人墟, 拓盡句麗舊山川, 皮衣樺屋入版圖, 白葦黃茅化良田 : 육진의 강토는 야인들 살던 곳, 개척한 곳 모두가 고구려 옛 산천. 가죽옷 입고 자작나무집 짓던 곳 영토로 편입되고, 흰 갈대 누런 띠 풀 자라던 곳 좋은 밭으로 변했네. 磨天之險若通衢, 南緜北布交市廛, 豆滿江水流如帶, 後春山色晴無煙 : 험고(險固)한 마천령(摩天嶺)은 사통팔달(四通八達)대로 같으니, 남쪽 솜옷과 북쪽 베옷을 시전에서 교역하네. 두만강(豆滿江) 물결 띠처럼 흐르고, 후춘(後春) 산색(山色) 개어 안개 없네.∼ ∼중략(中略)》하였다.
➥ 「偉哉尹侍中, 仗鉞來何年, 提兵絶大漠, 一膊掃腥羶 : 위대할 사 윤 시중이여, 부월(斧鉞) 잡고 왔던 것이 그 어느 해였나. 병사를 이끌고서 대막을 횡단하여, 단박에 오랑캐 비린내 씻어버렸네」라고 하였다.
이를 곧이곧대로 보면 : 「윤관(尹瓘) 장군(將軍)과 병사(兵士)들이 개척(開拓)한 1000 里【700 里】강토(疆土)는, 대막(大漠)을 가로질러 출정(出征)하여 점령(占領)한 땅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事實)은, 사실(史實)로 보면 된다. 그러나 기록(記錄)을 기록(記錄)대로 바로보면 끝나는 일인데… …여기에 쓸데없는 사족(蛇足)을 달아 어불성설(語不成說)의 이야기를 만들어 놓으니, 뒤죽박죽되어버린 것이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인 일제(日帝)와 야합(野合)한 부역자(附逆者)」들은 : 「중국(中國)의 옛 고사(古事)를 인용(引用) 또는 비유(比喩)한 것이다」라고. 주저(躊躇)없이 말한다.
필자(筆者)는, 이런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인 일제(日帝)와 야합(野合)한 부역자(附逆者)」들에게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인용(引用)한다거나 비유(比喩)하는 것은 그 대상(對象)이 서로 상응(相應)할 수 있는 관계(關係)에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전혀 다른 환경(環境)에서 “인용(引用), 비유(比喩)”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 ‘반도(半島) 땅의 형편(形便)’을 가지고, 「동해(東海)를 대택(大澤)이라고 비유(比喩) 또는 인용(引用)한다거나, 압록강(鴨綠江)이나 두만강(豆萬江) 이북(以北)의 땅을 대막지대(大漠地帶)니, 막북(漠北) 땅이니 하며 인용(引用) 또는 비유(比喩)한다면 : 바로 헛소리꾼이 되고, 미친놈이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마천령(摩天嶺) 앞에는 대택(大澤)이 임해 있다」라는 말을, 반도(半島) ‘북막(北漠)=북막(北幕)’ 땅에 배치(排置)해 보면 : “대택(大澤)은 바로 동해(東海)가 된다.” 이런 비유(比喩)가 가능(可能)한 일인가?
‘동해(東海)’를 ‘대택(大澤)’이라고 비유(比喩)할 정도의 배짱은 있고? 쉽게 말해 “미친놈들의 광기(狂氣) 어린 헛소리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이것이 21세기(世紀)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학계(學界)의 현실(現實)이다.
➥ 「윤관(尹瓘) 장군(將軍)의 대막(大漠)을 횡단(橫斷)하여 1,000 里【700里】 강토(疆土)를 개척(開拓)했다」라고 기록(記錄)한 원문(原文)인 :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보면 :
㈠ 〔丙戌〕睿宗文孝王 : 元年[1,106年] 《春正月。王親閱神機軍。時有東征之議。王屢閱兵士。且遣使諸道。敎習兵陣。點選壯勇。: 왕이 친히 신기군(神機軍)을 사열하였다. 이때 동방을 정벌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므로 왕이 여러 번 군사를 사열하고 또 사자를 모든 도(道)에 보내어 군사의 진법(陣法)을 교습시키고, 장건하고 용감한 군사를 점고(點考)하여 뽑았다.》라고 하였는데,
☛ 여기서 ‘필자(筆者)가 지적(指摘)하고 싶은 것’은, “당시(當時) 고려(高麗)의 ‘황도(皇都)=황성(皇城)’은, ‘개성(開城)=松岳=松都=松京’에 있었다”라고 말하는데… …,
그렇다면 위의 원문(原文) 기록(記錄)에서 말하고 있는 : 「時 有 東 征 之 議 : 이때 동(東)쪽을 정벌(征伐)하자는 의논(議)이 있었다」라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
☛ 「반도(半島) 땅」에서 「동정(東征) : 동(東)쪽을 토벌(討伐) 또는 정벌(征伐)하자」라는 말이 과연(果然) 가능(可能)한 것인가? 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반도(半島) 땅의 동(東)쪽에는 “열도(列島)”만이 있었을 뿐이며, 이때의 “열도(列島)는 고려(高麗)에 예속(隸屬)”된 땅이었다. 【이때는 왜(倭)나 일본(日本)은, 남아세아(南亞世亞)에 있을 때이다. 곧 “무소(犀), 코끼리(象), 악어(鰐魚), 물소(水牛) 등이 자생하는 땅에 있었으며, 그 땅은 각각(各各) 수천리(數千里)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㈡ 〔丁亥〕二年[1,107年] : 《十二月。尹瓘等擊女眞大破之。置英,䧺,福,吉四州。: 윤관(尹瓘) 등이 여진(女眞)을 쳐서 대파(大破)하고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의 4주(州)를 설치하였다. 乙未。瓘分道出軍。自以五萬三千人。出定州大和門。: 을미(14일)에 윤관(尹瓘)이 길을 나누어 군대가 나갔는데, 스스로 5만 3천 명을 거느리고 정주의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中軍兵馬使金漢忠。以三萬六千七百人。出安陸戍。: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 김한충(金漢忠)은 3만 6천 7백 명을 거느리고 안륙수(安陸戍)로 나가고, 左軍兵馬使文冠。以三萬三千九百人。出定州弘化門。: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 문관(文冠)은 3만 3천 9백 명을 거느리고 정주(定州)의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가고, 右軍兵馬使金德珍。以四萬三千八百人。出宣德鎭。: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 김덕진(金德珍)은 4만 3천 8백 명을 거느리고 선덕진(宣德鎭)으로 나가고, 船兵別監梁惟竦等。以船兵二千六百人。出道鱗浦。: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등은 선병(船兵) 2천 6백 명을 거느리고 도린포(道鱗浦)로 나갔다. 瓘過大乃巴只村。女眞見軍勢甚盛。皆遁走。畜産蔽野。: 윤관(尹瓘)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지나가니, 여진이 우리 군대의 기세가 매우 강성함을 보고는 모두 도망하여 가축(家畜)이 들판을 덮고 있었다. 至文乃泥村。賊入保冬音城。瓘遣兵馬鈐轄,林彦,與弘正。率精銳。急攻破走之。: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賊)이 동음성(冬音城)에 들어가 지키므로 윤관이 병마금할(兵馬鈐轄) 임언(林彦)과 최 홍정(崔弘正)을 보내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丙申。左軍到石城下。遣譯諭女眞降。女眞曰。吾欲一戰。以决勝負。何謂降耶。乘城拒戰。矢下如雨。軍不能前。: 병신(15일)에 좌군(左軍)이 석성(石城) 아래에 도착하여 통역을 보내어 여진을 타일러 항복하도록 하니, 여진이 말하기를, “우리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어찌 항복하라고 하는가?” 하면서 성(城)에 올라 막아 싸우니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므로 우리 군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瓘謂拓俊京曰。日昃事急。爾可與將軍李冠珍攻之。: 윤관이 척준경에게 이르기를, “해는 기울고 사태는 급하니 그대가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더불어 공격하라.” 하니, 對曰。僕甞犯罪。公謂我壯士。請于朝宥之。今日。是俊京殺身報效之秋也。遂至石城。擐甲持盾。突入賊中。擊殺酋長數人。: 대답하기를, “제가 일찍이 죄를 범했는데도 공(公)은 나를 장사(壯士)로 인정하여 조정에 청하여 용서하였으니, 오늘은 준경이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기 위하여 힘을 다할 때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석성에 도착하여 갑옷을 입고 방패를 쥐고 적진에 갑자기 뛰어 들어가서 추장 두서너 사람을 쳐서 죽였다. 於是。瓘兵與左軍合擊。殊死戰大破之。賊兵或自投巖石死。老幼男女殲焉。: 이에 윤관(尹瓘)의 군사는 좌군(左軍)과 합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적을 크게 쳐부수니, 적병이 혹은 스스로 바위에 몸을 던져서 죽고, 노유(老幼)와 남녀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弘正等進擊伊位洞克之。四軍凡斬首四千八百餘級。俘獲亦數千人。破村落百三十餘所。: 홍정(弘正) 등이 나아가 이위동(伊位洞)을 쳐서 이겼는데 4군(軍)이 적의 머리를 4천 8백여 개를 베었고, 포로로 잡은 자 또한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촌락을 부순 것이 1백 30여 소나 되었다. 遣使告捷。王大喜。賜詔奬諭。元帥以下賜物有差。: 사자를 보내어 승전을 알리니,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서를 내려 원수(元帥) 이하의 장수에게 유고(諭告)로 권장하고 물품을 차등이 있게 내려 주었다. 瓘又分遣諸將。畫定地界。: 윤관은 또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어 땅의 경계를 획정(畫定)하였다. 東至火串嶺。北至弓漢伊嶺。西至蒙羅骨嶺。: 동(東)쪽으로는 화관령(火串嶺)까지 이르고, 북(北)쪽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嶺)까지 이르고, 서(西)쪽으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 이르렀다. 又使日官崔資顥。相地於蒙羅骨嶺下。築英州城。 火串嶺下。築䧺州城。吳林金村。築福州城。 弓漢伊村。築吉州城。: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에게 지형을 살피게 하여, 몽라골령의 아래에는 영주성(英州城)을 축조하고, 화관령의 아래에는 웅주성(雄州城)을 축조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는 복주성(福州城)을 축조하고, 궁한이촌에는 길주성(吉州城)을 축조하였다. 女眞裊乙乃等三千餘來附。: 여진의 요을내(裊乙乃) 등 3천여 명이 와서 붙었다(의지하였다).》라고 하였다.
☛ 「정예병(精銳兵) 170,000 여인(餘人)이 출정(出征)했다면, 그 외(外) 후속(後續) 부대(部隊)가 동원(動員)됐어야 하는 것이므로, 무려(無慮) 30여만(餘萬)의 군사(軍士)가 출정(出征)했다는 말과 같다.」
「백번(百番), 천번(千番) 말해도, 옛 조선(朝鮮)의 땅은,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일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分明)하고 확실(確實)하다.」
○ 위의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는, ‘AD 1,724~1,802’年을 살다 가신 우리들의 선조(先祖)이시다. 18세기(世紀) 때의 옛 조선(朝鮮) 강토(疆土)의 ‘북막(北漠)=북막(北幕)’ 땅에 대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노래한 구절(句節)을 보면서 :
우리가 이것에서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를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대(偉大)한 선조(先祖)들의 말씀을 마치 “미친 헛소리”로 비하(卑下), 천시(賤視)하려는 자(者)들을 경계(警戒)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경계(警戒)해야 할 대상(對象)’이 바로 「위대(偉大)한 선조(先祖)들의 말씀을 마치 “미친 헛소리”로 비하(卑下), 천시(賤視)하려는 자(者)들이다. 바로 이 자(者)들이 일제(日帝)에 부역(附逆), 야합(野合)한 놈들이며, ‘바로 이놈’들이 세력화(勢力化)한 집단(集團), 무리(衆)이기 때문이다.」【제2편으로 계속(繼續)됩니다】
2026년 08월 22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본래 오늘 게재 예정이었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뒤는 향토사학의 결정적 헛 수"에 대한 것이어야 했는데.. ...준비가 덜 되어 준비해 두었던 "이계집"의 내용으로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 편에서도 역시 "몇 편으로 계속될 것 같습니다"
* 한민족의 선조들인 조선족의 선대 조상님들이 평생에 붓을 들고 서 내려갔던 그 글에서 "영토를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곳에서는 : 당시의 조선영토는 반도 땅이 될 수 없습니다.
바로 "東西 萬里의 나라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 반도 땅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살았다던 우리들의 조상님들은,
무엇 때문에 '중원대륙이 조선왕조의 강토였다'는 기록을 수없이 남겨 놓은 것일까?
*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무지무식한,
후손들을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지형지세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반도사학계의 "반도사학=식민사학" 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하고, '본래의 조선의 역사를 회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