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털루 전투 - 나폴레옹 '백일천하'의 종막 알린 최후의 결전 |
전투 발발 배경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 한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다시 집권에 성공했고, 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연합군들은 빈 회의에서 다시 돌아온 나폴레옹을 물리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나온 의견은 "영국-네덜란드-독일 군대 9만 3000명은 프로이센의 군대 11만 7000명과 합류하고, 21만명의 오스트리아 군대는 라인강 상류에 집결한다. 러시아의 15만명의 군대는 라인강 중류로 집결하며, 이탈리아 군대 7만 5천명은 북부 이탈리아로 집결한다. 그 후 이탈리아군대는 프랑스 리옹으로 진격하고, 다른 군대는 파리를 집중 공략 한다. 이 공격 시기는 1815년 6월 27 ~ 7월 1일로 한다." 였다. 하지만 먼저 알아첸 나폴레옹은 14만 2천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먼저 벨기에를 공격했다. 웰링턴의 영국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만나기 전에 각개격파 시킬 목적으로 였다. 이로써 나폴레옹군은 먼저 프로이센군과 워털루에서 만나게 되었고,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
전투 과정
나폴레옹의 7만 2,000명 병력과 웰링턴 공작의 동맹군 6만 8,000명 및 블뤼허의 주력 부대인 약 4만 5,000명의 프로이센군 사이에 벌어졌다. 나폴레옹군 원수인 미셸 네이와 에마뉘엘 드 그루시는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6월 16일 워털루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웰링턴을 카트르브라에 묶어둔 후 적이 분산되어 있을 때 공격해 섬멸하는 데 실패했다. 나폴레옹의 총병력 10만 5,000명 중 약 1/3에 해당 3만 3,000명을 거느린 그루시는 뒤늦게 블뤼허를 추격했다.
오후 6시에 이미 4차례에 걸쳐 프랑스군은 동맹군 중심부를 약화시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이유는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 사이에 전혀 손발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또다른 전투가 벌어졌는데 여기서도 프랑스 군대는 블뤼허 군대의 카를 폰 뷜로 군단 소속인 3만 명의 프로이센군을 맞아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프로이센군은 워털루에 당도해 나폴레옹군의 동쪽에서 압력을 가해왔다. 프로이센 병력이 후미로 진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로보 백작 조르주 무통이 이끄는 부대를 이동시키고 웰링턴 군대를 상대하던 주력 부대에서 몇 개의 근위대대를 이동시켜야 했다.
마침내 오후 6시 네이가 보병·기병 및 포병 합동공격을 개시해 동맹군 전선 중앙의 한 농가인 라에생트를 함락했다. 프랑스 포병들은 동맹군 중심부에 포격을 시작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웰링턴 군대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질 수도 있었으나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의 측면공격을 막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네이의 보병 증원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후 7시가 지나 측면을 안전하게 하고 나서야 나폴레옹은 근위대 몇 대대를 네이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미 웰링턴은 폰 차이텐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의 지원을 받아 방어태세를 재정비한 뒤였다. 네이는 근위대 일부 병력과 다른 몇 개 부대를 지휘해 연합군에 대한 최후 공격에 나섰다. 빽빽이 늘어섰던 근위대 보병은 동맹군 보병의 화력에 밀려 뿔뿔이 흩어졌다.
패배 원인
:지휘관 판단 착오로 전열 급격 붕괴 오후 4시, 우렁찬 나팔 소리와 함께 10개 연대 4800명의 기병은 800m의 벌판을 가로지르는 대돌격을 시작했다. 지축을 울리며 달려드는 기병 돌격 앞에 영국은 압도됐다. 언덕 위에서 포화를 내리퍼붓던 영국군 포병 11개 포대는 프랑스군의 돌격에 휩쓸려버렸다. 기세에 눌린 1만4000명의 보병도 언덕 뒤로 물러나서 22개의 방진을 펴며 방어에 급급했다. 그러나 웰링턴 휘하 영국군의 조직력은 아직 살아 있었다. 방진은 매우 견고해 기병만으로 뚫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방진을 돌파하기 위해 정말로 긴요했던 전력은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다. 네이 휘하에는 1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여단이 예비대로 남아 있었다. 이 보병들이 신속히 전진, 기병과 협동해 영국군 방진과 맞섰다면 한계에 이르던 영국군의 전열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병 대신 성급히 추가로 투입된 기병들은 또다시 방진 앞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실수를 깨달은 네이는 뒤늦게 보병을 전진시켰지만 이미 9000명의 정예 기병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뒤였다. 이러한 네이의 여러가지 실수는 프랑스군의 패배를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야 만것이다. 결과
프랑스군의 전열 붕괴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