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은 말이 적은 편이다.
내성적이라기보다는 보스 형에 가깝다. 부평고에서 그를 가르쳤던 조정구(현 재현고 감독)감독이 전하는 일화 한가지.
"1학년 땐가 7~8명이 숙소를 집단이탈한 적이 있었죠. 나머지 애들은 제가 무서워 그랬는지 하루만에 모두 돌아왔지만 남일이만 며칠 동안 소식이 끊겼어요. 뒤늦게 숙소로 돌아와선 오히려 동료들에게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끝을 봐야지 그렇게 도망치느냐"고 큰소리를 쳤어요. 그때부턴 선배들도 남일이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죠
잘생긴 넘들도 스타일에 따라 분류가 가능한데 꽃미남파로는
이동국, 안정환, 이관우 정도를 들 수 있겠다. 호남형은
홍명보, 장대일, 김도균 정도다. 그리고 분명 미남형이지만
한성깔 할 것 같아 차마 언급하기 어려운 김남일 정도가 있다.
-딴지일보-
김남일은 지치지 않는 체력과 강인한 승부근성을 갖춰 한국
선수중에서는 대인마크의 1인자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 자칫 잘못하면 옐로카드까지 받을 수 있는 거친 플레이로
일관, 상대선수들을 심리적으로도 압도할 수 있어 적격이다.
-fifa공식페이지-
“한국 선수들은 김남일처럼 할 줄 알아야 한다. 유명한 선수를 상대하면서도
기죽지 않고 심판이 안 볼 때마다 걷어 차는 근성이 있다”
-히딩크-
올 초 북중미 골드컵에서 베스트11에 선정될 만큼
해외에서도 인정받았고,또 지난달 벌어진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프랑스 등과의 평가전을 통해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바 있다. 외국의 언론들이 “이탈리아나 잉글랜드
리그에 진출해도 손색이 없다”며 칭찬했던 김남일은
이번 폴란드전에서도 상대 플레이메이커 시비에르체프
스키와의 맞대결에서 완승을 거둬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다.
이날 외신기자들은‘대단한 선수’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stoo-
상대 플레이의 축이 되는 미드필더 시비에르체프스키를 90분간
꽁꽁 묶은 김남일의 소금역할. 김남일의 수훈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올리사데베의 위력을 50%로 반감시켰다
-신문선의 관전평. 김남일의 [족쇄수비] 수훈. 이라는 제목-
김남일이는 항상 공과 관계없이 자신이 맡은 선수와 싸우고
있으므로 경기중 어디에선가 김남일 아니면 상대선수가 상대
반칙으로 쓰러져 구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단도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부상당했다)
등번호는 5번!
지단 부상당했다는 얘기에 기자들이 김남일에게 "어떡하냐..지단 연봉이 얼만데..."라고 하자
김남일 왈 "아, 내 연봉에서 까라고 하세요!!"
짱~!!!!!
*****골드컵에서 활약하는 김남일*******
▲출생지 = 경기도 대무의도
▲생년월일 = 1977년 3월14일
▲학력 = 송월초(부평초 졸업)-부평동중-부평고-한양대
▲신장. 체중 = 182㎝·75㎏
▲프로입단 = 2000년 1월 전남 드래곤즈 입단
▲A매치 출전 = 21경기 1골
전문가들에게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후 가장 기량이 향상된 선수를 꼽아달라면 송종국과 함께 첫 손에 꼽히는 선수가 단연 김남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가들의 평가 외에 그간 축구팬들에게 그토록 많은 욕(?)을 먹다가 요새 들어 칭찬을 받고 있는 선수도 드물 것이다.
일취월장(日就月將). 요즘 김남일의 모습을 이만큼 잘 나타내고 있는 단어도 없다. 대표팀 출범 초기만 해도 잦은 패스미스와 볼 처리 미숙으로 모든 축구팬들의 원성을 독차지했던 그가 이제는 팀에는 없어서는 안될 핵심선수로까지 꼽히게 된 것이다. 특히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에서는 결승골까지 뽑아내면서 일약 스타덤에까지 올랐다.
김남일이 히딩크호에 합류하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은 2001년 7월 28일 목동구장에서 있었던 K리그 안양과의 경기. 그간 소속팀 전남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면서 포백 라인을 이끌던 그가 이날은 플레이메이커로 처음 전진 배치된 날이었다. 2000년 드래프트 1순위로 전남에 입단한 후 한 시즌 동안의 빼어난 활약으로 이회택 감독의 신임을 얻은 그가 팀의 공수를 조율하는 중책을 담당한 또다른 '데뷔무대' 에서 맹활약을 펼쳤고 마침 이날 경기를 관전하러 경기장을 찾은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온 것.
경기를 관전하던 히딩크 감독은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저 4번 선수는 누구냐" 고 정해성 코치에게 물어봤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광양을 꾸준히 오가며 김남일의 활약을 집중적으로 체크한 코치진이 그를 추천하면서 김남일은 유럽 전지훈련을 떠나는 대표선수 명단에 전격적으로 발탁되었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황선홍과 설기현 등 해외파의 전훈 합류가 늦어진 것 요소로 작용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는 요소라는 점에서 그의 추가 발탁은 약간의 행운이 뒤따른 결과였다.
당시 히딩크 감독이 경기를 관전한 줄도 모르다 나중에 대표명단을 보고 얼떨떨했다는 김남일의 축구 인생은 그 때부터 새로운 전기를 맞기 시작했다. 올림픽대표팀이 주축이 돼 참가했던 2000년 6월 이란 LG컵 4개국대회에 참가 등 A매치 5회의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전까지 김남일은 사실 잘해야 대표 상비군, 혹은 2진 정도라는 평가를 받아왔었기 때문이었다.
김남일이 히딩크호에서 치른 첫 A매치는 8월 15일 체코 프라하에서 있은 체코 대표팀과의 친선경기. 그러나 콜레르, 로시츠키, 네브데드 등이 총 출동한 체코 베스트 멤버와의 일전은 그에게 혹독한 신고식이 되어야만 했다.
체코와 맞선 한국은 전반 네브데드에게 선제골을 내주긴 했지만 대등한 경기를 벌이며 선전했다. 그러나 히딩크호 출범 이후 가장 좋은 내용을 보여주던 경기의 양상은 후반 20분 김남일이 범한 어이없는 실수 하나에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김남일이 상대방 선수를 놓치면서 어설프게 처리한 공이 그대로 골로 연결되었고 이후 한국은 25분 동안 내리 3골이나 줄줄이 내주면서 5-0이라는 대패를 당하고 만 것.
경기가 끝나고 망연자실한 김남일의 가슴속에 뼈저리게 남은 것은 황선홍의 한 마디였다. "태극마크를 달고 뛸 때는 그러면 안된다" 는 대선배의 말 한마디에 평소 선배의 말이라면 누구보다 잘 따르던 김남일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붉어졌고 이후 "대표선수의 책임감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고 한다. "대인 방어에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 는 각오를 김남일이 하게 된 것도 이때라고 한다.
인천 앞바다의 대의무도라는 섬에서 태어나 6살 때 인천으로 이사한 김남일이 축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인천 송월초등학교 3학년 때. 2년 후 부평초등학교에 전학을 가 부평동중을 거쳐 꿈에 그리던 축구 명가인 부평고에 입학할 때까지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축구뿐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축구부는 김남일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힘든 조직이었다. 축구부 선배들에게 3일간에 걸쳐 집단 구타를 당한 후 친구들과 가출한 그는 부모님 손에 다시 집으로 끌려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축구에 대한 미련이 모두 사라진 후였다. 10개월 동안 긴 방황의 세월이 계속되었고 축구부에서도 그를 포기하면서 김남일은 이제 영영 축구와 연을 끊는 듯 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축구화 끈을 메지 않겠다는 김남일의 굳은 결심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호소하는 아버지의 눈물 앞에 꺾이고 말았다. 공사장 일꾼들의 밥을 해주며 가족을 부양하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이미 운동 선수가 되고자 했던 큰형 남훈(28)의 꿈을 한 차례 꺾어야만 했던 아버지는 김남일에게만 "제발 축구를 다시 해라" 며 눈물로 호소했고 결국 김남일은 아버지의 설득에 그라운드에 복귀해 이듬해 한양대 축구부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한양대에서 이관우와 함께 팀을 이끌던 김남일은 졸업 후 드래프트 1순위로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 이후 2000년 정규리그에서 30출전 1골 1어시스트의 안정감 있는 활약을 펼치면서 입지를 넓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 6월에는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들을 테스트하던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에 합류, 유고와의 평가전에서 자신의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막판 부상과 컨디션 난조가 겹치면서 아쉽게 시드니행 비행기를 놓친 김남일은 이후 히딩크 감독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선수로 탄생하게 되었다. 당초 수비형 미드필더인 김남일 앞에는 유상철이라는 거목 뿐만 아니라 히딩크의 총애를 받는 이영표, 박지성 등이 포진하고 있어 설자리가 전혀 없어 보였던 것이 사실. 그러나 크로아티아와의 친선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김남일은 북중미 골드컵에서 유상철을 비롯한 J리그파들이 중도에 귀국하자 어느새 팀의 기둥으로 성장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특히 멕시코와의 8강전에서는 상대 선수에게 팔꿈치로 맞아가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승리를 이끌어 "김남일이 상대방에게 한대 맞더니 갑자기 다비즈로 변했다" 는 놀라움 섞인 농담마저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는 뛰어난 수비력을 인정받은 김남일은 골드컵 이후 FIFA 테크니컬 스터디그룹에서 선정한 '베스트 11' 에 꼽혔으며 핀란드전에서는 상대방의 공격수인 미카엘 포르셀(첼시)의 공격을 철저히 차단해 다시 한번 그의 능력을 과시했다. 특히 이날 그의 활약에 대해서는 평소 선수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는 히딩크 감독 조차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성숙한 기량을 선보였다. 김남일이 오늘 경기의 MVP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사실 김남일의 플레이 스타일은 세련되었다기보다는 과격한 편이다. 투지, 거친 태클, 터프한 몸싸움,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앞세워 상대를 압도하는 그와 경기를 하던 중 실재로 성한수 등이 '희생양' 이 되어 오랜 기간 병원신세를 져야 했던 일화도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평소 "얌전한 플레이는 팀 전술에 보탬이 되지 않으며 반칙도 기술" 이라는 것을 선수들에게 강조해온 히딩크 감독에게 김남일은 없어서는 안될 선수다.
김남일은 파울이 많지만 지능적인 선수이다. '가가멜' 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아무리 심한 파울 상황이 나와도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냉정을 잃지 않는 그에게 심판도 쉽게 카드를 빼들지 못한다. 상대방에게 안면을 정면으로 가격 당하는 거친 파울을 당하고도 끝까지 침착한 플레이로 승리를 이끌어냈던 멕시코전과 교묘한 반칙으로 신경전이 오고갔던 핀란드전은 바로 김남일의 이러한 장점이 잘 드러난 경기라고 할 수 있다.
김남일이 가파른 상승세로 일약 확실한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히딩크 감독은 유상철을 중앙 수비수 혹은 기타 포지션에 기용할 수 되었고 이영표, 박지성 등의 선수들도 좌우 윙으로 놓을 수 있게 되는 등 포메이션 구상에 여유가 생겼지만 김남일 본인은 여전히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다. "이영표와 박지성은 언제든 지금 나의 포지션에 뛸 수 있는 데다 장점이 많은 선수들이라 안심할 수 없다" 며 훈련에 매진하는 김남일. 기회가 오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뛰고 싶다는 그의 꿈이 월드컵 이후 실현되는 그날을 같이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