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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스토리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전다빈
계절별 다도---매화도 이미 피었겠다 차 한 잔 하시지요!
눈을 보며 차를 마시는 그 즐거움 --- 1월의 차
때에 맞추어 차를 마신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차를 마신다는
일은 그냥 더운물에 찻잎 넣어 우려 마시면 되는 그런 쉬운 일이지만, 정말
맛있는 차 한 잔을 마신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주위환경과 어울리는 차 한 잔, 그리고 권하는 사람의 향기가 그대로 전
해지는 차 한 잔을 우려내기란 차에 웬만큼 정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 《대관다론(大觀茶論)》이란 다서(茶書)에서
차를 따는 날짜를 맞추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차 만들기에 좋은 날씨를 만나
면 축하한다고 하였습니다. 차만들기가 그러할진대 차마시기에 좋은 때를
만나면 우리 선조들은 그 흥을 시로 표현하거나 좋은 사람과 마주하여 정담
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동다송(東茶頌)》에 일부 전하는 《동다기
(東茶記)》에서, 아침에 꽃이 피기 시작하고, 뜬 구름이 비 개인 하늘에 곱
게 떠 있고, 낮잠에서 갓 깨어났을 때, 맑은 달이 푸른 시냇가에 휘영청 비
추일 때 차마시기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자연과 어울린 차 한 잔,
실로 멋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멋스러운 차생활은 사계절의
구분이 명확한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여러 가지 차생활의 형태로 나타났습
니다. 그런 차생활을 여러 문헌과 차시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도 오늘날의
차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하고,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넉넉했던 우리 선조들
의 마음에 깃들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혹 솔방울로 차를 끓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솔방울
로 차를 끓인다는 이야기는 명나라 전예형(田藝衡)의《자천소품(煮泉小品)》
에 보입니다. 전예형은 추운 겨울철에 솔방울을 가득 쌓아두고 차를 끓이면
더욱 그 고상함이 갖추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솔방울로 차를 끓인다는 이야
기는 작은 솔방울이 불 속에서 벌어지면서 뿜어 낼 솔내음 속에, 솔방울 하
나 던지면서 화력을 조절하였을 옛 사람의 슬기로움이 배어나오는 듯
한 맑은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끓인 차는 과연 어떤 맛이 났을까요? 일찍이 고려의 진각국사(眞
覺國師)는 솔방울로 차를 끓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고개 위 구름은 한가로와 흩어지지 않는데
시냇물은 어찌 그리 바삐도 달리는가
차를 달아니 차는 더욱 향기로와라
진각국사는 솔방울로 달인 차가 여느 차보다 더욱 향기롭다고 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도 차부뚜막에서 솔방울로 차를 끓인 시를 남겨 놓고 있는 것
을 보면 솔방울로 차를 끓인다는 이야기는 차의 은근한 멋을 아는 여러 선
조들이 즐겨하떤 찻물 끓이던 풍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겨울의 차생활 가운데 더욱 시정이 넘치는 일은 아마도 천지에 하얗게
내리는 눈을 보며 그 눈으로 차를 마신다든가, 눈이 온 뒤 적막함 속에서
화로에 불을 일구어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시는 일이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중국 허차서(許次序의 《다소(茶疏)》에서는 큰 비나
눈이 올 때엔 차를 마시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만, 하늘과 땅을 온통 은빛으
로 바꾸는 흰눈을 보면서 차를 마시는 일이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닐 것입
니다.
그 눈을 한 웅큼 떠서 화로에 녹여 김이 오르고 솔바람 소리가 밀려올때,
다관에서 푸른 차잎사귀가 마치 봄바람에 나부끼는 깃발과 같이 피어 오르
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차와 선(禪)이 하나가 되는 시선일미(
詩禪一味)의 경지가 아닐까요, 초의(艸衣) 스님의 절친한 차벗이었던 홍현
주(洪顯周)의 누이 유한당 홍시(幽閑堂 洪氏)는 눈을 보며 차를 끓이는 즐
거움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겨 놓고 있습니다.
처음 벼루를 열자
밤은 시를 재촉하네
북두칠성은 하늘에 걸리고
달은 더디 나온다
등을 달고 한가롭게 앉은
높이 솟은 누대 위
눈을 보며 차를 달이는
그 즐거움 나는 안다네
눈을 보며 차를 달이는 즐거움은 어떤 즐거움이었기에 유한당 홍씨는 추
위를 무릅쓰고 높이 솟은 누대 위에서 차를 달여 마셨을까요. 한참 동안 갈
아야 되는 벼루의 효능을 잊은 지 오래된 우리로서는 아마도 유한당 홍시의
차는 맑은 차향기와 투명한 대지의 기운이 하나가 된 그런 찻자리에 어울린
한 잔의 차였다고 짐작할 수밖엔 없지요.
눈을 보며 차를 마시는 즐거움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즐겨하시던 맑은 일
은 눈을 녹여 차를 끓이던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렸을 적에는 눈이 내
리면 혀를 한껏 내밀고 눈을 입속에 집어 넣거나, 손바닥으로 눈을 받아 먹
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잊혀졌지만 우리 어렸을 적에 눈을 보며 즐거워하던 그 마음
은 차를 마시던 옛 어른들도 같으셨던 모양입니다. 중국의 정위(丁謂)라는
다인은 눈오는 날 눈으로 차를 끓이는 것을 즐겨하여 귀중한 차를 아끼고
아껴 서랍 혹에 깊이 넣어 두고서 눈오는 날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눈이 내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첫눈은 늘 반갑다고 어느 시인은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눈은 차의 반가운 손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추운 밤 손님
이 오면 차로 술을 대신하여 대접한다는 옛 싯구 한야객래다당주(寒夜客來
茶當酒)가 있습니다. 반가운 눈오는 날 오래 보지 못하던 친구와 차 한잔을,
찻잔으로 손을 녹여가며 뜨거운 차를 마신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훈훈하여집니다.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인 기록을 남긴 최초의 사람은 송나라의 도곡(陶穀)
입니다. 그는 눈 녹인 물로 덩어리 차를 끓여 마셨습니다. 그가 남긴이 기
록이 후대에 두고두고 차의 맑고 운치 있는 옛 이야기로 전하여지고 있습니
다. 어릴 때 우리가 혓바닥으로, 손바닥으로 받던 눈을 우리 선조들은 입이
좁은 매병에 담았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담은 물을 땅 속에 묻어 두고 귀한
차를 마실 때 조금씩 나누어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입이 좁은 매병을 대지의 정기를 담은 눈을 받으려고 내놓았을 옛 다인들.
매화가지 내린 눈을 조심스럽게 병에 옮겨 놓던 옛 다인들. 참으로 성에 낀
유리창 너머에 보이는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매화 향기 어리는 이른 봄날의 차 - 2월의 차
매화꽃이 피기 시작하는 2월입니다. 바야흐로 이른 봄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느 계절이지요. 이 달에는 입춘과 우수의 절기가 들어 있고, 차례날이 있습니다.
정말 한 해의 시작은 입춘부터라고 할 수 있지요.
해를 넘기면서 차는 맛을 잃어 싱싱한 햇차가 벌써부터 그리워집니다. 이
렇듯 햇차가 그리워지는 계절에 우리 선조들의 차생활은 어떠하였는지 참으
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규경(李圭景)의《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演文長箋散考)》에는 매화꽃이
바야흐로 피려고 할 때 찻물이 끓기 시작한다는 차 기록이 나옵니다. 매화
꽃과 차가 어울리는 이야기는 여러 문헌에서 나오는데, 차를 마시면서 매화
를 감상하는 이외에 매화로 차를 달여 마신 기록도 보입니다. 명대의 주권(
朱權)은 그의《다보(茶譜)》에서 잔을 먼저 데워서 가루차를 내는 법을 설
명한 뒤에, 다음과 같이 매화차에 관한 기록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과일로 대신하여 차를 내지만, 매화나 계수나
무꽃, 그리고 말리(茉莉)꽃이 더 좋다. 이 꽃봉오리 여러 개를
찻잔에 넣은 다음 조금 지나면 꽃이 피기 시작한다. 찻잔이 입
술에 가 닿지 않아도 향기가 코에 넘친다.
이 기록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꽃차에 관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계수나무꽃과 말리꽃으로 만든 꽃차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면 차와 꽃의 만남은 운치 있는 일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산업
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수나무가 많은 중국의 계림에서 나는
계수나무꽃차나, 우리가 흔히 쟈스민차라고 하는 말리꽃차는 이런 오랜 전
통 속에서 개발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금당 최규용(錦堂 崔圭用)은 주권과 같은 매화차를 내십
니다. 이른 봄 범어사에서 피는 매화 한 가지를 조심스레 옮겨와, 매화 봉
오리 하나를 더운 김이 오르는 찻잔에 넣고서 조금 기다리면, 매화꽃과 차
가 어울린 한 잔의 차가 됩니다. 이런 풍류스런 차를 마시면, 문득 가슴속
에서 매화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차와 꽃의 어울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견해도 일찍부터 있
어 왔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이의산(李義山)은 꽃을 보면서 차를 마시
는 것은 살풍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다서에서 차에 다른 향기로
운 과일이나 꽃을 넣는 것을 무척 꺼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차는 새로운 차가 좋고, 먹은 오래 묵은 먹이 좋다고 합니다. 해를 넘긴
덩이차는 불에 구워서 말린 다음 가루를 내어 마신다는 기록이 채양(蔡讓)
의 《다록(茶錄)》에 보입니다. 묵은 잎차를 정갈한 한지 위에 올려놓고 은
근한 불에 살짝 불기운을 쪼여 차맛을 기르는 방법은 육우(陸羽)의 《다경(
茶經)》에서도 보입니다만, 《고반여사(考槃餘事)》의 차를 저장하는 법에
의하면 차를 만든 다음에도 하지와 추분, 동지 등 모두 다섯번에 걸쳐 차를
볼에 쪼여 보관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차를 보관하기 용이하
지 않던 시기에 생긴 차 보관법입니다. 냉장법과 진공포장 등 차의 보관이
쉬워진 오늘날에 이와같은 방법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개
봉한지 오래된 차를 정갈한 한지에 올려 놓고 불에 쪼여 말린 뒤 우려서 마
시면 종전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차맛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매화와 어울리는 꽃은 수선화와 동백꽃입니다. 중국인들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수선을 방안에 들여 놓고 수선화가 피기를 기다립니다. 수선화는
금잔옥대(金盞玉臺)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즉 금으로 만든
잔과 옥으로 만든 잔받침과 같은 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강희안(姜
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보면 우리 선조들도 그와같은 멋을 가지
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차 가운데에도 수선차(水仙茶)가 있습니다. 이 차 이름을 처음 들
으면 쟈스민차와 같은 꽃차 같지만 꽃차가 아니고, 수선이라는 차나무 품종
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선차는 무척 향기로우며, 그 맛이 진하여 여러번 우
려내도 그 맛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나오는 우수한 차이지요.
2월의 차생활 가운데 수선화와 더불어 차실에 어울리는 꽃으로는 동백꽃
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신민요의 하나인 《동백꽃타령》에 보면 다음과 같
은 가사가 있습니다.
가세 가세
동백꽃을 따러 가세
빨간 동백 따다가는
고운 님 방에 꽃아 놓고
하얀 동백 따다가는
부모님 방에 꽃아 놓으세
이런 민요 이외에 차를 사랑한 많은 우리 선조들은 동백꽃을 노래하였습
니다. 산다(山茶)라고 노래되는 꽃이 바로 동백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차
실에 가장 어울리는 꽃을 무궁화와 동백꽃이라고 합니다. 일본인들이 차실에
무궁화 꽂기 좋아하는 것이 무척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동백꽃을 좋아하는 이유와 같은 이유에서 무궁화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무궁
화와 동백꽃이 잎 밑에서 숨어 피어나면서 쉽게 지는 모습에서 잠시 이승에
스쳤다 가는 바람과 같은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빨간 동백 한송이 고운 님 방에 꽂아 놓고 매화 향기 어리는 차를 마십니
다. 매화 향기, 차 향기 어린 작은 찻잔 안에 봄이 눈 틔우고 있습니다.
3월의 차 - 대지의 잠을 깨우는 차 한 잔
겨우내 잠들었던 만물이 대지의 새로운 기운과 함께 기지개를 켜는 3월입
니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어진다는 그 경칩과 낮과 밤의 길이가 꼭
맞아 떨어지는 춘분이 이 달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시절을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 즉 화조월석(花朝月夕)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는 음력으
로 2월과 8월 보름입니다. 음력으로 2월과 8월에는 낮과 밤이 꼭반반씩 되
는 춘분과 추분이 있고, 가득차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보름 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를 우려낼 때, 더운 물을 반쯤 넣은 다음 차를 넣고 다시 더운 물을 넣
는 중투법(中投法)이 봄날에 어울리는 차내는 법입니다. 이렇게 차를 내면
서 차 정신의 하나인 중용의 덕을 생각해 보는 것도 이 시절에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봄비에 푸르러지는 버드나무와 꽃샘바람 이기고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면
서 마시는 봄날 아침의 차 한 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보름달과 함께
찾아온 반가운 차벗과 함께 마시는 봄날 저녁의 차 한 잔.
조선 시대 시인인 신종호(申宗鎬)는 이런 봄날이 가는 것을 아쉬워 하며
차를 마시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차 마시기를 그치자 비로소 잠이 깨는데
집밖에서 자주빛 옥생황소리 들려오네.
제비는 아직 오지 않고 꾀꼬리 또한 날아갔는데
뜰에 가득 꽃비가 소리 없이 내리네.
우리 선조들은 이 때를 맞으면 무엇인가 묵은 것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냉이, 달래, 씀바귀 등 우리 입맛을 새롭게 하는 봄나
물이 그 좋은 예지요. 차의 옛 글자가 씀바귀 도(도)자였다는 것은 차도 처
음에는 싱싱한 봄나물의 하나였다는 좋은 증거가 됩니다. 곽박(郭樸)이 지
은 《이아주(爾雅注)》에는 겨울에 나는 차싹으로 국을 끓인다고 하였습니
다. 이렇게 볼 때 그 옛날에 차가 기호음료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먹거리의
하나로 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칩은 만물을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차나무가 대지의
기운을 깨우는지도 모르지요. 차나무도 이 때를 전후하여 작고 작은 움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이 움으로 차를 만들어 마셧다는 기록이 여러 차문헌과
차시에 보입니다.
《선화북원공다록(宣化北苑貢茶錄)》에 보면 백차(白茶)와 승설차(勝雪茶)
는 경칩 이전에 만들기 시작하여 열흘동안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만들
어진 차는, 말을 탄 날랜 병사들이 음력 2월이 넘기 전에 서울로 날랐기 때
문에 가장 먼저 진상되는 차라는 듯의 두강(頭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북원별록(北苑別錄)》에도 경칩 때 만들어 처음으로 움이 트므로
해마다 그 3일 전에 차판을 벌이는데 그 이유는 윤년에는 기후가 조금 늦어
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경칩을 전후하여 이른 시기에 차를 따던 것이 후대에 이르러 점점 청명과
곡우 도는 입하를 전후한 시기로 바꾸어지게 되지만, 고려시대와 초기 조선
시대에는 좋은 차를 얻기 위하여 이 시기에 차를 만드는 것이 사뭇 성행하
였나 봅니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나오는 유다(孺茶)라든가 조아차(早芽
茶) 등이 경칩보다 이른 시기에 만든 차이지요.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
習)이 보내준 차에 감사하여 서거정(徐居亭)이 쓴 시에는, 경칩을 전후하여
김시습이 만들었던 차의 모습과 그 차를 마시던 서거정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부분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봄천둥 울지 않고 벌레는 아직 깨지 않았는데
산의 차나무는 움터서 새싹을 이루었네
......
경주의 눈빛 종이로 봉지를 만들고
그 위에 초서로 두서너 글자를 적어 봉하
봉함을 여니 하나하나 봉황의 혀
살짝 불에 쪼여 곱게 가니 옥가루가 날리네
서둘러 아이 불러 다리 부러진 남비를 씻어
눈물로 담담하게 차를 달이며 생강도 곁들이네
......
이 시에서 봄천둥이 울지 않았다는 것은 춘분이 아직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시의 제목은 《잠상인이 보내준 작설차를 고맙게 여
기며》입니다. 눈빛 종이에는 아마도 작설차라는 글씨가 멋진 매월당의 솜
씨로 적혀 있었을 것입니다.
서거정은 그 차를 가루로 내어 고운 가루차를 만들고 눈을 녹여 생강의
매운 맛을 더하여 차를 끓였습니다. 차의 순수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로서는
생강을 가미한 차를 용납하지 못하겠지만, 차에 다른 향기나 다른 맛을 내
는 풍속은 지금까지도 세계 각국에서 차를 마시는 하나의 풍속이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용납못할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즐기는 현미차는 숭늉에다가 차를 우려낸 듯한 맛이 나서 차
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지요. 그리고 요사이 중국에서는 인삼
과 차를 더하여 우리와 다른 인삼차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숭늉과 인삼의
본고장인 우리나라에서도 이와같은 차의 개발에 더욱 주력하여 차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별 부담을 주지 않고 차를 접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
다.
저는 때때로 별미로 가루로 된 인삼차를 더운 물에 부어 가루차와 같은
방법으로 마시기도 합니다. 그 차를 차벗들과 나누어 마시면 독특한 그맛에
차벗들은 감탄하기도 하고 차맛을 해치는 일이라고 꼬집기도 하지요. 그러
나 차를 하나의 봄나물로 먹던 시기나 약으로 먹었던 옛일을 생각하면, 오
늘날 우리에겐 기호식품인 차 하나에, 차 마시는 것은 꼭 이래야 한다는 고
정관념에 너무 얽매여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맛에 대한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각종 과일과 채소를 맛볼 수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새것이 나오면 먼
저 조상님께 올린 다음에야 비로소 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달이
나라에서 새맛을 조상에게 올리는 일을 일러 천신(薦新)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려 때에는 천신하는 품목으로 2월에 얼음이 바쳐졌는데, 조선시대에는 품
목이 더 늘어 생합, 낙지, 얼음, 전복, 그리고 작설차 등이 바쳐졌습니다.
차마시기가 성하였던 고려시대에도 보이지 않던 천신 품목인 작설차가 조선
시대에 바쳐졌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월이 끝날 무렵에는 어디서 누군가 햇차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
게 들려옵니다. 햇차를 만나거든 먼저 조상님과 웃어른에게 대접하도록 하
지요. 그러고도 남은 차 있으면 꽃피는 아침에 마시지요.
마음 속에 봄천둥이 칩니다. 어디선가 소리 없이 꽃비가 내리고 있을겁니
다.
4월의 차 - 차 한 잔과 진달래꽃빛 마음 나누며
온 산에 진달래꽃이 불붙는 4월입니다.
그 진달래로 우리 선조들은 화전을 부쳐 먹기도 하고, 오미자 우린 진홍색
물에 진달래를 넣어 진달래 화채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이 진달래가
피면 요즘 차 마시는 벗들도 옛 어른을 본받아 산으로 나가 화전을 부치면서
마십니다. 그 가운데 어떤 차벗들은 제비꽃을 찻잔에 띄웁니다. 제비꽃을
띄운 차 한 잔을 마주하면 마치 겨울날 찻잔에 매화꽃을 띄우는 것과 같은
매력이 있지요.
제비꽃은 여러모로 우리 건강에 이로운 야생식물로, 특히 소화기와 위장계
통의 질환에 좋다고 합니다. 투명한 연분홍색 진달래꽃이 어울린 화전과 자
주색 제비꽃이 한 송이 동동 떠 있는 차 한 잔이 어울린 그 찻자리는 생각
만 하여도 즐겁습니다. 요즈음 차를 따는 차벗들은 새로 나온 찻잎으로 마
치 파전처럼 전을 부치기도 하지요. 그 맛 또한 차의 독특한 향기가 어울려
일품입니다.
청명과 곡우의 절기가 들어있고, 중양절의 하나인 삼월 삼짇날, 그리고 한
식 등의 크고 작은 세시 명절이 들어 있는 이 4월은 그만큼 축복받은 계절
입니다. 이 축복받은 달에 신라 때 충담사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 부처
님께 차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번 중양절마다 부처님께 차를 올리던
충담사는 우리나라 사원다례(寺阮茶禮)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도
이 삼월 삼짇날이 되면 충담사 이 경주의 차동호인을 중심으로 삼화령에서
치러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여류시인인 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는 이 삼월 삼짇날 답청(踏
靑)가는 준비를 하면서 차도구를 준비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있습니
다.
여러 해 동안 은근한 불로 작은 화로에 차를 끓였으니
신기하고 영묘한 공덕이 조금은 틀림없이 있을터요
차 한 잔을 마신 뒤 거문고를 어루만지니
밝은 달님이 나와서 누군가를 부른다네
봄날 차반의 푸른잔에 옥로차를 올리노라니
오래된 벽에 그을음이 앉아 얼룩진 그림이 되었네
잔에 가득찬 것이 어찌 술이어야만 하리
답청가는 내일은 차호(茶壺)를 가져가리
여기서 답청은 삼월 삼짇날을 멋스럽게 부르는 말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엄격하게 제한된 시대에도 이 날만은 바같출입이 자유로웠습니다. 답청가는
날은 남자들은 곡수여(曲水筵)이라 하여 물이 굽이치는 곳에 술잔을 띄워
놓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여성들은 물을 길러 교외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 영수합 서씨는 차 마실 준비를 한 것이겠지요. 영수합 서씨가 남긴
이 한편의 시는 그동안 남성 위주의 차생활로 꾸며진 우리나라의 차문화에
여성도 일익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다신계의 《다신계 절목》에는
청명과 한식 때부터 차모임을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곡우날 어린
차를 덖어 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두 근을 만들어
청명 한식 때 지은 시와 함께 정약용의 아들 유산에게 부쳤습니다.
초의 스님은 우리나라에서는 입하 전후가 차 따기가 좋은 때라고 하였지만,
옛 차서에는 한식과 곡우를 전후하여 차를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중국
의 차산지와 우리나라의 차산지가 기온차가 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식 때
보다 먼저 만들어지는 차를 화전차(火前茶)라고 하고, 곡우를 전후하여 만
들어지는 차를 우전차(雨前茶), 우후차(雨後茶)라고 합니다. 장원(張源)의
《다록》에는 곡우를 전후하여 차를 따는 시기에 다음과 같은 등급을 두고
있습니다.
차 다는 철은 그 때가 중요하다. 너무 이르면 맛이 오롯하지
못하고, 늦으면 신령스런 기운이 사라진다. 곡우날 닷새 전이
으뜸이고, 닷새 뒤는 그에 버금가며, 또 닷새 뒤가 그 다음이다.
문헌에 따라 차를 따는 시기에 관한 견해가 엇갈리지만, 경상도에서 불려
진 차민요는 차를 따는 시기와 함께 차를 따는 여인의 마음을 소박하게 전
해줍니다.
백설 덮인 상상봉에
싹을 내는 차나무는
강풍에도 겁이 없다.
곡우에는 땅김 나고
우수 경칩 봄기운에
강남 제비 봄소식이
한 잎 두 잎 따는 손이
님의 생각 잃을까요.
한식을 금화(禁火)라고도 합니다. 그 뜻은 불을 쓰는 것을 금한다는 뜻이
지요. 한식 전에 딴다고 하여 화전차라는 명칭이 생긴 것입니다. 시기에 따
라 찻잎의 등급이 아주 큰 차이를 가집니다. 하루하루 찻잎이 자라는 속도
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한식 때 성묘가는 일이 큰 일 중의 하나입니다. 이웃 중국에서는 청명을
조상의 묘를 단정하는 민족소묘절(民族掃墓節)이라 정하고, 차인들은 봄을
맞이하는 영춘다회일(迎春茶會日)이라 하여 차의 명절로 지내고 있습니다.
완연한 봄기운이 산에 들에 가득한 때에 가족들과 조상들이 계신 산소에 가
서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보고, 마음 맞는 벗들과 함께 진달래꽃 화전을 부
치면서 차 한 잔을 마시다가, 찻잔 속에 어린 먼 산 진달래꽃빛과 햇빛 속
에 발그스레진 진달래꽃빛 얼굴을 보는 것도, 이 4월에 우리가 가질 수 있
는 즐거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 4월에는 이웃나라에서도 차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행사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 다도의 큰 별인 천리휴(千利休)를 기념하는 제(음력 2월 2
8일)를 올리고, 대만에서는 유가의 차예절을 정리한 주희(朱憙)의 제일(음
력 3월 9일)인데 대만의 차동호인들은 차례일(茶禮日)로 정하여 기념합니다.
삼월 삼짇날 강남에서 날아오는 제비 한 쌍이 하늘을 가로질러 납니다. 저
녁 놀 같은 진달래꽃길로 차구를 울러멘 충담사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잠시
묵은 것 훌훌 털고 나도 그 길로 접어듭니다. 산에 들에 진달래꽃 그늘에서
차벗들을 만나면 자주빛 제비꽃 한 송이 동동 더 있는 차 한 잔을 권해 보
지요. 그 찻잔을 건네받은 차벗도 진달래꽃빛 얼굴이 될 것입니다.
5월의 차 -- 뻐꾸기 울음 들리는 푸른 차 한잔
비가 오고 나면 붉은 꽃은 여위어만 가고 푸른잎이 살찌어는 5월입니다.
햇볕이 바른 날 기온이 올라가면서 비풍이 불어 올 때,하늘에 가득 날리는
버드나무 꽃은 봄 속의 또 다른 눈의 나라를 생각나게 합니다.
한식과 같은 세시풍속이 있는 지난 4월이 돌아가신 조상님의 달이라면, 어
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성년의 날이 있는 이 5월은 산 사람을 위한달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새싹과 같은 어린이, 고향의 느티나무와 같은 어버이,
그리고 청산에 자라는 푸른 소나무와 같이 성년을 맞이한 늠름한 젊은이들
을 위한 날들이 있는 5월.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차 한잔을 나눌수 있는 그런
뜻 깊은 날이 이 5월에 들어 있읍니다.
예전에는 관례(冠禮)라 하여 성대한 성인식이 치러졌는데, 오늘날에는 성
인식이 형식도 사라지고 그 의미도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뜻 깊은 어른들께서 성인식을 부활시키고 술대신 차로써 성인식을
치르는 것을 본 적이 있읍니다. 차의 마음을 전하는 뜻이겠지요 이렇듯 5월
의 차생활은 화합의 기운이 넘칩니다.
이 5월에는 입하와 소만의 절기가 들어있고, 불교의 명절인 석탄일이 있읍
니다. 위도가 중국의 차산지보다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입하를 전후하여 차
따기가 좋습니다. 아침 안개 속에서 꽃비 맞으면 다원에 올라 이슬 가득한
찻잎을 흔들어 깨우면서 찻잎을 따다보면, 해가 뜨는 것도 잊은채 찻잎을
따다보면, 먼산에서 뻐꾸기가 울기 시작합니다. 그 뻐꾸기 울음도 잊은 채
차를 땁니다. 차를 따면서 무아(無我)의 삼매경(三昧境)에 든다는 옛 어른
의 말씀이 실감나지요.
차를 따는것이 그러할 뿐 아니라, 차를 만드는 일도 또한 사념을 떨쳐야 합
니다. 솥의 온도가 조금 높다던가 낮으면 차의 참맛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
이지요. 조심조심하여 차를 덖다보면 차의 푸른기운이 사라지면서 차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제가 처음 차를 만들때, 그 향기는 그리 훌륭한것이 아니
었습니다. 그 냄새가 마치 잔디를 깎을 때 나는 풀냄새와 비슷하다면 상상
이 가실 것입니다. 그 향기가 나면 차를 차솥에서 들어내어 밀가루 반죽을
하듯 비빕니다. 비비기 시작할 때는 손에 힘을 들이지 않고 덩어리를 만들
어 가다가, 덩어리가 만들어지면 힘을 조금씩 주어가며 비비지요. 손에 근
끈한 진액이 묻어 나오고 잎이 마르기 시작할 때,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면
서 그동안 차를 너무 쉽게 마셨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날 것입니다.
초의 스님은 자원의 <다록>을 <만보전서(萬寶全書)>에 <다신전(茶神傳)>이
란 이름으로 옮기면서, 차를 만들 때는 정성스럽게, 저장할 때는 건조하게,
차를 낼 때는 청결하게 한다고 하였읍니다. 이른바 정성스럽게, 건조하게
그리고 청결하게 한다는 차의 위생은 1595년을 전후하여 만들어진 장원의
다도정신인데, 이 정신이 우리나라의 초의 스님 이전에 이미 1600년대에
있었다면 많은 분들이 놀라실 것입니다. 장원이 말하는 다도정신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다도와는 엄격한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 차이점보다는
초의 스님이 무리없이 수용한 그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장원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조선 중기 기인 중의 한 사람인 허균(許筠)
(1569-1618)의 <한정록(閑情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읍니다.
차를 딸 때는 정성스럽게, 차를 보관할 때는 건조하게, 차를
끓일 때는 청결하게 한다.
우리말로 옮기면 장원의 다록에 나오는 기록과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이 허균의 기록은 우리 차문화를 조명하는데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장원이나 허균이 전대 선배들의 차 문헌을 참고하여 자신들의 이론으로 끌
어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차를 잘 보관하
여 청결하게 차를 우려낸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명심하여야 할
차의 규범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햇차 맛보기를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원에 오자마자 찻잎을 따서 끓
는 물에 풍덩 담가서 마시거나, 푸른 찻잎을 다관에 담고 더운 물을 넣어
우려 마십니다. 조금 떫고 풋내가 나는 그 차맛은 한두번 즐기기에는 가지
고 있는 제 품성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그 향기와 빛 그리고 맛을 잃고 만
다는 것은 검소함과 덕있는 차생왈을 강조하는 차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고 생각됩니다.
중국에서는 입하 때가 되면 칠가죽(七家粥)과 칠가차(七家茶)를 먹습니다.
여기서의 칠기는 일곱 집이라는 뜻이지요. 이 풍속은 우리가 정월 대보름
때, 오곡밥을 여러 집에서 먹는 풍속과 비슷합니다.
칠기차란 일곱 집에서 각각 잘 만들어진 차를 가져와서 한 주전자에 넣어
차를 우려 여러 사람을 불러서 즐겁게 나누어 마시는 차를 말합니다. 칠가
죽도 이와같은 방법으로 나누어 먹는 풍속이지요. 요즘과 같이 반목이 많
은 시절에 칠가차와 칠가죽은 진정한 화합이라는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여
러가지 차를 혼합하여 우려내는 차는 차의 본래 맛을 잃게 하지만, 자신의
아상(我像)을 없애고 하나가 된다는 것과 그것을 여러 사람과 나누어 먹
는 풍속에 담긴 뜻은 우리가 배울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요즘음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하십니다.`차가 좋아서 차를
마시다가, 차를 마십네 하는 사람들이 싫어 차를 마신다는 말을 하지 않
는다\'고. 이말을 들으면 우울해집니다. 차 마시는 여러 어른들께서도 각각
차를 가져오셔서 차 한 주전자 끓여서 나누어 주시는 것도 이 5월에 할수
있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5월에 어울리는 다식은 송화다식(淞花茶食)입니다. 송화는 소나무 꽃가
루이지요. 그 꽃가루를 모아 꿀과 버무려 다식판에 박아 내놓으면 때깔 고
운 노란 빛의 송화다식이 됩니다. 이 송화다식과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반
가운 벗과 함께 소나무에 걸려 있는 흰 구름을 보는 것도 이 시절에 할수
있는 일이지요. 도은 이승인(陶隱 李陞仁)은 다음과 같이 그윽한 시 한수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산 남쪽 북쪽은 가는 길로 나누어지고
소나무 꽃가루는 비를 머금고 떨어지고
도인이 물을 길어 띳집으로 돌아간 뒤
푸른연기는 희구름을 물들이네
비를 머금은 송화가루가 뚝뚝 떨어지는 아침, 한 도인이 물을 길어가서 불
을 피우는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시는 차라리 글자가 그 어
느 구석에도 없지만 차의 내음이 물씬 배어 나옵니다. 고려말의 동은 이승
퓔▤ 차관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차내음은 더욱 짙어집니다.
고운 잎차를 다관에 넣습니다. 조금만 찻잔에 차를 따라서 송화다식과 함께
그대에게 권합니다.
그대 마음속에서도 뻐꾸기 우는지요.
6월의 차 - 마음 속에 차 다(茶) 자를 쓰며
봄의 꽃보다 더 아름다운 푸른잎이 눈부신 6월입니다. 낮의 기온이 올라가
기 시작하여 여름이 시작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달입니다.
이번 달에는 망종과 하지의 절후가 들어있고, 민속 명절인 단오가 있습니다.
망종 때는 보리는 수확하여 햇보리를 먹게 되고, 볏모가 자라나서 심게 됩
니다. 하지는 일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이지요. 이렇듯 바쁜 농번기에 일손
을 놓고 잠시 쉬는 날이 단오입니다.
이 6월의 기념할만 차 한잔의 옛일로서는 송대의 다구 모습을 그대로 전하
는《다구도찬(茶具圖讚)》이 쓰여진 일이지요. 그날은 하지가 지난 5일 뒤
입니다. 그럼 먼저 단오 때에 있는 차 풍속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단오 때에는 여러 민속이 있습니다만 차와 관련된 두 가지 민속이 문헌에
전합니다.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의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나오는
차부작은 부작을 쓸 때 쓰는 붉은 주사로 차 다(茶) 자를 써서 뱀을 쫓는다
고 합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꾸로 흐르는 물에 먹을 갈아 용 자를 써 네 벽에 붙이고,
단오날 오시에 주사로 차 다(茶) 자를 많이 써서 붙이면 뱀과
지네가 없다.
여기서 단오날 차 부작으로 뱀을 쫓는다는 이야기는 《증보산림경제(增보
山林經濟)》에도 보입니다만,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보기는 무척 어렵습니
다. 그러니 \'신다부\'라는 부작이 있는 것을 보면 차 자가 어떤 신통력을
가졌다고 믿은 것은 분명합니다. 신다는 악귀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
는 신도(神茶)와 울루(鬱壘)라는 대문을 지키는 문신을 가리키는 말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명나라의 전예형이 쓴 《자천소품》에 보
면 물에 관하여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우물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
이 보입니다.
갈홍(葛洪)은 말하였다. 5월 5일 날 닭털을 시험삼아 던져 보
아서 털이 곧장 내려가면 독이 없지만, 네 모퉁이를 빙빙 돌면서 떨어
지는 우물물은 마시면 안된다.
이 이야기나 앞서 나오는 이야기나 모두 오늘날 생각해 보면 이상할 따름
입니다. 날로 짧아지는 여름 밤, 이런 옛 사람의 마음을 더듬으면서 차 한
잔을 마시도록 하지요. 싱싱한 햇차의 맛이 신비롭게 입안을 적실 것입니다.
그리고 단오날 창포물에 머리를 단정하게 감은 뒤 창포뿌리로 비녀를 하고
차 한 잔을 우려내는 엣 여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즐거움입니다. 단오날 피는 창포는 우리가 흔히 꽃창포라고 부
르는 보라색과 흰색의 창포와는 달리 수수하기 짝이 없는 그런 꽃입니다.
일본에서는 우리와 달리 이 꽃창포를 유난히 좋아하여, 꽃창포를 수반에 꽂
아 놓고 차회를 열기도 하지요. 중국에서는 이 단오날을 약차절(藥茶節)이
라 하여 창포차를 마시고 약차를 만듭니다.
여름에 차를 낼 때는 물을 먼저 넣고 차를 우려내는 상투법으로 한다고 옛
문헌에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차를 넣고 물을 부어 차를 우려
내는 하투법이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고온 다습해지는 이 계절에 특별히 유
의하여야 할 것은 차의 보관입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차일지라도 차 보
관이 안되면 차가 지닌 본래의 맛을 잃게 됩니다. 차의 보관을 잘못하여 차
통에 습기가 차서 변질이 되면, 다음과 같은 심정이 절로 이해될 것입니다.
시름진 비는 한 달이나 강물처럼 내려
하늘은 밤낮으로 어두컴컴 해와 달을 감추네
항아리 속 좋은 술은 향기를 바꾸었으니
어찌 마실 수 없는 것을 마셔 사람을 취하게 하리
상자 속 향기로운 차도 맛이 많이 변했으니
끓여 마신다 한들 잠을 쫓을 수 있으리
이 시는 고려시대의 다인인 이규보의 《장마비 노래》입니다.
여기서 한 달 동안 온다는 비는 망종이 지난 뒤 6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7
월 초순까지 이어지는 매우(梅雨)를 가리킵니다. 이 시기에 매화의 열매인
매실이 노랗게 익기 때문에 매우 또는 황매우(黃梅雨)라는 시적인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때 강우량이 풍부하지 않으면 한 해의 수확량이 크게 줄게
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계속되는 장마는 의복 뿐만 아니라 집안이 눅눅해지고,
습한 곳에는 곰팡이가 핍니다. 이 시기에 습기를 싫어하는 차의 보관은 각
별히 신w서야 합니다. 차 보관이 불편하였던 그 옛날, 훌륭한 다인으로 손
꼽히는 이규보도 장마통에 차맛을 잃은 차를 이렇게 한탄하고 있는 것을 보
면 차 보관이 참으로 힘들기는 힘든 일인가 봅니다.
그래서 허차서의 《다소》에는 비오는 날에는 차 단지의 뚜껑을 열지 말라
고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차의 보관이 용이하고 과학적이어서
이런 불편한 점이 없지만 한번 연 차통 속의 차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마
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미리 차를 작은 포장으로 나누어 놓고, 마실
때마다 하나씩 풀어서 마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그러나 차의 종류에 따라서는 오래된 차가 더 좋을 수가 있습니다. 해를
많이 넘긴 차를 진년차(陣年茶)또는 노차(老茶)라고 하는데, 보이차와 오룡
차, 철관음과 같은 발효차로 진년차를 만듭니다. 녹차나 일반적인 차가 신
선한 맛이 잇다면, 진년차나 노차는 그와 다른, 중후하고 깊은 맛이 있지요.
옛 문헌에는 햇차와 묵은차를 섞어서 차를 우려내면 햇차가 묵은차의 맛을
도와 훌륭한 차우리기가 된다는 기록이 보입니다만, 오래 묵은 녹차는 마시
지 않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하지가 가까운 무더운 여름날 매미가 울기 시작합니다. 늘어지게 울기 시
작하는 그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여름날 차생활 준비를 시작합니다. 먼
저 차수건이나 차보도 삼베나 모시로 바꾸어 시원하게 꾸며보지요. 그리고
좀 여유가 있으면, 옛 어른들이 유기그릇에서 백자그릇으로 바꾸듯이 차그
릇도 차빛깔이 잘 보이는 그런 백자로 바꾸어 봅니다. 그리고 찻상과 차탁
도 대나무로 만든 소품으로 꾸며봅니다. 어떤가요? 한층 더 시원한 느낌이
들지요. 그리고 찻물을 끓입니다.
솔바람 소리 잣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립니다. 조심스레 찻통에서 차
를 들어낸 뒤에는, 나머지 차는 습기가 침입하지 않도록 꼭 싸서 차통에 다
시 넣어둡니다. 물을 붓고 차를 넣습니다. 가끔 개이다 다시 비오고 비오다
다시 개이는 사람살이에서 뱀과 같이 사악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이제 대
문이 아니라 마음 속에 주사로 차 다(茶) 자를 써 봅니다.
7월의 차 - 생각만 하여도 마음에 연그늘이 덮이는 연화차
덥지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절로 땀이 납니다. 이렇게 더운 날 우리 조상
들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차를 마셨을지 사뭇 궁금합니다. 이번 7월에는
소서와 대서 절기와 초복과 중복 그리고 6월 유두날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7월에는 뜨거운 차를 마신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마음가짐과 행위에서 이미 더위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동양문
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선조들이 더위를 이기는 데에는 다른나라의 피서법과는 달리 적극적
인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흔히 열로써 열을 다스린다는 이열치열(以熱治
熱)의 방법이 그것이지요. 그 대표적 예로는 복날 땀 흘리며 막는 삼계탕이
나 개장국과 한증이 있습니다. 차를 마실 때에도 이 이열치열의 정신에 바
탕을 둔 이런 말이 전해옵니다.
추울때 차를 마시고, 더울 때 차 마시기를 그치면 진정한 차
마심이 아니다.
여름날 차 마시는 풍속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마도 《부생육기
(浮生六記)》 속에 나오는 운(芸)이의 연화차가 아닌가 합니다. 임어당(林
語堂)에 의하면 중국의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인 운이는 훌륭한 다인으로서
충분한 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연화차는 비단봉지에 싸서 아직 피지 않
은 연꽃 봉오리 속에 넣어 두었다가 해가 뜨기 전 봉오리 속에서 꺼내어 새
로 길러온 샘물을 달여서 마시는 차입니다. 이 연화차를 생각만 하여도 넘
실거리는 연잎과 바람에 나부끼는 연꽃잎, 그리고 그 연잎과 연잎에 달린
아침이슬이 저를 운이의 곁으로 이끌어 갑니다. 물론 이 연화차는 청대에
유행하던 꽃차의 하나인데, 운이의 손길에 의해 우리에게 더욱 생생하게 그
멋과 향기를 전하는 차입니다.
요즈음도 이 운이와 같이 자기 나름대로 차를 마시는 방법을 개발하는 여
러 차 동호인들을 만날 수 있어 무척 즐겁습니다. 추울 때 차를 마시고 더
울 때 차를 마시지 않는 것은 진정한 차마심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옛 선배
들이 남긴 문헌을 살펴보면 복더위 속에서 차를 마신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요즈음 차 애호가들은 자기나름대로 이 더위속에서
도 쉽게 차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여 이웃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차가 섞인 마실거리와 먹거리는 주로 홍차와 가루차로 만들어집니다. 그
차와 음식들은 차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차생활을 오래한 사람
들도 신기하게 보십니다. 그럼 그런 마실거리와 먹거리에 관하여 알아 보도
록 하지요.
먼저 아이스크림과 가루차를 잘 섞어서 들어보십시오. 이 때 아이스크림은
향료가 없는 것이 좋지만 부득이 한 경우라면 바닐라 향이 섞인 아이스크림
도 좋습니다. 아이스크림과 가루차의 조합 비율은 빛깔과 맛을 조절해가면
서 자신의 기호에 맞추도록 하지요. 아이스크림의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들
도 조금 변형된 이 맛에는 만족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마실거리로는 사이다와 가루차를 섞어 마시는 방법이 있습니
다. 먼저 가루차를 잔 속에 넣고 찬 사이다를 부어서 조금 휘저으면 거품이
쏴하는 소리와 함께 잔뜩 피어납니다. 그 때가 가장 마시기 적합한 때입니
다. 그러나 이 마실거리의 아쉬운 점은 거품이 쉽게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마치 여름 소나기와 같은 시원함을 주는 마실거리라 하겠습니다.
어떤 차벗들은 차를 우려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마시면 갈증이 안나서
좋다고 하고, 어떤 차벗들은 차는 금방 우려서 마시지 않으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아직 여기에 관한 정확한 학계의 보고가 없음으로 여름철의 차를
마시는 한 방법으로 소개할 뿐입니다. 이웃 일본이나 대만에서는 오룡차를
알미늄 용기에 담아서 드겁게 하여 마시거나 차게 하여 마시는 방법이 개발
되어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알미늄 용기 속에든 오룡차가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일반화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술과 차를 사랑하는 벗들은 차를 술에 넣어 즉석 칵테일을 만들어서 마십
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차게 냉장시킨 소주와 오룡차를 섞어서 마시는 방
법이 유행합니다. 이 칵테일은 뒷끝이 깨끗하여 더욱 그 성가를 높이고 있
답니다. 차와 술은 그 특성이 상반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와같은 방법이 생
겨난 것을 보면 이미 서구에서는 뜨거운 홍차와 위스키를 조금 떨어뜨려 내
는 방법으로 홍차의 맛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위스키가 섞인 홍차가 겨울날의 사랑받는 차라면 이 소주와 오룡차의 차
마실거리는 여름날의 좋은 칵테일이라 할 수 있겠지요.
홍차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름날 즐길 수 있는, 정말 맛있는 아이스티를
만드는 방법을 하나 소개하지요. 먼저 홍차를 우려냅니다. 홍차는 녹차를
우려내는 요령과 같이 우려내는데, 붉은 장미빛으로 우러나는 것이 더 좋습
니다. 이렇게 우러난 홍차에 홍차 전용 설탕으로 단맛을 더하여 식힙니다.
그리고 모양을 주어 냉동실에서 얼리지요. 이제 준비가 되었으면 시원한 아
이스티를 만들어 보실까요.
먼저 홍차 한 잔을 우려서 유리잔에 담고 얼린 홍차 얼음덩이를 더합니다.
그리고 레몬 한 조각을 띄우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아이스티는 보기에도 아
름다울 뿐만 아이라 시간이 지나도 차의 맛이 옅어지지 않습니다. 여름날
야유회에 갈 대 홍차 얼음덩이를 만들어 가면 색다른 맛과 분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원한 차푸딩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지요.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한천을 끓이다가 홍차를 넣어 홍차빛이 우러나도록 끓여서 검
은 설탕으로 단맛을 주고 식혀서 냉장실에 넣어 두면 됩니다. 이 때 용기의
모양에 따라 푸딩의 모양이 바뀌므로 많은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부담없
이 먹을 수 있는 그 시원한 맛에 여러분도 놀랄 것입니다. 홍차를 넣고 너
무 오래 끓이면 빛깔도 탁할 뿐만 아니라 떫은 맛이 진해지지요.
아직 더우신가요. 그럼 제가 마신 여름 차 한 잔을 소개하지요. 몇년전 여
름, 차생활을 하신다는 스님 한 분을 뵈러 산사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날
따라 어찌나 무덥던지 땀으로 목욕을 하는 것처럼 해서 산을 올랐습니다.
급한 마음에 질러 간다고 한 것이 길을 잘못 잡아 산 정상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와 길을 헤매었습니다. 그러다가 물줄기 하나를 발견하고서 따라
올라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작은 암자와 요사채 하나가 동그마니 있었습니
다. 스님은 계시지 않고 그곳을 지키는 신도 한 분이 더운데 올라 오셨으니
세수를 하고 땀을 식히라고 하셨습니다. 땀을 식히면서 앉아있는데 그 신도
분이 뜨거운 차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차를 마시면서 저는 신기한 경
험을 하였습니다.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시고 조금 있자 갈증이 사라지면서
마음 속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때마침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
는지 산이 기웃하였지요. 그때 그 시원함,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신선이 된 듯한 바로 그런 기분이었지요.
여러분들도 운동을 하여 땀을 많이 흘린 뒤나 무더운 날 뜨거운 차 한잔을
들어 보십시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식혀
줄 겁니다.
8월의 차 - 느티나무 그늘에서 마시는 한 잔의 차
시원한 나무 그늘과 찬 음료가 생각나는 8월, 잎 지고 열매 맺는 가을을
생각하기엔 아직 이르지요. 그러나 이 8월의 첫머리에 가을이 시작되는 입
추가 들어 있습니다. 삼복의 마지막인 말복이 중순 경에 들어 있고, 더위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처서가 8월의 끝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이든지
가득 차면 넘친다는 옛 말씀이 과연 허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절기 외에도 이 8월에는 칠월 칠석과 칠월 백중이 들어 있어 무
더위에 찌는 한여름을 보다 시원하게 만듭니다. 칠석이 한밤의 축제라면 백
중은 한낮의 축제입니다. 물론 칠석날에 낮의 모임이 없는 것이 아니고, 백
중날 밤의 모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웬지 칠석에는 밤의 정서가 흐르고
백중에는 낮의 힘찬 정서가 흐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 이즈음에
옛 선배들이 차를 마신 기록을 더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입추가 되면 가으르이 기운을 아침이슬이나 아침안개로 먼저 알 수 있습니
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지요. 이 가을 바람 속에서
여성다인인 영수합 서씨는 차를 마시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놓고 있습
니다.
내 쇠약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너도 늙었으니 내 마음 알 것랬
지팡이 짚고 나서면 가을바람 차고
창을 열면 옥같은 이슬 맑기도 해라
비록 거문고와 피리소리는 없어도
술과 차는 갖추어 놓았네
한가로이 느티나무 그늘에서 졸면서
어찌 명리를 다투리
이 시는 영수합 서씨가 동생에게 보낸 시입니다. 한 발자국 물러서는 여름
날의 찬바람과 아침이슬에서 영수합 서씨는 문득 자신의 가을을 발견한 것
이지요. 그리고는 자신과 함께 늙어가고 있는 동생에게 자신의 근황을 시로
적어 보내고 있습니다.
그녀가 느티나무 그늘에서 졸면서 마시던 한 잔의 차는 과연 어떠하였을
것인지 위의 시로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찻자리가 실내가
아닌 밖으로 옮겨져 있다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여름날 차생활을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