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에게 '설'이란 것은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해준 조상에 대한 감사를 기념하는 것도 있지만
멀리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그간의 묶혔던 '情'의 확인을 하는 그런 자리이기도 하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의 다른 의미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항시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의 그 낡은 집에서 매번 치르곤 하는데
그런 설을 나는 내 인생에서 세번인가 참석을 하지를 못했다.
그 중의 한번이 이번의 설(신정 설/아버님이 생존시에 양력으로 지냈기에 어머니는 당신 생존시까지는
당신의 사랑이 해왔던 양력설로 지내라는 바람으로 치르는 설임)이다.
나는 이번의 설날 아침을 시흥본동에서 맞게 되었다.
전날 낮에 내자와 두 아이들은 P.M 1시 50분 경춘선 열차로 고향집으로 향했다.
그 출발 직전에 천둥벌거숭이 둘째가 지 엄마의 핸폰으로 전화를 해서는 '아빠, 이제 출발할려고 해요.'
라고 전화를 해주었고, 그리고는 '엄마 바꿔줄께요.'하고는 지 엄마를 바꿔주었고, 내자는
언제 내려오느냐?고 물어서 오늘은 제일 바쁜 토요일이니 아마도 좀 늦을 것이라고 말해주고는
전화를 끊었는데 그냥 작은 녀석의 그런 행동을 떠올리면서 웃음이 절로 생겼다.
고향길이 무슨 큰 여행이라고 그리 들떠서는 흥분된 목소리로 그렇게 쭈절대는지...
그리고 지녀석이 보기에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한 듯 하다.
그리고는 오후의 여러가지 일을 처리하고, 05년의 마지막 정상업무를 처리하던 중에
송파사무실과의 의견충돌이 발생하여 여러가지로 급하게 업무를 처리했으나 그 중에 미처
해결을 못하는 것이 있어서 그로 인해 결국은 고향으로 향하지를 못하고 시흥본동에 주저앉았다.
05년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로 현장기사들과 사무실에서 소주에 막걸리로 간단히 한 잔을 걸치고는
그렇게 해서 닭의 해를 취중에 보내게 되었고, 제야의 그 큰 종소리를 듣는 듯 마는 듯하게 듣고는,
아내와 어머니에게 그런 불미스런 내용을 유선상으로 알리고는 그대로 골아떨어져 버렸다.
그렇게 병술년의 새아침을 맡게 되었는데 새벽부터 내 핸폰이 울렸다.
그래 받으니 큰녀석이, '아빠, 다른 것은 다 알겠는데 술잔(퇴주잔을 뜻함)의 술은 어떻게 해야 하죠?'
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재천아, 홍동백서,.....대로 놓았니?'하고 물으니 '다른 것은 아빠처럼
그렇게 다 놓았는데 이 술은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겠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응, 그것은 할머니에게 대접을 하나 달라고 해서는 그 곳에 부으면 된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제서야 알겠다고 하고는 지 고모들과 사춘들과 그리고 고모부들이 모두 있음을 이야기를 했다.
아들 상주가 없는 대신에 손주 맞상주가 어느새 그렇게 커서는 지 애비를 대신해서 제사상을 꾸미는
것을 지켜보셨을 어머니의 생각에 잠시 뭉클했다.
그리고 친손주, 외손주들과 딸들과 며느리,사위들의 울타리에서 내가 없어도 덜 서운했을 어머니생각에
젯상을 차리지 못한 나의 우울한 마음이 조금은 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지놈의 할머니인 내 어머니를 바꿔주는 것이었다.
'아범, 인제 재천이가 다 컸어. 아빠가 없다고 젯상을 다 차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셨고
'아범, 걱정하지마. 동생네들이 모두 왔으니.'라고 하셨다.
그래 나는 큰애를 바꿔달라고 해서는 덕담을 하고, 막내와도 그렇게 덕담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제사가 끝나고 제사밥으로 아침들을 먹고는 그 모든 가족들이 죽림동의 그 성당에서 오전11시의
미사를 보았고, 나는 성탄미사를 보았던 그 시흥4동의 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
나는 나와 본명이 같은 주임신부님의 새해 미사의 강론을 듣고, 성체를 모셨다.
퇴장성가를 부르지를 못했는데 그 즈음에 계속 핸폰의 진동이 울렸다. 한 5~6회 이상이 되었던 것
같았다. 그것은 S.M.S라 부르는 문자메세지였는데 친구들, 의동생들 그리고 거래처들에서 오는
그런 신년의 축하메시지였다.
참좋은 세상이 된 것인지 아님 아주 편의적으로 된 세상인지 올 해는 카드를 한 장도 못받았는데
대신에 이리 유선상의 메시지를 비슷한 시간에 여러통을 받게 되었고, 그로인해 그렇게 퇴장을 먼저
하게 되었고, 그 길로 사무실로 향하면서 아들녀석의 그 전화가 생각이 나서
이녀석이 벌써 나를 대신할 수가 있게 되었구나!하는 대견함도 떠올렸고, 내가 벌써 대물림의 시점에
와있구나!하는 그런 세월의 무상감도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 내 가족들은 오후에 밀릴 것을 우려하여 서둘러서 서울로 향했고,
그 사이에 ㅇㅇ산악회의 회장과 친구인 이원형이 불암산의 산행을 마치고는
하계동의 창대돈까스에 왔고, 내자와 아이들도 그 때에는 집에 도착을 하였기에
큰 놈을 불러서는 회장되는 분과 친구에게 인사를 시켰고, 이미 구면인 두 사람들은 그 어릴 적의
모습만을 기억하다가 185cm의 큰 키에 놀라면서 새벽의 큰 놈과의 통화내용을 듣고는 회장되는 분이
'벌써 그리 짐을 지우면 되는가?'하는 것이었으나 친구는 내 전력을 알기에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이었다.
그렇게 하여서는 그 회장과 친구와 찐하게 어울리고, 내자의 서빙을 받으면서 06년의 첫날을 보냈다.
취중에 중국의 어느 성인이 읆조린 '인생삼락'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태백인지 주태백이...
그리고는 '내가 벌레인지, 아님 벌레가 나인지'와 같은 그런 허무맹랑한 망상도 해보면서.
06년의 첫날, 젯상을 아들에게 대신차리게 하면서, 망상과 취중속에서 보낸 마당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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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야기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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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도 외아들이어서 어머니, 딸과 아들, 내자와 서울집에서 차례, 제사를 치릅니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내가 춘천으로 가면 고생한다고 양손에 이것저것 잔뜩 싸가지고 서울로 오십니다. 추모예배로 대신하고 싶은데, 어머니 정서가 아직은 아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