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백제 역사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유네스코 측은
“백제 유적들은 한중일 3국 고대 왕국들 사이 상호 교류 역사를 잘 보여준다”고 했다.
1400여 년 전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중심이었던 백제 문화유산이 비로소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거듭난 것이다.
백제의 유적들은 일본에도 많이 남아 있다. 고대 일본에 문화와 문명을 전수하며
함께 성(城)을 쌓고 절을 지었으니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어제 소개한 수성과
다자이후에 이어 백제인이 대거 왜(倭)로 건너와 아예 도시를 만든 곳이 있으니
오늘은 바로 그 도시 이야기이다.
망국의 비애를 품고 새로운 땅으로
삼국사기 등은 멸망 당시 백제 호구 수가 76만 호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당 5명으로 계산하면 인구수가 약 380만 명으로 추정된다. 663년 백강전투에서
패하면서 나라를 완전히 잃은 백제인들 중 3000명 이상이 왜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3년 전 사비성이 멸망할 때를 포함해 이때를 전후로 대략 20만 명의 백제인이 건너간
것으로 추산된다.
이미 많은 친척과 가족들이 터를 닦고 살았을 터이니 백제인들에게 왜는 남의 땅이
아닌 혈육의 땅이었을 것이다. 가슴속으로는 망국의 한을 그대로 간직한 채 형제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일궜을 것이다. 그 대표적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오사카 부
동북부 히라가타(枚方)이다.
오사카 시 중심 난바(難波)에서 차로 50분 거리의 히라가타 시를 찾았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들어서니 고목들이 뿜어내는 푸른빛이 눈부셨다. 일본 내에서도
유명한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히라가타 시의 여러 문헌과 유적들은 오래전 이 땅의
주인이 백제인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표적인 유적지가 백제사(百濟寺)였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히라가타 시는 이 백제사 터를 ‘백제사적공원(百濟寺跡
公園)’이란 이름으로 조성해 놓고 있었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날은 평일이어서 그런지
한산했다.
일본 속 ‘리틀 백제’
33년간 이곳에서 발굴 담당으로 일해 온 시 교육위원회 사무국 문화재과 매장문화재
담당 오다케 히로유키(大竹弘之) 선생은 “1932년 발굴 조사를 시작한 이후 1962년에
이어 2005년까지 3차 조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평범한 땅인 줄 알았던 이곳이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 건 1932년. 오사카 부
사적명승기념물보존조사회가 소규모 발굴을 시범 실시한 뒤 이곳에 유적이 있을 것
이라는 의견을 내자 1940년대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결과는 놀라웠다. 비교적 정확한
형태로 8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가 나온 것이었다. 오다케 선생은 “‘백제사’에 대한
기록은 1679년 ‘하내감명소기(河內鑑名所記)’에서 처음 발견된다. 책에는 ‘백제왕의 궁’
‘가람의 옛터’란 표현이 등장한다”며 “절을 지은 사람들이 백제인이었다는 사실에 일본
사회가 술렁였다”고 했다. 게다가 백제사가 끝이 아니었다. 발굴이 지속되면서 백제
왕조를 모시는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 터와 도로 주거 흔적까지 발견됐다. 더 놀라운
건 백제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도로, 북쪽의 집터와 우물, 기와 굽는 터 등이
가지런히 배열됐다는 점에서 계획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히라가타는
한마디로 ‘리틀 백제’였던 것이다. 2차 발굴조사가 끝날 즈음인 1952년 일본 문부성은
이 일대를 특별사적으로 지정했다.
오다케 선생은 “추가 발굴 과정에서 도시 규모가 훨씬 크고 도시가 존속했던 기간도
훨씬 더 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며 “당시 문부성은 이곳을 고대 한일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중요 유적으로 인정해 특별사적으로 지정했다”고 소개했다.
바람이 거세져 오다케 선생이 사무실로 쓴다는 허름한 창고로 옮겼다. 창고에 들어서니
플라스틱 정리함 수백 개가 눈에 들어왔다. 정리함엔 지난 10년간 이어진 3차 발굴
작업에서 나온 유물들이 비닐 팩에 담겨 가지런히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8세기의 토기,
석탑, 기와지붕 등의 조각 더미를 보고 있자니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 출토 유물 연대기 측정으로 미뤄 볼 때 백제사는 8세기 중엽 창건돼
11세기경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백제사는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간 2차 조사 때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는데 동쪽과 서쪽에 각각 탑을 배치하고, 북쪽에 금당과 강당을
배치한 구조가 경주 불국사와 유사한 가람배치였다.
백제사에서는 또 왕족 관련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는 대형 다존전불(多尊塼佛·흙틀로
찍어내 제작하는 불상) 조각들도 발굴됐다. 오다케 선생은 “2007년 요미우리신문이 1면
기사로 백제사의 대형 다존전불 발굴 소식을 전하면서 이곳을 다스리던 ‘백제왕’씨가
천황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라고 보도했다”고 전했다.
백제 유민 이끈 경복왕
그가 언급한 ‘백제왕’씨란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백제왕(구다라노
코니키시)’씨란 바로 이 히라가타에 백제신도시를 만들었던 주인공들이었다.
백제사 터 왼쪽에 자리한 ‘백제왕신사’가 이 마을의 유래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것을
전하고 있었다. 백제왕신사는 백제 마지막 왕 의자(義慈)왕의 아들인 선광(善光)왕과
우두천왕(牛頭天王·신라계 신)을 함께 모시는 신사이다. 옛날 모습으로 복원된 신사
안으로 들어가니 신사를 소개하는 비석이 나왔다.
비문에는 일본 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백제 선광왕은 조국이 멸망했을 때 일본에 망명해 왔다. …
‘백제왕’이라는 성을 하사 받아 오사카 시 난바에 거주했다.
선광왕의 증손인 경복(敬福)왕은 동대사(東大寺) 대불 주조에 금을 헌상해
하내수에 임명됐다. 경복은 일족 결합의 상징이자 일족의 명복을 위한 백제사,
씨족 신사인 백제왕신사를 축조해 일족 다 같이 이 땅에 자리 잡고 산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663년 백강전투에 대규모 왜군을 보냈던 덴지(天智)왕이 왜로 건너온
선광왕 일족을 이듬해인 664년에 나니와(옛 오사카를 일컫는 이름)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들은 나라 시대인 8세기경 히라가타 시로 옮겨오는데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도지사 자격으로 지역을 다스리며 도시를 이루고
살게 된 것이다. 아무리 왜가 살 곳을 마련해 준다 해도 거기서 일족을 이루고 후대까지
번성해 나간다는 것은 독자적인 노력 없이는 힘든 법. ‘백제왕’ 씨족들이 히라가타에
정착하게 된 배경에는 선광왕의 4대손(孫)인 ‘경복왕’의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당시 동대사(용어설명) 건설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붓던 쇼무(聖武)
왕이 금이 부족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경복왕이 무려 황금 900냥을 바쳤다는
것이다.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장은 “당시 백제인들이 갖고 있던 많은 기술 중
하나가 바로 금을 채취하는 기술이었다”며 “경복왕은 무쓰노쿠니(陸奧國)란 곳에서
금을 발견해 일약 궁내경(도지사격)으로 승진하면서 백제왕씨 번영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고 말했다.
백제사는 817년을 끝으로, 백제왕씨는 9세기를 지나면서 문헌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후 문헌에 기록된 백제왕씨의 마지막 발자취는 오사카 부 가타노(交野) 시의
사냥터에서 하급 관리로 일한 것으로 나온다고 오다케 선생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