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1일은 만우절이다.
4년전 2003년도 4월 1일 만우절 인터넷 뉴스와 신문에는
홍콩의 미남 스타 장국영이 고층빌딩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동성연애자와의 삼각관계로 인해 심리적 갈등을 견디다 못해
끝내 죽음의 길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과 우리나라의 많은 팬들은 처음에는 만우절의 농담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사실임을 확인하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젊은 날 장국영에게 심취했던 팬의 한 사람으로서 놀라움과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홈페이지와 바람새에서도 장국영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남겼다.
어제 인터넷 뉴스를 보니 중국에서는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사망일을 즈음해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하고 극장가에서도 그의 영화를 상영한다고 한다.
나도 갑자기 그가 생각나서 옛날 썼던 글을 다듬어서 다시 한번 써본다.
장국영은 영화배우인 동시에 가수이다.
그는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85년 흔히들 홍콩 느와르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불리는 <영웅본색>에서
갱의 동생으로서 경찰이 되어 형제간의 갈등을 겪는 역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그는 여리고 순진하면서도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젊은 형사의 역할을 잘 소화하여
아시아의 많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겨준다.
약 2년 뒤 왕조현과 같이 출연한 <천녀유혼>에서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오른다.
그 뒤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패왕별희> 등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장국영의 수많은 영화 가운데서
나에게 가장 강열한 인상을 남겨준 영화는 <천녀유혼>이었다.
이 영화는 홍콩에서 개봉하였을 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개봉관에서 반응이 신통찮았다.
그러나 변두리 극장으로 건너가면서 뒤늦게야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나중에 가서는 수많은 마니아들을 만들어낸 특이한 영화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을 88년도 늦은 봄이다.
당시 아내는 첫째 애를 가져 약 보름 정도 서울 친정에 나들이를 가고 없을 때였다.
벚꽃으로 유명한 진해는 군항제 기간 중에만 전국에서 몰려온 꽃놀이 인파로 북적거릴 뿐,
보통 때에는 아무런 자극이 없는 그야말로 한적하다 못해 따분한 도시이다.
그날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5시 10분에 퇴근하여 자전거를 타고 학교 정문을 나서서
동료 장교들과 어울려 식사를 마치고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적한 시내쪽으로 가다가
거리에서 우연히 <천녀유혼>의 포스터를 보았다.
아내도 없어 심심하니 중국어 공부나 하자는 심정으로 극장에 들어갔다.
포스터에서 받은 첫인상이 별로 시원찮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순간부터 숨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다.
짙푸른 색깔의 화면에는 폐허가 된 사찰 난약사의 현판이 보이고
음산한 경내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 절 안에는 주황빛 등을 켜고 책을 읽는 서생이 있다.
갑자기 나타난 흰 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달콤한 음악에 맞추어 황홀한 춤을 춘다.
그녀의 춤에 반한 서생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고 둘의 뜨거운 정사가 시작된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급작스럽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낡은 종들은 울리고
이상한 그 무엇이 나타나 방안으로 들어가고 여인은 몸을 옆으로 피한다.
서생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달아나려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리고는 화면 가득히 펼쳐지는 붉은 천, 그 위에 붓글씨로 펼쳐지는 영화제목 ,
倩女幽魂 (아리따운 여인의 떠도는 혼)...
그리고는 아름답고도 몽환적인 음악과 함께 타이틀이 시작된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장국영이다.
人生 夢如路長 讓那風霜風霜留面上
紅塵裡 美夢有多少方向
找痴痴夢幻的心愛 路隨人茫茫
人生是 夢的延長 夢裡依稀依稀有淚光
何從何去 覓我心中方向
風悠悠在夢中輕嘆 路隨人茫茫
人間路 快樂少年郞 在那崎嶇中崎嶇中看陽光
紅塵裡 快樂有多少方向
一絲絲像夢的風雨 路隨人茫茫
인생, 기나긴 길과 같은 꿈
바람과 서리 얼굴에 잘 날 없네.
홍진 속에서 아름다운 꿈은 얼마나 많은 갈래가 있는지
어리석은 몽환 속의 사랑을 찾아가는데
길도 사람도 아득하기만 하구나.
인생은 꿈의 연장
꿈속에서 아련히 눈물 빛이 어른거리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내 마음 속의 길을 찾아가네
바람은 꿈속에서 아련히 소리치는데
길도 사람도 아득하기만 하구나
인생의 길, 쾌락을 찾는 소년들
그 기구한 길속에서도 햇살은 보이는 것
홍진 속에서 쾌락은 얼마나 많은 갈래가 있는지.
한 줄기 꿈과 같은 비바람 속에서
길도 사람도 아득하기만 하구나
이 얼마나 시적인 가사인가?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삶의 깊이가 드러나고 있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주인공은 하염없이 길을 가고 있다.
사실 우리의 삶 자체가 나그네 길인데
그 속에서 주인공은 하염없이 꿈길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 나그네 길속에는 맑은 날도 비 오는 날도 있다.
노래가 끝날 무렵에 주인공은 빗길 속에서 진흙탕에 빠진다.
그 진흙탕은 주인공이 앞으로 겪어야 할 한바탕 치정을 암시해준다.
이 영화는 얼른 보기에 공포영화 같지만 공포영화는 아니다.
중간 중간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무술과 활극이 자주 등장하지만 결코 무술 내지는 활극영화는 물론 아니다.
영화의 주제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과 귀신과의 몽환적인 사랑이야기이다.
영화가 방영되는 시간 내내 나는 그 몽환적인 사랑에 완전히 몰입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져서야 비로소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 순수한 서생과 아름다운 귀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너무나 애틋하게 가슴에 저미는 것이었다.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그대로 앉아서 다시 한 번 더 보았다.
이미 스토리의 전개를 알고 있기에 처음 볼 때에 비해서 강렬한 긴장감은 없지만
오히려 그 몽환적이면서도 애틋한 분위기에 더욱 휘말리는 느낌이었다.
다시 보고 싶었지만 이미 극장은 문을 닫으려고 하고 있었다.
극장을 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밤늦은 거리를 거쳐 집에 돌아와서도
영화의 주요장면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다음 날도 계속 머릿속 을 맴도는 장면들과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는 애틋한 감정때문에
하루 종일 멍하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근무를 마치자마자 밥을 먹고 바로 그 극장에 갔다.
그런 식으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매일 두 번씩 보았다.
아쉽게도 토요일은 다른 영화로 바뀌는 바람에 극장에서의 관람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천녀유혼>에 대한 나의 갈망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외국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핑계를 대서 비디오 기계를 사고 난 뒤
비디오 가게에 가서 해적판을 구하여 계속 보기 시작하였다.
마침 아내는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마음껏 비디오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밤마다 맨날 <천녀유혼>과 같이 살았고
아예 영화를 카셋트테이프에 녹음하여 낮에도 카셋트를 틀어놓고 계속 들었다.
나는 영화를 계속 보고 들으면서 나중에는 영화 전체의 대사를 다 암기하였고
나중에는 눈만 감으면 영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그대로 떠오를 정도가 되었다.
극장에서 본 횟수와 비디오로 본 횟수 그리고 오디오테이프로 들은 횟수까지 다 합쳐서
무려 110번 정도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한 영화를 백 번 이상 본다는 것은 거의 미친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천녀유혼>이 썩 그렇게 잘 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약간 유치한 그저 그렇고 그런 홍콩 영화이다.
그렇지만 화면 전체를 가득 메꾸는 푸른색과 붉은 색의 강렬한 대비
애잔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의 배경음악과 주제곡, 그리고 삽입곡들은
그리고 장국영의 연기와 왕조현의 분위기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애틋하면서도 몽환적인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영화 속으로 푹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돌아온 아내는 내가 <천녀유혼>을 보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아내는 내가 중국어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천녀유혼>을 계속 보고 있지만
사실은 영화 속의 여주인공인 왕조현에게 홀딱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임신한 아내를 두고 영화 속의 처녀귀신과 사랑에 빠진
무정하고 철없는 남편이라고 구박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왕조현에게 빠졌던 것은 아니었다.
왕조현은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은 아니었다.
내가 그 영화에 빠졌던 것은 왕조현 때문이 아니라 장국영 때문이었다.
영화 속의 장국영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지닌 인물로 나온다.
남자를 호리는 데는 도가 튼 여자귀신마저도 감동시키는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청년,
사랑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굳센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위해서는 이승과 저승을 초월하여 자기의 몸을 던지는 그 청년의 역할은
그 크고 순진한 눈매의 장국영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나는 영화에 푹 빠져들어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몽환 속에서 애틋한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누구나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몽환적 사랑에 대한 갈망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 풀 수밖에 없지 않는가?
장국영, 참으로 아까운 인재다.
이제 그는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버렸다.
꿈과 같은 인생 속에서 그렇게 여러 갈래의 쾌락을 추구하던 미소년,
그는 저승 속에서도 머나먼 꿈속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줄기 꿈과 같은 비바람 속에서 사람도 길도 아득하기만 하다는
<천녀유혼>의 주제가 가사가 가슴에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비록 영화를 통해 부와 명예를 가지게 되었지만 영화와는 너무나 다른 이 현실,
이 삭막하고 차가운 현실 속에서 여린 마음을 지닌 그는 많이 괴로워하였으리라.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끝내 차가운 빌딩 숲에서 몸을 던져버린 것이리라.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그처럼 여리고 착한 나머지
삶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높은 곳에서 몸을 던져 생을 버린 이들이 있기에
그의 죽음이 더욱 가슴에 파고든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버리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한 번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저승에서나마 편히 쉬기를 기원한다.
너른돌
첫댓글 말씀하신 영화를 저도 다 보았는데...저는 패왕별희 에서 동성애자의 역할을 하던 그가 떠 오르는군요...참 잘한다고 생각 했었는데...그랬군요..안타깝다. 죽었는지도 몰랐읍니다.. 근데 같은 영화 110번 보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요? ㅎㅎㅎㅎ굉장히 정상 적인 분으로 뵈었는데...하하하하하 그 만큼 열정이 있다고 봐야 올겠죠?
ㅋㅋㅋ 네, 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 한 군데 미치면 정신 못차리는 유형이올시다.^^ 그 영화에 미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중국어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지요.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를 입으로 줄줄 외었으니, 그것도 감정과 분위기를 그대로 실어서....
너른돌님의 글을 읽고나니..천녀유혼도 함 보고싶고..장국영이 불렀다는 주제가도 들어보고 싶네요..교수님처럼 그렇게 한군데 미치면..정신 못차리는 사람이 뭔일을 내도 크게 내는법이라는...^^
'장국영' 나나님 처럼 패왕희를 보고 좋아 했던것 같아요. 패왕희를 저도 다섯번 정도는 본듯...그러면서 경극이란것에 조금 관심을 가지며 한나라의 배우의열연으로 그나라의 문화를 전파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했던 배우로 남아 있답니다.
역쉬 저런 열정이 어디에서 튀어나올까 궁금하다는... 기억속의 '천녀유혼'을 떠올려봅니다^^
바이올렛님, 천녀유혼 한번 보세요. 아마 비디오 가게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짤라 먹은 데가 좀 많고 번역이 엉터리여서 아쉽지만 그런대로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2편, 3편은 보지마세요. 패왕별희, 참으로 괜찮은 영화지요. 그 영화도 장국영이 아니었으면 하기 어려운 역이었을 겁니다. 화니님 말대로 경극을 소개하는 가장 성공적인 영화이지요. 별사모님도 천녀유혼을 보셨군요. ^^
다시 보고 싶군요. <천녀유혼>. 하얀 천이 휘날리는 것만 생각남^^
저역시 예전에 천녀유혼을 보며 좀 산만하고 이해가 않가 명성만큼 재밌는 영화는 아니라 생각했었지요.고저 왕조현의 미모만 쳐다 보느라 그랬는진 모르지만
필시 그랬을거라는 추측을..
영화를 잘라먹은 곳이 많고 번역이 엉터리가 많아서 그렇답니다. 실제 산만한 영화는 아니랍니다. 제가 보증하건대 나름대로 짜임새가 있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왕조현, 원래 대만의 농구선수였다가 배우가 되었죠. 키가 워낙 크기 때문에 하얀 천이 휘날리는 전통 복장이 어울렸을 거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