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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大學 제 일장을 살펴 공부에 대한 전체적 구도, 방법, 효과를 설명 하겠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知止而后有定. (지지이후유정,)
定而后能靜 (정이후능정)
靜而后能安 (정이후능안)
安而后能慮 (안이후능려)
慮而后能得 (여이후능득)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물유본말, 사유종시, 지소선후, 즉근도의)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고지욕명명덕어천하자, 선치기국)
欲治其國者, 先齊其家(욕치기국자, 선제기가)
欲齊其家者, 先脩其身(욕제기가자, 선유기신)
欲脩其身者, 先正其心 (욕수기신자, 선정기심)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욕정기심자, 선성기의)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욕성기의자, 선치기지)
致知, 在格物 (치지, 재격물)
物格而后知至 (물격이후지지)
知至而后意誠 (지지이후의성)
意誠而后心正 (의성이후심정)
心正而后身脩 (심정이후신수)
身脩而后家齊 (신수이후가제)
家齊而后國治 (가제이후국치)
國治而后天下平 (국치이후천하평)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脩身爲本 (자천자이지어서인, 일시개이수신위본)
其本亂而末治者否矣 (기본난이말치자부의)
其所厚者薄而其薄者厚, 未之有也 (기소후자박이기박자후, 미지유야)
[대학의 목표는 분명한 德(이치를 밝히고 그 중에 이롭게 하는 이치)을 밝히는데 있고 그 밝힌 덕을 백성과 가깝게 하는데 있으며 그리하여 백성들이 지극한 善에 머물게 하는데 있다.
앎(어리석은 앎, 또는 마음의 번잡함)이 쉬어야 마음이 바로 잡히며
마음이 바로 잡혀야 마음이 조용해지며
마음이 조용해진 후에야 편안한 마음이 되며
편안한 마음이 되어야 생각할 기반을 갖춘 마음이 된다.
이러한 마음에서 생각해야 얻는(깨닫는 것, 지혜) 것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것은 근본 된 것과 지말적인 것이 있고
세상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러하니 선후를 알아야 도(이치)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진정한 덕으로 천하를 밝히려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치료해야 하고, 그 나라를 치료하자고하니 가정을 먼저 치료(가지런히)해야 하며, 그 가정을 치료하고자 하니 자신을 먼저 치료(바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하니 자신을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바로 해야 하고, 그 마음을 바로 하려 하면 그 뜻을 성실히 해야 하고, 그 뜻을 성실히 하려면 그 아는 바가 자세하여야 하는데, 자세한 앎이란 법칙과 만물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있는 바 자연의 법칙과 만물의 존재 양상을 잘 살펴야 한다.)
있는바 법칙과 만물의 존재양상을 자세히 살핀 후에야 앎에 도달할 수 있고
올바른 앎이 있어야 비로소 뜻이 성실해진다. 뜻이 성실해지면 마음이 바로 될 것이고 마음이 바로 섰으니 자신을 바로 세워 나갈 수 있고 자신을 바로 세울 줄 알아야 비로서 가정이 가지런해지는 것이다. 가정이 평화롭고 가지런해지니 이제야 비로소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생기며 그렇게 세상에 참여하니 천하가 평안해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대통령에서 일반서민까지 스스로 오로지 자신을 바로 세움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 근본이 어지러워서는 그 근본을 따라 생긴 세상일이 치료되기는 난망한 것이니
왜냐하면 후한자가 박하게 살고 각박한 자가 후하게 사는 것은 있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공부에 가장 긴요한 요체를 설명 하는 길이니 자세히 보고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우선 공부는 왜 하느냐를 밝히고 있다. 왜 하느냐?
진리 중에 사람의 삶에 진정으로 유용한 덕을 밝히려 하는 것이고 그 밝힌 덕을 나 혼자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가깝게 가지고 놀 수 있게 하자는 것이요 그렇게 해서 세상사람들이 어질어지고 행복하게 살게 하려는 것이다.
누차 강조해온 바이지만 진리는 이러한 사랑의 마음이 없는 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법이니 그 공부의 시작하는 마음이 이러해야 함이다.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이것은 공부를 하기 위해 준비돼야 할 마음 자세에 대한 글이다.
앎을 쉬어야 마음이 바로 잡힌다 했는데 여기서의 知는 깨달음의 앎이 아니고 소위 말하는 번뇌 망상이다. 즉 공부를 하려는 마음이 아니고 이런저런 잡생각, 근심 걱정 등 일상생활에서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번뇌가 보리라는 불가의 말처럼 이런 잡생각이 진정한 지혜와 다른 것은 아니지만 우선 공부하려면 자세히 살피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 때는 당연히 집중하여 연구해야 하는바 그 마음을 쉬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의 생각을 멈추고 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한 곳에 집중할 준비가 되는 것이고 그러한 마음이 되어야 마음이 조용해지고 편안하여 비로소 자세히 생각할 수 있고 그러한 자세한 살핌이 있어야 깨닫는 바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우선 지금 이 단계는 공부를 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불교에서는 수식관(호흡을 관찰하며 마음을 쉬는 법), 천팔십배 염불 등 여러가지 마음을 쉬는 전문적 방법들이 있다. 왜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동원하는가 하면 우리의 마음이란 것이 좀처럼 주인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좀 쉬고 공부를 하고자 해도 그 동안의 습성 때문에 자꾸 여러가지 잡생각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러한 방편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니 독자들은 공부를 좀 하겠다는 마음이 있을 때 이런 번잡한 것에 홀리지 않기를 바란다. 또 불교계의 일부 사기꾼들은 이런 방편적 행위를 팔아 많은 사람을 혼란 시키는 바가 있으니 잘못하면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멀리하고 방편에 불과한 것에 매달려 시간을 허송세월 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친절한 가르침은 마음을 쉬게 한 후 사유를 통한(화두 등)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 이건만 어리석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을 번뇌, 분별망상이라 하여 왠수 대하듯 하며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이니 우리는 공자님의 말씀처럼 다만 마음을 정갈하게 하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함을 알자. 또 마음의 알고자 함이 간절하면 다른 방편 없이 마음은 쉬는 것이요 충분이 생각할 준비가 되는 것이니 명상이다, 수식관이다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마음을 쉬어 생각하라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자세히 분별하여 놓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마음 하면 보이지 안는 것이니 대충 뭉뚱그려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다. 그러나 공부는 대충하면 되지 않으니 대충하면 대충 알게 되고 대충 알면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며 확신이 서지 않으면 일에 부딪혀 또 흔들리는 것이다. 마음의 현상도 이렇게 자세히 공부한 공자이니 표현에 자세함이 당연한 것이요 이렇게 자세하고 분명히 알아야 진정으로 다 알았다 할 것이고 마음에 생긴 여러가지 다름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또 다시 말하지만 나의 의견에 대해 반박의 말들
예를 들어
원래 한마음 둥그렇고 원만한데
그 마음 이렇게 자세히 분별함 번뇌망상이다
분별망상심 다 털어버리고 ‘무심무처’에 이르러라
한 물건도 없는 그 곳이 무진장이니라.
(이 글의 뜻은 중용과 같아서 나타나기 전에 비일물이나 그 것은 중용에서 모든 것이 벗어나지 않는 것이란 이치와 같은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을 이용하여 분별 망상이 없는 것을 한 물건도 없다 이해하는 것은 이 뜻을 모르는 자의 견해이다)
와 같은 말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잘 알지도 못하는 무리들이 자신의 미망 속에서 그저 이말 저말 조합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은
사실 우리 주위에 이러한 소견에 빠져 갈 곳 몰라 하는 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빨리 도인인양 하고픈 명예심이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도인이 되면 꽤나 좋은 줄 아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세상의 큰 스승 네 사람을 보라
공자,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
과연 이들 중에 편하게 살다간 사람 있는가?
도인 되면 대자유인이 된다고 불교에서 꼬시고
주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교회에서 꼬시고
군자 되어 존경 받는 인격체가 되라고 유교에서 꼬시고
너무나 훌륭한 성인들의 말씀을 들이대고 꼬시니
우리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홀딱 넘어가기 일수이다.
넘어가기만 하면 다행인데 몸바쳐 돈 바쳐 손실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하라
왜 공부하는가?
성인 되어 뭇사람에게 추앙 받고 싶어선가?
남보다 많이 알아 폼 잡고 싶어선가?
순이 철수 다 지옥 가는데 나만 영생 얻어 무엇 하려는가?
남보다 많이 알아 세상에서 먼저 이득 취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대자유인 임이네 하고 세속 떠나 청청하게 살고 싶어서인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매일 싸우는 어머니 마누라 이 문제 좀 해결하고자 함이다.
어린 자식 놀이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세상 보고싶어서이다.
전철타면 오만상 찌그리고 있는 군중들 그만 보고 싶어서요
날 때부터 장애인인 사랑스런 어린 동생
대접받고 사는 사회 딱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는 그 법을 알고 싶어서다.
만약 이러한 이유가 아니면 아무리 공부해도 범인은커녕 마귀가 될 것이니
사탄의 자식들아 이 성스러운 세상에서 물러나라(예수)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모든 일은 그 순서가 있고 중요도가 각각 다른 것이니 공부를 함에도 그 길이 올 바라야 하는 것이다.
이제 공부의 차례가 나올 것이니 이러한 차례가 생긴 이유를 들어 말한 것이다.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脩其身
欲脩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 在格物
왜 천하에 깨달은 이치를 밝혀야 하나?
세상은 그물망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 곳을 치면 그 파동은 전체 그물망에 전 달 되는 것이다.
나 혼자 만의 생각, 행동을 하는 것 같지만 그 것은 온 우주에 파급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홀로 존재할 방법은 없는 것이며 나 혼자만의 행동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또 내가 무엇을 하려 해도 항상 그 대상이 있는 것이니 천하가 도를 알지 못하고 내가 행복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서술한 이 말들도 많은 고찰이 있어야 분명히 알아지는 것이나 여하튼 일단 그렇게 이해하자.
세상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내가 다 알았다 해도 모를 때보다 인간을 벗어난 특이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육체를 갖고 있는 이상 자야 하고 먹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통력이나, 부처님의 신통력 사명대사의 신통력 뭐 이런 것에 헷갈리지 마라. 신통력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여하튼 자연의 법칙은 깨달았다 하여 더하고 어리석다 하여 덜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하니 천하를 밝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천하를 밝게 하려면 당연히 국가의 제도가 또는 교육 등이 바로서야 한다.
국가의 질병을 치료하지 않고 천하를 밝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 공자가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가서 국가를 바로 하자니 가정을 고르게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새벽기도 드립네 절에 가서 공양해야 하네 하며 가정을 등한시하는 사람들
나 교회 다니니 제사는 죽어도 못 한다 하며 가족의 화합을 깨는 사람들
나의 취미를 앞세워 가족의 화평을 멀리하는 이기적 인간들
도대체 왜 교회는 나가는 것인지
도대체 왜 절에 다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라
본말의 전도됨이 이와 같으면 되는 것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가족이 바로 서자니 결국은 내가 이치에 어두워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공부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를 순차적으로 단계를 밟아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차례다.
공부를 하고자 한다면 우선 마음이 올발라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하는 마음이 엄한데 가있으면 결과가 바를 수 없는 것이다.
공부하는 이유가 대자유인이 되기 위함이면
도피하는 법을 깨달을 것이요
공부하는 마음이 신통력에 가있으면
사기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공부하는 이유가 나에게만 있으면
작은 법을 깨달으며
공부하는 이유가 남에게 있으면
온전히 다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하니 마음이 올 바라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바르고자 하면 성실하고 간곡해야 한다.
성실하고 간곡하지 않으면 샛길로 빠지기 쉬운 법이니 남도 망치고 나도 망치는 자가 될 것이다. 알기는 알되 항상 어설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고 사람을 현혹시키는 자가 될 것이다.
이제 마음이 성실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아는 바가 자세하여야 하는 것이다. 즉 분명한 앎이어야 한다는 것이니
나에게는 그러한데 남에게는 안 그러면 분명한 앎이 아니다.
예전에는 그러한데 요즘에는 그러하지 않으면 분명한 앎이 아니다
남자에게 그러하고 여자에겐 그러하지 않으면 분명한 앎이 아니다
노측에는 그러한데 사측에는 그러하지 않으면 분명한 앎이 아니다
어른에겐 그러한데 아이에겐 그러하지 않으면 분명한 앎이 아니다
분명한 앎이란 진리를 말하니 보편타당한 것을 앎이요
보편 타당함은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언제든지 그러한 이치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이치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나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대목이니 잘 고찰하여보자.
이러한 보편타당한 분명한 앎은 어디에서 깨달을 수 있는가?
致知, 在格物(치지는 격물에 있다) 하였다.
이 것은 매우 대단한 가르침이니
세상의 어느 성전에서도 가리켜준 적이 없는 방법이요
가장 빠르고 진실한 방법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붇다의 [여실지견]이 바로 이 법이다. 다만 붇다는 밖의 법뿐 아니라 안의 법도 살핀 것이니 더 법에 정확한 것이다.
致知(자세한 앎)은 格物(만물의 이치)에 있다는 것은 만물의 이치를 구명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보편타당성을 근거로 구명하라는 것이다.
이제 만물을 연구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 좀 더 살펴보자
방법은 많을 것이나
1)우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앎이 다가 아니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 생각이 다 옳다면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음이요 이미 모든 것을 알았다는 것이니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내 생각이 다 옳지는 않다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2) 보편 타당한 답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의 생각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대개 이 보편타당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왜 무시하게 되는가 하면 나의 몸을 이루는 여섯감관(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밖을 보며 정보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함에 주관적 자세가 되고 있는 바 사실을 살피는데 능숙하지 못하여 보편타당한 진리에 어둡게 되는 것이다.
만물을 궁구하는 것은 나의 마음에 들면 그렇고 아니 들면 안 그렇고 해서는 불가능 한 것이니 공부를 함에 나의 감정 또는 마음을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고 누구나 그렇다 할 도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내 마음도 바뀌는 것이 이치이다.
3) 내가 궁금한 것부터 살펴 나간다.
그래야 열심히 생각 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시작은 내가 관심 있는 것에서 시작하나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라 했으니
두루 널리 연구할수록 그것이 자세해질 가능성이 높고 자세해야 분명해지는 것이라 했으니 명심하여 주길 바란다.
4) 너무나 당연한 것에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여자란 무엇인가?
나는 언제나 남자인가? 여자 같은 남자는 무엇이며 남자 같은 여자는 무엇인가? 하리수는 여자라 해야 옳은가? 남자라 해야 옳은가? 사람마다 여자에 대한 개념을 다르게 머리 속에 갖고 있다 그래서 여자를 보고 나오는 생각과 행동이 제 각각이다. 그러니 연구해야 한다. 어떤 이는 여자를 보면 성모 마리아를 생각하고 어떤 이는 여자만 보면 음심만 떠오른다. 나의 아내도 여자요 내 어머니도 여자다 나의 고객의 70%가 여자이니 내가 여자를 모르고 어찌 세상을 잘 살 수 있겠는가? 그저 단순한 여자의 정의를 내리라는 것도 아니요 자신만의 여자관을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생각은 항상 어긋나게 되는 것이니 누구나 긍정할 수 있는 이치를 살피라는 것이다. 학자가 연구하듯이 그렇게 살펴서 누구나 그 논리로 설득할 수 있어야 내가 다 안 것이다. 노인에게 노인의 말로 할 수 있어야 하며 4살배기 아이에게는 아이의 말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다 안 것이다. 여자에 대한 것은 다양한 나이, 계층의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 보면 좀더 쉽게 알아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재료들을 나열해볼 것이니 여러가지로 많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재료)
사람은 왜 손가락이 다섯일까?
나에게 애 못 낳는 여자가 와서 하소연할 때 무어라 하면 그녀가 기쁜 마음으로 돌아갈까?
사람은 왜 돼지 개를 낳지 못하는 걸까?
길거리에 저 전봇대는 매일 무슨 생각을 할까?
들에 핀 저 야생화 왜 하필이면 저 자리에 피었을까? 우연일까 필연일까?
우연이란 무엇일까? 필연이란 무엇일까?
어떡하면 부모에게 효도 할 수 있을까?
어떡하면 자식을 잘 키울 수 있을까?
물 속에 한 방울의 물은 어디까지 나라고 생각할까?
생각은 무엇일까?
행동은 무엇일까?
생각과 행동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화남은 무엇인가?
예쁨은 무엇이고, 기쁨은 무엇인가?
대량 생산되는 자동차 공장에서 나온 자동차는 모두 같은 걸까 다른 걸까?
하늘은 왜 파랄까?
멀어지는 비행기는 왜 작아지는 걸까?
배고픈데 저 기차를 김밥처럼 먹을 수는 없을까?
병듬은 무엇일까?
사랑은 무엇인가?
--- 전화는 사랑일까?
돈은 사랑일까?
병듬은 사랑일까?
할머니는 사랑일까?
공부는 사랑일까?
원수는 사랑일까?
나무는 사랑일까?
생각은 사랑일까?
오고 감은 사랑일까?
무엇이 미움일까?
--- 전화는 미움일까?
돈은 미움일까?
병듬은 미움일까?
할머니는 미움일까?
공부는 미움일까?
원수는 미움일까?
나무는 미움일까?
생각은 미움일까?
오고 감은 미움일까?
두루 자세히 하라 한다고 전문적 학문을 하라는 것이 아니니 이 책 저 책 뒤지고 다니면 깨달음은 오지 않고 또 다른 편견들만 싸여갈 것이다. 결국 내 생각을 바꾸어 넓고 깊게 하자는 것이요 자세하고 분명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의문들을 살피려 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니 자꾸 내 생각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하니 생각의 갈 길을 찾기가 막막할 것이다. 그럴 때는 노트에 논리적인 문장보다 단편적 내용들을 떠오르는 대로 많이 써보자. 또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들을 모아보자. 그리고 작은 것(하잖은)도 떠오를 때마다 첨가해보자. 하나의 의문에 대해 여러가지로 접근하며 생각해보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넓어지고 이치가 살아난다.
앞서 순임금이 邇言(일상의 언어)를 살피고 묻기를 좋아하여 大知를 얻었다 했으니
다른 방법이 아니다.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脩
身脩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이제 깨닫고는 어찌하나. 뜻을 정성스럽게 하여 마음을 바로 하고 자신을 이치에 맞게 행동하며 살면서 가족을 평화롭게 하고 나라의 일에 참여하여 법답게 살고 세상을 밝게 하며 살아야 한다. 脩身齊家治國平天下라!
이러하면 어찌 되는가?
자식들이 학교 갈 때 사고 걱정 없게 되고
부모 아내 마주 앉아 정다웁게 얘기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밝은 얼굴 인사하고
부자는 훌륭하다 그 능력 칭찬받고
가난한자 열심히 해보자 주위에서 격려하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새 나라에 새사람들 함께 모여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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