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엉겁결에
2020년 4월 어느 주일 아침에 페이스북에 “여기 좀 들어가 보세요”라고 댓글이 달려서 무심코 클릭을 했더니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 모임은 만난 적은 없으나 당당 뉴스에 오래 동안 같이 칼럼을 써와서 이름만 알고 있었던 뉴질랜드의 신성남 씨가 주축이 되어서 운영되고 있었는데 나를 알아보고 “지 목사 님이 오셨네요”라고 인사를 건네주어서 금방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다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면 예배로 돌아가서 온라인 모임은 소수만 남게 되어 더욱 빠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참여를 권유해서 ‘온라인평신도교회'가 '아둘람온라인공동체’가 되었다. 우연찮게 '온라인공동체’의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장애물이 나타나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예기치 못한 장애물을 만났다. 참여하는 이들 모두 교회를 다녔던 이들이었기에 한풀이하듯이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왜 예수 이야기는 없고 교회 이야기만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그동안의 신앙생활이 나와 달리 교회 안에서만 예수를 찾았었기 때문이었다.
즉 몸은 출애굽을 했지만 정신은 아직 출애굽을 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교회에 대한 한풀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 예수도 그런 무리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라고 한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둘람에 참여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나는 자신을 퀘이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을 입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짜증 나는 일은 믿는 것을 가지고 다투는 일이다. 양심의 자유가 있는 민주사회에서 남이야 무엇을 어떻게 믿던 상관할 바가 아닌데 기독교인은 믿는 것을 가지고 싸운다.
의외의 효율성
인간은 낯선 존재, 모르는 존재, 두려운 존재, 즉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성장한다. 그러나 나와 다른 것, 내가 모르는 것, 내게 낯선 것과 만나고 소통할 때는 반드시 일정한 길이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봐야 하고, 시간을 두고 어떻게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대면이 대면보다 오히려 더 능률적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이 오직 상대방의 얼굴만 보고 하는 말만 듣기 때문에 오히려 집중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모니터를 통해서 보는 것일지라도 내 얼굴을 1년 이상 1 주일에 한 번씩 몇 시간 동안 볼 수 있다면 내 본모습을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사람의 사고의 구조나 성격 등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히 자기주장을 많이 할수록 자기를 더 많이 드러내게 되어 있다.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을 이야기를 함으로써 듣고 알게 되는 것이다.
설교가 없다.
예배에는 설교 대신 누구나 돌아가면서 10분 내외의 신앙적 ‘담화’를 한다. 담화 후 토론에서 귀한 내용들이 많이 나와서 결과는 항상 기대 이상이지만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
토론 위주의 온라인 모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말의 길이를 조절하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피곤하게 느낀다면 언어폭력이 될 수 있다.
토론하는 공동체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말하는 습관이나 내용들을 대강 파악하게 된다.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듣는 것에도 전문가가 되어 말을 시작할 때 들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을 시작할 때부터 듣고 싶지 않은 사람도 생기게 된다. 즉 마음으로 귀를 닫는 것이다.
어떤 경우 일까? 내용도 문제지만 이야기를 하는 방법에 달린 것이다. 지루하거나, 장황하거나, 주제에 벗어나거나, 가르치려 하거나, 지나치게 전문지식을 내세우거나, 뻔한 이야기 거나 하는 경우라면 자연히 들을 귀를 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말하는 방법에 달렸다는 것이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정연한 논리로 이야기를 전개하면 길다는 느낌이 덜 드는데 주제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병열식으로 나열하면 짧아도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백화점의 진열대와 노점삼의 좌판의 차이인 것이다. 더욱이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는 소비자가 찾지 않는 물건을 불쑥 내미는 격인 것이다.
이런 대화법은 장사로 따지면 손해 보는 장사인 셈인데 흥미 있는 것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처럼 손해 보는 장사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문제
비대면 모임은 말로 이루어진다. 더욱이 누가 혼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 구조가 아니고 토론하는 방법으로 운영되는 아둘람에서는 말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말, 상투적인 말, 하나마나한 말, 낭비되는 말 등은 그야말로 암 덩어리이다. 그러므로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하고 이야기하는 훈련이 되고 있다.
다수가 함께하는 모임에서는 항상 발언의 균형을 잡는 것이 최대의 난제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을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느낌이 별로 들지 않고 어떤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었어도 많이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아둘람의 3년간의 임상실험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 그런 착시가 아닌 착청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한 결과 신박한 결과물을 얻어냈다.
말을 효과적으로 하는 원칙은 듣는 사람을 생각해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을 짧고 간결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하지만 이것이 전혀 쉽지 않다. 더욱이 머릿속에 재고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깨달은 위대한 진리가 있다. 십계명은 대면 시대에 필요한 것이지만 비대면 시대에는 11 계명이 필요할 터인데 바로 “길고 자세하게 말하지 말지어다”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 생겨나는 죄도 있고 사라지는 죄도 있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쳐다보았다고 시비가 붙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것은 없어지는 추세이고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면서 길고 자세한 설명이 짜증을 유발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전문가일수록 ‘길고 자세한 죄’를 범할 가능성이 많다. 본인은 자료도 많고 성의를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듣는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가 제공되면 ‘길고 자세한 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돈 생기는 일이 아니고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태도로 말을 해야 한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고 자세한 설명”은 쥐약인 것이다.
아둘람의 대표 상품
예배에 이어 1 시간 동안 휴먼라이브러리 시간을 갖는다. ‘휴먼 라이브러리(사람책) 운동’은 책 대신 사람을 모셔 놓고 그의 삶을 통하여 세상과 삶을 배우는 것으로 전 세계 도서관에서 하는 운동이다. 발표자가 20분 한도에서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나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질문을 받는 것이다. 이런 형식은 항상 새로운 주제와 사람에 대한 창조적이고 진지한 이야깃거리가 발굴될 수 있다. 프로그램의 목적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고 시각을 넓히는 것이다. 독서모임과 비슷하나 책을 읽어와야 하는 숙제가 없어서 부담이 없다. 나는 호주에서부터 오랫 동안 해왔지만 사실은 세계적인 프로그램이다. 처음 시작은 책을 잘 읽지 않는 시대를 맞이해서 위기를 느끼는 서구의 도서관에서부터였다.
온라인이어서 나의 네트워킹 덕분에 처음 2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사람을 초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불편한 것은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둥글어서 유럽 쪽과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러시아나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에게 발표를 부탁하면 새벽 4시에 눈 비비고 일어나서 발표를 할 수밖에 없어서 몹시 미안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어려운 문제는 20분 발표를 해달라고 하는데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준비한 내용을 모두 이야기하려는 좋은 의미에서의 욕심 때문이다. 대부분의 발표자들은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면 보다 비대면으로 듣는 내용을 소화하기 더 어렵다는 것을 잊는다. 그래서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2년 이상 100 명 가까운 인사들을 초청해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교수포비아’가 생겼다. 무슨 전공이든 교수라는 타이틀이 붙은 작자들은 이야기를 짧게 할 줄을 몰라서 청중을 지치게 만들었다. 어차피 들었다고 기억도 할 일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일방적 소통 밖에 모르는지 안타까웠다. 가장 중요한 상호 소통을 하지 못하는 직종인 것 같다.
집단 치유 현상
한 번은 ‘생애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즐거웠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 부정적인 무의식으로 남아 있을 기억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업을 하려고 했던 것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어두움을 끄집어내어 치료하여 좀 더 밝아지기 위한 시도였다.
자기 자신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심층적인 이야기를 비대면으로 할 수 있을까를 염려했었다. 나는 첫 번째로 작위적으로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기 위하여 감정적인 표현을 자제하고 최대한 건조하게 발표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분위기가 진지해지다가 진지함을 넘어서 깊은 내적 성찰을 분위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 혹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어서 가슴속에서만 품고 살아왔던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심리상담업계의 전문용어로 ‘역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현상은 업계에서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이런 현상은 절대적인 신뢰 관계에서만이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둘람은 비록 온라인에서 만났지만 멤버들 사이에는 서로 간의 깊은 신뢰가 쌓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뢰가 쌓인 집단에서만이 일어날 수 있는 집단치유 현상의 경험인 것이다. 감동해서 눈물이 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지만 이야기하는 사람의 고통이 듣는 사람에게 전이되어 눈물이 나는 경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서로 간의 절대적 신뢰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모임을 마치면서 정리를 하는 순간에 ‘wounded healer’라는 단어가 떠올려졌다. 나는 헨리 나우웬이 썼다는 같은 이름의 책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척하면 쿵 아닌가?’ 상처를 받은 자만이 치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를 신뢰함으로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고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상처를 나의 상처로 받아들이고 함께 아파하고 분노할 때 치유는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공감은 치유의 원천인 것이다.
감동을 물리적으로 표현한다면 ‘심리적 공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공명 현상은 같은 공간에 있을 때만 일어날 수 있지만 심리적 공명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다. 인간이 예술 작품 앞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까닭인 것이다. 또 종교의 경전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비대면 환경에서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과 같은 공명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한 회원의 “맹목적인 교회 생활에 40년을 허비한 것이 가장 후회스러운 점이다”라는 고백에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도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다양성을 넘어
아둘람에서 각자 다른 신앙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즉 색깔이 분명치 않아 보이기 때문에 심지어는 '종교다원주의냐?"라고 묻는 사람도 생겼다. 그러나 사실은 ‘종교다원주의자’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쫓아갈 수 없는 사람을 점잖게 비난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는 마치 북방 불교가 자기들 보다 더 원초적인 남방 불교를 향하여 소승 불교라고 시건방을 떠는 것과 같다.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느 길로 가나 모두 정상으로 이르게 되어있다”는 뜻같이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은 "산을 올라가 보고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산을 올라가 보지 않고 먼 데서 산을 바라보기만 하고 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다르다. 일단 산에 올라가 봐라. 산을 올라가다 보면 잘못 든 길도 있고, 가다가 끊어진 길도 있고 심지어는 골짜기로 도로 내려오는 길도 있다. 그러므로 산을 올라가 정상에서 그런 소리를 할 때 맞지만 올라가 보지 않고 밑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에 올라가 보고서 비로소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즉 다원이 아니라 일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정의하면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종교일원주의'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진지하게 길을 찾는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점점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꾸준히 하향 평준화를 시도했지만 잡히지 않는 물가처럼 토론의 질이 자꾸 높아져 갔다.
그래서 아둘람은 아무나 와도 좋은 곳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나 오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정확하게는 올 수는 있지만 오래 있지는 못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따라서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주장하지만 어떤 의견이라도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한다. 즉 차이와 다름은 인정하고 서로 배우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신앙이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하는 더러운 성향이 있지만 아둘람에서는 은사파에서 유물론적 신앙고백까지 다양한 신앙이 공존한다.
같은 차원에서 다른 모습을 가지는 것을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차원 자체가 다를 경우는 다원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늬만이 아닌 공동체
대면해서도 공동체성을 갖기 어려운데 비대면 상황에서 어떻게 공동체성격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었다. 공동체는 서로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서로를 아는 것은 상대방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국에 사는 회원들이 귀국하면 한국에 있는 회원들이 모이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회원들이 외국을 가면 서로 방문을 하게 되면서 공동체 성격을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막상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니 역시 평소의 지론인 “인간의 품격은 합리성, 현실성, 상식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실제로 3년을 지나는 동안 온라인이지만 공동체적으로 지낼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아둘람을 하다가 보면 짜증이 나거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일이 생길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보아서 헌금이나 사람이 늘어야 하는 목사로서 직업적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아둘람을 계속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둘람에 시간과 정열을 집중 투자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보다는 사랑할만한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자연 보다 감흥을 주는 것은 역시 인간이다. 인간에서 느끼는 각가지 맛과 비교할 것이 없다. 죽음보다 심한 고통을 주는 것도 인간이고 천국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을 만나고 만드는 것이 삶의 최대의 의미일 것이다. 나는 아둘람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한 번은 함께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으로 요양원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본 적이 있었다. 비록 기획력이 남다른 한 회원의 아이디어 차원의 제안으로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지만 앞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현실적으로 나이 들어가는 회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업이 추진될 수 있다면 내가 바로 1순위 해당자가 될 터이니 더욱 절실한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훈련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둘람의 방향은 재미이다.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는 단순한 교회도 아니고 “이 땅에서는 축복받고 죽어서는 천국 가자”는 보험용 교회도 아니다. 일반 교회처럼 프로그램을 정신없이 돌려서 에너지를 교회에 쏟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온라인 교회는 조금 허전함을 느끼기 쉽다. 좋은 이야기가 많고 배우는 바도 많지만 이야기만 무성하고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래서 여러모로 생각을 해보았지만 온라인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토론을 했으나 공동으로 할 수는 없지만 이미 각자가 충분히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실이 그랬다. 아둘람에 모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길을 찾는 구도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를 드나드는 스타일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을까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내용들을 많이 다루다 보니 현실과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졌다. 누구라도 자신이 소화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오가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공허한 말처럼 들리는 법인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 자체가 가장 강력한 실천이라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될 일이다.
지식은 가르쳐질 수 있겠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가르칠 수도 배워질 수도 없는 것이다. 인간관계를 벗어나 고독한 고요 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지만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다시 실천을 해야 한다. 즉 깨달음 자체가 강력한 실천인 것이다.
거쳐간 사람들
아둘람은 경계나 한계가 없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사건들이 생긴다.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들이 분명하고 또 그것들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둘람은 이단이 아니라 삼단도 포용할 수 있고 어떤 내용이라도 소화할 수 있는 위장이 튼튼한 공동체로 진화 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견디기가 어렵다. 아둘람도 시작한지 1년이 되지 않아 어쩐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가서 독립을 했다. 원래 신앙은 철저히 주관적이라서 젊은 과부의 3년 묵은 성감대보다도 민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해프닝은 “당신들을 바로 잡아주어야 하겠다.”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접근했다가 가망성이 희박해 보이자 실망해서 떠난 이도 있었다.
한 번은 아둘람에 새로 합류한 회원이 JMS에 다녔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또 다른 아둘람의 분위기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신입 회원이 JMS와 더 이상 관계가 없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해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물론 그 회원은 혹시라도 아둘람이 오해 받지 않도록 하자는 좋은 의미에서 했던 제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으로 보면 이것은 종교적 폭력일 수 있다. 신앙에서도 이 쪽이나 저 쪽이냐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북에서 살 수 없어서 내려온 탈북자에게 북한공산당을 부정하라고 다시 한 번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편안함을 느낀다면 이상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 안에서 스스로 안전함을 느낀다. 오히려 안전하지 못한 것은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정신적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밖에 있는 사람을 자기와 같이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격을 하기 때문이다
뒤끝 있는 사람들
단체에는 어디나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더욱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진 단체에서는 오고 감이 더 쉽다. 아무리 신앙의 공동체라고 할지라도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니만큼 감정적 충돌은 피할 수가 없다. 아둘람에서도 3년 동안 함께 하다 보니 마음에 맞지 않아서 그만둔 사람도 생겼다. 어떤 사람이 참석을 중지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경우와 알 수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정서적으로 다친 경우라고 하겠다. 그런 경우에는 비대면 관계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풀 수가 없기 때문에 문제점이 더욱 첨예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신앙적으로 차이가 있는 사람들은 조용하게 떠난다. 하지만 성격적인 이유로 떠나는 사람 중에는 뒤끝 있게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건을 겪으면서 배운 것이 있다. 건축을 할 때 설계에 따라서 건물의 크기는 조절할 수 있지만 땅의 넓이는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건평은 넓힐 수 있지만 지평은 넓힐 수 없다는 상식적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공부와 경험과 포용력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타고난 천성이라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인간관계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반드시 악한 의도에서만 생기는 일이 아니다. 나쁜 의도가 전혀 없는데도 때로는 미숙해서, 무지해서, 편견과 아집에서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선천성 구제불능으로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을 “싫어”, 혹은 ‘좋아’로 판단하는 어린이 같은 어른이들이다. 사물과 사건을 판단할 때 객관적인 생각보다 주관적인 판단이 강해서 자기가 느끼는 느낌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남에 대한 배려보다는 항상 자기 본위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고 자기감정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사람이 사람을 마주하면서 드는 느낌들은 피차의 상호작용 속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과 마주치면서 드는 느낌들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래서 이 작용은 얼마든지 정확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을 절대적으로 적용할 때 사소한 일로 불행이 싹틀 수가 있다. 무엇보다 자기감정이 제일 중요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이다.
특허 낸 성찬식
예식이 없는 종교는 없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예식은 성찬식이다. 성찬식을 하면서 평범한 떡과 포도주를 갔다가 신비하게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 분위기를 잡는가 하면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청승을 떨기도 한다. 그러나 성찬식의 오리지널인 최후의 만찬의 의미를 정확히 해석하면 '먹는 것이 남는 것(기억 속에서)'이라는 것이었다. 즉 예수가 제자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사상사에서 기억이 갖고 있는 위대한 신학적 의미의 깊이를 탐구한 첫 신학자였다.
"그러므로 당신을 알게 된 후, 당신은 나의 기억 속에 머무르시며, 당신을 상기하고 당신을 기뻐할 때 당신을 거기에서 발견합니다."
그의 참회록의 한 구절이다. 예수는 ‘기억만이 남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아셨기 때문에 아무리 머리 나쁜 인간이라도 확실히 당신을 기억하도록 ‘먹는 게 남는 것’이라는 시범을 보이신 것이다.
비대면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성찬식을 하지만 전부 집례자가 집례를 하고 회중은 수동자적으로 참여하는 전통적인 성찬식이다. 그러나 아둘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성찬식(?)을 했다. 즉 목사가 일방적으로 집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배병과 배잔을 차례로 다음 사람에게 권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나와 그리스도와의 교류뿐만 아니라 비대면 상황에서의 형제자매끼리 영적인 교류’의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아둘람에서는 내가 포도주와 빵을 먹은 뒤에 타인에게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성찬을 통하여 영적인 어루만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상에서는 무언진행이 사실상 힘들기에 집례자보다는 안내자(Usher)가 필요했는데 다행히 아둘람에는 성공회 사제가 있어서 안내자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