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운태 광주시장이 5.18 북한군 개입설 같은 터무니없는 낭설로 민중항쟁을 비하하면서 역사바꾸기를 시도하는 ‘일베’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강 시장은 어제 자신의 트위터에 공개적으로 일주일 안에 허위사실을 게재한 게시물들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모두 응분의 책임을 묻겠다며 강력한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경고 때문인지 일베 게시판은 자신의 글을 삭제조치하고 제명해달라는 게시물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사전 증거인멸 조치를 해달라는 거다. 그리고 오늘 광주에서 발행되는 지방신문들이 분기탱천, 종편들의 5.18 왜곡방송을 방치하는 박근혜 정부에게 강력한 제재를 요구하는 사설을 싣는 등 호남 전체가 이 사안을 두고 5.18과 광주정신을 왜곡하는 세력들과 전면전을 선언한 모양새다. 나는... 그동안 TV조선에 출연해서 북한군 특수부대원 600명이 광주에 침투, 시민군과 함께 진압군과 교전했다는 한 탈북자의 발언, 채널A의 북한군 50명 침투라는 탈북자 발언을 팩트로 한 보도 등에 대해 그런 발언과 보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망발인지 내 군대경험과 실체적 진실에 의거 반박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현재 정부가 인정하는 가장 확실한 사실관계(이 때문에 전두환은 사형을 받았고 관련자들은 법적 조치를 받았다)’인 5.18광주민주화운동 검찰수사보고서를 입수 게재한다.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다. 방어가 아니고 공격, 저들의 패악질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패악질을 일삼는 세력을 멸절시키기 위한 공격, 내 논리가 아니기 때문에, 내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기록에 대해 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 검찰수사보고서가 광주 피해자들에겐 미흡한 내용이지만 그분들도 내 진정성은 이해하실 것으로 본다. 즉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검찰이 수사해서 내놓은 수사보고서로서 이를 근거로 법원은 재판을 해서 관련자들을 징치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 김영삼 정부 이하 현 박근혜 정부까지 ’광주민주화운동‘이란 공식명칭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즉 광주 피해자. 가해자, 보수세력, 진보세력, 여야 정치권, 언론, 국제사회 등이 모두 공인한 자료라는 얘기다. 이 자료는 방대하다. 그래서 한 번에 모두 옮기기 어렵다. 하여 나는 편의상 일자별로 정리, 순번을 붙여 게재한다. 즉 광주항쟁 발발 이전 상황부터 발발일인 1980년 5월 18일의 상황을 1편으로 19일은 2편, 20일은 3편, 21일은 4편 등의 순서로 한다는 뜻이다. 단 이 순번만 내가 편의상 정했을 뿐, 게재 내용은 단 한 자도 첨삭하거나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임도 밝힌다. 오늘 올리는 내용은 그 1편이다. 1편, 5월 17일 전국비상계엄확대조치 및 5월 18일 광주상황
1. 1980. 5. 17 - 5.17 비상계엄확대조치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 등은 이날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령 해제는 불가하며 계엄령을 제주도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5월 17일 - 19시 00분,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령 확대와 관련하여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의견을 물은 후에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 등 인사들이 요구한 비상계엄 확대 요구를 수락한다. 5월 17일 - 23시 00분, 이 날 같은 시각, 김대중과 김종필은 비상계엄확대조치에 의해 자신의 자택에서 계엄군에 의해 체포된다. 김대중은 지금까지 일어났었던 학생들에 의한 소요사태 배후조종자라는 죄명이 적용되었고 김종필은 박정희 정부 당시 부정으로 재산을 축적한 부정축재자라는 죄명이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2. 5월 18일 이전 광주 상황 - 5월 3일~5월 14일 5월 3일 전남대생 3000여 명이 처음으로 시국성토대회를 열었다. 5월 9일 조선대생 2000여 명이 시국성토대회를 열었다. 5월 13일 광주지역 7개 대학 학생대표자 회의를 개최했다. 5월 14일 전남대생 2,500여명은 전날(1980년 5월 13일) 서울 6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4시 50분경 경찰의 저지를 뚫고 시내로 진출하였고 18시경까지 전남도청 앞에서 첫 대규모 가두 정치 집회를 열었다. 같은 날 10시 45분 장형태 전남도지사는 도지사실에서 31사단장, 경찰국장, 전남대 및 조선대 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학원사태 대책회의를 열었다. 14시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 신우호 7공수여단장을 불러 학생 가두시위대책 합동작전회의를 각각 열고 시위 대책을 협의했다. 그리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 준비 명령에 따라 진종채 2군사령관은 전북 금마소재 7공수여단에 전북대·충남대·전남대·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 출동시킬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정웅 31사단장은 동일 19시 예하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을 광주 소재 MBC·CBS·KBS·전일방송 등에 배치했다. 5월 15일 정웅 31사단장은 7공수여단 2개 대대 숙영시설(宿營施設)로 전남대·조선대 교정에 천막 24개동을 가설했다. 506 항공대대로부터 31사단에 지휘용 500MD 헬기 1대가 지원되었다. 오전 광주시내 대학생 15,000여 명은 교내 시위를 마친 다음 14시 30분경 교외로 진출, 전남도청 앞에 모여 「결전에 임하는 우리의 결의」라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연합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생회 지도부는 학생들에게 휴교령이 내릴 경우를 대비해 '다음날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다음 정오에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하라'는 투쟁방침을 전달했다. 5월 16일 16시경 광주시내 9개 대학 대학생 3만여 명은 전남도청 앞에 모여 복학생 대표 정동년이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집회를 마친 다음 대규모 시가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다시 20시경 도청 앞에 모여 시가지 횃불 시위를 벌인 다음 5·16 화형식을 끝으로 해산했다. 5월 17일 10시 40분 2군사령부는 광주 소재 8개 전문대학에 31사단병력을 투입하도록 지시했다. 한편, 16시 7공수여단 33·35대대를 31사단에서 작전통제 하도록 지시했다. 광주지구 보안부대는 보안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5월 17일 23시경부터 시위 주동자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정동년·권창수·오진수·이승룡·유재도 등 8명을 체포했다. 3. 1980. 5. 18 - 계엄군의 전남대 진주 5월 18일 01시 10분경 전남대에 진주한 33대대는 1개 지역대가 학내(學內)를 수색하여 잔류 학생 69명을 체포했다. 조선대에 배치된 35대대는 11지역대 1개 중대가 건물을 수색하여 잔류 학생 43명을 체포하여 06시경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했다. 03시 05분 2군사령부로부터 무기고 안전대책 강구 지시가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전교사는 예하 부대에 무기고 안전대책을 강구할 것을 지시하여 5월 18일 광주시내 직장예비군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 4717정과 탄약 116만 발을 회수했다. 31사단의 무기고 접근자 발포 승인에 대하여는 군인복무규율에 따라 지휘관이 재량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4. 1980. 5. 18 - 전남대학교 앞 상황 5월 18일 - 전남대학교 앞, 일요일인 5월 18일 09시경 전남대 정문에는 등교하는 학생과 출입을 통제하는 7공수여단 33대대 간에 시비가 벌어졌다. 10시경 휴교령이 내릴 경우 학교 정문에 모여 시위를 하기로 한 행동지침에 따라 학생들이 200여 명으로 증가하고「비상계엄 해제하라」「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했다. 33대대장은 귀가를 종용하면서 불응시에는 강제 해산하겠다고 경고했다. 학교 출입을 제지당한 학생들은 계엄 확대와 휴교 조치에 항의하면서 돌을 던졌다.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여 해산을 시도했다.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이 던진 돌에 다친 데 분개하여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했다.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 7명과 일부 학생들이 부상했다. 10시 30분경 전남대 후문 쪽에서는 야유를 보낸다는 이유로 시내버스에서 내리거나 시내버스를 타고 있는 학생을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더러는 연행하여 꿇어앉혔다. 공수부대원들에 쫓긴 학생들은 도청 앞에 모이기로 한 투쟁지침에 따라 대열을 이루어 광주역, 공용터미널을 거쳐 금남로로 진출했다. 5. 1980. 5. 18 - 광주시내 상황 5월 18일 10시 30분경 학교 출입을 거부당한 전남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대학생 1000여 명이 광주 시내 금남로에 집결하여 「계엄 해제」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하여 진압을 시도하고 시위대는 돌과 화분을 던지는 등 경찰과 학생들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졌다. 시위대 200여 명은 경찰의 진압에 항의하여 충장로 파출소에 몰려가 돌을 던져 파출소 창문이 파손되었다. 같은 날 오후 시위대는 「전두환 물러가라」「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12시 45분경 산수동 파출소를 습격했다. 13시 20분경 시위대가 돌을 던지면서 기습했다. 학생회관 정문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전경들이 도주한 사이에 시위대는 경찰 페퍼포그차를 전복(顚覆)시키고 방화하여, 페퍼포그차 1대가 전소(全燒)되었다. 14시 40분경 금남로 일대에는 1500여 명으로, 충장로 일대에는 16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경찰을 향하여 보도블록과 음료수병을 던졌다. 15시 50분경 시위대 300여명이 동산파출소에 투석을 하였고,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교사에 군병력의 투입을 요청하였다. 6. 1980. 5. 18 - 7공수여단 시위 진압 투입 및 11공수여단 증원 5월 18일 10시경 진종채 2군사령관은 "광주지역에서만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학생들 간 충돌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현지 확인 및 작전 지도 차 광주를 방문했다.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14시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다른 지역에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만 시위가 있으니 빨리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고 정웅 31사단장은 500MD 헬기를 타고 전남대와 조선대로 갔다. 7공수여단 33·35대대장에게 "경찰이 수세에 몰려 있다"면서 16시에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하되 도청 앞은 경찰이 차단하고 있으니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를 차단하고 33대대는 금남로에서 도청 방면으로 압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킬 것을 명령했다. 한편 동일 09시부터 전남대 앞 충돌 상황 등 광주상황을 보고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대응 병력이 2개 대대 600여 명에 불과하여 추가 병력 투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1개 공수여단의 투입을 지시했다.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은 14시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정에 따라 11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15시 11공수여단을 수경사 작전통제로부터 해제함과 동시에, 11공수여단에 "광주로 이동하여 2군사령부 작전통제하에 소요 사태를 진압하라"는 작전명령을 시달했다. 15시 30분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11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동국대학교로 가 최웅 11공수여단장에게 "광주에 7여단 2개 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으나 고전을 하고 있다"면서 "광주에 가서 7여단을 도와 임무수행을 잘 하라"고 지시했다. 최웅 11공수여단장은 즉시 여단 작전참모와 61대대 1지역대 병력을 선발대로 하여 16시 30분경 성남비행장을 출발했다. 61대대 잔류 병력과 62·63대대는 17시 청량리역에서 열차편으로 광주로 출발했다. 7. 1980. 5. 18 - 시위대 투석으로 공수부대원 흥분 정웅 31사단장의 출동 명령에 따라 15시 35분경 전남대를 출발한 7공수여단 33대대는 유동 삼거리를 거쳐 북동 180번지 앞 횡단보도 금남로 끝 부분으로 이동,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중 16시경 "자진 귀가하라"는 선무(宣撫) 방송에도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33대대장은 시위진압 명령을 내렸다.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등 뒤에 메고, 손에는 진압봉을 든 상태에서 진압대형을 유지하여 도청 방향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시위대를 압축해 나가다가, 돌격 명령이 내리면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를 향하여 돌진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타격하는 방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흥분한 공수부대원들은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진입하여 시위대를 체포했다.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와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도주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나 하의, 혁대를 벗기거나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하는 등 기합을 주기도 하였다. 조선대를 출발한 7공수여단 35대대는 16시경 광주전화국 부근과 광주일고 부근 천교에 도착, 시위진압 작전에 들어갔다. 35대대장은 돌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1000여 명의 시위대에 "자진 귀가하라"는 선무 방송을 하였으나 시위대가 계속 돌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며 해산하지 아니하자, 대대원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대각선으로 등 뒤에 메고, 방독면을 차고, 방석망은 내린 채 시위대를 향해 돌격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가격하여 해산을 시도했다. 35대대의 시위 진압은 시위대를 추적, 체포하는 과정에서 부근 공용터미널 일대에까지 확대되었다. 18시 전남북계엄분소는 광주시내 통금시간을 1시간 앞당겨 21시~04시로 발표했다. 17시 50분 광주공항에 도착한 11공수여단 선발대인 61대대 1지역대는 숙영지인 조선대로 이동하면서 시내 상가지역에서 위력시위를 했다. 18시 "11공수여단 3개 대대를 5월 19일 0시부로 31사단장이 작전통제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19시 정웅 31사단장은 7공수여단 35대대장으로부터 시위 진압을 완료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그후에도 23시경까지 한일은행 뒤·노동청 앞·가톨릭센터 앞 등지에서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8. 최초 사망자 발생과 유언비어 이날 시위대는 모두 273명이 체포되어 31사단 헌병대에 인계되었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김경철(남·28세·제화공)은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으로 5월 19일 03시 사망하였고, 이종남(남·27세)등 광주 시민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광주지역에는,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 * 여기까지가 5월 18일 상황에 대한 보고서다. <자료 출처>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군검찰부 발표 5.18수사보고서 전문(1995년 7월 18일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