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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2020.11.30.)
다아윈 박만규 역
삼성출판사 1982년
차알스 다아윈_진화론은 18세기에도 등장되었으니, 그에 의하여 이론적으로 확립되었다. 다아왼은 진화의 근본요인의 설명으로서 자연도태설을 제창, 이 학설은 아직도 현대 집단유전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아윈는 16세에 미국 에딘버러대학 학부에 입학엤으며 의학공부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박물학, 지질학에 열중하여 이 방면의 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부친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돌아가자 그를 케임브리지대학 신학부로 전학시켰다.
다아윈은 1882년2월부터 심장의 통증이 시작되어 4월16일 심한 발작을 일으킨 끝에 19일 오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골은 유명한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역서
본역서 종의 기원은 생물진화론의 체계를 확립한 저작으로 생물학사뿐만 아니라 사상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고전의 하나로 평가된다. 다아윈의 학설은 스페서의 진화론학설과 헉슬리의 사상운동과 결부되어 19세기 말에 널리 보급되었는데, 그 당시만 하여도 생물의 종은 신에 의해 개별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사상이 일반에 유포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당시 진보적인 자유사상을 가진 과학자들은 이에 크게 반대하고 나섰으나, 문제는 창조에 의하지 않은 신종의 탄생에 대하여 그 설명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부심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하여 그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다아윈의 자연도태설이며 적자생존, 생존경쟁 등의 용어와 함께 그 시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학설은 자연과학분야뿐만 아니라 사회고학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종의 기원을 우리들의 견해에 자연사적 기초를 부여한다고 평가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우성에 의한 열성의 지배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 반민주주의 사상의 합리화에 이용되기도 했다.
아무튼 다아윈의 자연도태설이 19세기 말 당시 사상계에 큰 충격을 준 것은, 일반적으로는 진보의 관념에 대응하고, 특히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기에서 그 자유경쟁의 이념과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아윈의 생물진화론은 1860년에 확립되어 80년까지 자연도태설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또 이 무렵부터 진화요인설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20세기의 유전학의 진보에 따라 유전에 관한 다아윈적관념도 크게 개혁 수정되었다. 그러나 드 프리이스에 의해 돌연변이가 발견된 후, 오늘날도 집단유전학을 바탕으로 한 진화론은 자연도태와 돌연변이를 골격으로 한 것이며, 다아윈의 진화론이 그 새로운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아윈이 종의 기원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1856년 그 예정의 반 정도가 진행된 1858년년 6월 윌리스에게서 한 편의 논문을 받았다. 당시 그 논문에 자연도태에 기초를 둔 진화론이 서술되어 있었는대, 윌시스가 다아윈에게 부탁한 것은 그 논문의 발표에 대하여 편의를 제공받기 위해서였다. 한편 라이엘, 후커 등 다아윈의 친구들은 윌리스의 논문과 다아윈 자신의 논문을 동시에 발표할 것을 권유, 마침내 1858년7월 린네학회에서 처음으로 저연도태설이 공표되었다. 이를 계기로 라이엘의 권유로 다아윈은 이전의 계획을 축소하고 1859년 2월 종의 기원을 단행본으로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의 원명은 자연도태의 방법에 의한 종의 기원, 또는 생존경쟁에 있어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대하여 이며 이후 1872년 제6판이 간행되기까지 그 내용은 많은 수정을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본역서의 텍스트는 미국의 랜덤 하우스에서 출간한 모던 라이브러리판 종의 기원을 썼다.
박만규
차례
역서
해제_다아윈의 진화론과 종의 기원
1 생물의 진화와 진화사상의 발전
다아윈의 노작 종의 기원의 초판이 나오기 이전에 있어서의 종의 기원에 대한 학설을 간단히 더듬어보고자 한다. 생물이 발달한 경로, 즉 생물의 진화에 관한 고찰은 기 기원이 매우 오래된 것인데, 그리이스 사상속에서 이미 그 싹을 찾아볼 수 가 있다. 그리이스 철학자들에 그 근원을 둔 진화사상은 중세에 있어서는 가는 실마리와도 같았고, 때로는 끊어지려다가 겨우 계승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급속도로 진화사상이 발전하였고, 19세기에는 그 주제가 진지한 학구적인 대상이 되었다. 문예부흥 이후에는 자연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생물을 전체로서 인식하려 하였고, 그뒤에 생물의 구조, 발육, 생리 등을 연구한 바는 있어도, 생물이 발달한 경로에 관한 문제까지에는 별로 진척이 없었다. 고등한 생물은 간단한 생물에서 서서히 변천해왔다는 학설은 다아윈의 연구 이후, 19세기에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진화학설은 이미 18세기 말 라마르크에 의하여 완전히 안출된 것이었다. 라마르크는 과학적인 생물의 진화학설을 짜낸 최초의 학자로서, 그뒤에 여러 가지 학설이 전개되었으나, 우선 그 이전의 진화사상의 발달을 더듬어보는 것도 종의 기원의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생물의 종류, 또는 개개의 생물의 진화라는 문제는 곧 개개의 생물의 기원문제이므로 일체의 진화학설의 귀착점은 여기에 있고, 진화의 요인, 그 과정 등이 일체 생물의 기원이라는 문제에 포괄되는 것이다. 종의 기원의 문제는 레이와 린네의 주장과 같이 종이 일정불변하다는 설로써만 간단하게 처리되지 못하였다.
현재 모든 생물은 맨처음에 창조한 한 쌍의 생물의 후예로서, 이들은 처음에 창조한 것과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과학이나 신학에서 먼저 채용한 견해였다. 즉 특별창조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개개로 독립하여 연구하는 학자나 사색가들의 머리 속에는 종은 변천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이 두 학설은 오랫동안 논쟁을 크게 불러 일으켜 왔던 것이다.
1) 신학자들의 견해
과학은 실험과 관찰에, 신학은 권위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 양자의 견해가 화합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에 관하여서는 오랫동안 양자가 서로 조화한 시대가 있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자로서 처음으로 창조에 관하여 논한바가 있다. 즉, 그는 처음에는 땅과 물에는 생물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창조물은 모두 한꺼번에 창조된 것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의 생강은 19세기의 신학자들보다는 그 생각이 훨씬 훌륭했던 것이다. 13세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설에 대하여 공명했다. 반면에 이들의 사상을 일반인들은 승인하지 않았을뿐 아니다, 모든 신학자들은 16세기 중엽에서부터 19세기 중엽까지 특별 창조이론을 고수하고 있었다. 특히 스페인의 신학자 수아레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반대하여 특별창조이론을 강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드으이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만일 이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자연의 진리는 좀더 빨리 천명되었을 것이다. 실낙원을 쓴 시인 밀론ㅌ의 사상에는 수아레스와 같은 사상이 다분히 들어 있었다. 이로써 새로운 생물의 진화설은 그 적수를 밀톤의 우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헉슬리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2) 일반연구가의 견해
뷔퐁은 그 시대 사람들에 비하면 철학적인 경향이 있으나, 참다운 연구가는 아니었다. 그의 대작 박물지는 세계 각지에서 박물관에 모아놓은 표본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1739년부터 죽을 때까지 왕실 식물원장으로 재직했다. 생물은 서서히 변화한다는 사상은 그의 저서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는 용의주도하게 이 문제를 다루었으나, 결코 그 견해를 뚜렷이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종의 고정설, 즉 불변설을 신봉했으나 뒤에는 변화설을 취하고 나중에는 다시 고정설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에라스머스 다아윈은 라마르크의 선구로서 제1인자였으나 라마르크가 직접 그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1794년 64세 때의 주노미아 제1권을, 다음해에 그 제2권을 저작했는데, 그 속에는 열 가지 법칙이 실려 있다. 그 법칙 중에는 습득성의 유전, 자연도태, 보호색 등에 관한 것이 암시되어 있다. 그는 종의 변이를 확신하고, 라마르크와 같이 그 변화의 원인을 외계의 자극에 대한 내부의 반응이라고 귀결지었다. 그는 의사인 동시에 시인이었으므로 시로써 진화사상을 노래하였다. 또 철학을 좋아하여 1784년 철학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3남 로버어트는 바로 차알스 다아윈의 아버지가 된다.
오늘날까지 확고한 지위를 학계에서 지니게 된 진화학설을 처음으로 심어준 것은 라마르크(1744~1829)였다. 그는 근대적인 의미의 진화론의 창설자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 앞서 진화론의 선구자로서는 뷔퐁, 예라스머스 다아윈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연구의 범위가 좁고 암시적이었으며, 독창적인 진화사상을 발표하였으나 라마르크는 생물학적 진화학설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너무 비참하였다. 그는 일생을 거의 생활고에 시달렸고, 그의 학설에 도전하고 조소하는 사람들과 과감히 투쟁하면서 85년의 생애를 마쳤다. 그뿐 아니라 만년에는 눈까지 어두워져 부자유를 참아 넘기는 운명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한 두사람의 벗만이 있었는데, 이 벗과 두 딸의 신뢰와 애정에 의하여 비참한 생활을 참고 넘길 수 있었다. 그의 장례식 때 조사까지도 그의 학설을 빈축했을 정도였다. 그는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뒤에 그 뼈까지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의 저서 동물철학이 간행된 지 100년을 맞아 축제를 올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100년이 지난 뒤에야 그들의 조상들이 조소했던 라마르크의 동상을 자르댕에 세웠던 것이다. 그의 곁에는 그의 딸 코르넬 리가 묻혔다. 그의 비석에는 그의 딸이 항상 입버릇처럼 그를 위로했던 말, 즉 뒤에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아버지를 칭찬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유한을 풀어줄 것입니다. 라고 새겨져 있다. 라마르크는 1794년 즉 50세까지는 식물학의 연구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의 식물학상의 업적은 1778년 그ᄀᆞ 35세 때에 프랑스 식물지 3권을 발간하였다. 이때 뷔퐁은 가장 원숙한 학계의 중진으로 있었는데, 그가 뷔퐁에게 인정을 받아 그 집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2년 후에 뷔퐁의 아들과 같이 유럽 각국의 식물원을 견학하고, 1782년에 파리로 돌아왔다.
1789년 식물원의 박물관 식물표본실의 주임이 되었으나, 그리 좋은 직위는 아니었다. 1792년에 혁명이 일어났으나 그는 태연히 연구를 계속하였다. 혁명으로 경비를 절감하는 바람에 그의 지위도 한때 위태로왔으나 그는 일 자체의 중요성과 자기 경험과 재능을 기록한 서류를 정부에 제출하여 무사하였다. 그뒤에 박물관이 확장되었다. 그해 즉 1793년 1월에 루이왕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이 박물관에는 2부문이 있었으며, 2부문이 동물이었다. 그 하나가 척추동물, 다른 하나가 무척추동물의 부문이었다. 라마르크는 식물 부문에서 자리를 얻지 못하고 무척추동물부로 옮겼었다. 이때까지는 무척추동물에 관하여서는 연구하는 학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그는 이 미개척분야에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그로 인하여 1815년~1823년에 걸쳐서 무척추동물의 연구라는 7권의 대작이 완성되었고, 이 연구에 있어서 그의 훌융한 관찰자로서의 소질은 이미 식물학 연구에서 함양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동물에는 많은 변종이 있고, 또 하나의 종을 다른 종과 구별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또 그는 기후 온도 습도 해발 고도 등에 따라서 동물에 변이가 생기는 것도 관찰하였고, 또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관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 즉 사용하는 기관은 점점 발달하는 반면에, 쓰지 않는 기관은 점차 퇴화한다는 사실도 관찰하였다. 가령 물 속을 걷는 물새의 다리가 긴 것은 몸이 물에 젖지 않기 위하여 위로 걸은 결과라고 하였다. 두루미의 목과 부리가 길어진 것도 그 생활의 습성에서 온 것이며, 기린의 목이 긴 것은 높은 나무의 잎을 따서 먹기 위한 것이다. 물새의 발의 물갈퀴는 헤엄을 칠 때에 발가락을 벌리는 까닭에 발가락 사의 막을 자극하여 발달을 촉진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뉴우질랜드의 날개가 없는 새가 날 수 없는 것은 날개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이며, 땅 속과 어두운 동둘에 사는 동물이 시력을 잃어버린 것도 눈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동물체에서 생긴 변화는 유전에 의하여 직접 다음 세대로 전하여지며, 세대가 거듭될수록 그 변화는 점차 뚜렷해진다. 또 각기 생물은 스스로를 발전시키려는 내재적 욕구가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1809년에 출판된 동물철학에는 수년 동안 지녀온 그의 견해를 정정하고 부연했는데 그의 진화학설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이 저서에는 법칙이라는 이름 아래 다음 두 가지 명제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첫째, 제1법칙이다. 즉 그 발달의 한계를 넘지 않은 일체의 동물에 있어서의 모는 기관은 쓰면 쓸수록 점차적으로 그 기관이 건장해지고 발달하여 커진다. 기관을 사용하는 시간의 길고 짧음에 따라서 간강해지는 도가 정비례한다. 이와 반대로 어떤 기관을 영속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약화되어서 작아지며, 누진적으로 그 능력이 감소되어 마침내는 그 기관을 소질해 버린다. 이것은 용불용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둘째, 제2법칙이다. 어떤 동물이 오랫동안 살고 있는 환경에 따라서 어떤 기관을 특히 많이 쓰고, 어떤 부분을 계속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결과, 자연은 그 개체에 어떤 점은 발달시키고, 또 어떤 점은 퇴화시키게 된다. 이와 같이하여 생긴 변화는 양성, 또는 새로운 개체를 만들 때에 공통되는 한, 이들 변이는 유전에 의하여 보존되고, 이에서 생긴 다음 새로운 개체에 전하는 것이다. 이 법칙은 새로운 기관이 생기는 것은 생물이 끈임업싱 감응하는 새로운 욕구의 결과라고 하였다.
라마르크의 견해가 세상에 용납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퀴비에(1769~1832)의 반대 때문이다. 퀴비에가 식물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라마르크와 생 틸레르의 두 벗의 호의 있는 보증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퀴비에는 그뒤에 식물원 내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다시 최대의 동물학자로서 비교해부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나폴레옹 1세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문교부의 시학과이 되었으며, 교육제도의 개선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생 틸레르는 라마르크보다 28세나 연소하고 퀴비에보다는 3세가 젊은데, 다같이 동물의 비교해부학자로서 그가 23세 때 라마르크와 같이 식물원에 봉직하였다. 퀴비에 생 틸레르 라마크르는 친한 교우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라마르크의 진화학설이 나오자, 퀴비에는 그의 저술을 가리켜 새로운 발광이라고까지 꼬집었다. 그뿐 아니라 그 시대는 라마르크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진보되지 않았었다. 퀴비에로 인하여 참다운 과학의 진보가 반세기는 늦어진 셈이다. 퀴비에와 생 틸레르는 같은 식물원에 봉직하면서 함께 비교해부학을 연구하였으나, 그들의 근본개념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었다. 마침 두 사람 사이에 유명한 학사원 논쟁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1830년2월15일, 생 틸레르가 과학 학사원에서 오징어와 척추동물의 체제의 상동을 논하고, 형의 일치를 주장하는 논문을 낭독했다. 그 논문 중에 퀴비에를 공격하는 대목이 있었다. 이에 반발한 퀴비에는 20일에 그에 대한 답변을 하였으나, 완전히 굴복시킬 수는 없었고, 그뒤에도 세 차례의 논쟁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생 틸레르는 퀴비에에게 굴복하였다. 퀴비에는 동물계에는 그가 설정한 네 가지 형이 있고, 이것은 네 가지 다른 체제를 대표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다시 종의 고정과 형의 고정과는 과학적인 박물학의 존재에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는 그의 견해가 잘못이라는 것이 확실하나, 당시 프랑스의 젊은 사람들은 모두 퀴비에의 견해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 틸레르의 견해는 마침내 퀴비에에 의하여 억압당했던 것이다. 생 틸레르는 한평생, 라마르크와 우의를 유지하였고, 종말에는 장님이 되어서 그 생애를 마친 사람이다. 생 틸레의 주장은 그의 저서 동물학의 원리에 담겨 있으며 1809년에는 동물철학을 발간한 바 있다.
종의 변화에 대하여 그의 생각은 세 번이나 바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즉 식물학에서 동물학으로 바꾸기 이전에는 당시 유행하던 종의 불변설을 지지하였고, 1800년에는 갑자기 그는 변화설로, 만년에는 중용설을 취했던 것이다. 그는 1800년 봄에 무척추동물에 대하여 행한 공개강연에서 처음으로 종의 변화를 발표하였고, 이 사상은 1801년에 발표된 무척추동물의 계통이라는 책의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퀴비에가 생 틸레르를 굴복시키고 있는 동안, 영국에서는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가 간행되었다. 그에 의하여 퀴비에의 논거를 번복시켰고, 종의 변화성은 그 기초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괴테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의 자연과학의 연구와 시적인 창작이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에 있다. 실로 그의 시적인 창작과 자연과학 연구와는 같은 바탕에서 출발한 활용으로서, 방향을 달리하는 두 가지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50년 이상 중단하지 않고 항상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데 종사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그가 자연과학에 공헌한 주요업적은 골격학과 색채학 식물변태론이라고 할 수 있다. 1784년 봄에 그가 사람에도 간악골이 있음을 발견했을 때에는 오장 육부가 흔들리는 것과 같은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1790년에는 식물의 변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줄기의 모든 부속기관은 모두 잎의 변형이라고 하였다. 즉 고등식물의 모든 부속기관을 잎이라는 기본형에 환원시킨 것이다. 이 녹장에서 그의 진화 변천의 사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그를 진화학설의 선구자로써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예술과 자연을 같은 태도로써 관찰하였다. 원시식물을 발견하기 위하여 시실리섬에 건너갔고, 로마에 돌아온 때에는 자연과 예술은 같은 본질의 두 가지 발현이라고 믿었다.
3) 종의 기원에 대한 견해
생물진화에 대한 학설은 막연한 가설로서, 다분히 상상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견해가 한때 일반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한 사실의 실질적인 증명이 시작되어서, 여러 증거에 입각한 근거를 제시한 뒤에야 이 이론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생물의 진화, 즉 생물의 모든 종류가 생성된 것은 어떤 원인에 의하여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종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뚜렷한 정도의 변화를 거쳤다는 것은 과학적인 관찰로써 증명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이 변화가 어떤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미해결의 문제점으로 남게 되었다. 그 내부의 유전물질과 그 생물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잔연조건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것은 쉽사리 추정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를 가져온 진화의 원동력, 또는 그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요인에 대하여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진화에 관한 여러 학설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여러 학설의 논쟁점은 진화라는 것이 생물창조의 방법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다른 생물들의 진화가 어떤 요인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1900년 이전에 있어서 생물진화의 설명을 시도한 학설 중에서 특히 세인의 주목을 끌었고, 각 방면의 논쟁의 중심이 된 것은 라마르크 다아윈 바이스만의 학설이다. 이들의 이론은 모두 생물의 진화를 한 체계로써 취급하였다. 그 밖에 다른 학설들은 세부에 대한 논의이며, 진화에 관한 특수한 상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 그중에 대표적인 라마르크의 학설은 두 가지 항목으로 요약된다. 즉, 첫째가 변이에 관한 것이며, 둘째가 유전에 관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동물계에 일어나는 기관의 변이는 주로 쓰고 안쓰는데서 생기고, 새로운 기관이 발생하는 것은 동물이 어떤 새로운 욕구를 가지면, 먼저 조직에 이를 자극하여 어떤 특수한 방향으로 생장과 적응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그의 학설에서 특히 세인의 비판의 초점이 된 것은 이 욕구라는 점에 있다. 만일 그가 이 용어를 동물의 의지, 또는 욕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외계의 새로운 상태에 따라서 생긴 반응으로 풀이한다면, 그의 설명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고, 확고한 생리학적인 근거에 의거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2 다아윈의 생애와 그 업적
다아윈(1809~1892)은 라마르크의 동물철학이 발간되던 해에 났다. 과학자로서 다아윈의 생애는 처음에는 지질학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불타는 지식욕으로 충만한 청년시대를 지질학상의 모든 문제ᅟᅳᆯ 구명하는 데 부단한 노력을 경주했다. 그가 태어날 무렵의 지질학계에는 베르너의 범수설, 하아튼의 범화설, 라이엘의 진화설 등 세 조류가 있었다. 그가 16세에 입학한 에든버러대학은 범수설의 중심이었다. 그는 범수론자 제임슨의 강의를 꺼려하지 않았다. 케임브리지로 옮긴 뒤에는 베르너의 범수설이 잘못되었음을 깊게 깨닫게 되었다. 이와같은 조류가 그의 머리 속을 스치고 있을 때, 1831년 그의 스승 헨슬로우는 그에게 지질학을 전공하도록 종용, 당시 유명한 케임브리지의 시즈위크에게 소개했다. 시즈위크의 감화는 청년 다아윈을 지질학에 대한 열정을 더한층 부풀게 했다. 헨슬로우의 호의로 비글호에 탑승, 그를 과학계의 첫 출발을 딛게 했다. 그는 항해 중에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다시 시즈위크는 지질학회지에서 라이엘의 견해에 크게 반대했다. 귀국 후에 그는 스승이자 친구인 라이엘에게 더욱더 친밀감을 느끼고, 그를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다아윈의 아들 프란시스는 아버지의 서재는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서적을 실제적으로 수집하여 둔 곳이라는 것이 특색이라고 말하였다. 다운에 있는 그의 서재를 비롯한 주택과 가재도구는 1929년부터 영국학술협회가 그대로 보존하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준다. 다운의 생활은 매우 한적하고 농촌 풍경이 더욱 그를 즐겁해 해주었다. 런던에서 이곳으로 이사한 뒤부터 그의 생애는 시계처럼 일을 진행시켜 나갔고, 그는 이곳에서 40년간을 보냈다. 이 40년동안에 거의 절반은 환자로서 지냈으며, 1876년, 즉 이곳으로 이사를 한 지 34년만에 그는 자서전에서 자기가 보낸 것과 같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은 그리 많이 않을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성격이 조용하고 침착한 그는 자기 학설에 대한 비판, 논란에 대해여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대신 헉슬리와 헥켈과 함께 그의 작업을 가름하여 그의 학설의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헉슬리는 영국에서 다아윈의 학설을 지지하고, 19세기에 있어 과학의 보급에 크게 진력한 사람이다. 철두철미한 그의 적확한 지식과 날카로운 비판력은 곧 문제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었다. 논쟁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성실했다. 그는 학교에서, 또는 대중을 향하여 진화학설의 변호에 앞장섰다. 순수한 연구자이기도 했던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형태학과 고생물학에 관한 것은 우수한 것이었다. 한편 헥켈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다아윈의 학설에 가담히ㅏ여 진지한 사람이었다. 1863년에 발간한 그의 명저 일반형태학에서 모든 생물의 진화원리를 적용했는데 이 책에서 그의 진화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포츠담에서 태어나서 1862년 예나대학교의 동물학교수가 되었는데 1909년에 은퇴하고도 10년이나 더 살았다. 엄격한 종교적 가정에서 자란 그는 평생 교인으로서 생활을 영위했다. 강건한 신체, 왕성한 의욕으로 그는 연구생활에 전념했다. 방사충의 연구를 12년간 계속한 끝에 이루어진 원고는 그 무게가 12파운드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사상가로서 헉슬리를 따르지는 못하지만 71세의 나이로 원인의 유골을 발견하고자, 단신 자바에 건너가는 등 학문 연구에 대한 노익장의 열정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3 종은 고정된 것인가
린네가 처음 생각하는 것과 같이 좁은 범위에서의 종은 불변하는 것일까? 우리들이 종을 관찰하면 현재에 있어서는 종이 일정불변하고 또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범위에서도 일정불변한다고 하면, 현존하는 수많은 종은 진화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밖에 도리가 없다.
4 종의 기원에 대하여
다아윈의 명저 종의 기원은 1859년2월24일 그 초판이 영국 런던에서 간행되었다. 종의 기원의 사색의 근저에는 지질학상의 지식이 내포되어 있다. 자연과학자로서의 그의 생애는 지질학의 연구가 그 출발이었고, 그의 반평생은 불타는 정열로써 지질학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데 바쳐졌다.
5 다아윈학설의 내용
1)변이
변이현상은 관찰에 의해서도 뚜렷이 실증할 수 있으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어떤 두 가지 생물을 비교하여도 날 때부터 이미 꼭같은 것은 없다. 또 이것을 유사한 환경 아래서 사육해도 그 양자는 서로 달라진다. 재배하거나 또는 사육하는 동식물의 변이는 특히 주목을 끌기 수비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므로, 처음에 학자들의 주목을 끌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종류의 변이였다.
2)유전
변이의 유전은 그의 이론상 제2의 요점이다. 그러나 어떤 특수한 변이가 유전에 의하여 보존되며 살아남게 되는가는 어떠한 원리에 입각하여 그 변이가 선택되었는가 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인데, 다아윈은 자연이 유전을 위하여 선택하는 특별한 변이는 그 개체에 대하여 유리한 것이라고 하였다. 다아윈은 습득성의 형질의 유전을 인전하고 있으나, 그의 유전설은 라마르크의 주장과는 큰 차이가 있다.
3)자연도태
자연도태는 다아윈의 진화론에 있어서 주요한 특색을 지니고 있는데, 그가 사용한 자연도태의 의의를 한두 가지 예를 들어서 밝히고자 한다. 가축을 사육하는 사람이나 비둘기, 그밖에 가금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적응시키고 있는 인위적인 도태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사육가나 원예가들은 동물과 식물의 특수한 변이, 즉 사소한 변이라도 이를 선택하여 짧은 기간에 매우 다른 새로운 종류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4)자웅도태
자연계 현상에는 이 자연도태의 원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상이 많이 있다. 가령 극락조의 꼬리와 깃, 수공작의 꼬리의 깃이 화려하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다아윈은 새들 중에는 이 경쟁으로 인하여 도리어 평화스러운 성질을 띠게 된다. 이 문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종의 수컷 사이에는 노래로서 암컷을 유혹하려는 경쟁이 극히 심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각 수컷이 계속되는 세대 동안에 그 무기 방어수단 또는 체색들이 다른 수컷보다도 약간 우수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단지 수컷의 자손에만 유전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5)자연도태설에 대한 異論
다아윈의 진화의 요인으로서 자연도태가 주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반대 또는 그 외의 요인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학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드브리이스, 요한센 등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6 종의 기원의 의의와 영향
다아윈은 1831년부터 5년간이란 긴 세월을 비글호를 타고, 세계를 주항하여 수많은 동식물을 채집하고 관찰 연구하였으며, 지각의 격변, 종의 절멸과 생활조건의 관계, 종의 변이와 생활조건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암시를 받았다. 그가 세계를 주항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뒤부터 종의 기원이라는 학설을 발표하기까지는 약 20년이 걸렸는데, 종의 변이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문헌을 수집하고, 수많은 자료를 모아서 이를 정리 인용하는 한편, 사육동물과 재배식물의 변이에 대하여 오랫동안의 실험 관찰과 놀랄만큼 광범위한 조사를 거쳐서 마침내 19세기의 혁명적 저서 종의 기원을 완성했던 것이다.
다아윈
종의 기원
자연도태의 방법에 의한 종의 기원, 또는 생존경쟁에 있어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대하여
종의 기원에 대한 학설진보의 역사적 개요
서언
제1장 사육재배하에 발생하는 변이
제2장 자연상태에서 발생하는 변이
제3장 생존경쟁
제4장 자연도태 또는 최적자생존
제5장 변이의 법칙
제6장 학설의 난점
제7장 자연도테설에 관한 여러 견해
제8장 본능
제9장 잡종
제10장 지질학적 기록의 불완전에 관하여
제11장 생물의 지질학적 계승에 관하여
제12장 지리적 분포
제13장 지리적 분포(속)
제14장 생물의 상호유록 형태학 발생학 흔적기관
제15장 요약과 결론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