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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주덕읍 덕연리 삼연정 중수기(三蓮亭 重修記)를 올렸는데 《동문계서(同門契序)》를 활자로 옮기고 번역문을 실었습니다. 동문명단인《동문생(同門生)》도 같이 올립니다. 예전 정자에 《삼연정중수기》와 함께 걸려있던 현판들입니다.
이병연(李秉延, 1894년 ~ 1977년)이 1934년(昭和 9年)에 간행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충주군 樓亭 항목을 보면 三蓮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 있습니다.
『三蓮亭 : 在周德面德蓮里士人鄭在彪等三十人爲其師李敎勉建○栗亭申直均序止齋朴準龜記蓮隱亦有自詩 --- 栗亭은 東陽을 잘못 쓴 것 같다.
文行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李敎勉 : 字汝稷號蓮隱星州人胡簡公思芬后 稟性寬厚行義高潔養親以孝敎導後進見重士友門生爲之搆亭因爲嘯咏之所焉(이교면(李敎勉) : 자는 여직(汝稷)이고, 호는 연은(蓮隱)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호간공(胡簡公) 이사분(李思芬)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관후(寬厚)하고 행의(行義)가 고결하였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모시고 후학을 교화하여 길러내니, 선비들과 벗들에게 중망(重望)을 받았다. 문생(門生)들이 그를 위하여 정자를 지어주니, 이로 인하여 시를 읊으며 거니는 장소로 삼았다.) 』
동문계서(同門契序)를 쓴 분은 동양(東陽) 신직균(申直均)입니다.
사진을 찍을때 좀더 유의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동문계서(同門契序) 끝에 강이대황락소춘지념이일 동양 신직균 제(疆圉大荒落小春之念二日 東陽 申直均 題) 라고 써 있는데, 정사년(丁巳年)에 해당하고 여러 정황상 정사년(丁巳年)은 1917년으로 추정됩니다.
고갑자(古甲子)로 강어(疆圉) 혹은 강이(疆圉) 는 정(丁)을, 대황락(大荒落)은 사(巳)를 나타내며, 소춘(小春)은 음력 10월을, 념(念)은 이십(二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1917년 음력 10월 22일이 《同門契序》를 쓴 날짜입니다.
《동문생(同門生)》말미(末尾)에 辛未 九月 四日이라 써 있는데 음력으로 1931년 9월 4일에 작성되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차후에 정정(訂正)합니다.
우선 동문생(同門生) 현판에 있는 명단을 싣습니다. 총 30명입니다. 삼연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서기년도(西紀年度)를 첨기(添記)하였습니다. 이 분들은 전부 돌아가신 분들인데 星州 李氏(6명)가 많이 보입니다. 지금 이 분들의 후손들이 충주에 많이 살고 있을 겁니다.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은 一名 柄夏, 자(字)는 여직(汝直)이며, 호는 연은(蓮隱)이고 1859년 태어나 1944년 졸(卒)한 분입니다. 연은선생 집안을 보면 이헌규(祖父), 이창용(父,1836년생), 연은 이교면(1859년생), 이홍배(子), 이석동(孫), 이용진(曾孫), 이근백(玄孫)으로 이어집니다.
<동문생(同門生)>을 보면, 가장 나이가 많은 이종구씨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연은 선생과는 28살 차이가 나며, 서당에 8살에 입학했다고 하면 연은(蓮隱) 선생은 30대 중반에 훈장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종구씨가 31살때 <동문계서>가, 45살때 <동문생>이 작성되었습니다.
同門生
李鍾球 丁亥生 1887년 星州人
---> 예성춘추(1959년)에 보면 삼연정 수호자로 되어 있다. 나이를 보면 여러 제자들보다 연장자이고 덕은선생 집안사람이다.
李敎承 壬辰生 1892년 延安人
鄭在彪 戊戌生 1898년 晋州人
金榮培 戊戌生 1898년 金海人
--->주덕읍지에 의하면 김종훈(1923년생)의 父로 연은 선생의 애제자였다 한다.
李 俊 戊戌生 1898년 延安人
李露榮 乙未生 1895년 延安人
趙泰吉 庚子生 1900년 淳昌人
李暎培 壬寅生 1902년 星州人
李鍾澤 壬寅生 1902년 德水人
李麒承 癸卯生 1903년 延安人
金○○ 癸卯生 1903년 安東人 돈원(弴源)로 추정되나 이름이 지워졌다.
安炳𤪌 甲辰生 1904년 竹山人
李面基 乙巳生 1905년 碧珍人
李恒基 乙巳生 1905년 碧珍人
魚沿秀 乙巳生 1905년 咸從人
李炳善 丙午生 1906년 星州人
李炳祐 丙午生 1906년 星州人
李僖培 丙午生 1906년 星州人
李瓊培 丙午生 1906년 延安人
李䵍榮 丙午生 1906년 延安人 돈(䵍)
, (享黃)으로 써있다.
朴喜贇 丁未生 1907년 密陽人
魚在雲 丁未生 1907년 咸從人
李錫東 戊申生 1908년 星州人
朴喜遇 戊申生 1908년 密陽人
李鍾九 戊申生 1908년 延安人
李譜榮 壬子生 1912년 延安人
金基泰 戊申生 1908년 安東人
李瑢培 己酉生 1885년 星州人
安相根 乙巳生 1905년 順興人
吳丞根 庚子生 1900년 海州人
辛未(1931년) 九月 四日
<同門生 현판, 예전 삼연정에 걸려 있었다>
<2017년 8월 24일 촬영>
<원문>
同門契序
同門之誼歆其會之數 講之久而
不可忘者也 蓋人之情 離則易踈
合則易益 故羲易著麗澤之象曾
聖有會文之訓 其示人之意明且
切矣 凡爲同業者敬受指引之功
各晝䂓戒之責聨箧對床周旋乎
亟筵之間花開玩理有如谷鳥之
相求竿頭進步有如駏蛩之相依
若有昏味之失互提撕以警之若
有玩愓之蔽毎催趨以導之夜以
継晷積以時月功不至間斷誼不
至踈闊則安知不至樂生於喫苦
之中乎 然歲月有限人心易放如
兄之情而至夢轂之難尋視父之
恩而至定錧(舘)後求見此己睽違之
悵因循之失而況愈遠愈踈愈久
愈忘者乎 與其悵之於睽違之後
曷若限以盖簪之期而無睽違之
歎也 與其失之於因循之際曷若
定以登門之日而無因循之習也
此蓮隱處士門下所以設同門契
也 或疑修契雖古以物則俗奈古
今之有異何朱夫子有言硯上也
有天理人欲墨上也 天理人欲
何以說之壞筆汚墨人欲也 字畫
楷正天理也 若使同契之人帶全
得贏一以資晝夜講習如孫秀才
之三千錢一以供左右就養如弟
子職之饋食條則天理之眞藹然
呈露於端木氏之不受命而陽虎
之爲富不仁實爲無用之贅語矣
復何患乎 古今之異 宜人欲之牽
制也哉 余於蓮隱知心不淺窃瞷
其養親以孝敎子以義今之桐栢
山中畊(耕)讀之人也 景仰于心者深
矣 今其門人鄭在彪 李伉 金榮培
要余以敍設契之意問其主意則
謂以同門講誼不負吾先生奬育
之厚意也 有是哉聖訓易象可朙(明)
於數千載之下而降師親友之道
復見於寂寞之濱矣接門下之言
談擧止而夙所景仰者可驗於今
日矣 旣而書之以美其務實之事
而獻吾胥勗之忱焉
疆圉大荒落小春之念二日 東陽 申直均 題
<표점>
同門契序
同門之誼, 歆其會之數, 講之久而不可忘者也. 蓋人之情, 離則易踈, 合則易益. 故羲易著麗澤之象, 曾聖有會文之訓, 其示人之意, 明且切矣.
凡爲同業者, 敬受指引之功, 各晝䂓戒之責, 聨箧對床, 周旋乎亟筵之間. 花開玩理, 有如谷鳥之相求; 竿頭進步, 有如駏蛩之相依. 若有昏味之失, 互提撕以警之; 若有玩愓之蔽, 毎催趨以導之. 夜以継晷, 積以時月, 功不至間斷, 誼不至踈闊, 則安知不至樂生於喫苦之中乎?
然歲月有限, 人心易放. 如兄之情而至夢轂之難尋, 視父之恩而至定錧(舘)後求見, 此己睽違之悵, 因循之失, 而況愈遠愈踈, 愈久愈忘者乎? 與其悵之於睽違之後, 曷若限以盖簪之期而無睽違之歎也? 與其失之於因循之際, 曷若定以登門之日, 而無因循之習也? 此蓮隱處士門下所以設同門契也.
或疑修契雖古, 以物則俗, 奈古今之有異何? 朱夫子有言: "硯上也, 有天理人欲; 墨上也, 天理人欲." 何以說之? 壞筆汚墨, 人欲也; 字畫楷正, 天理也. 若使同契之人, 帶全得贏, 一以資晝夜講習, 如孫秀才之三千錢, 一以供左右就養, 如弟子職之饋食條, 則天理之眞, 藹然呈露於端木氏之不受命, 而陽虎之爲富不仁, 實爲無用之贅語矣. 復何患乎古今之異, 宜人欲之牽制也哉!
余於蓮隱, 知心不淺, 窃瞷其養親以孝, 敎子以義, 今之桐栢山中畊(耕)讀之人也, 景仰于心者深矣. 今其門人鄭在彪, 李伉, 金榮培, 要余以敍設契之意. 問其主意, 則謂以同門講誼, 不負吾先生奬育之厚意也. 有是哉! 聖訓易象, 可朙(明)於數千載之下, 而降師親友之道, 復見於寂寞之濱矣. 接門下之言談擧止, 而夙所景仰者, 可驗於今日矣. 旣而書之, 以美其務實之事, 而獻吾胥勗之忱焉.
疆圉大荒落小春之念二日 東陽 申直均 題
<번역문>
동문계서 (同門契序, 1917년)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동문의 의리는 그 만남의 모임을 기뻐하고, 오랜 세월 학문을 익혀 나가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개 사람의 정이란 떨어져 있으면 쉽게 서먹해지고, 모이면 쉽게 유익해진다. 그러므로 주역(羲易)에서는 연못이 서로 이어져 물을 대어주는 ‘리택(麗澤)’의 상을 나타내었고, 증자 성인께서는 글을 통해 벗을 모은다는 ‘회문(會文)’의 가르침을 남기셨으니,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뜻이 밝고도 간절하다.
무릇 같은 학업을 닦는 자들은 지혜로운 이끎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각자 경계하고 규율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상자와 책상을 서로 대하고 앉아 스승의 강학 자리에서 어울리며, 꽃이 필 때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골짜기의 새가 서로를 부르는 듯하고, 학문의 경지를 더욱 높여가는(竿頭進步) 것은 거허(駏虛)와 공공(蛩蛩)이 서로 의지하는 듯해야 한다. (거공(駏蛩)은 전설 속 동물인 거허(駏虛)와 공공(蛩蛩)을 함께 부르는 말로, 어려움 속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는 깊은 우정이나 관계를 뜻한다)
혹여 어둡고 아둔한 실수가 있으면 서로 일깨워 경계하고, 나태하고 경솔한 폐단이 있으면 매번 독려하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밤낮을 이어서 공부하고 세월을 쌓아가서, 공력이 끊어지는 데 이르지 않고 의리가 서먹해지는 데 이르지 않는다면, 어찌 고통을 견디는 가운데서 즐거움이 솟아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세월은 한정이 있고 사람의 마음은 방종해지기 쉽다. 형제와 같은 정이 있으면서도 꿈속의 수레바퀴처럼 아득하여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어버이 섬기는 듯한 은혜를 마음에 품고서도 안부를 여쭙고 난 뒤에야 겨우 만나기를 청하게 되니, 이는 이미 멀어진 아쉬움이요 머뭇거린 허물이다. 하물며 더 멀어질수록 더 서먹해지고, 더 오래될수록 더 잊히는 자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멀어진 뒤에 아쉬워하기보다는 갓끈을 맞대어 모이는 기한을 정하여 멀어지는 탄식이 없게 하는 것이 어찌 더 낫지 않겠는가?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기회를 놓치기보다는 스승과 벗의 문에 들어설 날을 정하여 나태한 습관을 없애는 것이 어찌 더 낫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연은(蓮隱) 처사 문하에서 동문계를 모으게 된 까닭이다.
혹자는 "계를 맺는 것이 비록 예부터 내려온 방식이라 하나, 물질을 수단으로 삼으면 속되게 되니, 예와 지금의 다름을 어찌하겠는가?" 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자(朱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벼루 위에도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있고, 먹 위에도 천리와 인욕이 있다"라고 하셨다. 이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붓을 망가뜨리고 먹을 더럽히는 것은 인욕이요, 글씨를 단정하고 바르게 쓰는 것은 천리이다. 만약 계에 함께한 이들이 돈을 모아 이익을 얻되, 하나는 밤낮으로 학문하고 익히는 비용으로 충당하여 손수재(孫秀才)의 삼천전(三千錢)처럼 쓰고, 하나는 좌우에서 어버이나 스승을 모시는 비용으로 바쳐 제자의 직분으로 음식을 대접하는 조목처럼 쓴다면, 곧 천리의 진성(眞性)이 무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하여 단목씨(자공)가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물을 늘린 것이나, 양호가 부유하되 인하지 못했던 일은 실로 쓸데없는 덧없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니 다시 어찌 옛날과 지금의 다름을 걱정하고, 인욕에 매여 지체됨을 걱정하겠는가!
내가 연은(蓮隱)에 대해서는 그 마음을 안 지가 적지 않으니, 그가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자식을 의로써 가르치며, 오늘날 동백산(桐栢山) 속에서 밭 갈고 글 읽는 참된 선비임을 그윽이 보아왔기에 마음속으로 깊이 흠모해 왔다. 이제 그의 문인인 정재표(鄭在彪), 이항(李伉, 同門生에는 李俊으로 씌여있다. 이름이 外字는 이 분이다.), 김영배(金榮培)가 나에게 계를 설시하는 뜻을 서술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 취지를 물으니, "동문 간에 의리를 다지고 학문을 나누어 우리 선생님께서 장육(奬育)해 주신 두터운 뜻을 버리지 않고자 함입니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그렇도다! 성인의 가르침과 주역의 괘상은 수천 년 뒤에도 밝게 빛날 수 있으며, 스승과 어버이, 벗을 섬기는 도리가 다시 이 적막한 시골 구석에서도 나타나는구나. 문하에 들어서서 그들의 언행과 거두를 접하니, 평소 흠모하던 바를 오늘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글을 써서 그들이 실천에 힘쓰는 아름다운 일을 찬양하고, 서로 도우며 힘쓰자는 나의 진심 어린 마음을 바친다.
정사년(丁巳年) 10월 22일, 동양(東陽) 신직균(申直均) 짓다.
※정사년(丁巳年)은 1917년으로 추정된다.
※참고
《주덕읍지, 2007년》에서 인용하였다.
---> 바로 위 현판 사진들을 보면 三蓮亭은 蓮隱선생의 친필이고 바로 옆은 同門生, 아래는 同門契序이다. 잘못 편집한 것이다.
삼연정(三蓮亭) ---> 어색하고 잘못된 내용은 고쳤다.
덕련리(德蓮里) 360번지 조동마을에 위치하는 정자로서 조선 철종 10년(1859년, 己未年)에 태어난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이 서당(書堂)을 건립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서당 자리에 1924년(甲子年) 제자 정재표(鄭在彪) 등 30여명이 스승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창건한 후, 삼(三)자는 鄕里에 유명한 德蓮山이 있고, 향리(鄕里) 역시(亦是) 德蓮里요, 선생의 아호(雅號)가 연은(蓮隱)인지라 세글자 蓮을 따서 삼연정(三蓮亭)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그러나 1944년(甲申年) 불의(不意)의 홍수(洪水)로 기지(基地)가 유락(流落)되어 도복(倒伏) 직전(直前)에 있었으나 중수(重修)에 대한 아무런 재정적(財政的) 뒷받침이 없어 문하생들이 회합을 갖고 결의한 결과, 그때 당시 쌀 70가마의 성금을 갹출(醵出)하여 1970년(庚戌年) 4월 1일 도랑 건너 현재의 위치에 중수(重修)한 것이라 한다.
이날은 때마침 선생의 증손자인 이용진이 교사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날이었다한다.
건물의 규모는 2단의 기단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워 지은 팔각정 목조 건물로서 공포(拱包)는 이익공계통(二翼拱系統)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퇴화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창방(昌枋)으로 결구된 기둥사이에는 화각반(花刻盤) 1구씩을 배치하여 주심도리(主心道理) 장혀를 받쳐주고 있다.
내부는 우물 천정으로 단청을 한 겹처마 지붕으로 지재(止齋) 박준구(朴準龜)가 지은 삼연정중수기(三蓮亭重修記), 동양(東陽) 신직균(申直均)이 지은 동문계서(同問契序), 동문생(同問生)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현재 부착된 삼연정중수기(三蓮亭重修記)는 김종훈 글, 동문계서(同問契序)는 김종훈의 선친이며 연은선생의 애제자였던 김영배 글, 동문생(同問生)은 연은선생의 친필(親筆)이라 한다. (김종훈, 84세, 증언 및 자료 제공)
---> 바로 위에 나오는 구절과 배치(背馳)되어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글씨를 썼다(書)는 표현이 맞다. 동문계서를 읽어보면 글을 쓴 동양 신직균은 蓮隱의 친구처럼 보인다.
②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 일명, 병하 柄夏) (1859.9.10~1944.5.13)
己未 九月 十日(1859년 9월 10일) 성주이씨(星州李氏) 이창용(1836년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병하(柄夏)이며 휘(諱)는 교면(敎勉)이고, 자는 여직(汝直)이요, 호(號)는 연은(蓮隱)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입학수학(入學修學) 학문이 뛰어나고 천성이 仁孝하여 鄕里는 물론 인근동리(隣近洞里)에서 굴지(屈指)의 대유사(大儒士)가 된 것이다.
학교라고는 간혹 한문서당이 전부이던 시절이라 종족(宗族)은 물론이고 향리인근동(鄕里隣近洞) 원거리(遠距離) 주민 및 자녀들이 거의 다 문맹자(文盲者)가 될 것을 염려하여 내 집 사랑방을 한문(漢文)서당(書堂)으로 제공하고 향리(鄕里) 아동(兒童)을 가르침에 원근(遠近)을 물론(勿論) 향학열(向學熱)에 불타는 학도(學徒)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강론(講論)을 들었으며, 극빈(極貧)한 학생들에게는 사재(私財)를 털어 지필묵(紙筆墨)과 서책(書冊)을 무료로 제공, 불철주야(不撤晝夜) 전력(專力)을 다하여 가르치니 문하생(門下生)들이 후(後)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지사(志士)들이 많이 속출(續出)하였다.
국운(國運)이 기울어 가던 정미년(丁未年, 1907년) 의병(義兵) 거사시(擧事時)에 음양(陰陽)으로 의병(義兵)을 도와 항일항쟁정신(抗日抗爭精神)을 일깨웠으며,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후 일제강점(日帝强占) 때는 배일사상(排日思想)과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鼓吹)하였다.
---> 문장을 고침.
어느 날 의병 수 명(數 名)이 선생(先生)을 찾아와서 부족(不足)한 군량미(軍糧米)를 요구하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수고한다는 치사(致辭)와 함께 돈과 쌀, 그리고 애마(愛馬)까지 주어 보냈다 한다. 즉시 왜경(倭警)이 정보를 입수(入手) 득달같이 달려와 소리치자 선생은 자진(自進)하여 아주 당당하게 "내 민족(民族)을 내가 구원(救援)하기로서니 무슨 잘못이 있느냐?" 하며 대항하자 왜경(倭警)이 총검(銃劍)을 가슴에 대고 위협(威脅)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자약(泰然自若) "나는 이미 사생(死生)을 결단(決斷)한 자(者)인즉 의리(義理)와 도덕(道德)을 아는 자(者)이면 너희들 양심(良心)에 맡기겠다" 고 하며 의지(意志)를 굴(屈)하지 않으니 그들도 가히 대인(大人)됨을 알고 스스로 물러갔다한다.
그의 문하생(門下生)들도 선생(先生)의 배일(排日) 정신을 본받았는데 안병기(원문엔 安東基로 되어 있으나 同門生에는 안병기(安炳𤪌) 甲辰生 1904년 竹山人로 되어있다. 정정한다.)는 조선(朝鮮)총독(總督)을 살해(殺害)하려고 모의(謀議)하다가 사전에 발각(發覺)되어 일본(日本) 관헌(官憲)에 붙들려 투옥(投獄) 5년 후에 출감(出監)되었다한다. 또한 선생은 일제(日帝)의 단발령(斷髮令)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손과 문하생들의 귀감(龜鑑)이 되었다고 한다.
때마침 일제(日帝)가 각처(各處)에 사립(私立)강습소(講習所)를 설치(設置)하여 학생(學生)을 모집(募集)하자 선생은 현금(現今) 일제는 저희들의 말을 가르치고 순화(淳化)하려하고 광분(狂奔)하고 있으니 이에 속지 말고 이 서당(書堂)에서 공부(工夫)하기를 역설(力說)하여 한 사람도 강습소(講習所)에 가는 자(者)가 없었다한다.
하루는 왜인(倭人) 서장(署長)과 조선인 순사(巡查)가 찾아와서 서당(書堂) 철거(撤去)를 종용(慫慂)하니 선생은 “강습소(講習所)는 왜인(倭人)들의 글을 가르치나, 여기는 우리글은 가르치는 곳이다” 라고 대갈일성(大喝一聲) 하여 이들을 추방(追放)하였다. 또한 선생은 덕성(德性)이 온후(溫厚)하고 언소(言笑)가 적으며 아무리 혹서(酷暑)철이라도 대립(竹笠)과 옷을 벗지 않았으며 지절(志節)이 출중(出衆)하고 처신(處身)이 근엄(謹嚴)하였다.
이렇게 강직한 선생이었으나 부모님께서 노환(老患)으로 와병(臥病)중에는 식음(食飲)을 전폐(全廢)하고 시병(侍病)하였으나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 돌아가심에 3년상을 치루는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칭송 않는 이가 없으며 타인(他人)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이로써 훈육(訓育)과 효성(孝誠), 박애(博愛)로 일생을 마치시고 저서(著書) 수 권(數 卷)이 있으며 1944년 5월 13일 조국의 광복을 1년여 앞두시고 향년 88세로 졸(卒)하였고 묘소(墓所)는 부흥산(富興山) 도덕골에 있다. ---> 부흥산(富興山)은 시골에서 흔한 <부엉이>에서 온 이름으로 한자 부흥(富興)으로 써서 좋은 뜻으로 새긴 것이다. 도덕골은 두둑골일 것이다. 두둑(坡)은 언덕을 말한다.
(三蓮亭重修發起文, 1970.4.1. 蓮隱李先生行狀記. 김종훈(84세) 보관문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