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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7. 묵상글 ( 연중 제6주간 금요일. - 건강한 사람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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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건강한 사람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 주님 말씀에 따르면
잃어야 할 목숨과 구해야 할 목숨이 있고,
죽어야 할 목숨과 살아야 할 목숨이 있고,
이 세상에서 사는 목숨과 하느님과 함께 사는 목숨이 있는가 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언제 들어도 어렵고
지금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앞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주님을 따라야만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주님을 따르는 데 자기나 자기 목숨이 방해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주님을 따라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께 갈 것이고, 지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가겠지요.
그리고 그래야 우리는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고 잃지 말아야 할 목숨이며,
반대로 사라질 이 세상의 어차피 없어질 목숨은 잃어야 할 목숨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어려운 것이 실은 뜻이 아니라 실천일 것입니다.
저세상에서 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죽는 것,
저세상의 삶을 이미 여기서 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심리학에서 정신 건강을 간단하게 테스트하는 것이 있답니다.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 두 가지 음식이 있고 둘 다 먹어야 하는데
무엇을 먼저 먹느냐에 따라 정신이 건강하고 약한 것이 갈린답니다.
맛없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이 정신이 건강하고
그 반대의 사람은 정신이 약한 사람이라고 한답니다.
정신이 건강하다고나 할까 강하다고나 할까 그런 사람은
현재의 싫은 것이나 고통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곧 미래의 기쁨이나 행복을 위해 견디는 힘이 강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내 알 수 있습니다.
미성숙하고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조그만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나중에 어떻게 되건 당장 좋은 것만 하려고 합니다.
어제는 미사 가방, 수도복, 컴퓨터 등이 들어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귀가하는데,
무겁고 힘들어도 그리고 무릎이 안 좋아도, 건강을 위해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인, 힘든 것을 피하지 않고 이겨내는 내가 되기 위해 계단을 걸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젊은이 거의 모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렇게 쉽게 그리고 단숨에 위로 오르던 젊은이들이
인생길에서 수없이 만나는 어려움을 어떻게 맞닥뜨리고 견디어내며,
또 어떻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 노파심에서 염려가 되었습니다.
목표를 아예 또는 이내 포기하지 않을까?
목표를 향해 가되, 가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가 되고,
스트레스가 쌓여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으로 건강을 잃지 않을까?
이런 남 걱정을 하다가 이내 저를 돌아봤습니다.
그들보다 조금 더 정신적으로 강하고 그래서 당장의 고통을 그들보다
조금 더 잘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숙제를 미루고 당장 노는 것을 선택하는 아이처럼,
내가 죽는 것은 뒤로 미루고 당장 즐거운 것만 쫓는 나는 아닌지.
내일과 모레 강론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글피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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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본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에서,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인지,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지금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는지보다, 무엇을 채웠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비울 수가 없으며, 이미 자신을 비우신 그분에 의해서 비워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빋이들이고, 그분께 의탁하여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스스로를 비운다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신을 실현하는 꼴이 되겠지만, 그분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신앙의 행위로 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주님!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도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고통과 함께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속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가운데 계시는 당신을 통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사랑의 십자가를 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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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는 사랑의 보증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의 보증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고대 로마인들이 범죄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던 도구였습니다.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형태의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하면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고 난 이후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신성하고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의 용서를 위해 기꺼이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놓으심으로써 인간에게 속죄와 구원을 가져다주셨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었지만(1코린 1,23. 갈라5,11) 하느님께서는 패배처럼 보이는 것에서 승리를, 허약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활기 넘치는 힘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우리를 위한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담을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내려놓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기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우리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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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미운오리 새끼’라는 동화를 읽었습니다. 오리 새끼들 중에 유난히 키도 크고, 털의 색이 다른 새끼가 있었습니다. 물 위에 비친 모습이 다른 새끼들과는 달랐습니다. 엄마 오리는 다른 새끼들과는 다르지만 똑같은 정성으로 키웠습니다. 어느 겨울 미운오리 새끼는 호수로 날아온 백조를 보았습니다. 미운오리 새끼는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백조들과 함께 힘찬 날개 짓으로 하늘을 날아올랐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도 읽었습니다. 실력은 있지만 타고난 성격 때문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선수들이 함께 모여 지옥 훈련을 하였습니다. 모난 성격들이 다듬어지고 외인구단은 뛰어난 성적을 올린다는 만화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미래에 대한 이상을 가진 사람은 ‘미운오리 새끼’ 취급을 받곤 합니다. 거짓과 욕망으로 출세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에 나눔과 겸손으로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사람은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 기획팀’이 발족하였습니다. 보스턴, 탬파, 버지니아, 토론토에 사는 분들이 열정과 신념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상과 열정으로 신앙의 차원을 높여보려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을 개설하였습니다. 좋은 강사를 섭외하고, 홍보하고, 강의를 개설하였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하는 이분들에게 지도 사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으니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유리처럼 반사하는 성격이 아니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성격인 저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줌으로 하는 신앙 강좌 기획팀’이 발족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뉴욕에서 모여 단합대회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숙소를 구하고, 함께 미사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획팀은 다른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피정의 집을 선택하였습니다. 미사를 하고, 신앙체험을 나누고, 신앙기획팀이 나갈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는 ‘미운오리 새끼’처럼 보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벨탑’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우화가 생각납니다. 많은 애벌레들이 아무런 이상도 없이, 목적도 없이 다른 애벌레들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앞서가는 애벌레는 끌어 내렸습니다. 따라오는 애벌레는 떨어트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강한 애벌레들만이 앞으로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허무였습니다. 그 끝은 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 출세,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신기루를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를 보았습니다. 나비는 측은한 눈빛으로 애벌레에게 그 길로 가지 말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의 눈빛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줄무늬 애벌레는 나비의 말을 듣고 욕망이라는 ‘탑’을 오르기를 포기하였습니다. 누에가 된 애벌레는 시간이 지나면서 ‘노란나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나비와 함께 하늘을 날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라가야 할 탑은 욕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탑은 증오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겸손의 누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누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가는 사람을 끌어 내리는 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밀쳐내는 탑을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동료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지 않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는 샘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체험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변에 미운오리 새끼가 있다면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꿈과 이상을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공포의 외인구단이 있다면 그들의 꿈과 이상을 격려하면 좋겠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이 있다면 그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누에가 되지 않는 애벌레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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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크론시타트의 요한 성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성인께서 어느 날 기도하고 있는데 악마가 찾아와서 이렇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이 위선자야! 어떻게 감히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느냐? 내가 너의 생각을 다 읽었다. 너는 더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악마에게 별 상관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종종 “저 같은 사람이 감히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라면서 자격 없음을 들어 이야기하십니다. 겸손해 보이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말씀처럼 그렇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했습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입으로만 자격 운운하고 있을 뿐, 어떻게든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유혹이 있어도, 또 때로는 온갖 분심으로 가득해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창 신부와 전화 통화할 때면 보통 30분에서 때로는 1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합니다. 특별한 대화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즐겁고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주님과의 대화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벗으로 오신 주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벗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니, 주님과의 대화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에 이분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종 커다란 착각에 빠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마르 15,21 참조)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서 따를 수 있을까요? 주님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서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의 삶을 살면서 주님을 따르고, 또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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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보통 사람보다 용기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5분 정도 더 오래 용기를 지속시킬 수 있을 뿐이다(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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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바벨탑을 쌓지 마라
바벨탑을 허물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무지의 죄입니다. 반복되는 죄입니다. 죄의 악순환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죄의 현실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눈먼 무지의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에 이어 노아시대의 죄로 인한 심판의 홍수, 노아를 통해 새로 시작된 삶이었는가 했는데 또 바벨탑을 짓는 죄를 되풀이 합니다. 흡사 거대한 괴물처럼 생각되는 바벨탑입니다. 두려움에서 기인한 바벨탑 쌓기입니다.
먼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바, 참 다양하고 깊습니다. 안팎으로, 알게 모르게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 본능상, 자기 보호 본능상 바벨탑을 쌓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바벨탑, 우상의 바벨탑, 교만의 바벨탑, 허영의 바벨탑, 명예의 바벨탑, 탐욕의 바벨탑,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잊으면, 하느님을 잃으면 사람은 누구나 바벨탑을 쌓기 마련입니다. 마음 깊이 내재한 갈망, 불안, 두려움, 공허, 허무, 무의미, 무료함 때문에 바벨탑을 쌓습니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바벨탑의 제국들이 명멸했는지요! 도시마다 높이 솟은 거대한 괴물같은 고층 아파트들이 흡사 바벨탑을 연상케 합니다. 오늘날도 바벨탑 제국들의 역사는, 참으로 위태한 바벨탑의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무지의 바벨탑에 반드시 등장하는 독재자들입니다. 무지의 독재자들이 꿈꾸는 바 무지의 바벨탑, 교만의 바벨탑 쌓기의 제국들입니다.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하니 획일적 집단을 이루기가 너무 좋습니다. 두려움의 본능상 함께 모이는 것은 필연입니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합니다. 그들은 이주해 오다가 마침내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습니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흩어지는 것이 두려워 한데 모여 도시를 건설하고 일치의 중심인 우상같은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의 바벨탑입니다. 내적 공허와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대책이 고작 우상의 바벨탑, 무지의 바벨탑 쌓기입니다. 결국은 자멸에 이를 바벨탑을 쌓는 무지의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단의 개입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심판, 살리는 심판입니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심으로 바벨탑 중심의 눈먼 획일적 무지의 집단을 살리십니다. 그들은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고, 바벨탑 쌓기를 중단하고 온 땅으로 흩어집니다. 우상 중심의 세상에서 살다 보면 지배와 피지배의 상황은 재현되기 마련이며 여기서 노예상태의 사람들 또한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상실이요, 자기를 잃은 익명의 무명의 존재가, 1회용 소모품 인생 되기가 십중팔구입니다. 그러니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인 하느님 구원 사건의 쾌거가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바, 참 깊고 두렵습니다. 마치 현대의 문명이 바벨탑 쌓기의 멸망으로 치닫지는 않는지 불길한 예감도 듭니다. 디지털 혁명이 추세라지만, 문명의 대세라지만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인간이 실종되가는, 도태되어 가는, 퇴화되어 가는 추세가 불길하기만 합니다. 도대체 점점 일자리도 사라져가니 약하고 착한 보통 사람들이 살길이 막막해집니다. 자연이나 마을은 사라져가고 도시화와 더불어 무수한 고층의 아파트들에 사람들은 날로 왜소해져가고 죄도, 병도 많은 세상이 되어 갑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쌓기와 도시건설과 참 좋은 대조를 이루는 옛 광야같은 세상을 옥토로 만든, 야만의 유럽을 문명화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이들 수도자들이 먼저 광야에 머물렀을 때 한 일은 바벨탑 쌓기가 아니라 수도원을 세우고 성전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니 오늘 창세기의 바벨탑같은 우상 중심이 아니라 넓은 광야같은 유럽 대륙 곳곳에 하느님 중심의 도시가 형성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수도원 도시들이 광야의 유럽 곳곳에 생김으로 거친 광야의 유럽은 옥토로 변합니다. 이래서 유럽인들은 성 베네딕도 수도회(시토회, 트라피스트회 포함)가 유럽을 구했다 하여 베네딕도 성인을 유럽의 은인으로, 또 유럽의 주보 성인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 정주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역시 함께 살지만 공동으로 기도할 때와 식사할 때와 일할 때를 제외하곤 흩어져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 중심의 함께와 홀로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성의 일치를 이루는 유기적 공동체 삶이지, 결코 창세기의 바벨탑 중심의 획일화된, 단일화된 무기적 비인간화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러니 살길의 답은 단 하나, 분명해졌습니다. 무지의 바벨탑을 쌓지 않는 것입니다. 무지의 바벨탑 쌓기를 중단하는 일이요, 우상의 바벨탑을 허무는 일입니다. 바벨탑 우상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예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길이요, 각자 삶의 자리에서 형제들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요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전쟁의 요체입니다.
그러니 바로 창세기 바벨탑에 대한 궁극의 답을 오늘 복음이 줍니다. 예외없이 인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구원의 삶의 길은 이길 하나뿐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수 있겠느냐?”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례여정의 삶을 살 때, 저절로 안주를 위한 내외적 바벨탑 쌓기는 중단되고 우상의 바벨탑도 허물어질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을 나눕니다. 늘 나눠도 늘 새로운, 내적 우상의 바벨탑 허물기에 참 좋은 고백기도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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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순교라는 말을 현대인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제가 지금 지내고 있는 곳은 ‘갑곶순교성지’입니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에 이곳에서는 우리 신앙인 중 몇몇이 복음 때문에, 자신의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친 곳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 말씀이 다시 한번 묵상 되는 장소가 바로 제가 사는 이곳입니다. 순교한 분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기에 하늘의 영원한 복을 얻으셨고, 하느님 품에서의 삶이라는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죽음의 순교’, 혹은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죽임을 당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당에 나와 기도 한다고 해서 잡혀갈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큰 소리로 기도하고 성가를 부른다고 해서 끌려가거나 옥살이할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방법으로 복음 때문에 목숨을 바쳐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랑해야 할 순간순간에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내 마음이 ‘내가 더 사랑받아야 한다.’라고 소리칠 때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용서해야 할 순간순간에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내 마음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라고 말할 때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믿어야 할 순간순간에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내 마음이 ‘더 이상 주님을 너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할 때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이것이 우리 목숨을 하늘에 꽃 피우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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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함은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
마음의 물이 탁할 때에는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할 때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입니다. 오히려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까지 보이기도 합니다.
평상시 일상을 살아갈 때는 잔잔함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바쁜 일상을 살기도 하고 더욱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자기 자신에게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요즘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것들과 동시에 마음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오물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잔잔함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건져낼 것은 건져냅니다. 추한 마음과 더러운 마음을 덜어냅니다.
그리고 닦아냅니다. 그 오물들 때문에 마음에 끼인 이끼 같은 습관들을 닦아냅니다.
이러한 마음 작업은 잔잔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물과 같은 우리 마음을 가끔은 잔잔하게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그곳을 깨끗이 만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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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사람의 길>
앞섬이 아닌 따름의 길
홀로가 아닌 함께의 길
가짐이 아닌 비움의 길
오름이 아닌 낮춤의 길
누름이 아닌 받듦의 길
받음이 아닌 베풂의 길
밀침이 아닌 품음의 길
없앰이 아닌 이룸의 길
죽임이 아닌 살림의 길
찰나가 아닌 영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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