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윤 칼럼(23-40)> 70년대 현대미술계 거장, 박서보·김창열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100년> 제7강은 1970년대 두 거장인 박서보 화백과 김창열 화백에 관한 이야기를 정하윤 박사(이화여대)가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6월 13일(화) 오후 2시부터 두 시간에 걸쳐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또한 조선일보 6월 13일자 16면(Culture)에 ‘나의 현대사 보물(9) 화가 박서보, 현대미술사가 50년 일기(日記)에 담겼다’가 실렸다.
박서보(朴栖甫, 본명 朴在弘)은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4남2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했고, 부친이 대서소(代書所) 일을 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 1950년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에 동양화 전공 2기로 입학했다. 하지만 바로 6.25남침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중에 부친이 병사(病死)했다.
1953년 휴전이 되고 환도 후 홍익대학 미술과는 서울 종로의 화신백화점과 YMCA 사이에 있던 장안빌딩 뒤 창고 건물로 옮겨왔다. 1954년 마지막 학기에 광주 보병학교에 입대해 장교 훈련을 받고 군대 문제를 해결했다. 1956년 홍대에서 만난 이봉상 선생의 이름을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란 이름의 화실을 운영했다. 1958년 12월에 결혼하여,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홍익대 강사로 시작해 1997년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박서보는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박서보가 화단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이다. 1958년 서울화신백화점에서 열린 제3회 현대전(現代展)은 한국에 앵포르멜(Informel)미술이 시작된 기점으로 미술사에서 자주 언급된다. 박서보의 ‘회화 No.1’의 출품 때문이다. 제4회 현대전에서는 비정형(非定形)이라고 하는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혼합한 추상회화(抽象繪畵)가 부상되었다.
박서보는 1970년대에는 한국미술가협회 부이사장과 이사장을 역임하며 현대미술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97년 마포구 성산동에 신축한 작업실에 1994년에 설립한 (재)서보미술문화재단 사무실을 옮겨 운영하고 있다. 박서보 화백은 1994년 심근경색증(心筋梗塞症, myocardial infarction)으로 쓰러졌고, 2009년에는 뇌경색(腦梗塞, cerebral infarction)으로 다시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작업을 이어가서 2015년에는 ‘단색화(單色畵) 열풍’이라고 부르는 상황을 맛보게 되면서 해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2019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89세의 나이로 생애 두 번째 회고전(回顧展)을 열었고, 9월에는 후진양성을 위해 기지재단(Gizi Foundation)을 설립하였다. 박서보 화백은 국민훈장 석류장(1984), 옥관문화훈장(1994), 은관문화훈장(2011), 금관문화훈장(2021)을 수훈했으며, 2020년에 제4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공헌예술가상)을 수상했다.
<단색화>란 한 가지 색 또는 비슷한 톤의 색만을 사용한 그림으로 한국의 전통과 미학을 담은 그림이다. 한국식 모노크롬(monochrome)으로 알려지다 2000년 국제 미술전람회 광주비엔날레(Gwangju Biennale) 이후 단색화(영어표기: Dansaekwha)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사조로 자리매김했으며, 세계 미술계가 비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단색화의 대표적 작가들은 김환기, 권영우, 정창섭, 윤형근, 박서보, 정상화, 하종헌, 김기린, 이우환 등이 있다.
박서보(Park Seo-Bo) 화백은 ‘한국 단색화의 대부’,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로 지칭되며,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을 주도한 인물이다. 1991년 일본의 미술평론가 미에무라 도시아키(峯村敬明)는 “구미의 근대회화와는 근본정신부터가 차이가 나는 아시아 민족의 추상회화를 박서보(朴栖甫)가 만들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서보 화백의 조선일보(2023.6.13.) 인터뷰(허윤희 기자) 기사에서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80세까지 안 팔리는 작가였고, 단색화 열풍의 주역이 된 그는 최근 달라진 한국 미술의 위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리는 늘 있었어요. 이제야 세계가 한국 미술의 위상을 알아본 거죠. 그런 작가를 알아보고 힘을 실어주려고 박서보 재단이 미술상을 제정할 겁니다. 박서보 장학 재단의 장학금을 받는 대학생들 전시도 기획할 거예요. 내가 죽어도 이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박서보 재단이 애써 주리라 믿습니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金昌烈, Kim Tschang-Yeul)은 1929년 12월 24일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났으며, 2021년 1월 5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창열 화백은 한국 예술사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술계의 거장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마르틴 질롱(Martine Jilon) 씨와 아들 김시몽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와 김오안 사진작가 등이 있다.
김창열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사사해서 서예(書藝)를 익힌 그는 붓글씨를 통해 회화(繪畵)를 접했고, 광성고보 시절 외삼촌으로부터 데생을 배우면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6세 때 이쾌대가 운영한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검정고시로 1949년 서울대학교 미대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6.25전쟁이 벌어지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전쟁 후 서울대학교에 다시 등록하려고 했으나 월북한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녔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등록이 거부된다.
이후 군 복무를 대신하여 경찰직에 근무했다. 부평경찰전문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1955년 고등학교 교사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한 후 경찰에서 나와 서울과 수도권의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현대전(現代展)을 통해 한국의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으며, 1961년 파리 비엔날레 등에 작품을 출품했다.
대학 은사였던 김환기 교수의 주선으로 1965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4년간 뉴욕에 머물며 록펠러재단 장학금으로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여기서 비디오작가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의 눈에 띄어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하였고, 이를 계기로 파리에 정착한다.
김창열은 파리 남쪽 팔레조(Palaiseau)의 마굿간을 공방으로 쓰던 독일의 한 젊은 조각가에게 작업실을 이어 받아, 여기서 부인 마르틴 질롱을 만나 동거하면서 그림을 그린다. 재료 살 돈을 아끼려 캔버스 뒷면을 물에 적셔 묵힌 후 물감을 떼어 또 그리는 식으로 재활용하던 어느 날,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영감을 얻어 1972년부터 물방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 연 첫 개인전이 우연히 길을 지나던 파리의 일간지 콩바(Combat)의 선임기자 알랭 보스케의 눈에 들어 기사화되고, 이후 다른 신문사에서도 앞다투어 취재를 해가면서 순식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2년 파리의 권위 있는 전위미술 전시회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 초대받아, 검은 바탕에 오롯한 물방울 하나와 그 그림자를 그린 ‘Event of Night, 1972’를 출품하여 유럽에서 데뷔했다.
1973년에는 물방울 회화만을 모은 첫 프랑스 개인전을 개최하여 ‘물방울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975에는 ‘르 피가로(Le Figaro)’ 1면에 수채 물감으로 물방울을 그렸으며, 이 때 처음으로 문자와 물방울의 조합이 시작된다. 1980년대는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선보인 ‘회귀’ 연작은 인쇄체로 쓰인 천자문(千字文)을 배경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무리 지어 화면 전반에 흩어져 있다. 한국에서는 이 작품을 철학과 정신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한다.
김창열 화백은 프랑스에서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1996)과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2017)를 받았으며, 한국에서 은관문화훈장(2017)을 수훈했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아들 김오안이 김창열 화백으로부터 받은 예술적 영향이 지대하다는 생각이 들어, 틈틈이 부친을 담은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상이 모여 김창열의 작품세계와 일생을 탐구한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졌다. 제주시에 <김창열미술관>이 2016년 개관했다.
<사진> (1) 박서보 화백(금관문화훈장)과 작품(회화 No.1), (2) 김창열 화백(부인과 함께)과 작품(Le Figaro 물방울).
靑松 朴明潤 (서울대 保健學博士會 고문, AsiaN 논설위원), Facebook, 14 June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