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정형외과·재활의학과 출신' 런던올림픽대표팀 주치의
서동원씨
런던의 28개 메달 뒤엔 '금메달 닥터' 있었다
신동흔 기자/조선일보 : 2012.09.01.
스포츠는 내 삶의 에너지‐ 축구 잘했으면 의사 않고 선수됐겠죠" 주사제 사용 '金'_'바늘 자국만 있어도 도핑 'IOC 정책에 조마조마…
女핸드볼 가장 안타까웠다_관중석에서 정유라 선수 무릎 돌아가는걸 봤는데… 종합병원과장서 레지던트로 수술없는 재활치료 한계…
남현희 등 스포츠스타 단골 2005년 청소년축구대회때 박주영이 경기중 팔 빠져 현장에서 맞춰준 인연…
"어린 선수들 보호하자” “같은 동작 과도하게 반복 선수들 몸 망치는 훈련방법 개선해야”
금메달 13개, 은메달 8개, 동메달 7개로 한국이 종합 순위 5위를 기록한 제30회 런던하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받은 메달 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공식(?) 금메달 하나가 더 있다. 한국팀은 이번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게 투여한 주사제 사용량에서 1위를 차지했다. 런던올림픽은 몸에 주삿바늘 자국이 있으면 도핑으로 간주하는 ‘주삿바늘 사용 금지 원칙’(No Needle Policy)을 처음으로 적용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놀랄 필요는 없다. 금지 약물은 없었으니까.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는 이번부터 선수들이 처방받는 주사제를 일일이 신고하게 했다. 그 결과, 우리가 가장 많은 신고 서류를 제출했던 것이다. 유도·핸드볼 등 유난히도 부상 선수가 많았던 이번 '팀 코리아'의 성과는 부상에 굴하지 않은 선수들의 투혼이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를 뒷받침한 코칭 스태프와 의료진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런던올림픽 선수단 245명의 재활의학과 및 정형외과 팀 닥터로 참여했던 바른세상병원 서동원(49) 원장을 만났다. 그는 재활의학 및 정형외과 두 분야 전문의 자격증을 보유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 올림픽 기간 내내 경기장과 선수촌 의무실에서 환자들의 관절과 근육에 주사를 놓고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뼈도 맞춰주느라 정신없이 보낸 서 원장은 지난 24일 오후 경기도 성남 분당의 병원에서 올림픽 기간 내내 밀렸던 진료와 수술 일정을 소화해내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선수용 주사제 사용은 나도 금메달"
―팀 닥터였으니, 경기를 많이 봤겠다.
"대부분의 시간을 선수촌 의무실에서 선수들을 기다리며 보냈다. 점심시간이고 자정이고 불시에 환자(선수)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경기장은 거의 못 갔다는 말인가.
"유도 경기장을 비롯해 몇몇 경기장은 직접 갔다. 사전 등록이 안 돼 있으면 벤치에 앉지 못한다. 일단 부상이 나면 바깥으로 후송해서 치료한 경우가 많았다."
―유도는 사전에 등록이 되어 있었나.
"태릉선수촌부터 봤던 유도 선수들의 부상이 심해 직접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주사 한 대라도 더 놓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번 올림픽은 주사가 금지되지 않았나.
"'No Needle Policy' 때문에 정말 조심했다. 대회 초기 선수들이 힘들어해도 주사를 놓지 못했다. 주삿바늘 자국만 있어도 도핑으로 간주한다는 말에 바짝 긴장했다. 답답한 나머지 대회 사흘째 되던 날 밤인가 의료진이 런던 시내 IOC 위원들만 묵는 힐튼호텔에 찾아가 도핑 담당 위원장에게 문의를 했다. 그랬더니 '주사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사를 놓기 전에 무슨 약물을 쓸지 미리 신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다음부터 일일이 신고해가면서 선수들에게 주사를 썼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가장 신고 문서를 많이 낸 나라가 됐다고 하더라."
―그걸로도 금메달 받을 뻔 했겠다.
"의료진도 열심히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슨 주사를 놓았나.
"관절 윤활유(히알론산)와 국소 마취제, 소염제… 다양하게 썼다. 정형외과 의사가 거기까지 가서 어떻게 가만히 있나. 우리는 수술하면서 관절 속을 열어보고 주사도 찔러봤기 때문에 선수들이 '아프다'고 하면 어디가 왜 아픈지 감이 온다. 경기장에선 당장 거기만 해결해주면 좋아질 수 있다. 그래서 주사약에 초음파기기까지 잔뜩 챙겨서 갔다."
―유도 선수들이 맞은 주사는 주로 관절염 환자들이 맞는 주사 아닌가.
"엘리트 유도 선수들은 경기 때마다 어깨 팔꿈치 무릎 등 곳곳의 관절이 비틀리고 꺾인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세계 최고 수준급 선수들이다. 관절 부상은 엘리트 유도 선수들의 운명이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선수는.
"김재범 선수다. 처음 태릉선수촌에 진료 봉사 나가서 그의 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몸으로 유도를 할까 싶었다. 그 몸으로 금메달을 땄으니 '죽기 살기로 할 때는 안 되더니 죽자고 하니까 되더라'는 그의 말은 100% 진실이었다."
―가장 안타까웠던 선수들은.
"여자 핸드볼 선수들이다. 관중석에 있었는데 내 눈앞에서 정유라 선수의 무릎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전방십자인대를 이어줄 수도 없고…. 역도 선수 사재혁도 경기 중 팔이 빠지는 위급한 상황이 있었다. 그때 나한테 응급 콜이 왔다. 나는 배구 경기장에 있었는데 역도 경기장까지 이동하는 길이 너무 막혔다. 현장에 있었으면 빠진 팔을 1분 만에 맞출 수도 있었는데…. 당시 응급실 의사는 엑스레이를 보면서 팔을 맞췄다고 한다."
―왜 핸드볼팀 벤치에는 앉지 못했나.
"핸드볼 규정에 스태프는 윗도리 티셔츠를 통일하게 돼 있었다. 물리치료사가 다른 옷을 입고 있다가 500파운드 벌금을 물었다. 이래저래 벌금도 참 많고 까다로운 올림픽이었다."
―축구 마니아라고 들었다. 축구 경기장 벤치에는 앉았나.
"하하, 사실 올림픽 대표팀 주치의가 되고 나서 가장 기대를 했는데, 알고 보니 축구팀은 축구협회에서 파견한 주치의가 따로 있었다."
―가장 위험한 종목은 뭐라고 생각하나.
"필드하키라고 생각한다. 그 딱딱한 공을 다루는데 정강이 보호대 말고는 없지 않은가. 하키 퍽을 맞고 이가 다 박살 날 수도 있다. 하키 스틱도 굉장히 무섭다. 이번에도 하키 스틱에 맞아 골절된 선수가 있었다."
―올림픽 선수촌 클리닉은 어땠나.
"선수촌 물리치료실에 우리 병원 장비와 똑같은 스위스제 체외충격파 기기가 있었다. 근육을 풀어주는 기계다. 그런데 영국인 직원들은 사용법을 몰라 방치하고 있었다. 내가 어깨 근육이 잘 뭉치는 체조 선수들을 데려가 치료를 했더니 자기들한테도 사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냥 내버려뒀으면 다른 나라 선수들은 이용하지 못했을 텐데, 본의 아니게 다른 나라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도 도움을 준 셈이다."
―에피소드가 많았나 보다.
“진료 과목 중에 치과와 안과도 있었는데 그곳 클리닉에서 치과 보철도 해주고 틀니도 해줬다. 그러다 보니 일부 가난한 나라 임원들은 그곳에서 틀니에 안경, 콘택트렌즈까지 무료로 맞추고 돌아가더라.”
◇37세에 시작한 정형외과 레지던트 생활
◀ 김재범 선수가 금메달을 딴 직후 도핑테스트까지 끝내고 함께 찍은 셀카./바른세상병원 블로그
서 원장이 대표팀 주치의로 발탁되는 과정에서 재활의학과와 정형외과 동시 전문의 자격은 큰 역할을 했다. 한 명이 참가하지만, 사실상 의사 두 명이 간 셈이었다. 이번 올림픽 팀 주치의는 그 외에 박원하 삼성서울병원 스포츠의학과장, 고정아 가정의학과 전문의 이렇게 3명으로 구성됐다. 평소에도 그는 재활의학과 정형외과 경력을 결합해 수술도 하고 약물 치료와 재활 치료를 병행하고 있었다. 그의 병원 옥상에는 인조 잔디를 깐 미니 축구장과 헬스 시설까지 있어서 운동선수들이 회복을 하며 몸도 풀 수 있다. 운동선수들이 많이 찾는지 병원에는 축구 야구 배구 등 여러 프로팀 선수들이 기증한 사인볼이 작은 장식장 하나를 채우고 남을 정도로 전시돼 있었다.
―스포츠의학은 재활의학과 가까운가.
“스포츠의학은 분야가 다양하다. 스포츠 손상으로 들어가면 이를 치료하는 것이 정형외과와 재활의학과 두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수술적 치료가 정형외과라면 비수술적 치료를 주로 하는 것이 재활의학과라고 할 수 있다.”
―올림픽 팀 닥터가 된 계기는.
“지원을 했다. 우리 병원 재활센터 원장님이 과거 국가대표 육상 감독이었다. 선수촌 재활의학과 상근 의사가 병가를 낸 사이 그분의 소개로 일주일에 한 번씩 선수촌에 가서 진료를 하다가 올림픽이 다가오면서 일주일에 2~3번씩 가게 됐다. 그러다가 팀 닥터에 지원을 했다.”
―대표팀 따라 파견된 것은 처음인가.
“2005년에 축구협회 파견으로 세계청소년축구대회 팀닥터로 동행한 적이 있다. 당시 박주영 선수가 경기 도중 팔이 빠졌는데 현장에서 맞춰줬다. 박주영은 ‘습관성 탈구’가 있었다. 나이지리아 선수와 헤딩하고 내려오다가 그만 팔이 빠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문제가 없다.”
―스포츠 손상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재활의학과에서 나는 근골격계 손상에 대해 보존적 치료를 하고 운동을 통해 회복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전문의 자격을 따고선 고대 안산병원 재활의학과장으로 근무했다. 그 후 하버드 재활의학과에 펠로로 2년을 갔는데 돌아올 때쯤 정형외과 전문의 자격도 따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무슨 일이 있었나.
“스포츠 손상을 전공으로 하면서 주사도 놓고 재활 치료 물리 치료도 공부했는데, 수술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수술을 하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근골격계 질환을 치료하는 데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종합병원 과장을 하다가 레지던트 과정을 다시 밟기로 결정한 것은.
“하버드 재활의학과에 펠로로 있으면서 회진을 돌 때 젊은 교수 옆에 따라다니는 나이 지긋한 교수가 있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사람은 교수가 아니라 레지던트였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누가 봐도 40대 후반~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인데…. 아, 저 나이에도 젊은 교수 따라 회진을 도는구나’ 생각하니 나도 지금 정형외과를 시작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스포츠 손상에 관심이 많았나.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분야를 택한 것이다. 미국 연구실에서 미세 현미경을 보면서 근육 하나하나를 잇는 수술을 배웠다. 극세사로 근육 세포를 잇는 것이었는데 나는 1시간에 3개 정도를 이었다. 손에 익으니 4개 정도를 할 수 있었다. 미국 의료진은 1시간에 하나도 못 이었다. 거기서 ‘손이 섬세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의 ‘손기술’을 쓸 수 있는 분야는 정형외과였다. 정형외과 의사의 애용 장비가 망치와 톱 아닌가.”
―다시 레지던트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겠다.
“37세에 정형외과 레지던트 1년차가 되어 ‘100일 당직’(100일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병원에서 근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들어가보니 고대안산병원 과장 시절 인턴과 실습생으로 있던 후배들이 레지던트 위 기수로 와 있었다. 원래 나를 잘 따르는 학생들이었는데 굉장히 어색했다. 하지만 1년차 레지던트가 해야 할 일은 빼놓지 않고 다 했다. 정형외과 수술 앞두고 다른 과 교수나 레지던트들을 찾아다니며 ‘수술해도 좋다’는 서면 확인을 일일이 받아오는 것도 ‘막내’인 내가 할 일이었다.”
―정형외과를 하면서 재활의학과 지식도 많이 도움이 되나.
“재활의학과에서 내가 많이 쓴 것이 주사였다. 그런데 정형외과 의사는 주사로 환자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많지 않다. 그리고 물리치료를 제대로 했을 때 좋아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재활의학과가 더 잘 알 수 있다. 그러니 환자들한테 해줄 이야기는 좀 더 많은 편이다. 수술 좋아하는 환자는 없다. 나는 다른 데서 수술 진단을 받아온 환자를 수술 없이 주사와 물리 치료만 하는 경우도 많다.”
―병원은 언제 개업했나. 원래 운동선수가 많이 왔나.
“2004년 정형외과 의원 개업해서 파리만 날렸다. 지금 있는 분당의 상가 건물 2층 한 귀퉁이에 의원을 열었는데, 하루 환자 30명을 못 넘겼다. 환자가 없다 보니 설명을 열심히 했다. 1시간씩 설명해야 환자들도 대기실에서 좀 기다리게 되지 않겠나. 그게 소문이 났는지 조금씩 환자가 늘었다. 언젠가부터 트레이너들이 자기 선수들을 데리고 왔다. 다른 병원 갔다가 나한테 세컨드 오피니언(보조 의견)을 듣기 위해 많이 왔던 것 같다.”
―트레이너들하고도 이야기를 많이 나눴나.
“그런 부분이 내가 좀 달랐던 것 같다. 바쁜 대학 교수님들은 MRI 보고 ‘수술해야겠네’ 한마디 던진 다음에 다른 방으로 가면 그 밑의 펠로들이 설명하고 수술 날짜 잡고 하는 식이다. 그런데 나는 직접 자세히 설명하고, 수술 말고 재활 치료도 하니까 소문이 났던 것 아닐까.”
―지금 병원은 어느 정도 규모인가.
“현재 의사 14명에 병상 90개, 수술실 5개, 물리치료실과 재활센터 등을 운영한다. 처음 입주한 건물에서 계속 확장해서 지금은 지하 1층 지상 5층 건물 전체를 다 쓰고 있다.”
◇“나는 즐거운 팀 닥터”
수많은 선수의 부상을 목격한 그는 선수들을 혹사하는 훈련 방식에 불만이 있었다. 의료진과 코칭스태프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어 선수를 보호하는 훈련법을 보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수들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달랐다. K리그 승부 조작에 연루돼 FIFA에서 제명된 국가대표 출신 축구 선수 최성국이 취직한 병원도 그의 병원이었다.
―선수 보호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갖게 됐나.
“2005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팀닥터로 참가했다. 당시 대회에서 한 경기도 못 뛴 선수가 있었는데 이미 그때 허리 디스크가 있었다. 매일 의무실에 와서 치료만 받았다. 그리고 무릎이나 발목 망가진 아이도 수두룩했다. 어떻게 이런 아이들을 선발했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청소년이면 미래가 창창한 선수들인데 벌써 환자 수준이었나.
“나도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엘리트 스포츠의 문제라고 봤다. 물론 다 치료를 했다. 그때 디스크였던 선수가 지금 국가대표니까.”
―누구인가.
“절대 말할 수 없다. 당시 그런 문제점을 외부에 이야기했다가 바로 팀닥터에서 잘렸다. 하하하.”
―어린 시절 손상이 와서 운동을 못하는 선수도 있나.
“학교 체육부터 코칭 스태프와 의사들이 토론을 해야 한다. 종목마다 어떤 동작은 과도하게 반복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축구에서 인사이드 킥으로 크로스를 올리는 것도 연습하느라 50~100개씩 연속으로 하고 나면 근육 피로로 무릎 관절 내측 인대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사소한 것 같지만 어린 시절부터 훈련할 때 이런 부분을 감안해서 선수들을 보호해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땀을 많이 흘리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축구하다 십자인대가 끊어졌는데 그때 병원에서 빨간 약 발라주고 붕대 감아준 게 다였다. 수술은 대학에 가서 받았다. 과거 고교야구 대회에서도 투수 한 명으로 64강에서부터 올라와 대학도 잘 가는데, 대학 가서 선수 생명이 끝나는 경우도 있지 않았나.”
―팀 닥터는 정형외과 의사들이 많이 하고 싶어 할 것 같다.
“장기간 병원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개원의는 가기 힘들다. 그래서 대학교수가 많이 간다. 병원을 비우는 동안 손실도 크다.”
―그 정도로 스포츠가 좋은가.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다. 축구를 잘했다면 선수 했을 것이다. 그러면 행복했겠지.”
―모든 정형외과 의사가 스포츠를 좋아하나.
“정형외과 의사가 운동을 싫어한다면 자기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툴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엘리트 운동선수들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라면 일반 동호인이나 일반인들의 운동 부상은 쉽게 고칠 수 있다. 내가 엘리트 선수 치료에 관심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펜싱의 남현희 선수도 당신 환자라고 들었다.
“펜싱에서 금메달이 나온 것은 남현희 선수의 공이 크다고 본다. 남현희 선수 같은 테크니션이 선배로 있었기에 어릴 때 남 선수가 활약하는 것을 보며 꿈을 키운 선수들이 결실을 본 것이다.”
―남 선수는 어디가 안 좋았나.
“펜싱은 운동 성격상 한쪽만 힘을 써서 좌우 비대칭이다 보니 한쪽 골반이 커졌다. 어릴 적부터 운동을 시작했고, 그로 인한 고통이 오랫동안 남 선수를 괴롭혀왔다. 그래서 치료를 받았다.”
―몸이 ‘생계 수단’이자 ‘전부’인 운동선수들이 당신을 많이 찾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남현희 선수는 2~3년 됐고, 김재범은 최근이고…. 그동안 유명한 선수가 많이 왔다. 박주영도 다시 만났다. 2008년쯤 진료실에서 다시 봤는데 특유의 말투로 ‘어, 여기 계셨어요?’ 하더라. 박주영 때문에 소문이 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축구 선수가 많아지더니, 야구 김광현 선수도 어깨 치료를 받았고, 농구 하승진 선수도 왔다. 다들 진료받고 드라마틱하게 좋아져서 갔다기보다 조용히 치료받고 갔다. 유명 선수일수록 정확한 요구 사항을 갖고 온다. 엘리트 선수들은 대학병원 가서 유명한 교수들 이야기도 다 듣고 결정한다.”
―선수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는 없나.
“이름만 말해도 알 만한 유명한 농구 선수가 점프를 한 뒤 착지하다가 인대가 파열되어 병원을 찾아왔다. 깁스를 하거나 인대 재건술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적어도 3개월을 쉬어야 했다. 그런데 수술을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인대 강화 주사를 통해 그 시즌을 수술 없이 버텼다. 자기 몸값 떨어질까봐 한두 달도 쉬지 못하는 프로 선수들 보면 안타깝다. 나이 들어 결국 그 부위가 망가져 못 쓰는 경우가 생기는데도 부러지지 않는 이상 수술을 하지 않으려 한다. 선수들은 순수한 마음에서 조언하는 의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
―운동 선수들을 치료해보면 뭐가 다른가.
“증상만으로 뼈가 부러졌는지 헷갈릴 때가 많다. 같은 증상이라도 통증을 호소하는 정도가 덜하다. 고된 훈련을 반복하면서 그만큼 아픔에 무뎌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의료진의 수준은 어떤가.
“나는 과거 유명 선수들이 외국 나가 수술하는 것을 보며 ‘왜 외국 나가나’ 싶었다. 수술 솜씨에선 한국 의사들이 톱 클래스다. 나 역시 거의 매일 1~2명은 전방십자인대를 수술하다시피 한다. 선수촌에서 무료 진료를 하다가 십자인대를 정말 잘 붙여놓았길래 ‘누구 솜씨냐’고 물었다가 나라고 해서 얼굴을 붉힌 적도 있다.”
―최성국 선수는 어떤 인연으로 이 병원에서 근무하게 됐나.
“처음에는 환자로 만났다. 승부 조작에 연루된 선수가 한 명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랴부랴 그에게 연락해서 ‘함께 일하자’고 했다. 지금 그는 원무과에서 대외 협력 업무와 우리 병원 축구팀 ‘바세FC’ 선수 겸 플레잉 코치를 맡고 있다.”
수많은 선수의 부상을 치료하고 상담도 해온 그는 많은 선수와 만나지만 그들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가슴에만 묻어두고 끝내 입을 열지 않는 사연도 있었다. 최근에는 스포츠팀 후원에도 나서서 매년 경기도 어린이들의 야구 대회(바른세상병원장배)를 지원하고 있고, 올해부터는 병원이 있는 성남 일화 프로축구팀의 팀닥터도 맡게 됐다. 홈경기가 열릴 때는 반드시 운동장 벤치에 가서 앉아 있어야 하지만 그는 “즐거울 따름”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