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가 칼럼] 문화살롱
나를 성장시켜 줄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한국교직원공제회
2021.08.02. 16:30627 읽음
김중혁 작가
변호사는 영화 제작자들이 좋아하는 직업 중의 하나다. 범죄와 연루되어 있으니 액션을 보여주기 좋고, ‘말로 누군가를 옹호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명대사가 나올 확률이 높고, 권력자들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 부패할 가능성도 있으며, 결정적인 증거 하나로 막판 역전승을 이뤄낼 수도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플롯을 구상할 때 변호사만큼 ‘드라마틱한’ 직업을 찾기 힘들다. 한국 영화에서는 많지 않지만, 할리우드에서는 변호사가 주인공인 영화가 일종의 장르가 되었다.
변호사 출신인 소설가 존 그리샴은 할리우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일 것이다. 존 그리샴은 10년 동안 법률 사무소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서 쓴 소설 <타임 투 킬>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펠리컨 브리프>, <의뢰인>, <레인 메이커> 등 많은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데뷔작 <타임 투 킬>은 미시시피 주에서 두 명의 백인 남자가 10살도 안 된 흑인 소녀를 강간한 사건에서 출발한다. 소녀의 아버지는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대신 직접 복수를 감행한다.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타임 투 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였다.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비슷하며, 둘 다 변호사가 주인공이다. 1960년에 출간된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변호사가 주인공인 소설의 ‘전설’ 격이라 할 만하다.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의 명대사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이 말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변호사라는 직업을 상징하는 대사가 되었다. 도저히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사건이더라도, 그게 만약 정의라고 생각한다면 끝까지 피해자를 변호하는 것이야말로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수많은 변호사 캐릭터가 저 대사로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다크 워터스, 2019> 포스터
영화 <다크 워터스>의 변호사 롭 빌럿(마크 러팔로)은 폐기 물질 유출로 전 세계를 독성 물질 중독에 빠뜨린 미국 화학 기업 ‘듀폰’의 행태를 고발한 사람이다. 그는 개인 생활을 모두 포기하고 무모할 정도로 사건에 매달리며 수많은 문서들 속에서 듀폰의 실상을 찾아낸다.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의 주인공은 변호사 사무소의 직원으로 거대 기업이 인체에 해로운 물질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에린 브로코비치(줄리아 로버츠)는 마을의 모든 집을 찾아다니며 거대 기업과의 싸움을 포기하려는 피해 주민들을 설득한다. 영화 <필라델피아>의 두 변호사 앤드루 베켓(톰 행크스)과 조 밀러(덴젤 워싱턴)는 흑인과 에이즈를 두려워하는 사회와 맞서 싸운다. 영화 속의 변호사들은 인권의 최종방어선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변호사에게는 또 다른 역할도 있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정부청사 앞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범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여름 캠프에 참가 중인 청소년들에게도 총기를 무차별 난사했다. 그는 이슬람을 혐오하고 다문화주의에 반대하는 극우주의자였다. 77명의 희생자를 낸 이 사건은 노르웨이 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범인을 변호한 예이르 리페스타드는 ‘왜 악마를 변호하는가?’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변호를 받을 권리는 법치국가의 근본 원칙 가운데 하나다. 변호인은 누구도 죄가 없이 심판을 받거나 부적절한 판결로 고통받지 않게 기여해야만 한다. 변호인은 증거가 과연 타당한지 따져보고 증거로 말미암은 부담을 덜어줄 방법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간호사인 그의 아내는 재판을 망설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 남자가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온다면 의사는 수술하고 우리 간호사는 그를 돌봐야 해요.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무슨 짓을 했는지, 또는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묻지 않죠. 그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당신의 직업 아닌가요.”
어쩌면 변호사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직업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누명을 썼든 실제 범행을 저질렀든 변호사라는 존재는 궁지에 몰린 외로운 한 사람에게 크나큰 버팀목이 될 것이다.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2020> 포스터
2020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법정 스릴러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아론 소킨의 영화다. 아론 소킨은 할리우드에서 긴박한 대화를 가장 잘 쓰는 각본가로 유명한데, 그의 각본 데뷔작은 (법정 영화의 전설로 불리는) <어 퓨 굿 맨>이다. 첫 번째 영화 연출 작품 역시 세계 최대의 포커 하우스를 열었던 몰리 블룸의 재판 과정을 담은 <몰리스 게임>이었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19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평화롭게 시작했던 반전 시위가 경찰 및 주 방위군과 대치하는 폭력 시위로 변하면서 7명의 시위 주동자 ‘시카고 7’이 기소되었던 악명 높은 재판을 다룬 이야기다. 영화를 보기 전에 당시 상황을 공부한다면 영화의 재미가 배가되겠지만 정확하게 몰라도 큰 상관은 없다. 아론 소킨 특유의 끊임없는 대사의 향연으로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 좋아서 일곱 명의 캐릭터에 곧장 감정이입할 수 있다.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2020> 스틸
영화는 두 개의 대립을 부각시킨다. 첫 번째 대립은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대립이다. 1968년의 미국은 혼란 그 자체였고, 다양한 세력들이 ‘베트남 파병 반대’와 ‘반전’을 외치며 정부와 맞서 싸웠다. 새롭게 들어선 닉슨 정부는 젊은 세대의 혁신적인 ‘생각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반전시위를 폭력시위로 포장하고, 주동세력인 ‘시카고 7’을 고발했다. 정부 측은 시위를 주도한 7명이 폭동을 일으키려는 생각이 있었음을 주장하고, 피고석에 앉은 7인은 경찰이 먼저 폭력을 휘둘러 폭력 사태가 번졌다고 주장했다. 피고 중 한 명인 애비 호프먼은 법정에서 검사의 질문에 대답을 잘할 수 없는 이유가 “총기나 마약이 아니라 특정한 생각을 반입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선 게 처음이라서”라며 어이없는 상황을 비꼬았다.
감독이 ‘시카고 7’의 면면을 그려내는 태도가 재미있다. 그들의 목표는 숭고했지만 모든 세력의 생각은 제각각이었고 통일되지 않았다. 사분오열, 엉망진창이라고 볼 수 있지만, 각본가이자 감독인 아론 소킨은 그 모습이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2020> 스틸
두 번째는 검사와 변호사와 판사의 대립이다. 영화에는 역대급 ‘고구마 캐릭터’가 한 명 등장하는데 바로 율리우스 호프먼 판사(프랭크 란젤라)다. 권위주의를 끔찍하게 싫어하고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하면 윽박지르는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각오할 필요가 있다. 보는 내내 울화통이 치민다. 말이 통하지 않고,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판사다. 검사는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다. 폭력 시위로 포장하라는 ‘윗선’의 지시에 따르면서도 원칙을 통해 법집행을 하고 싶은 리처드 H. 슐츠 검사(조셉 고든 래빗), 때로는 논리로, 때로는 울분으로, 때로는 조롱으로 ‘시카고 7’을 지켜주는 윌리엄 컨슬러 변호사(마크 라이런스)가 맞서는 장면들은 영화의 가장 미묘한 대립이다. 상부의 지시를 어쩔 수 없이 따르지만, 피고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며 존엄을 지키는 슐츠 검사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재판 과정에서 분통을 터뜨리지만 끝내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는 컨슬러 변호사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변호사가 등장하는 영화들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처의 말처럼, 재판에서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증거를 모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최선을 다해서 무언가를 입증해내려고 노력하면 결과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순간이 만들어진다. 누군가를 변호하는 과정은 우리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과정과 무척 비슷하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수많은 재판을 치르고 있다. 때로는 판사가 되고, 때로는 검사가 되고, 때로는 변호사가 되어 올바름을 결정한다. 영화가 변호사를 사랑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