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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님
어제도 손님들 여러 명이 다녀갔다.
이곳 시골에 살다 보니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단조로운 내 생활에 조그만 변화와 활력을 주는 매우 반가운 이벤트다. 그래서 손님이 오기로 한 날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한편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래도 손님 취향에 따라 반찬거리나 와인 같은 걸 준비해야 하고, 집안 여러 구석구석 청소도 해야 하니 그냥 느긋하게만 있을 수는 없다. 나보고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말고 평소 사는 모습으로 손님을 맞자고 하는 아내도 기실 내 대학 동창들이나 검찰 선·후배들이 몰려올 때는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준비를 열심히 하면 그만큼 보람도 있다. 힘은 들지만 잘 접대하여 손님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다른 쪽에서는 찾기 어려운 특별한 즐거움이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도 ‘주인의식’의 하나인가?
손님이란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손’에 이들을 잘 모시라는 취지로 높임 접사인 ‘님’ 자를 붙여서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처음 보는 낯선 나그네라고 할지라도 식사와 잠자리를 부탁하면 다소 힘들더라도 반드시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도리로 삼아왔다. 특히 지체 있는 집안에서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라고 해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분은 손님을 모시는 것은 대인관계, 즉 사회생활의 출발점이자 그것이 완성되는 결승 지점이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그런데 손님은 주인과는 달리, 그 집안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그래서 언젠가는 떠날, 그리고 꼭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야만 한다. 그래서 ‘손은 갈수록 좋고 비는 올수록 좋다.’거나 ‘가는 손님은 뒤꼭지가 예쁘다.’는 속담도 있고, 떠나야 할 손님이 떠나지 않고 있으면 ‘숭어와 손님은 사흘만 지나면 냄새가 난다.’는 속담처럼 골칫거리로 눈총받게 된다. 예전에 천연두(마마)를 ‘손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라 할 것이다.
손님은 남의 집에 온 사람이기에 조심스럽게 처신하고 아무래도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손님처럼 굴지 말고 주인의식을 가져라.’고 할 때처럼 손님은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와 반대로 ‘주인’이나 ‘주인의식’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뜻으로 잘 사용된다. 나도 한동안 책상머리에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써 붙여 놓고 내가 어느 때 어느 곳에 처해 있건 주인이라는 의식으로써 살아오려고 노력했다. 그 덕에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려고 정진하는 자세를 지킬 수도 있었다.
또 한편 최근에는 손님이 꼭 잘 모셔야 할 대상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특히 접객업소 같은 데서 무례한 손님이 자주 생기다 보니 일반 업계나 공적 기관에서도 ‘고객은 항상 옳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과연 옳은 것인지 다시 검토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가치 있는 고객만이 대접받을 가치가 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고객이 과도한 요구를 하면서 직원에게 막 대하는 것을 ‘진상질’한다고 하는데, 이럴 때는 그 주체를 ‘손님’이라고 하지 않고 ‘손놈’이라고 낮춰 부르기까지 한다. ‘손놈’이란 표현을 두고 언어 구조를 무시하여 만든 단순 유행어라고 보는 시각이 많지만, ‘손님’이 ‘손’과 높임 접사 ‘님’의 합성어인 것처럼 ‘손놈’도 ‘손’과 낮춤 접사 ‘놈’이라는 실질 형태소가 결합한 훌륭한 단어로 보는 쪽도 만만치 않고, 일부 오픈 사전에는 정식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검찰 기관장을 할 때나 공공기관의 장으로 재직할 때 워낙 저질인 악성 민원인을 많이 보아 왔기에 ‘우리 직원이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하다.’는 사고로 ‘손님’보다는 소속 직원들을 우선 북돋워 주는 식으로 운영을 해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나서 2층 서재에서 어쏘변호사가 메일로 보내온 간단한 서류를 검토해서 답신을 보낸 후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베란다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 마당을 내려다보니 가을의 정취가 물씬 느껴졌다. 눈처럼 희거나 개나리처럼 샛노란 국화꽃들이 “안녕하세요, 주인님?” 하며 인사를 하기에 나도 미소로 답례를 보내고, 더 이상 못 버티고 고개를 떨군 백일홍과 달리아가 “이제 저희는 떠나야겠습니다.” 하기에 약간의 측은함과 함께 그동안 수고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처마 밑 화단 군데군데 서리를 피해 용케 살아남은 페튜니아와 샐비어가 입술연지 같은 붉은 색을 발하며 “저희는 아직 건재합니다.” 하고 뽐내고 있어 그들에게도 아는 체를 했다. 마당 둘레에는 자두나무, 모과나무, 보리수나무, 꽃사과, 은행나무, 배롱나무, 산딸나무 같은 키 큰 나무들과 텃밭 주변의 공작단풍, 블루베리, 왜철쭉 같은 키 작은 나무들까지 자기들만의 울긋불긋하거나 황갈색으로 치장을 하고 나에게 인사를 해 온다.
이럴 때면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장만하여 가꾸어준 아내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이러한 것들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흐뭇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멀리 잔잔히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에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비쳐 감미로운 윤슬을 만들고, 그 너머로 웅장하게 팔을 벌리고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양자산, 그리고 더없이 깨끗하고 푸른 가을 하늘까지 내 눈 안에 들어오게 되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누리며 나른한 행복감에 빠진다. 나아가 이 아름다운 경관 역시 나의 것이고 나는 그 주인이라는 생각에 크게 부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까지 젖어 든다.
아내가 차와 과일을 내어 왔다. 오늘따라 아내가 더 예뻐 보인다. 몇 번이고 한 말이지만 한 번 더 이 집을 선택해 줘서 고맙다고 하려는데 아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
“아무래도 시계는 못 찾을 것 같죠? 제가 새 걸로 하나 사드릴게요.”
아들이 지난봄에 어버이날 선물로 아내 것과 함께 세트로 사준 스마트 워치를 내가 최근에 잃어버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아내는 마침 최신 모델이 출시됐으니 얼리어댑터가 되라고 했지만 나는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시계 생각 때문에 모처럼 꿈처럼 느끼던 나른한 오후의 행복감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엄연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내가 가장 몸 가까이 두고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린 것이다. 필시 지난번 서울 외출 시 비좁은 전철에서 부대끼면서 잠금고리가 풀리거나 했던 모양이다. 시간을 가리키는 기본은 물론 걸음걸이 수도 재어주고, 수면시간과 수면의 질까지도 측정해주며, 체지방과 혈압 같은 건강지표도 재어주고, 핸드폰 둔 곳을 잊었을 땐 그 위치도 알려주는 등 여러 가지로 편리하여 내 생활에 필수품이 된 스마트 워치를 잃어버렸다는 현실이 짜증으로 다가왔다.
내 소유였던 스마트 워치가 떠나갔다. 손님처럼 떠나갔다.
손님처럼?
그러다가 지금 그 시계를 차고 자기가 주인인 양 행세를 하고 있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났다. 내가 “내 시계 지금 어떤 사람이 차고 있을까?” 하고 짜증스럽게 내뱉자 아내는 “누가 차고 있든 잘 작동만 하면 그 시계는 제 역할 하는 것 아니겠어요.”라고 대꾸하고는 빈 찻잔을 가지고 주방 쪽으로 가 버린다.
고개를 들어 강물을 다시 바라본다. 여전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흐르는데 그사이에 해의 위치가 바뀌었는지 물결의 반짝임이 바로 내 정면을 향하고 있다. 자세히 바라보니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듯도 하다. 그 순간 뭔가 번쩍하더니 내가 그 스마트 워치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었다는 깨달음 같은 것이 찾아든다.
스마트 워치는 그대로 있고 지금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만 바뀌어 있는 것이다. 누가 그 스마트 워치의 주인이라는 것인가. 스마트 워치는 스마트 워치인 채로 잘 작동하고 있는데 그걸 사용하는 사람만이 손님처럼 바뀐 것이 아닌가. 그 주인은 나나 지금 그것을 차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 바로 스마트 워치 자신인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우리 집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수형이 잘 잡힌 키 큰 소나무를 바라보니 저 소나무가 내 소유라고 해서 내가 과연 그 주인인가 하는 회의(懷疑)가 들었다. 내가 이 집에서 이사를 가도, 아니 내가 죽어서 이 땅에서 사라져도 저 소나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의연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를 지키는 것은 저 소나무이고 떠나는 것은 나이니 내가 손님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조금 전에 바라보며 그런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나른한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 주변의 저 아름다운 경관도 나의 것이 아니고, 나는 결국 이곳을 떠날 손님이 아니던가.
그렇다! 옛날부터 ‘강과 산은 만고의 주인이요, 사람은 기껏해야 백 년 동안의 손님이다(江山萬古主 人物百年賓).’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손님인 주제에 자기가 주인을 소유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 부자라도 된 듯한 포만감에 젖어 있었던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해진다.
문득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歸天)」이 떠오른다. 그는 무욕(無慾)의 경지에 이르러 이제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서 참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고 노래했다. 자신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고 손님으로 잠시 다녀갈 뿐이라는 겸허한 마음이 느껴지는 참으로 담박(淡泊)한 시다. 나는 왜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가 없는가.
돌이켜보니 그동안 나는 너무 ‘주인 행세’만 하고 살아온 것 같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내가 모든 걸 책임지고 행동하지 않으면 내가 소속된 조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자기 나름의 ‘주인의식’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항상 옳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사람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기를 바랐고 내 생각과 다를 땐 우선 틀렸다고 판정을 내리곤 했다. 자연경관이나 꽃을 바라볼 때도 그렇고 그림이나 영화 같은 것을 감상할 때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먼저 자기 기준을 세워 놓고 거기에 적합한 것만 받아들이려고 한 것 같다. 대인관계에서는 더욱더 내 기준에 맞는 사람들하고만 만나려고 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모든 사람은 각자 주인이고 나는 그들에게 그저 손님일 뿐인데…. 손님이 주인을 가리는가.
눈을 감고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주인 노릇을 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괴롭혔을까 돌이켜본다.
검찰청에서 내가 조사를 한 피의자나 나를 찾아온 민원인은 따지고 보면 내가 받들어야 할 국민이고 나는 그들에게 봉사해야 할 공복(公僕)임에도 마치 내가 주인인 양 그들 위에 서 있으려 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기관장으로 봉직하면서 조직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요량으로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독려하는 바람에 오히려 반발심을 일으켜 근무 의욕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는지…. 내 가족에게 마치 그들이 내 소유라도 되는 것처럼 꼭 내 뜻에 맞게만 처신하도록 강요하여 그들 나름의 고유한 삶의 리듬을 깨뜨리지는 않았는지…. 정말이지 걱정이 되는 것이 너무 많다.
내 나이도 이제 제법 들었으니 언젠가는 소풍을 마치게 될 것이다. 손님은 떠나야 한다. 떠나지 않는 손님은 부담만 된다. 내가 떠난 다음 남은 사람들이 나를 좋은 손님으로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숙박업소를 떠나면서 침구를 잘 정리해 놓고 머리맡에 필로우 머니라도 놓고 가는 그런 투숙객처럼 깔끔하고 매너 좋은 손님으로 기억되고 싶다.
저녁 시간이 가까이 온 것 같다. 아까 아내가 스마트 워치를 사주겠다고 하는데 내가 괜히 역정을 낸 것 같아 미안하다. 주방 쪽으로 가서 아내에게 최대한 상냥한 톤으로 말했다.
“여보,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자. 조금 일찍 나가 형제공구사에서 당신 필요한 것도 사고 추어탕이나 먹고 오자. 미꾸라지 튀김도 소짜로 하나 시키고…. 당신 어제 손님 치르느라고 수고 많이 했잖아.”
우선 아내에게부터 잘해야겠다. 예전엔 부인들이 남편을 일컬어 ‘쥔양반’이라고 했지만, 어디 그게 될 법이나 한 말인가. 가정에서는 어디까지나 아내가 주인이고 남편은 그저 손님이지 않은가. 손님이 주인 눈치 봐야 마땅하다. 오늘 저녁은 손님인 내가 주인인 아내를 한번 제대로 모셔야겠다. 이제 아내에게부터라도 ‘좋은 손님’이 되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래서 내가 소풍을 마치고 떠난 다음 많은 ‘주인’들에게 내가 최소한 ‘손놈’은 아닌 ‘손님’으로는 기억되게 말이다. ☼
* 추기(追記): 이 글을 송고하기 전에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했더니 마지막 대목의 아내가 남편의 주인이라는 식의 표현에 강한 반발을 표하면서 보내지 말라고까지 한다. 부부는 어디까지나 서로 존중하면서 함께 여행을 하는 동반자이지 어느 한쪽이 주인인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써 놓은 이 원고가 아깝고 그냥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송고한다.
(경제포커스 2022.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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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합니다.
몇 번을 읽어봅니다. 볼수록 또 새롭습니다.
그렇지만 一切唯心造-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
결국 마음이 주인일진데~
내가, 내 마음이 없어지면 모든 것 또한 사라지는 것이니 잠시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