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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2
#신앙고백 #아타나시우스 30. #예수그리스도 #성육신
30. Deus est ex substantia Patris ante saecula genitus: et homo est ex substantia matris in saeculo natus.
God of the substance of the Father, begotten before the worlds; and made of the substance of His mother, born in the world.
主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聖父의 神的 本質을 가지신 하나님으로서 創世 前에 聖父께로부터 홀로 태어나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으로서는 自身의 어머니(*童貞女 마리아)의 人間的 本質로부터 生成되셔서 이 世上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서 성육신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셨다는 성경의 진리는 사도 시대까지는 잘 보존되었을 터이나, 로마의 국교로 인정을 받은 후 교부 시대에는 헬라 철학의 유입과 영향으로 인해서 훼손되어 지금까지 가리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사도신경을 제외한 모든 신앙고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동정녀 마리아의 인성을 취함으로써 비로소 생성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하신 상태로 창세 전 영원 전에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스스로 태어나셨다고 정정되어야 옳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취해진 것이라 할 때 야기되는 문제는 육체는 그럴수 있다 치더라도 영혼이 취해지는 방법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인성을 취한다면 육체뿐만 아니라 마땅히 마리아의 영혼도 취해야 하는데 이는 영혼은 단일체로서 나뉠 수 없다는 신학적 해석에 위배가 된다. 그러다보니 교부들을 비롯한 성경교사들은 마리아에게서는 육체만 취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잉태와 동시에 즉시 직접 생성 부여하셨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사람으로서 잉태된 방식이나 모든 인류의 생육 방식이 동일해야만 하기 때문에 통일성을 갖추기 위해서 사람이 생육할 때는 육체의 씨앗은 남자의 씨앗과 여자의 씨앗이 만나 잉태되지만 영혼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 때에 지으셔서 잉태된 씨앗에 부여하신다는 영혼창조론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혼창조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영이 유여하시더라도 오직 하나의 영만을 만드셨다는 성경구절을 그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영혼창조론은 원죄의 유전과 창세 전에 구원받기로 선택되지 못한 버림받은 유기자의 영혼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혼은 순수하게 선할 수 밖에 없는데 잉태된 육체의 씨에 부여되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원죄에 오염이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영혼을 선하게 만드셔서 왜 버려버리시는지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영혼창조론이 반박되고 폐기되어야 하므로 영혼창조론에 기반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원리, 즉 마리아의 육체를 취함으로써 생성되었다는 고백도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또다른 문제는 기존의 성육신 원리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숭배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기존 성육신 원리대로라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으셨으므로 무한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음이 명백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당신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당신 자신의 인성을 지칭하신 것이 분명하다. 아울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수도 없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수도 없으며 나아갈수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으로 불리시고 하나님께서만 받으실 수 있는 모든 찬양과 경배를 동일하게 받으시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배제하고서는 성립될수가 없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 경배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고 찬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하지도 무한하지도 않은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경배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일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빌헬무스 브라켈은 그러한 문제점을 간파하고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빌헬무스 브라켈의 견해는 칼빈신학이 단죄하는 로마카톨릭의 성상숭배와 일맥상통한다는 오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경배하고 찬양하는 성경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고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몇몇 인물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성자 하나님을 뵙기도 하고 경배와 제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입으신 사람의 육신을 향해 그리 하였는데, 만약 그 사람의 형체가 일시적이거나 가변적이거나 버려지는 것이었다면 그 인물들은 모두 가증한 우상숭배 죄를 저지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우상숭배를 저지른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와 제사를 드린 것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여러 인물들에게서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 성자 하나님의 사람의 육신은 영원한 인성이어야 한다. 밧모 섬에 갇힌 요한 사도에게 마지막 날에 대한 계시를 주시려고 영광 중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인성의 모습이 구약시대 선지자 에스겔과 다니엘에게 나타나셨던 인성의 모습과 동일하며, 그 주님께서 스스로를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어제도 오늘도 계시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분으로 말씀하신 것 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는 명백한 증거들이다.
고대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완벽하게 연합되었다는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는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하는 심각한 우를 범하고 말았다. 마리아는 단지 그리스도의 낮아진 인성을 잉태하고 낳았다는 것에서 멈춰야 했는데,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자와 연합하셨으므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인성뿐만 아니라 신성의 어머니도 된다고 하는 것이 교부들의 논리였다. 하지만 비록 교부들의 의도와 목적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한다는 것은 신성모독과 우상숭배에 너무도 쉽게 빠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20171102
#성화 #성령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 참 인간으로 고백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100%이시며 동시에 사람 100%라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를 반인반신이라고 한다거나, 어떤 때는 하나님, 어떤 때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단이다. 신자의 거룩한 삶(성화) 또한 이와 같다. 신자의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임과 동시에 전적으로 신자의 일이다. 왜냐하면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연합되었기 때문이다.성화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성화가 구원의 과정 중 하나이며, 구원은 창세 전 예정부터 최후 심판 후 영화까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신자의 의지를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선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을 자발적으로 행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성화가 전적으로 사람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신자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선을 깨닫고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의 성화를 성령님 절반, 신자 절반의 사역이라고 본다거나, 하나님만 또는 사람만의 사역이라고 본다거나,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일, 어떤 때는 신자만의 일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의 신비를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듯이, 성령께서 신자의 삶을 거룩하게 이끄시는 것과 신자가 자신의 의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연합의 신비를 이해할 수는 없다.
#요셉 #보디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것을 두고, 어떤 사람은 보디발의 아내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어서 그런거라고 하는데, 난 도리어 이세벨과 같은 음란한 요부였을 것이라고 본다. 즉, 신체 건장한 남자라면 백이면 백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정도의 여자였다고 생각한다.보디발은 아내의 얘기를 듣고 매우 화를 내었다고 했는데, 이게 요셉에게 화를 낸건지 아내에게 화를 낸건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보디발은 자기 아내를 범하려던(?) 요셉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낱 노예따위인 그를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넣었던 것이다. 요셉에 대한 각별한 신뢰가 있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아마도 보디발은 도리어 아내의 행실을 의심하였으나, 자신의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서 최선의 방안을 취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과연 보디발은 요셉이 총리로 등극할 때도 바로의 친위대장이었을까? 그럼 대반전.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대략적으로 추정해본다면, 아마도 요셉은 야곱이 90세 정도에 낳았을 듯. 야곱 일행이 애굽에 왔을 때가 야곱이 130세였고, 7년 풍년 후 2년째 기근일 때였으며, 이 때는 요셉이 30세에 애굽 총리가 된지 대략 9-10년 정도 지난 때일 것이므로, 요셉이 대략 4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211102
#여호수아 #Joshua 2:12-13(1)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여리고의 창녀 라합은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과 그 여호와께서 여리고를 멸망시키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왔기 때문에 때마침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자기 집으로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숨을 걸고 그들을 돕고 그에 따른 정당한 대가, 즉 자기와 자기 가족들을 멸망에서 구원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멸망 당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라합은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해나간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가르치셨고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차지하려는 소작농과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전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사는 상인의 비유를 드시는데 라합의 요구는 바로 이에 대한 적합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라합은 단지 육신의 생명만을 구원받기 위한 요구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합은 그 기회를 잡으려고 모든 것을 걸었고 요구하였고 쟁취하였다. 나오미의 며느리인 모압 여인 룻은 나오미의 인격과 성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믿었으므로 비록 나오미에게 남편도 아들들도 재산도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녀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에게 자신의 모든 삶을 걸었다. 사도 바울이 동족 히브리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과 여러 성도들의 삶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갖은 고난과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모든 것들을 견고히 감내하며 인내하였다고 하였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주님의 계시록에는 이제 곧 멸망할 바벨론에서 서둘러 빠져나올 것을 종용하고 있다. 아무리 신자를 자처하더라도 멸망할 바벨론에 남아있고자 한다면 결국 바벨론이 멸망할 때 그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조카이며 의인인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당할 때 가까스로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이는 머뭇거리는 그의 손을 천사들이 강제로 잡아 이끌어 탈출시킨 덕분이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미리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나오지 않고 미적미적거렸기 때문에 재산도 잃고 아내도 잃고 두 딸과는 자기도 모르게 근친상간까지 하게 되는 막장 인생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고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대적자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신자들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와 동네와 국가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어떠한지를 면밀하게 살펴보고서 소돔과 고모라와 여리고와 바벨론과 같이 도저히 복음으로써 회생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라합처럼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강구하여야 한다. 성경과 성령에 비추어 봤을 때는 분명히 그 죄악이 관영하여 멸망 받기에 합당함을 알면서도 겉으로 보이는 웅장함과 화려함에 미혹되어 머뭇머뭇거리고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장차 그 교회나 동네나 국가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멸망을 받을 때 자기도 그 화를 당하게 된다. 명백하게 만천하에 음행과 비리와 부정부패가 드러난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를 굳이 다니겠다고 하는 것은 롯처럼 자기의 의로운 심령을 상하게 할 뿐이다. 선교와 전도를 빌미로 시골벽지 외딴 곳이 아닌 휘황찬란한 번화가나 잘사는 선진국으로 향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애굽이나 에덴 동산처럼 물이 넉넉하고 풍요로우나 조만간 멸망 당할 소돔과 고모라에 일부러 자발적으로 화를 자초하며 가는 것과도 같다. 신앙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나 이민을 하는 것 또한 멸망 당할 여리고와 바벨론에 정착하는 것과도 같다. 온갖 음란한 퇴폐문화가 성행하는 홍대, 할로윈 같은 온갖 우상숭배가 창궐하는 이태원, 학업을 우상으로 하는 목동과 대치동 등은 국내의 대표적인 소돔과 고모라와 여리고와 바벨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찬란한 신앙개혁을 추진하고 성경의 진리를 구축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지금은 인간의 학문으로 전락시켜버리고 동성애가 만연하는 등 반성경적인 문화가 지배해버린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 등의 서구 유럽과, 자본주의라는 맘몬사상 위에 구축 된 미국은 오늘날의 소돔과 고모라와 여리고와 바벨론 같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목사들은 이런 곳에서 복음 사역을 하려고 하지 말고 후미지고 외진 곳을 찾아나서야 하고, 신자들은 이런 곳에서 살려고 하지 말고 참된 교회가 가까이 있는 한적한 지역에서 살려고 해야 한다.
#20201102
#민수기 #Numbers 6:1-5
나실인의 법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나실인의 서원이 어떤 특별한 것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여호와께서 제정하신 규례의 엄격한 정도를 본다면 아마도 엘리야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여호와께 더욱 특심함이 있어 오직 여호와께만 집중하고자 하는 목적의 서원으로 보인다. 이것이 서원인만큼 다른 누구의 강요나 억지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서원자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하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실인의 서원은 서원자 자기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으며, 여호와의 영이신 성령께서 서원자의 심령을 감동시키실 때에민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별하시고자 하는 성도의 심령을 살과 같이 부드럽게 하시고 특별한 감동을 주셔서 그 성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된 심령으로써 자기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나실인의 서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는 여호와께서 나실인으로 택하신 자를 은밀하게 부르시고 서원자는 그 은밀한 여호와의 음성에 나실인의 서원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최악의 나실인은 사사 삼손으로서 그는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나실인이 되었으면서도 육의 탐욕을 위해 악용하였다. 반면에 아주 탁월한 나실인으로는 세례 요한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또한 엘리사벳의 태중에서부터 거룩하게 성별됨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뱃속에서 반겼으며 태어나고 자라서는 홀로 광야에 칩거하며 메뚜기와 석청으로 연명하면서 성별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최고이자 유일한 참 나실인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인류의 대속을 위해 30여 년 동안 이 땅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 그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30여 년 간의 나실인 서원은 영원 전, 창세 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인성 간의 상호 협약에 따른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 전 영광의 인성은 당신과 연합하신 성자 하나님과 인성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스스로의 의지로써 두 위격의 근원이신 성부 하나님과 나실인의 서원과 협약을 맺으신 것이다.
3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4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포도는 보편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생활과 문화와 신앙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포도를 제거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실인은 서원한 기간 동안에는 포도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되었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와의 격리가 아니고서는 지킬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나실인이 되고자 서원하는 이는 나실인으로서 상당 기간 격리된 생할을 하기 위해서 가족이나 친지나 이웃이나 친구들에게도 알려야 했을 것이다. 평소에 홀로 지내던 사람이라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실인 서원이 수월했을 것이다. 날 때부터 나실인이었던 삼손은 정작 그 심령 자체는 성령으로 감동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포도를 비롯한 온갖 부정한 음식을 금하라는 나실인 규례 따위는 개나 줘버리는 막장 인생을 살았다. 길을 가다 사자를 찢어죽이고 그 시체에서 난 꿀을 먹었으며 대적 블레셋 사람들과 질펀하게 잔치를 벌이며 지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삼손이 포도를 먹지 않는 나실인의 규례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머리를 밀리고 눈이 뽑혀 포로로 잡혀 연자맷돌이나 하염없이 돌리던 때였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살기 전부터도 여느 사람들과 같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에게서 과연 이 아이가 커서 무엇이 될지 큰 기대를 모을 정도였고 광야에 나가 살 때에는 메뚜기와 석청만 먹으면서 그야말로 야인처럼 지냈다. 이 땅의 예수님께서는 먹고 마시는 것 자체로는 제약을 두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실인 규례를 어기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본래 계시던 곳이 이 땅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 우편이셨음을 본다면 하늘에서 누릴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30여 년 동안 내려놓으신 것 자체가 한낱 포도를 금하는 것 따위에 비할 수 없는 것이다.
5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나실인으로 서원한 기간에는 머리를 깎으면 안되는 규례에서 이 기간은 아마도 보통 1년 이상이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스스로 격리 된 생활을 하면서 긴 머리를 보기 좋게 가꿀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묶어서 관리했을 것이다. 아마도 어떤 예능의 '자연인'과 가장 흡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삼손은 비록 날 때부터 머리를 깎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마음껏 더불어 지냈으므로 긴 머리를 일곱 가닥으로 보기좋게 묶어 자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치렁치렁한 일곱가닥 머리숱을 보먼서 삼손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여호와께서 나실인으로 삼으신다는 고귀한 표징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그래서 한낱 몸 파는 여인에게 홀려서 긴 머리 모두 잘리고 눈도 뽑히고 구리줄에 묶여 연자맷돌이나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머리가 다시 자랐다고 하는 것은 삼손의 패역한 인성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나실인으로 선택하신 이는 여호와이시므로 끝까지 나실인으로 삼으시겠다는 성령의 확증하심에 대한 표징인 것이다. 압살롬은 나실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리숱을 자랑하고자 길게 길렀다가 해마다 많은 양을 잘랐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자기의 자랑인 아름답고 풍성한 머리숱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 사울 왕의 손자인 므비보셋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을 간 기간 동안 머리와 수염을 깎지도 않고 씻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이는 비록 나실인의 서원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다윗을 위해 나실인의 삶을 산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사역 중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몇몇 신자들을 데리고 머리를 깎는 비용을 대기도 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이 복음을 믿기 전에 율법대로 나실인 서원을 한 것을 지켜 마무리 하려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