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빛으로 나가라
1. 어둠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니라.”(암 5:18)
빛은 어둠 때문에 빛으로 존재한다. 어둠이 없다면 빛은 빛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의 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함께 존재했던 것처럼 빛과 어둠도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기에 생명과가 필요해진 것처럼 하나님이 나누어 놓으신 어둠의 존재이기에 빛이 필요했던 것이다. 구원은 어둠이 빛과 하나 되는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를 둘로 나누신 것이 선이요 사람은 그 둘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선이다. 생명과는 성령의 법이며 빛이다. 선악과는 죄와 사망의 법이며 어둠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뱀의 말은 맞는 말이다(창 3:5). 선악과는 우리를 생명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선악나무와 생명나무는 동산 가운데에 함께 있다(창 2:9). 생명나무 열매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의 법이며 지혜이다. 선악나무의 열매는 싸우게 하는 율법이며 죽음으로 인도하는 지식이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 3:22)
인자(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그 빛을 따라가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는데, 그 길을 가려면 케루빔(지식의 천사들, 율법)과 화염검(활, 창)이 지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율법과 창에 찔려 죽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과 어둠을 하나로 합일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어두운 무덤에 들어가셨다. 하나님이 인자로 인자 안에 오신 것은 빛이 어둠 안으로 오신 것이다. 빛이 어둠 안으로 올 때의 고통을 몸소 감내하시고,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어둠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가 오신 길을 따라가면 빛으로 가는 길이다. 십자가 사건은 궁창이 하늘과 땅의 진동으로 무너져서, 갈라져 있던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 23:44-45)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예수 십자가는 어둠(9)과 빛(10)의 중간 사각시간이다. 예수께 치료함을 받은 나병환자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은 사라지고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께 돌아와 감사드리는(눅 17:12-19) 완성의 시간 10시는 예수가 죽고 보혜사 성령이신 그리스도가 오시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성경은 아홉 나병환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께 돌아온 한 나병환자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의 가장 치명적인 착각은 자신이 한 나병환자인 줄 알고 있거나 자신은 나병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첫 사람은 나병환자(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 아홉 나병환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나병을 고침 받았으나 그들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예수를 잊어버렸다. 몸은 고침 받았지만(표적 신앙), 영혼은 고침 받지 못하고(구원은 이루지 못함) 그대로 어둠의 상태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태풍이 몰아치는 암흑의 바다에서 깜박거리며 구원을 기다리는 작은 등불들을 건져 올리시는 역사이다. 그 작은 배는 사랑을 찾아 헤매다 태풍을 만난 소망의 배이다. 소망의 작은 배는 반드시 암흑의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고 귀하게 간직했던 작은 등불 때문에 구원 받아 사랑을 만난다. 칠흑 같은 어둠의 바다에서는 깜박이는 작은 불빛이라도 있어야 하나님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유월할 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놓은 자들만 구원 받은 것처럼(출 12:1-28), 어두운 바다에서는 등불을 밝히는 자들만 구원 받는다. 그래서 천국은 기름이 공급된 등불을 들고 있는 다섯 처녀만 신랑을 만나 함께 갈 수 있는 곳이다(마 25: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빛과 어둠은 형제다. 한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다. 사랑(형제 사랑, 이웃사랑, 원수사랑)은 빛과 어둠에 대한 이야기다. 빛과 어둠은 형제도, 이웃도, 원수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는 내 안에서 형제, 이웃, 원수 사랑이 이루어져야 밖에서도 사랑이 가능함을 가르치신 기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십자가는 자기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 되어 사랑이라는 존재로 다시 창조되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
① 가인과 아벨
가인과 아벨은 아담의 아들들이요 형제다. 가인(작살, 창)은 어둠이요, 아벨(숨, 생기, 공허)은 등불이다. 등불이 켜진 곳이 성전의 성소이다. 제사장은 등불이 있는 지성소에서 수시로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등불 밑에서 드리는 성소의 제사는 율법의 제사이다. 등불은 율법(어둠)에 의하여 죽게 되어 있고, 휘장이 갈라져서 셋(세우다)란 빛으로 바뀐다. 가인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둠이지만,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창(작살)이 되어 아벨을 쳐(찔러) 죽여준다(창 4:8). 결국 가인(어둠)은 아벨(빛)이라는 어린 양을 하나님께 바친 제사장 역할을 한 것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지만, 셋(참 빛):그리스도의 표상)이란 새로운 씨의 동생이 생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담에서 셋으로 이어지고, 가인과 아벨을 사라진다(눅 3:38).
“… 죄(죄에 대한 속죄제, 형벌)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통치하다, 주관하다)지니라.”(창 4:7)
가인은 어둠의 통치자요, 속죄제를 주관하는 제사장이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으로 서로 협력하여 셋을 탄생시켜 하나님께 드렸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셋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② 이스마엘과 이삭
이삭은 이스마엘의 이복동생이다. 형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의 몸종 하갈이 낳은 아들이다.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애굽에서 데리고 온 자신의 몸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서자 이스마엘로 만족하면 살려고 하였지만(창 17:18),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이삭을 주신다. 이스마엘은 동생 이삭을 희롱(경멸하다, 비웃다, 박해하다)하여 어미와 함께 광야로 쫓겨난다(창 21:10-21).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2-26)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아들이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아브람은 어둠이었고, 아브라함은 빛이었다.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은 시내 산으로부터 나온 율법이요 어둠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은혜요 빛의 아들이다. 이스마엘은 엘로힘(신들)이 함께 하시매(창 21:20)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궁사, 활잡이)로 번성(권세를 잡다)해진다. 아브라함은 엘로힘에 의해 이삭을 자신에게 바치라는 시험을 받는다(창 22:2). 가인은 창을 든 자였고 이스마엘은 활 쏘는 자가 되어 광야에서 빛들을 죽여 엘로힘에게 바치는 제사장들이다. 후에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광야 구덩이에서 요셉을 구해주고 애굽으로 데리고 가서 팔아버린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어둠을 빛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
③ 에서와 야곱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태(胎) 중에서부터도 싸우는 아들 쌍둥이를 낳는다. 예서는 익숙한 사냥꾼(포획하다)이었으므로 들(땅, 밭)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완성하다, 순결하다)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성막, 덮개/깨끗하다, 빛나다)에 거주하였다(창 25:27). 에서는 어둠(율법)의 주관자로, 현상금 수배자 사냥꾼처럼 짐승들을 잡아다 이삭에게 별미로 바쳤지만, 야곱은 리브가의 말대로 염소 새끼로 별미를 드려 축복을 받았다. 야곱은 에서의 비워함을 피하여 광야에서 목자 생활로 기나긴 도피생활을 한다. 귀향길에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어떤 이와 밤새도록 씨름하고 허벅지 관절이 부러진 뒤에 그로부터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아버지 이삭에게 돌아온다. 이것은 야곱이 구원 받은 이야기다. 밤새도록 어둠과의 고통스러운 싸움은 허벅지 관절이라는 힘의 근원이 꺾인 다음에야 끝난다. 기나긴 고통의 밤이 지나고, 그가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다. 야곱은 이스라엘로 바뀌고 빛으로 변해 있었다. 어둠(원수)도 빛(하나님)으로 보이는 변화를 경험한다. 형 에서가 바뀐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이 변화되어 빛으로 바뀐 것이다.
“…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 33:10)
사람들은 종종 자신은 완전하다고 생각하며 상대가 변화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어둠이 스스로 밝아질 수 없는 것처럼 인간 스스로는 변할 수 없다. 철학과 윤리 도덕(율법)은 인간을 도도한 위선자로 만들 뿐이다. 어둠에 빛이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 와야 밝아지듯이 인간도 전혀 다른 온전한 씨로 다시 태어나야만 변화되어 완전해질 수 있다.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이 드러날 때 자신의 보는 눈이 바뀌고 그 눈으로 보는 세상은 온통 하나님으로 충만한 천국이 된다. 내 천국이 이루어져야 세상에 천국을 소개할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은 누룩이니까(마 13:33). 그래서 천국은 ‘나’라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눈이 떠져야 갈 수 있는 곳이다. 그 눈은 원수도 하나님처럼 보이고,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이라는 눈이기 때문이다.
④ 요셉과 그의 형제들
야곱(이스라엘)의 사랑을 독차지 한 늦둥이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운 짓만 골라서 했다. 형제들(어둠)은 요셉(빛)을 미워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요셉의 꿈 이야기는 형들에게 죽기를 자청한 최악의 미운 짓이었다.
“…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창 37:7)
“…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창 37:9)
결국 요셉을 없애버릴 기회는 와서, 형들은 요셉의 채색 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는다. 유다가 요셉을 이스마엘 족속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하여 은 이십 개에 팔린다(창 37:12-36). 요셉의 구원 이야기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결국 팔아버렸지만, 요셉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 구원 받아 애굽의 총리가 된다(창 41:37-43) 죽음의 고통 끝에 등불이 되어 어둠(애굽)으로 옮겨진다. 이제 꿈대로 형(어둠)들이 요셉(빛)에게 와서 절하고 양식을 얻어간다(창 42:1-). 요셉은 어둠 속에서 양식을 구하는 형제들을 사랑으로 극진히 대접하고 양식(빛)을 준다. 사랑은 빛이 어둠을 감싸는 것이다. 어둠은 빛을 감싸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 한다. 그래서 자기 안에 어둠이 가득하면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이 밝을 때 사랑은 샘물처럼 흘러넘쳐서 스스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입으로 떠벌이는 사랑은 모두 거짓이다. 어둠에서 나오는 위선이요 자기 의이다. 그 사랑은 어는 순간 빛을 죽이는 마음으로 돌변하여 세상을 어둡게 만든다. 당신이 빛이라면 당신은 당신 자신도 모르게 어둠에게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고, 그것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율법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던 원수 형들에 양식을 주어 기근에서 구해줌으로 그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리고 자신은 죽어 백골이 되어 아버지와 조상들이 있는 고향 가나안으로 후손(모세)들에 의하여 옮겨진다.
2. 빛에 대하여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6-18)
본문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에 대하여 변명한 내용의 일부이다.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기 위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야만 그동안 사탄의 권세 아래서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흑암의 눈을 뜨고 어둠에서 탈출하여 빛으로 나아가는 데 신앙의 초점을 맞추어야 함은 두 말할 필요 없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말씀에 깊이 잠겨야 한다. 이것이 물세례의 본질이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바탕으로 빛과 어둠에 대해서 상고해보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나누게 하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5)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빛의 반사작용이다. 눈은 발광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이 반딧불처럼 빛을 발한다면 그 빛으로 모든 사물을 비추어 볼 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다른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없는 눈 뜬 맹인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에 태양의 빛이 없다면, 지구는 우주를 떠도는 수많은 유성들 중의 하나일 뿐이요, 피조물이란 존재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빛은 우리에게 엄마 품 같은 따스함으로, 생명을 누리면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갈 수 있는 힘과 더 밝은 내일을 그려 볼 수 있는 지혜를 준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태양 빛과 인간이 만들어낸 전기로 말미암아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어떤 빛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온전한 신앙의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은 자신이 발광체가 되어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씨로 말미암아 새 종(種)의 탄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계획된 새 종의 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종의 씨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야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그의 앞에 섰을 때,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했다고 한다. 천하를 정복하고 호령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한 뼘 빛의 따스함도 되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때 그 태양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비추어주고 있다. 디오게네스는 눈에 보이는 빛의 따스함과 밝음의 중요함과 인간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우화로 남겼지만, 밝은 대낮에 등불을 비추고 다녔던 한 철학자의 고뇌하던 모습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늘에 태양은 언제나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만, 그 빛으로도 밝히 볼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담한 어둠의 세계를 밝혀 보려는 애처로운 몸짓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태양도 등불도 밝혀줄 수 없는 인간의 마음, 그 깊이도 알 수 없는 흑암의 세계를 밝혀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고뇌하며 이 땅을 살다가 사라져갔다.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무지에서 오는 마음의 어둠을 깨달으라 한 것이다. 그 뒤 많은 철학자들은 ‘마음’이라는 것과 ‘깨달음’이라는 것들을 자신들의 관념 속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려고 애써 왔다. 철학의 한계는, 자신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은 온통 어둠이라는 사실 뿐이다. 어떻게 무엇으로 밝힐 것인지는 아직 아무도 제시하지 못하고, 윤리 도덕이나 애매한 철학이론과 자기모순의 이념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앙의 길(道)은, 자신의 어둠을 깨달은 사람들이 비로소 빛을 찾아나서는 처참한 나그네 삶의 시작이다. 나그네는 비록 가난하고 배는 고프지만, 자신 안에 드러난 빛으로 귀중한 보화를 찾아가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시한 길, 즉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요 18:38),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진리에게 진리를 물은 것이다. 빌라도는 ‘어둠의 왕’이다. 어둠은 진리를 알아볼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다. 어둠은 진리를 ‘인간의 도리’, ‘보편타당한 지식’이라고 한다. 빌라도는 예수께 그 보편타당한 지식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세상의 이치에는 맞지 않는, ‘하늘의 도리’를 말할 뿐이다. 하늘의 도리는, 진리에 속한 자 만이 진리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어 있다(요 18:37). 그래서 예수는,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있어야 하는, 살아 있는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진리의 빛이요,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은 어둠의 세계, 빌라도의 진리이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6-18)
달과 별은 밤에만 그 빛을 발한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태양의 빛이 어둠 때문에 반사되는 것뿐이다. 그 빛은 밝은 낮에는 힘을 잃고 사라진다. 태양 빛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흔적도 없이 자신의 빛을 잃는다. 달과 별은 새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만, 희미한 빛으로 우리를 어둠에서 지켜 준다. 그래서 고통의 밤 후에 빛이 오는 날,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라는 것이다(마 24:29). 하늘의 도(道)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새로운 생명만이 자기 안에 있는 진리의 빛으로 그 도를 알아볼 수가 있게 된다. 결국 진리 안에서 사는 자만이 함께 살아보니 진리를 알 수 있게 되고, 그 삶만이 죄와 사망의 법(율법)을 이미 뛰어넘어 자신도 모르게 자유를 누리고 있는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다. 진리는 율법을 폐하고 오는 것이 아니다. 율법으로 가득 차서 어쩔 수 없이 질식하여 죽은, 모든 것이 무너져 폐허가 되어버린 내 마음 안, 율법 위에 오는 것이다. 인간은 법을 만들고 그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 법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법에 의하여 죽거나 뛰어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세상에서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착하지만 바보 같은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맞다. 세상에서 아무리 착하게 자기 경우대로 산다하더라도, 법을 모르면 언젠가는 세상의 법에게 당할 때가 있다. 자기의 경우는 자기의 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있는 자기 법(경우)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면 율법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안의 법이 선악의 지식에서 온 자기 계명(규정, 명령)이라면, 온전한 율법의 심판을 받게 되거나 스스로 그 법을 폐기하게 되거나 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이 물처럼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법이 녹아져 채워진 삶이라면 그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과 함께 사는 삶이다. 그래서 법과 하나 되어 그 법의 능력 안에서 사는 사람과 법을 지식으로만 알기에 법을 피해가려고 뛰어넘는 사람이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빛=삶)와 바리새인(어둠=외식)의 삶의 차이다. 빛은 어둠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깨어진 그 틈 사이에서 흘러나와 밝음으로 채운다. 어둠도 빛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흐려지는 빛 사이를 비집고 나와서 어느 사이 가득 메워지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차이는 백지 한 장 차이다. 빛과 어둠은 언제나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빛(발광체, 번개, 낮)과 등불(촛불, 반짝임)의 본보기가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이다. 예수 그리스도(큰 광명)와 세례 요한(작은 광명)은 함께 있었지만, 큰 빛(낮)이 나타나자 작은 빛(밤)은 사라져 버렸다. 세례 요한을 ‘켜서 비추는 등불’이라고 했다(요 3:35). 율법은 아직 밤에 속한 자들의 등불이다. 그래서 율법을 폐하지 못한다. 등불(율법)은 빛(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고(요 1:7), 어둠을 빛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초등교사)이기 때문이다. 등불이 있어야 등불이 있어야 어둠을 헤쳐 나와 빛(낮)을 만날 수 있다. 낮에 빛과 함께 있는 자들은 등불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요 5:35). 그래서 심판은 오늘날(지금) 자신의 상태이다. 내가 어둠의 상태인지, 빛의 상태인지에 따라 심판이 결정된다. 빛의 나타남 자체가 심판이고 구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둠 속에 있다면 빛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고, 빛으로 있다면 어둠을 감싸 안아서 함께 참 빛(그리스도)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당신 자신이 갈라놓은 빛과 어둠이 우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빛으로 당신께 드려지기를 기다리신다. 오늘날 하나님은 빛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들은 빛의 아들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림자가 없는 온전한 빛이시기 때문이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7-18)
하나님의 그 일을 예수께서 하고 가셨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가 해야 할 차례이다. 맹인이라고, 나병환자라고, 이단이라고 비웃지만 말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면, 아버지가 하신 일을 우리도 해야 한다. 어둠을 어둡다고 손가락질이나 하면서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꺼져가는 등불일망정 말 아래에만 두지 말고 우리의 마음 한구석이라도 비출 때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질 것이다.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하는 비판이나 판단은 자신 안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율법, 어둠에서 나온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희미한 등불인 율법은 완전히 소화시켜야 한다. 찌꺼기 똥은 완전히 싸버려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을 완전히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축복’이라는 욕망에만 눈이 어두워 그 욕심만 부둥켜안고 변비에 걸려서 싸버리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개가 토해 놓은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벧후 2:22).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는 몰각한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파수꾼들이고(사 56:10-12), 돼지들은 소화도 시키지 못하면서 성경 지식만 주는 대로 허겁지겁 받아먹고 스스로 깨달아 배부르다면서 부족함이 없다 하는 자들이 아닌가?(계 3:17) 귀신들은 그런 돼지들에게 들어간다. 그리고 귀신들린 돼지들은 비탈을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교리)에서 몰사한다(마 28-32). 이것이 예수의 또 다른 하나의 귀중한 사역이다. 그러나 시내가 그 예수를 그 지방에서 떠나가시기를 간구한다(마 8:34). 자신들에게는 예수의 말씀보다 살찐 돼지가 더 돈이 되어 좋기 때문이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말씀)을 가지고 먼 나라(바벨론 교회)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창녀들(거짓 선지자들)과 재산을 낭비해버리고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궁핍한지라 어찌어찌해서 그 나라 사람에게 붙여 살게 되었는데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때에야 비로소 아버지 집의 풍족한 양식이 그리워진다(눅 15:12-19). 쥐엄 열매와 아버지 집의 양식, 참 양식의 귀중함을 아는 것, 그것이 구원이고, 그래서 탕자는 말씀의 맛과 귀함을 알게 되어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돼지들과 함께 쥐엄 열매에 만족하며 아버지 집의 양식의 귀한 맛을 이미 까마득히 잊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시 돌아갈 고향도, 아버지도 없는 영원한 탕자들만 수두룩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1)
예수 믿는다는 당신! 예수를 믿으라는 당신! 당신 자신이 빛이 되었을 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어둠뿐인 당신이 빛을 말할 때 당신은 광명(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후 11:14-15). 참으로 놀라운 일은 자신이 빛을 비추는 자인지, 불을 피우는 자인지도 모르고 자식들을 밖으로 내몰아 나무를 주워오게 하여 그것을 혀의 불로 태워 죽이는 사탄의 일꾼이 된 교회 지도자들이다.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교회들)과 예루살렘 거리(기독교계)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자식들(교인들)은 나무(불신자)를 줍고 아버지(목사)들은 불을 피우면 부녀(신학자)들은 가루(말씀)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거짓 그리스도)을 위하여 과자(교리와 주석)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사탄)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렘 7:17-18)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가 행한 일에 공감하고 자신도 그 일을 행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땅에서 어둠의 일을 하면서 부르는 당신의 아버지는 마귀이다. 그 아버지께 열심히 구하는 당신의 기도는 오직 이 세상에서 필요한 부귀영화로 가득한 욕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채워보려고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욕망, 당신의 머리만 가득 채우려는 관념뿐인 지식에 대한 욕망은 어차피 컴퓨터라는 기계보다 못할 터이니 그 지식의 누더기들은 당신의 작은 등불마저 자꾸만 덮어버려서 더욱 더 어두워지게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정죄(심판)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19-20)
하나님은 빛이시고 사랑이시다. 사랑은 샘의 근원인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존재하여 그 풍성함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빛도 자기 안에 존재할 때 밖으로 밝게 비추어져 어둠을 감싸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빛은 말씀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이 다 이루어진 것은 십자가 사건 후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해 놓았던 휘장이 갈라진 뒤였다. 십자가 사건만이 하나님이 갈라놓았던 빛과 어둠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제사장이 드나들던 성소와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피를 뿌리며 들어가던 지성소가 하나로 되는 사건,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곳은 모세가 여호와를 만나던 곳이다(출 25:22). 결국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 됨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휘장을 갈라놓아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터놓으신 사건이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성소에 있던 제사장들이 앞서 가신 대제사장을 따라 비로소 지성소에 들어가는, 자기 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천국이 내 안에 있다면(눅 17:21), 성소와 지성소도 모두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제사장인가 아닌가,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포로 시대에는 지성소에 언약궤가 없었던 것처럼 내 안에 언약궤가 없다면 나는 아직 마귀의 포로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언약궤가 있어야 내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있다. 그래야 휘장이 갈라져 무덤 같던 지성소에 언약궤의 덮개가 얼리며 밝은 빛으로 가득 할 것이다. 부활은 무덤 같은 내 안에서 빛과 어둠이 하나 되어 찬란한 빛으로 그 무덤을 나오는 사건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 앞세울 언약궤가 없다면 전투는 해보나 마나 뻔한 것이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부하들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있을 동안에(요 12:35) 등에 기름을 붓고 등불을 밝게 켜고 그리스도가 계시는 거룩한 성에 이르러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이름도 이마에 기록되어야 한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취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3. 맺는 말
“날(낮, 해)은 날에게 말(약속)하고 밤은 밤(역경)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말)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음성, 부르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세상)에 통(들어가다, 드러내다)하고 그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2-4)
예수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하셨다. 참 빛을 만나려면 낮에 등과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해는 낮(잎)에게 생명과의 사랑(빛)을 한량없이 내려 준다. 밤은 어둠(뿌리)에게 선악과의 지식(물)만 전해 줄 뿐이다. 선악과는 내 안에서 법으로 존재하여 형제를 판단하고 미워만 한다. 그리고 어둠이 껍질이 하나하나 벗겨진 새벽, 갈등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마치 나병환자처럼 살이 썩어서 너덜너덜 녹아내려 뼈만 앙상하게 남아 백골이 되어버린다. 빛을 가렸던 장막이 걷히고 하얀 백골(열매)이 되어 빛을 발한다. “내가 생기(영, 생명, 바람)를 너희(뼈)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5) 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빛을 발하는 하얀 백골만 찾으시는데, 세상은 온통 인간들이 잡아먹고 버린 짐승들의 뼈다귀들만 가득 쌓여 있다.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하나님의 소리는 이미 온 땅(세상)에 퍼져 있고, 그의 말씀(예언)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시 19:4). 그래서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요 15:22).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공기와 물과 빛은 세상에 충만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이미 온 땅에 충만하게 퍼져 있지만, 오염되어 있거나 듣지 못할 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오염시킨다. 생명의 근원들을 온통 어둠으로 덮어버려 자신들을 감추려 하지만, 변함없이 떠오르는 태양과 엄청난 태풍이 몰고 오는 비바람은 그따위 위선의 껍데기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린다. 밤새도록 꾸며 놓은 인간의 역사들은 아침이 되어 태양이 떠오르면 어쩔 수 없이 눈부신 빛 가운데 초라하게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심판은 빛이 어둠에 와서 모든 상처를 드러냄이다. 구원은 빛으로 드러난 상처를 치료 받음이다. 애굽은 흑암이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광야로의 탈출이다. 흑암에서 등불로의 이동이다. 광야에는 모세의 율법과 만나와 세례 요한의 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광야가 목적지는 아니다.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길목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서 육신의 정욕에서 오는 고통을 이겨가며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처절한 죽음의 순례길이다. 광야에서 거듭난 자들만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갈 수 있다.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감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목표, 푯대)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가나안은 치열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 전쟁터요, 자기 십자가의 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자기 영혼의 깊은 골방, 어둠에 빛을 밝혀 빛과 하나 되는 화해의 싸움이 있는 곳이다. 정복을 하던 항복을 하던 빛과 어둠이 하나 되는 싸움이다. 가나안은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다. 최종 목적지 새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안의 원수 형제와 화목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둘이 하나 되어 태어난 새로운 생명만이 가는 곳이다. 가나안은 ‘나’라고 이제까지 껍죽대던 그림자가 바닥까지 낮아져서 신발을 벗어들고 항복하는 내 영혼의 밤이다. 그 고통의 밤이 지나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 그때야 비로소 참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보일 것이다(계 21:1-2).
그래서 가나안은 하나님께는 빛이지만, 나에게는 어둠이다. 내 안의 법은 아직도 관념의 껍질을 벗지 못하고 선(빛)과 악(어둠)이라는 인간의 원론(原論)에 멈춰 서서 머뭇거린다. 그래서 형제를 판단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 모든 일들이 못마땅하고 자신 외에는 모두 부정하게 보인다. 영혼은 점점 더 어두워만 가고 마음은 속앓이로 숯처럼 까맣게 되어 등불마저 가리는 커다란 그림자만 일렁일 뿐이다. 어찌 이 어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단 말인가? 말씀 전한다는 말은 함부로 하지 말자. 단지 소리만 지를 뿐이다.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다. 광야에서는 소리(물)를 들음으로 충분했지만, 가나안에서는 말씀(빛)이 있어야 살 수 있다. 만나와 소리는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열매는 물과 참 빛이 하나 되어야 맺을 수 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4-15)
참 빛에는 그림자가 없지만, 등불 빛에는 그림자가 있다. 참 빛이 내 안에 존재하면 그림자가 없지만, 밖에 있는 빛을 향하여 따라만 간다면, 긴 그림자도 나와 함께 따라 간다. 빛이 나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내 그림자는 흉물스럽게 커지고, 빛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림자는 작아진다. 정오 빛이 내 머리 위에서 비출 때 잠시 그림자는 없다. 이처럼 등불이 있더라도 참 빛이 내 안에 없다면 그림자는 어김없이 나와 함께 운명적으로 살아가는 이웃이요 형제다. 떨쳐버리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떨칠 수 없는 운명적 관계. 오직 한 가지 방법은 그를 사랑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 원수 같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등불)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참 빛이 내 안에 있다면 등불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참 빛으로 모든 것을 감싸 안아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참 빛이신 하나님 자신이 사랑하신다. 열매 맺게 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흉측한 그림자를 일렁이면서 원수 형제 사랑을 침 튀기며 떠벌이는 당신의 사랑은 아직 등불(율법)에서 나오는 그림자 사랑이요 위선의 껍데기일 뿐이다. 그래서 당신 말대로 당신이 진정 살아 있는 제사(롬 12:1)를 하나님께 드리길 원한다면 당신은 먼저 당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당신의 원수, 어둠과 화해해야만 한다. 그 그림자 원수는 이 넓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당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요 형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점 희미한 어둠의 그림자라도 있는 예물은 절대로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자기 안의 형제와 화목해야만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랑이란 예물만 받으신다. 당신의 어둠에서 비집고 나온 구겨진 그림자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림자가 그림자를 따라다니는 허깨비 사랑일 뿐이다. 그래서 당신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재산과 온 몸을 내주어 불사른다 해도 당신 안의 형제와 화해하여 하나 된 사랑이 없으면 헛일인 것이다. 그런 모든 껍데기들은 율법에서 흘러나온 위선으로 가득한, 스스로 만족하며 스스로에게 강요되어진 행위일 뿐이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며 얼굴은 미소를 짓지만, 당신의 머리는 재빠르게 손익(損益)을 계사해 보고 사랑과 미움을 결정하는 조작되어진 자기 사랑일 뿐이다. 화목하여 형제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을 이룬 율법을 완성한 온전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림이 살아 있는 제사요 온전한 십일조일 것이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정확히 계산하여 다리미질을 한 당신의 돈 봉투를 온전한 십일조로 가져오기를 기다리시는 가난한 분이 아니시다. 빛으로 나와 상처를 치료 받고 고통 속에서 새 생명을 잉태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은(계 21:1-4) 진정 자신의 형상을 닮은 당신의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실 뿐이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고 당신만이 들을 수 있게 다정하게 속삭이기를 바라는 분이시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2-4)
심판은 미움이요 나누어짐이다. 예수는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오신 것이다.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리라.”(마 10:34-39)고 말씀하신 예수는 할 일이 없이 남의 가정 파탄시키려 오신 분이 아니다. 빛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집 주인 바알세불이 원수로 있음을 말함이요, 그 분열의 집안싸움을 이겨내어 화목을 이루어 나아감이 구원이 여정인 사랑으로 가는 자기 십자가의 길임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바알세불로 집 주인 행세하던 ‘나’라는 존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그리스도가 그 집 주인이 된다. 그렇다, 예수는 나에게 칼이 되어 어둠 속에서 썩어가는 내 영혼을 난도질하여 물로 씻어 다시 거듭난 생명을 싹트게 하셨지만, 그리스도는 그 작고 연약한 싹을 따스한 빛과 성령이라는 뜨거운 바람으로 사랑이라는 열매가 자라게 하시어 집안 식구와 화평하게 하신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작은 씨앗은 땅속 어둠에서 싹이 난다. 씨앗은 어둠과 물이 필요하다. 씨앗이 빛 속에 있으면 말라죽어버릴 뿐이다. 그러나 나무는 빛이 있어야 산다. 씨앗은 물을 주어야 싹이 나지만, 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강으로 내려서 스스로 물을 흡수한다. 나무뿌리는 여전히 어둠에 묻혀 사랑이라는 열매가 맺힐 때까지 물을 빨아들여야 한다. 사랑이라는 열매는 하늘의 빛(잎)과 땅의 어둠(뿌리)이 화목하고 합심하여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사랑은 희생을 요구한다. 아니 희생의 감동 위에 피어나는 꽃이 사랑이다. 사랑도 희생도 감동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감동의 눈물이 없는 삭막한, 계산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나뭇잎은 뜨거운 태양과 바람에 노출되어 말라가면서 뿌리는 차갑고 어두운 땅 속에 묻혀 썩어가면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열매 맺는 일만 묵묵히 한다. 그들은 바싹 말라서 시들어버리고 말지만, 영광은 화려하게 피어난 열매가 누린다. 세상에는 사랑이 식어간다. 밤하늘에 붉은 네온의 십자가는 화려하게 번쩍이는데, 고난의 자기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감동도 없고 눈물도 메말라버렸다. 남의 불행을 보고도 아픈 고통이 나누어지는 예수의 뜨거운 피눈물은 점점 사라져가고, 차가운 냉소(冷笑)만 가득하다. 십자가는 희생이고, 사랑이 되어 감동으로 우리에게 온다. 감동의 눈물만이 메마른 땅을 적셔 믿음이라는 씨를 뿌리게 하고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어 구원을 이루게 한다. 어두운 골짜기에 박혀 있는 십자가만이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나무이다. 천국은 집안(자기 안)의 원수가 사랑으로 하나 됨이다. 빛과 어둠, 은혜와 율법, 사랑과 미움, 구원과 심판 등 모든 나누어져 있음이 ‘나’요, 사랑으로 하나 됨이 ‘그리스도’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 되기를 말하는 책이다. 하나는 온전한 완성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겠노라 노래한 어느 시인의 꿈은 한 가닥 시로 끝나고 마는 헛소리인가? 내 마음은 언제나 한 점 어둠의 그림자도 없는 참 빛으로 가득 찰 수 있을 것인가? 그 꿈마저도 어둠에서 나오는 헛된 욕심이란 말인가?
아니다. 생명수 샘물도 값없이 주시고(계 21:6), 다시 밤이 없어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는(계 22:5) 참된 열매 맺는 자들만 모여 세세토록 왕 노릇 하며 사는 나라가 있단다. 여름밤 빛을 향하여 미친 듯이 날아와 불 속에 뛰어들어 타 죽어버리는 불나비처럼 몸서리쳐지도록 아름다워 보이는 그런 죽음이라도 맞을 수 있다면 심판이니 구원이니 사랑이니 미움이니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따위의 낱말들이 펼치는 유치한 지식의 유희(遊戲)는 차라리 끝낼 수도 있으련만, 세상은 여전히 어둠으로 가득하고 내 마음은 아직도 차가운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져 일렁이고 있을 뿐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하나님의 경륜은 당신 자신이 갈라놓은 빛과 어둠이 우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빛으로 당신께 드려지기를 기다리신다. 오늘날 하나님은 빛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들은 빛의 아들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림자가 없는 온전한 빛이시기 때문이다. 천국은 집안(자기 안)의 원수가 사랑으로 하나 됨이다. 빛과 어둠, 은혜와 율법, 사랑과 미움, 구원과 심판 등 모든 나누어져 있음이 ‘나’요, 사랑으로 하나 됨이 ‘그리스도’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 되기를 말하는 책이다. 하나는 온전한 완성이기 때문이다. "본 말씀과 글을..모두 보고..듣는이들은 이것을 모두에게 전하라 ! 그리하면 너의 상급을 하늘에 샇으리라 ! 아멘 !"
우리가..죽기전에...잠깐은... 한번쯤...생각해보고...가자 ! 2000년이 넘고넘어....그리도...기다리는 사랑이...있는지를....! 창조주앞에...까불지말라 ! 너희가...영원히...죽을까하노라 ! 너희가...별을...따랴 ! 너희가...달을...만들것이냐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개나 소,돼지에게 성경책을 주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짐승들에게 먹을것을 주면 짐승들은 주인을 좋아라한다 ! 너희가....짐승이냐 ? 이제...너희와 약속된...용서의... 기다림의 시간이 다가왔음이라 !
창조주앞에.... 바짝...업드려... 두려움을...생각하고...참회하라 ! 그리고..지금도 기다리시는... 주님꼐...돌아오라 !
어찌하여 말벌의 침과 전갈의 독침은 두려워하면서 너의 영혼을 잡아 먹는 사탄은 두려워하지 않느냐 ! 너의 눈은 멀었으며 너의 귀는 어두워졌으며 너의 마음의 빛은 꺼져 사탄의 어둠에 갖혀있음이라 ! 인간의 썪어질...육체는... 인간의 삶의 ...목표도...목적도...전부...아니다 인간이 어찌하여... 개나...돼지나...닭이나..소처럼.... 저차원의 동물로 남아...사단과 악마의 자식으로..살려하는가! 숨어 살아있는....영원한...다음세상이 있음을...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생명의 길로 가라 ! 죽은후에는...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사후에는 잠든 너의 영을 깨울수도 없으며 너의 영은 거듭날수도 없다 !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생명의 길로 가라 ! 그길로 가는 법은...오직한길... 하나님이...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게 주신... 생명의 성경 말씀...뿐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창조주... 하나님은 반드시 계신다 ! 어리석은 자들아....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혜어보라 ! 그...끝도없이...많은 별들을... 만드신이는 석가도...마호메트도...교황도...목사도...신부도 성황당 고목나무도...돌부처도...돌아가신...내부모도... 모두 ..아니다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그들도...모두..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며, 죄인이다 ! 못 알아 듣는자는....짐승이다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신은
오직 한분...창조주...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의 무한하신 참사랑으로 돌아오라 ! 어찌하여.... 보아도...보지못하며 들어도... 듣지못하고... 살다가 죽어가는 자야 ! 너는 사단의 자식이니라 ! 아름다운영혼 http://blog.daum.net/happyhousein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