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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나라에 금발머리에 고귀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외모로 태양이라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던 프란츠 리스트라는 왕자가 있었습니다. 수 많은 여인들이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는 창백한 달이라 불리던 어느 한 귀족의 아들 쇼팽을 진심으로 사랑할 뿐 이었습니다. 왕자는 귀족을 사랑했고 귀족 역시 왕자를 사랑했습니다. 둘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소풍을 갔고, 타인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몸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죠. 하지만 어느 날, 귀족은 이유없이 이별 편지만을 남겨둔 채 왕자를 버렸고 왕자는 슬픔에 잠긴 채 생기를 잃고 10년 동안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왕국의 후사를 이으라는 부모의 강요로 알파인 왕자는 원치 않은 오메가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되는데....
오늘은 왕자인 나의 결혼식날. 내 의사 따위 없었고 내 신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보이는 것은 신자의 모든 죄를 낱낱이 까발리겠노라 드러낸듯 지나치게 새하얀 성당과 질식할 듯한 독한 꽃의 향기, 갑갑하게 꽉 조여진 나의 칠흑같은 검은 정장과 녹색 화관뿐이었다. 신부가 누가 되었든 난 결코 그 신부를 평생 사랑하지 않겠노라 다짐한 채, 나는 죄수마냥 무거운 발길을 옮겨 성당 문을 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10년전 정말 너란 말이야? 10년전처럼 새하얗고 투명한 아름다움을 가진 나의 달, 쇼팽이 하얀 정장을 입은 채 보라빛 화관을 쓰고 조용히 성당의 제대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인가 싶어 멍하니 있었고 스테인드 글라스의 빛에 반사된 그는 마치 자신을 심판하러 온 천사마냥 성스럽고 고결해 보였다.
리스트: 오랜만이네, 나의 창백한 달 쇼팽. 10년만에 날 버리고 다시 돌아온 이유가 뭐야? 아니, 그것보다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없었니?
쇼팽: 나 다시 돌아왔어. 너를 위한 신부이자 제물로....10년만에 처음 연인에게, 그것도 우리의 정략결혼 자리에서 하는 말로 하기에는 너무 우스운가??
10년전이랑 넌 변한 게 없네. 얼굴 한 번 만져보고 싶었어. 보라빛 꽃은 꼭 너를 닮았어. 너는 내가 10년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며 너를 그리워하고 울부짖었는지 알고는 있니?
쇼팽: 그날은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내가 왜 널 떠날 수 밖에 없었는 지는 묻지 말아줘.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해. 하지만 너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지는 모르겠어.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정략 결혼을 하는 중이지. 저 가식적인 귀족들의 비위라도 맞춰 주려면, 너도 짐짓 기뻐하는 척 가면이라도 써줄래?
친애하는 나의 프레데리크, 넌 내 마음 속 어둠을 결코 보지 못할꺼야. 난 널 보며 온갖 더럽고 추악한 상상을 하며 웃지만, 너가 원한다면 난 기꺼이 친절과 예의라는 위선의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광대가 되어줄께!
지루하고 별 의미도 없는 주례가 끝난 후 금발의 왕자가 나에게 맹세의 키스를 해 주었다. 10년전의 키스에는 자신을 사심없이 한 인간으로서 사랑한다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의심과 혼란만이 나의 영혼을 깊게 잠식하기 시작한다. 그는 나를 지금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걸까?
자 이제 가볼까? 물론 당신을 평생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은 빼 놓으면 안되겠지?
왕자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나는 차라리 평생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이라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잊었더라면, 다시 상처를 받을 일도, 너의 잔인한 미소를 마주할 일도 없었겠지. 그리고 너가 더 이상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을 필요도 없었을거야....
리스트: 어릴 적부터 잔인한 두 부모님은 우리에게 자주 체스 시합을 시켰지. 지는 사람은 매를 맞고 붉은 색으로 칠해진 다락에 갇혀 하루종일 굶는 벌을 받았어, 자네는 나보다 자주 굶었고 그때마다 난 너에게 몰래 식사를 갖다주었지. 카다란 눈으로 울면서 빵을 먹는 다람쥐 같이 귀여운 자네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군. 어때, 오랜만에 체스를 둬볼까?
너의 검은 정장, 나의 하얀 정장. 이리 보니 우리도 마치 체스말 같지 않아? 아니 어쩌면 우리는 태어날 때 부터 지금까지 체스말 이었는지도 몰라 리스트, 정해진 틀 안에서 가식을 띄우며 사람들이 정해준대로 우리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지. 하지만 리스트, 비록 우리는 장기말이라도 지금부터 의지를 갖는다면, 어쩌면 둘다 장기말이 아닌 플레이어가 되어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체크메이트 프란츠 리스트. 너는 늘 습관이 똑같아! 지나치게 흥분하면 플레이가 과격해져 속을 뻔히 드러내는 양상. 내가 이겼는데 무슨 소원을 들어줄꺼니 나의 바람둥이 왕자님?
어릴 적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내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며 불길해했고 악마의 자식이랑 바꿔친 거냐며 놀리기도 했지. 하지만 그들도 영원히 모르겠지. 나도 사랑했던 누군가의 앞에서는 여전히 긴장하고 모든 걸 다 보여주고 싶어하는 평범한 남자였음을. 모든 걸 다 바치고 평생 숭배하고 싶은 그런 남자....
쇼팽: 너는 항상 피아노를 부술 것 처럼 굴었지. 마치 음표로 사람들의 귓속을 공격하는 느낌이랄까? 너가 만약 왕자로서 피아니스트 직업을 얻었다면, 정신나간 여자들이 너를 피아노의 왕이라며 숭배하고 너의 모든 걸 알기 위해 목욕물이나 머리카락을 훔쳐 갔을 지도 모르지!
리스트: 친애하는 나의 쇼팽, 자네의 연주는 늘 꿈결의 바람같이 부드럽고 우아했지. 부서질듯 한 아름다움, 우리는 추구하는 연주 스타일이 너무 달랐고 무대에서 처음 이중주를 연주한 날 우리는 태양과 달이라는 별명을 얻었지. 그 말이 맞을 지 몰라. 서로가 반대 지점에서 상대를 보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꼭 필요한 존재....
프레데리크, 혼자 여기서 뭐해? 많이 쓸쓸해 보여. 자네만 괜찮다면, 나도 그 옆에 잠시만 서 있어도 될까?
리스트, 이거 봐! 라일락 정원에서 혼자 핀 빨간 장미를 찾았어! 정말 재밌지 않아? 이거 너에게 줄게. 바람둥이에게 꼭 어울리는 꽃이잖아!
그래 10년전 그날에도 넌 나에게 꽃을 선물로 주었었지. 달빛 아래 선명한 보라빛의 수국과 라일락. 꽃의 종류는 달라졌지만, 사랑스럽고 우아한 너의 미소는 변한 것이 없구나.
나와 춤추자. 눈부신 햇살이 우리의 운명을 비추는 날, 너와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맹세. 내가 꼭 지킬거야. 어떤 수를 쓰더라도....
수 많은 미약들의 향기. 효과는 일시적이며 지나치게 많이 마실 경우 극약이 되어 복용자의 몸을 해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끊을 수 없어 다 마셔버려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 이 중에는 마시면 독약이 되어 즉시 목숨을 끊는 약도 있다. 영원히 그를 차지하기 위해서....
붉은 빛의 액체가 투명한 글라스를 따라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마치 피를 마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 마음이 어둠을 쫒아서일까 그를 향한 소유욕과 집착이 내 목을 조르고 있어서일까.
친애하는 나의 프레데리크, 첫날밤인데 분위기 있게 포도주나 한 잔 마실래? 올해 처음 수확한 포도야. 달콤한 맛이라 너도 잘 마실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원래 본 포도주랑 달리 색깔이 엄청 진하네? 마치 피같아. 여기에 뭐 독이라도 탓니? 아무튼 건배나 하자. 저주받은 우리의 결혼 생활을 위하여!
지독하게 얽힌 너와 나의 저주받은 사랑을 위하여 건배!
과연 이 방법이 진정 옳은 것인가? 눈 앞의 빛나는 유리잔에 속으로나마 말을 건네 보았지만, 당연히 대답을 해 줄리 없지. 이 방법을 쓰면 그를 영원히 네 것으로 만들 수 있어! 하지만 어쩐지 검은 그림자가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우 쓰다. 이거 달다며! 리스트, 도대체 자네는 쓰고 몸에도 안 좋은 걸 뭐가 좋다고 매일 즐기는 거지? 참 이해할 수가 없어! 나중에 나랑 알코올중독 치료 센터나 가 볼래?
그의 농담에 가식적으로나마 웃고, 포도주를 들이키며 문뜩 나는 우리의 10년전 그 날을 떠올렸다. 어느 지독한 봄날 이었지....
그날 나는 어느때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나무 앞 피아노에 앉아 무도회에서 연주할 왈츠를 작곡하고 있었어. 너는 그런 나를 보고 그런 왈츠를 연주하면 사람들이 빨간구두 마냥 미친듯 춤추다 지쳐 죽게 될 거라고 뼈있는 농담을 던졌지. 시니컬한 모습도 꽤 신선했는데.
너는 내가 너를 위해 손수 가꾼 보라빛의 정원에서 라일락을 따면서 화관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며 혼자 놀고 있었지. 달빛 아래 보라빛의 정장과 스카프, 라일락 화관을 두른 자네는 마치 숲에서 갓 나온 꽃의 요정 같았고, 나랑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빨개진 채 꽃에 코를 묻은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어!
이거 봐 리스트! 너를 위해 내가 고른 꽃이야. 사람들은 자네에게 붉은 장미가 가장 잘 어울린다며 선물하지만, 왠지 보라색 라일락도 잘 어울릴 것 같아! 내가 머리카락이랑 조끼 단추에 꽂아줄께!
라일락 향이 참 좋지 않니.... 언젠가 만약 내가 너보다 먼저 죽게 된다면, 하얀 유리관 속에 라일락 꽃을 가득 채워서 날 넣어줄래? 너가 내 지독하게 부패하고 냄새나는 시체를 끌어안고 서럽게 우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이왕이면 가장 좋은 정장을 입혀주는 것도 좋고!
사랑하는 나의 리스트, 달빛 아래에서 너의 입술을 가질 수 있어서 난 행복했어. 언젠가 수 많은 세월이 지나고 만약 내가 너의 곁에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너와 함께한 모든 기억만큼은, 설령 슬픔이라도 절대 잊지 못할꺼 같아.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 만약 너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나에 대한 기억만큼은 추억으로나마 남겨줄 수 있니?
친애하는 나의 쇼팽,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순간 쇠사슬에 덫을 놓고 너를 평생 가두고 싶어. 피아노의 시인의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내 손으로 직접 끌어내려 추락시키고, 내 손으로 조종하고, 시인을 복종시킨다면 시인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언어를 속삭이고 있을까?
으음.... 리스트, 나 이상하게 졸린 것 같아. 이상하게 눈이 감기네. 날 좀 눕혀줄 수 있니?
난 너가 살아있든 죽어있든 사랑할께. 그저 내 곁에만 영원히 존재해 줄래?
포도주를 마시자마자 의식없이 창백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 죽어있는 그를 보며 조용히 입을 맞춰주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하든 답해 주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너의 육체를 소유할 수 있으니 그거면 된거 아닐까?
누군가 너를 본다면 그저 천사가 편히 잠들어 있는 줄 알거야. 성스러운 맹세의 장소에서 성스러운 너를 평생 지켜줄게. 잘 자 안녕....
그의 시신을 본 순간 차가운 내 얼굴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후회의 눈물, 차라리 좀 더 용기를 내어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말 해줄걸. 죽은 유령은 혹시 인간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니?
쇼팽: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려? 마치 유령을 본 것마냥. 내가 안 죽어서 놀랐니? 네 혼잣말 다 듣고 있었어. 이제 네 마음을 확실히 알았으니 나도 숨기지 않고 내 마음을 드러낼께. 사랑해! 나의 입맞춤을 받아줄래?
꿈이 아니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멀쩡하게 살아서 웃고 있었고 나에게 진한 키스를 해 주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낮게 속삭였다. "첫날 밤 내 몸 잘 부탁해. 날 독살하려 한, 사랑스런 악마 배우자."
사실 너 몰래 와인을 독이 없는 걸로 바꿔치기했어, 와인을 건넬 때 너의 눈빛이 마치 옛날에 나에게 고백한 아가씨를 죽일 듯 노려보던 질투의 눈빛과 꼭 같았거든! 때가 되면 일단 너에게 10년전 내가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양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 줄께. 일단은 긴 밤을 너와 실컷 즐기고 나서....
보라빛 라일락의 추억-Souvenirs de lilas violets
붉은 장미나무 아래 달콤한 악마-doux diable sous le rosier rou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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