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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거울을 두고 보는 듯 보기에 흐릿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온전히 알리라.’ -신약 고린도전서 13장 12절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1995년 작)를 보고서.] 20학번 철학과 김바다
개요-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본질은 무엇인가. AI와 인간의 근본적인 차별점을 우리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우리는 데카르트가 과학혁명 시기에 제창하였던 '물질은 물질의 영역으로, 정신은 정신의 영역으로 분리시켜야 한다‘ 는 주장이 설정한 구도 속에서 살고 있다. 데카르트가 과학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을 구분지음으로서 로마 교회의 일방적인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과학자들은 더 이상 화형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물질로서의 인간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로부터 마침내 정신과 물질을 아우르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신학과 과학이 서로 아예 다른 영역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함부로 말해서, 신학이 정신을 의미하고 과학이 물질을 의미한다고 하면 말이다.
1. 자아에 대해 탐구하는 두 가지 이론에 관하여.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라 깊게 믿고 있다면, 신이라는 존재가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에고 이론을 믿는 사람이다. 이는 비약일까? 내 육체안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규정시킬 수 있는 정체성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공각기동대에서 그 자아의 증명을 도와주는 정체성의 원료는 다름 아닌 기억이라고 얘기한다. 어떻게 보면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가 기억이라고 보일 수도 있겠다. 개인의 사사로운 기억. 과연 이것은 한 사람에게 영혼이 정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할까.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개념인가.
우선 자아의 개념을 정립해보아야 한다.
자아(自我, 영어: Ego)는 생각, 감정 등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는 행동의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말한다.
모든 경험을 통일하여 모든 경험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당사자라고 생각되는 의심할 수 없는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에고이론은 자아가 실제한다는 가정 아래 인간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사고라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나의 생각과 행동의 원천은 나라고 하는 자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 즉, 자아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에 대하여 공각기동대에서는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타인을 대하는 얼굴,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 자연스로운 목소리, 눈을 뜰 때에 응시하는 손, 아이었을 때의 기억, 미래의 예감, ... 그 모든것이 나의 일부이며 , '나'라는 의식을 낳고 동시에 계속해서... '나'를 어떠한 한계에의 제약을 걸어버려." - 쿠사나기 모토코 -
이 대사를 읽으면서 어디선가 경험한 듯한 기시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예컨대 자아에 대한 혼란스러움,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가 실제하는지. 그리고 그 자아가 결코 어제의 것과 오늘의 것이 일치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지 다들 한번쯤 생각해보고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단적으로 꿈을 꾸었을 때의 우리 모습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우리는 꿈을 꿀 때에 당장 그것이 꿈인지 알 수 없다. 혹은 정말 리얼한 꿈을 꾼 뒤 눈을 떴을 때 과연 무엇이 진짜 현실이고 꿈이었는지 혼란스러워 했던 경험이 한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장자의 호접지몽은 과연 어느 것이 현실이고 꿈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자아 분열의 괴리감을 보편적으로 비유한 구절에 불과할 뿐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나비였다고 생각했을 때의 자아와 장자였다고 생각했을 때의 자아는 다르다는것을 표현했던 것이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꾼건지 장자가 나비 꿈을 꾼건지 그 주체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었음을 시사하는것은 아닌 것이다. 즉, 만물은 변화한다. 나비라고 믿었을 때의 자아도 나의 일부이며, 장자로 돌아왔을 때 그것을 의심하는 자아도 나 자신의 일부이다. 모든 것은 변화발전하며 한가지의 상태로서 머물려고 하는 현상은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번들이론은 이 모든것이 다 허황된 착각이라고 말한다. 의식은 여러 독립적인 프로세스의 집합 인것이지 실체하는 물질, 즉 스스로 존재하는 자아라고 하는 것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고 말이다. 애초에 나라는 존재는 없었으며 무수한 뉴런이 주고 받는 전기신호의 상호작용만이 행동의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 번들이론의 가설이다. 따라서 그 의식은 융합, 분리, 축소, 확장이 가능하며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업로드와 다운로드도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자유의지는 뇌에서 만들어낸 환상이며 우리가 무엇인가 하고 싶음을 느끼는 욕구도 모두 우연에 불과하다. 의식은 허상에 불과한 것인데 어젯밤 잠들때의 나와 오늘 아침 눈 떴을때의 '나'가 같은지 다른지 구별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부질없음을 회의하는 것이 번들이론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뇌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억도 없고 자아도 없고 정체성도 존재하지 않고 무엇보다 나라고 부를 수도 없는 두개골 속에 갇힌 외로운 뇌는 무엇을 담고 있는 것일까. 만약 모든것이 바뀌고 그 어떤 것도 증명되지 않는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아가 생기면 존재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해결 되고 '나'의 인식에 대한 괴리감을 없앨 수 있을까. 나라고 하는 오리지널리티는 무엇일까.
'나'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곧 존재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일까.
번들이론은 결국 생명체로서의 가치와 무언가를 믿고 소망하고
얻으려고 하는 모든 의지를 통틀어 허구라고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2. [나 인형사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희망한다.]
"웃기지마, 너는 단지 자기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불과해!"
"그렇다면 당신네의 유전자도 또 다시 자기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불과해. 생명은 정보의 흐름속에서 생긴 결정체 같은 것이지. 인간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통해서 기억에 의해 개인이 되는 것이야. 그것이 단지 환상이라 해도 인간은 다만 기억으로 살아가는 거지. 컴퓨터가 그 기억을 조작하게 됐을 때 인간은 그 의미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어." -인형사-
생명으로서의 의식은 주관적 경험에서 나오는것이며 이것들을 통틀어 철학자들은 퀄리아(감각질)이라고 말한다.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서 퀄리아와 영혼의 존재를 기술적으로 서술해주는 용어가 바로 '고스트'이다.
예컨대 생명이라면 모두 고스트를 갖고 있다는것이 요점이다. 그러나 그 고스트를 누군가 해킹하기도 하고, 기억을 조작시켜 인간의 정체성의 의의를 완전히 뒤흔들어 버려서 기억이 세탁된 뒤에 남게 된 인간의 육체가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작용이 만연한 사회가 되어버린다. 극중 테러리스트의 고스트가 해킹 되어 인형사의 꼭두각시로 쓰여지고 난 뒤 체포되어 그 모습을 보고 바토가 새빨간 피를 흘리는, 자신이 누군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된 불쌍한 철학적 좀비라고 표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인간처럼, 아날로그로 이뤄진 생체가 아닌 디지털로 태어난 프로그램이 자신에게도 고스트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고스트를 갖고 있을 때 행동하는것과 유사한 반응을 보인 알고리즘의 집대성, 인형사가 등장한 것이다.
자신과 같은듯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자아의 존재를 의심하는 쿠사나기 모토코에게 접근하기 위해 일부터 공간 9과에 잡힌 인형사는 자신과 융합하여 새로운 생명체로서 다시 태어나자고 제안한다.
3. 고스트의 실체가 존재하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변종이 탄생하다.
쿠사나기는 몸의 90프로가 의체화 되어서 사이보그의 형태를 띄고 있고 태어날 때 갖고 있던 뇌에 컴퓨터 공학 시스템을 결합시켜 완전한 인간도 아닌 그렇다고 켬퓨터도 아닌 하나의 결합체가 되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가 그나마 개인에 내제되어 있는 성격과 기억인데 정보기술이 발달하여 그 정보를 조작하고 기억까지 왜곡시킬 수 있는 세계이니 쿠사나기는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점점 헷갈리게 된다.
그리고 운하를 건너던 중 자신과 똑같은 모델의 의체를 가진 사람을 발견하고 어느새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던 고유의 특성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되는 모습이 그려져 섬뜻하게 만들기도 했다.
인형사는 자신과 닮은 쿠사나기 모토코와 융합을 제안하면서 더 높은 차원의 생명체로 다시 태어날것임을 약속한다. 모토코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다시 깨어났을 때 나로 남아있을 수 있는 보장에 대해서 묻자 인형사는 이렇게 답한다. " 그 보장은 없다. 인간은 계속해서 변하고 지금의 너로 남으려는 집착은 계속해서 너를 제약할 것이다. . . 우리는 서로 닮아 있지. 거울을 마주했을 때 보게 되는 허상과 실체처럼"
사실 공각 기동대의 주제는 하나가 아닌 여러가지며 그 갈래는 대부분 원작이 각자 존재한다.
하지만 1995년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는 치밀한 구성과 현학적이고 신화적인 스토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현실적 고찰이 드러나기도 했고 실제로 현대사회의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어서 충격적으로 다가온 영화이기도 했다. 현재 재배되는 바나나와 전세계 시장에서 유통되는 종이 단일종이어서 만약 바나나 전염병이라고 하는 것이 생기게 되면 지구에 있는 모든 바나나의 90프로가 괴멸될 수 있다는 가설이 있다.
생명이 바이러스 하나로 괴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특성과 데이터를 남겨야 되는것이 자연의 섭리라는것. 기억이 조작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에게 나라고 하는 자아가 존재하는것인지.
자아라고 하는것이 정체성과 개인의 특성을 무조건 포함시켜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인간과 AI의 차이는 없는것은 아닌지
여러가지 질문과 화두를 던진 작품이었다.
마무리-
에고이론은 자아가 실제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생명체의 가치를 얻기 위해서,
내가 나이기 위해서 그 주관적 경험의 인식이 필수라고 믿는다.
그와 반대로 번들이론은 어차피 모든 것은 똑같지 않으며 의식을 허상이라고 본다.
제법 무아, 諸法無我 모든 존재에는 고정불변한 실체적인 자아가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어쩌면 번들이론과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번들이론은 단순히 의식이 허상이라고 해서 사람이 살 가치가 없다거나 그 존재는 허무하다고 부정하는 이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아가 없고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내 육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내가 나 자신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단 한가지 사실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어쩌면 AI가 존재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날이 올수도 있다.
왜냐하면 생명체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AI에게 숭배받으며 인간뿐만이 아닌
프로그램에게도 철학적 화두를 던진 철학가가 될 수도 있다.
첫댓글 서구 철학은 "사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유와 기억에 집중하고 있지요. 고스트는 메모리고, 기억이지요. 그것이 저장될 수 있고, 그것으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한다면 공각기동대의 미래는 디스토피아가 아니겠지요. 하지만 과학기술이 아직 그 정도로 발전하지 못해서 그런 것만은 아닌, 그것이 디스토피아인 이유가 있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