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만할래
“끼익끼익 어떻게 해요?”
“아, 저건 드리프트라는 건데...”
둔하기도 하지.
게임을 시작한지가 언젠데
이제서야 드리프트를 물어오다니.
채연처럼
스스로 터득하지는 못하더라도
남들은 뭔가 다른 기술을 구사한다는 것 정도는
이미 진작에 알아챘어야 하는거 아닌가.
게임을 시작하고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꼴찌만 했다면;
“커브돌 때 쉬프트도 같이 눌러주면 돼요.”
“아, 그런 거예요? 쉽네.”
글쎄다.
과연 쉬울까.
첫판을 돌때부터
드리프트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도
드리프트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데.
설명 한번 듣는 걸로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아 뭐예요 재석씨!”
“네? 무슨...”
갑자기
채연이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며
벌컥 짜증을 낸다.
“가르쳐주기가 어디 있어요. 나는 혼자 알아낸 건데.”
“아...아니...전 그냥...”
당황하며 귀염녀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하니
그녀는 입가에 영문모를 미소를 머금은 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조용히 게임준비상태에 들어간다.
“아씨, 이제 가르쳐주지 마요.”
“아...네...네.”
“흥, 벌써 다 들었어.”
이게 뭐하는 짓들인가.
애기들 게임이라고 비웃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고작 게임 따위에
이토록 열을 올릴 줄이야.
그것도
늘상 붙어 다니는 친한 사이들끼리
경쟁심에 불타 싸우고 있는 꼴이라니.
그나저나
이제 가르쳐주지 말라는 것은
나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일이다.
귀염녀는 벌써 다 들었다며
의기양양해 하고는 있지만
한바퀴만 돌아보면
그것만으로는 택도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다.
다시 물어보기 전에 어서 자리를 피하자.
...고 잠깐 생각해 보았으나
과연 그녀가 얼마나 해낼 수 있을 지 궁금하여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자녀를 독립시키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출발신호가 울리자
세 마리의 귀염둥이는 일제히 뛰쳐나간다.
어려운 트랙이 아니다보니
처음부터 드리프트를 할 일은 별로 없다.
미세한 차이이기는 하나
귀염녀는 당당히 1위를 달리고 있다.
그 뒤를 볼륨녀와 채연이 차례로 따라간다.
이제 겨우 출발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귀염녀는 상당히 의기양양하다.
물론 내 눈에는
물파리를 소지한 채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는
귀염둥이채연도 보인다.
오늘 처음 시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채연의 코너링은 상당히 뛰어나다.
확실히 게임이해도가 다르다.
늦은 스타트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귀염둥이혜수를 앞지르고
2위로 달려나간다.
귀염둥이채연이 노련한 코너링으로
2위를 확정하는 순간
조용히 컨트롤키를 누른다.
“왜엥-”
소름끼치는 파리소리가 퍼져나오고
귀염둥이수정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꼴찌 자리로;
물파리에 맞고 잠시 움찔하는 사이
다른 두 귀염둥이가 앞질러 나가자
귀염녀는 무언가 울컥
하는 것 같았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다시 그녀들의 뒤를 따라간다.
어차피 뒤에 있을수록
유리한 아이템이 많이 나올 테니
벌써부터 약올라 하는 것은 이르다.
한 바퀴를 돌 때까지
귀염녀는 두 개의 물폭탄을 습득했으나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이밍을 맞춰서 던져야 하는데도
먹는 족족 바로 던져버리니
애써 피해가지 않더라도
맞아줄 이유는 없다.
이윽고
문제의 직각코스가 앞에 보인다.
끼익-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나름대로 여유있게 드리프트를 구사한다.
볼륨녀 또한 살짝만 쉬프트를 눌러주며
유유히 코스를 통과한다.
그 뒤를 바싹 쫓고 있는 귀염둥이수정.
쉬프트를 누르고
누구보다도 요란하게
끼이이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그녀는 이내
역주행을 시작한다;
“어...어...이거 뭐야! 이거 왜 거꾸로 가요?!”
“다시...다시 도세요. 너무 오래 돌았어요;”
다시 한 번 끼이이이익-
아 아니;
처음 돌았던 방향으로 돌아야지.
왜 이번엔 반대방향으로...;
그리고는 물 속으로 첨벙-
곤두박질친다.
귀염둥이채연은 싱긋
미소를 띤다.
역시나...
예상대로 됐구나.
자 이제
빨리 이 자리를 피하자.
또 나한테 뭐라 그러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뒤에서 그녀들의 레이스를 잠깐 지켜보다
다시 카운터로 돌아온다.
혹시나 그녀가 나를 원망할까
두려운 것도 있었지만
마침 계산을 하러 온 손님도 있었다.
손님이 나간 자리를 치워놓고
그녀들이 있는 곳을 힐끔 보니
역시나
그녀는 여전히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계속 시무룩한 표정이다.
뭐 이제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니
그냥 카운터에 앉아 티비를 켠다.
그 다음은 스스로 해결할 문제.
더 가르쳐주면 채연에게 욕을 먹을 뿐더러
내가 더 가르쳐준다고 해서
귀염녀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
어느 새 손님들은 하나 둘 빠져나가
가게 안에 있는 사람은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을 정도.
“또로롱.”
또 한번 쪽지가 온다.
이번에는 뭘까?
[부웅 어떻게 해요?]
나 이거 참;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니...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녀들에게로 간다.
새벽 세 시를 훨씬 넘어섰으니
참 오래도 하고 있다.
그렇게 재미있나?
“부웅- 하는거 어떻게 해요?”
“부웅- 이 뭐예요?
“부웅- 하면서 빨리 가는거 있잖아요.”
“빨리...가는거요?”
부스터를 말하는 건가?
아무리 처음 한다고는 하지만
참 이름 한번 귀엽게도 짓는구나;
“부스터 말하는 거예요? 그거 아이템 먹어야 된다고 아까...”
“근데 언니는 그냥도 한단 말이에요.”
무슨 소리야.
아이템도 없이 어떻게 부스터를 쓰냐.
혹시 채연이 몰래 스피드방으로 바꿨나.
“봐봐요. 언니 하는거.”
다시 한번 출발선에 선다.
역시나 아이템방이 맞다.
그런데 아이템없이 부스터를 쓴다는 것은?
출발 신호가 울리자
귀염둥이채연은 혼자서만 부웅-
하며 다른 귀염둥이들을 앞서 나간다.
출발부스터 말하는 거구나.
“저거 봐요! 왜 언니는 그냥도 돼요?”
“아 저건 출발할 때...”
“가르쳐주지 마요!”
채연이 다시 한 번 소리를 빽 지른다.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느 한쪽도 편들어 주기가 뭐하다.
특히나 우유부단한 내 성격으로는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빨리 말해줘요. 저거 뭐예요?”
“아...그러니까 그게...”
“말하지 말라니까요!”
“...네...”
나는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인가.
가르쳐줬다가는 채연에게
그렇다고 입을 다물자니 귀염녀에게
어쨌거나 나는 원망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을 받은
어린이의 입장과 똑같은 심정이다.
“내가 어제 오렌지주스 사줬잖아요. 말하지 마요.”
“네...”
어린이들은
사탕을 들이대며 물어보는 쪽을 선택한다.
결국 내가 입을 다문 채로
게임은 종료되고
아니나다를까 이번에도 꼴찌를 한 귀염녀는
잔뜩 골이 나 있다.
“나 그만할래.”
역시나 삐졌군.
새침한 표정으로 방을 나와
게임을 종료시켜 버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몸에 오한이 든다.
특별히 내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가르쳐주지 않은 책임은 있는 것이므로.
“야 왜그래? 좀 더 하자.”
“됐어. 재미없어.”
재미없을 만도 하지.
몇 시간째 꼴찌만 하는데
재미있을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응? 재석씨도 같이 해요.”
“아...네?”
“셋이서만 하니까 재미없잖아요. 넷이 같이 해요.”
이 순간,
사장이 올 거라고 말하고 가버린
경림이 상당히 원망스럽다.
시간상 오지 않을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재수없게 걸리기라도 하면
애써 잡은 직장을 그만둬야 할 터이니
정중하게 거절하는 수밖에 없다.
“팀플로 할까요, 개인전으로 할까요?”
......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이 매력적인 여인네들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팀플 해요. 재석씨가 수정이랑 같은 편 해요.”
나도 비록 게임을 한 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늘 처음 하는 사람들에게 질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는 다시 카운터 쪽으로 와서
카운터에서 가까운 컴퓨터 한 대를 켜고
곧바로 카트라이더에 접속한다.
그래도 알바생의 입장이므로
카운터를 비워둔 채
그녀들과 나란히 앉아서 게임을 하기는 좀 뭐하다.
방을 찾아 들어가 게임시작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난데없이 귀염둥이수정이 방에서 나가 버린다.
뭐야.
왜 나가는 거야.
고개를 들어 그녀들 쪽을 보니
귀염녀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도 없다.
어느샌가 내 옆자리로 온 귀염녀는
조용히 컴퓨터를 켜고 있다.
“자리 옮겨 주세요.”
“네.”
꼭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지인가.
자리까지 옮길 줄이야;
이윽고
처절한 레이스가 시작된다.
귀염둥이채연은 예상대로 앞서나가고
나는 일부러 느긋하게 출발한다.
어차피 2:2의 아이템전이니
먼저 출발한다고 해서 유리하지는 않다.
이건 아이템 싸움이다.
꼴찌로 출발한 나는
유리한 아이템을 하나하나 모아가며
한 명씩 제쳐나가기 시작한다.
물폭탄도 던지는 족족 맞는다.
애초에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다.
마지막 바퀴를 반 정도 남겨두고
나는 여유롭게 1등을 달린다.
귀염둥이채연과 귀염둥이혜수는
이미 내가 처치해두었기 때문에
귀염둥이수정은 2위로 따라오고 있다.
이제 결승점만 통과하면 되는데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별안간 머리 위로 물폭탄이 떨어진다.
“잡았다!”
신이 나서 소리치던 귀염둥이수정은
이내 물파리에 잡힌다.
그 사이에 귀염둥이채연은 유유히 결승점을 통과한다.
“아이씨, 이게 뭐야.”
“......”
“뭐예요? 되게 못하잖아.”
......
이게 다 누구 탓인데.
어떻게 자기 앞에 달리는 사람이
같은 편인지도 모르냐.
“...빨간색...한테만 던져요.”
“네? 뭐라구요?”
“지금 우리는 파란색팀이잖아요. 아이템은 빨간색한테만 쓰세요.”
“아, 그런 거예요? 몰랐네.”
수정은 씨익 웃으며
다시 한번 게임을 준비한다.
그 웃는 모습이 웬지 불안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만행을 저지를지...
“이제 알겠어요. 이번에는 꼭 이겨...”
“드르륵-”
별안간
수정의 핸드폰이 요동을 친다.
표정이 굳어지면서 조용히 메세지를 확인한다.
이내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달아오른다.
“아...저...전 이제...그만 할게요.”
“......”
그녀 차례인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서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간다.
게임을 계속 할 것인지를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
문을 열고 나서는 그녀의 뒤로
형님들이 들어오고 있으므로.
또 다시
정신없는 서비스가 계속된다.
이미 두둑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형님들은 끊임없이 먹을 것을 주문하신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
형님들이 오시는 순간부터
피씨방에 그 외의 다른 손님은 없다.
다섯시 반이 되어서야 일어나는 형님들 사이로
약속이라도 한 것일까,
수정이 다시 들어오고 있다.
같이 게임을 할 때와는 현저히 다른
몹시도 굳어진 표정으로 들어선다.
조용히 채연의 옆으로 가서 앉은 수정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다른 두 여자는
수정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잠깐 멍하니 있던 그녀는
슬며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
수정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벌써 여섯 시가 넘었으니
나도 청소를 해야 하건만.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여자화장실로 향한다.
출근하자마자 미리 청소도구를 챙겨
남자화장실에 가져다 두었더라면.
살며시 여자화장실 문을 열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들어선다.
두 칸 중 한 칸은 문이 닫혀진 채이다.
청소도구가 있는 쪽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려는데
화장실 안쪽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언니...”
“......”
다른 손님들이 전혀 없었으니
당연히 일행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을까.
생각해보면
거기서 변명을 하고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언니...나...이제 그만할래...”
나지막히 새어나오는 차분한 목소리에
흐느낌이 슬쩍 배어있음이 느껴진다.
출처 : 웃대
첫댓글 행복한거지님이 올리신글 넘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 마지막에 언니..나..이제 그만할래.. 이대목에서 갑자기 맘이 찡해졌다는 ㅠ.ㅠ.. 다음글 기대할게요~~ 휴~ 요즘 이글읽는재미가 솔솔~~
감사합니다...ㅎㅎ
결말이 궁금하네요...작가가 어떤 식으로 결말으 낼지....
이제 반 읽으셨는데..벌써 결말을..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