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는 시인이자 신문기자였다. 동국대 불교학과 출신인 그는 연합신문, 서울신문 기자, 대한일보 정치부장을 거쳐 작가 이병주의 소개로 국제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20여년 동안 언론계에서 뼈가 굵었다. 1981년부터 부산산업대, 동국대 교수 등을 지냈으며,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2003년 초봄 서울 방학동 자택 거실에서./문학세계사 제공
정진규 시인은 “이형기 시인은 술 자시고 흥이 나면 ‘꽃 잡고 길을 물어~’라는 유행가 대목을 혼신의 표정으로 처절하게 불렀다”며 “워낙 조용한 성품이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지상주의·탐미주의의 심봉자일 정도로 시나 예술에 관한 한 열정적이고 철저했다”고 회고했다.
시집 ‘적막강산’ ‘그해 겨울의 눈’ ‘절벽’, 평론집 ‘시와 언어’ ‘현대시 창작교실’ 등이 있다. 한국시협상, 윤동주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조은숙씨와 딸 여경씨, 사위 김태윤씨가 있다. 장례식은 4일 오전 9시 서울 방학동성당에서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안암병원. (02)929-4099
이상은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가장 많이 낭송되는 '낙화'와 '이름 한번 불러보자 박재삼', '절벽', '허무의 빛깔'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시구 하나하나에 허무와 고독의 삶을 산 시인의 체취가 느껴지는듯 합니다.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시인의 첫 시집인 '적막강산'(모음출판사-1963년)에 수록)
<이름 한번 불러보자 박재삼>
(이 시는 동갑내기 시인으로 평생 절친한 친구였던 박재삼(1933~1997) 시인에 대한 추모시로 쓰여졌습니다. "이왕 갔으니/ 내 자리도 네 가까이 하나 봐다오"라고 노래하셨으니, 아마 두 분은 오랫만에 만나 술 한잔 기울이실지도 모르겠십니다.)
너는 나와 많이 다르게 살았다
너는 처음부터
전통의 결 고운 슬픔을 가다듬어
비단을 짰지만
나는 비틀비틀 갈지자걸음
마냥 어지럽고 위태위태하다
그러나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보냐고
이심전심 대수롭지 않게 지나다가
갑자기 네가 훌쩍 이승을 떠났고나
순서도 뭣도 깡그리 무시하고
그렇게 함부로
멋대로 가기냐 해봐도 소용없는 곳으로
실상은 내가 먼저 쓰러져 누웠지
문병 온 너를 속으로 부러워하면서
나는 중국으로 침 맞으러 떠났다
그새를 못 참고
더구나 내게는 기별도 없이
가버린 너
순서부터가 틀리지 않느냐
평생 시만을 써온 너의 그 계산법은
나도 시를 쓰지만 모르겠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던 시
그것이 이제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황금빛 종소리
또는 바람의 장미꽃이 되어
너의 무덤 위에 찬란하고나
이름 한번 불러보자
아아 박재삼!
이왕 갔으니
내 자리도 네 가까이 하나 봐다오
<절벽>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허무의 빛깔>
여기는 인적 없는 바닷가
수많은 조개껍질 흩어져 있다
주워 봐라 그 중의 오래된 하나를
파도가 일어서고 부서져 내리고
거기 햇빛과 또 달빛
그리고 어둠의 속살까지 속속들이 비쳐들어
십억년 또는 이십억년 까마득한 시간이 쌓인다
하필이면 조개껍질에
까닭을 알 수 없이 아로새겨진
오묘한 빛깔!
반투명의 흰 바탕에
엷은 분홍무늬 가늘게 곁들여져
파르스럼 떠올라 있다
십억년 또는 이십억년
덧없는 시간의 되풀이가 아무 뜻 없이
아름답게 녹아들어 하나된 그것은
없음이 만들어낸 없음의 빛깔
그래 그렇다 허무의 빛깔이다
(이상 시집 '절벽'(문학세계사-1998년)에 수록. 시인의 마지막 시집입니다)
이형기 시인이 생전에 쓴 마지막 산문을 구했습니다. 이달 중순 출간되는 시전문 문예지 ‘시인세계’(발행인 김종해) 봄호에 실리는 ‘시가 있는 이 한 컷’이란 코너에 쓴 글입니다. 빛바랜 흑백사진을 놓고 옛추억을 되살리는 코너죠. 시인은 먼저 간 문우들을 한 명씩 호명하는데, 무엇이 급했는지 잡지가 나오기도 전 자신도 그 친구들 곁으로 가셨네요.
만일 죽음이 없다면 모든 생명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목)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인지 정확하게는 짚어낼 수가 없다. 다만 막연하게 짐작하건대 60년 대 후반의 어느 시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리고 찍힌 사람들이 왜 모였는지도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문인협회에서 주최한 시 관계의 어떤 심사위원회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시 문인협회는 광화문 현 세종문화회관 뒤쪽의 예총회관 건물 안의 한 사무실에 들어 있었다.
오른쪽에서부터 보이는 시인의 이름을 들어보면 문덕수, 김현승, 김수영, 박목월, 서정주, 그 리고 뒤통수만 보이는 나 이형기 등이다. 뒤쪽에 보이는 두서너 사람은 그때 취재차 나온 신문기자가 아니었나 싶다.
이 여섯 사람 중에서 문덕수 시인과 나만 빼놓고 다른 네 분은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아, 인생이여!’라는 감회가 가슴에 사무친다.
죽음에는 물론 나이 순서가 없다고 한다. 그 말 그대로 이중에서 제일 먼저 세상을 버린 분은 젊은 김수영 선생이다. 그리고 다음이 김현승 선생, 또 다음이 박목월 선생, 제일 늦게 가신 분이 연세가 제일 높은 서정주 선생이다. 김수영 선생의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그리고 장례식은 예총회관 앞 광장에서 치러졌다. 물론 나도 그 장례식에 참석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이 모임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문단의 쫄자에 불과했던 나였으니 남의 말을 듣기만 할 뿐 젠체하고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진은 시간을 초월한다. 40년이 다 되어 가는 이 사진은 그래서 40년 전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진에 찍혀 있는 인물들도 또한 그렇다. 지금도 살아 있는 문덕수 시인과 나는 별도지만 다른 분은 모두 나이 먹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죽는 그 순간부터 영원히 늙지도 않고 따라서 또 죽지도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일종의 죽음 예찬론이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과는 성격이 다른 의견도 있다. ‘곤충기’를 쓴 파브르의 의견이 그것이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아니 모든 생명체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파브르는 묻는다. 그것은 이 세상이 온통 죽음으로 뒤덮이지 않겠느냐는 물음이다. 한 번 태어나면 아무도 죽지않고 살기만 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때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쓰레기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한 쓰레기를 깨끗이 청소해 주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니까 죽음은 위대한 자연의 청소부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위대한 죽음에 대해 우리들 인간은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파브르의 가르침이다.
이 사진에 찍혀 있는 이미 세상을 버린 네 분도 그러한 파브르의 가르침을 훌륭히 실천에 옮긴 분들이다. 그러나 여기서만 그치지 않는다. 그분들은 또 훌륭한 시작품을 후세에 남겨 그것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는 분들이다. 실은 이 사진을 찾느라고 오랫만에 이분들을 만났다. 만난 김에 나도 물어본다.
“선생님들에게 있어서 시는 무엇입니까?”
~♬
Sylvie Vartan의 La Maritza
커버스토리 / 이형기
거북 하나가 파란 별빛을 받으며
허공 속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글·장경기
소금 개펄을 기어가는 거북
─ 거북은 시인 이형기를 상징화 한 것이다.
개펄 위를 한 걸음씩 힘겹게 내딛는 거북이었다.
작열하는 땡빛, 쩍쩍 갈라진 개펄의 등판에는 소금꽃이 피었다. 검붉게 피멍이 든 발은 갈가리 찢기고 갈라졌다. 타들어가는 갈증으로 고개를 쳐들면 까맣게 탄 하늘에 이글거리는 태양. 물도 불도 한줌 먼지로 풀썩거렸다.1)
지평선 저편은 말라버린 바다. 물 한 모금 없는 그곳에서는 절망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거북은 그 지평선을 향해서 어구적 어구적 발을 옮겨 놓았다. 그 누구도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처녀지에 한 발 한 발 자신의 발자국을 새기고 있다는 기이한 매력 때문인가? 그렇게 얼마나 긴 세월을 왔던가.
갑자기 파리 떼가 잉잉거리며 얼굴에 달라 붙기 시작했다. 고개를 흔들며, 소금기에 절은 눈꺼풀을 힘겹게 올리자, 웬 시신이 한 구 보였다. 벌판을 침대 삼아 드러누운 채 썩어가고 있었다. 흉악한 구더기 떼가 시체로부터, 걸쭉한 액체모양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들레르, 보들레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며, 그 썩어 가는 시신, 구더기들을 그윽이 경이로운 눈빛으로 들여다 보고 있는 이는 분명 보들레르였다. 죽음 속에서 탄생을 보고, 탄생 속에서 죽음을 보았던 인간. 모든 이들이 정수의 세계만을 갈 때, 마이너스의 세계로 거슬러 가며 음각화를 새겼다던 그의 깊고 음울한 눈빛이, 자신을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서는 셰시토프, 셰시토프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만인 근성을 버려라. 천재는 천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천재는 천재의 천적일 뿐이다.’
그의 뒤로는 고바야시 히데오, 에밀 시오랑이 가파른 소금 탑처럼 버티고 있었다.
‘저들은 어찌하여, 저 소금기뿐인 사막지대에 갈증의 화신이 되어, 나를 알 수 없는 굶주림으로 타들어가게 하는가. 바람이 제 뼈를 갈아서 우주 공간에 흩뿌린 먼지는 왜 하필 별이 되어 밤하늘을 채우고 있는가.’
슬픔이여, 애수여, 신기루여, 감미롭던 언어의 숲이여!
거북은 그들 옆을 지나 계속해서 지평선 쪽으로 나아갔다. 부르튼 살갗이 찢겨지는 고통에 몸을 비틀면서도, 멈추지는 않았다. 무거워지는 몸, 겨우 한 걸음 내딛는 발, 몽롱하게 가물거리는 눈,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죽음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무너지게 하리라.
길게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문득, 뒤를 돌아보자, 역시 등이 쩍쩍 갈라진 벌판만이 땡빛에 타들어 가며 마른 소금 먼지를 날렸다. 그 흰 소금기 위에 난 외줄기 발자국들은 비틀비틀 이어지다가는, 무너져 내린 거친 벼랑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이젠 돌아갈 수도 없으리라.’
거북은 자신이 굳이 자초하여 빠져 나왔던 그 고향 숲을 신기루처럼 떠올렸다. 무성한 수풀들이 드리워 주는 그늘과, 촉촉한 이끼의 감촉이 그리움으로 확 끼쳐 왔다. 청록파, 서정주, 이용악의 숲이 보이기도 했다. 부드러움, 섬세함, 애잔함이 깃들어 있는 선배들의 손길은 꽤나 감미로웠었다. 그때가 17살 때였던가. 《문예》지를 통해서, 유난히 빨리 그 詩魂들의 숲에 깃들일 수 있었다.
그들의 섬세한 배려 속에서 자신만의 숲을 일찌감치 가꾸며 그 언어의 향기에 스스로 도취되기도 했었다.2)
그때만해도 시인들은 아름다운 정원사들이라고 생각했다. 일제시대, 6.25 등의 거친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움, 애잔함, 섬세함, 슬픔 같은 것들을 따 모을 수 있는 …….
‘그러나, 그 꽃들은 모두 그게 그것이 아니었던가.
나의 시가 빚어낸 꽃 역시도……. 현실의 무게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청록파>, <귀촉도>. 이용악의 <오랑캐꽃> 등이 갖고 있는 슬픔, 그리움에서 나는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아무리 잘 써야 내가 교본으로 삼았던 청록파 3인, 서정주, 이용악의 울타리에 속에 있는 무리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흐흐흐, 거북은 아찔한 현기증 속에서도, 땡빛을 똑바로 쳐다보며, 시니컬한 웃음을 흘길 수 있었다. 셰시토프, 고바야시, 에밀 시오랑, 보들레르 등의 소금 탑들이 아득히 번득였다.
“모든 것은 철저히 버려졌다. 그 탐스런 숲을 버리고 나온 후로 나는 광야의 미아가 되었다. 그러나 보라. 나는 끝 없는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계속하여 절망을 꿈 꿀 뿐이다. 꿈은 실현되지 않기에 꿈이다.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절망을 확인할 때만이 꿈은 꿈으로써 참답게 존재한다.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한다.”
파란 인광, 가뭄을 관장하는 귀신의 꿈이여
가도 가도, 지평선은 언제나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하얗게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함몰시키는 소실점, 거기에서 잔인한 절망은 흐느적이며, 유혹하듯 아득히 아지랑이를 피워내고 있었다. 지나온 발자국들 틈새에는 시집 《적막강산》 , 《돌배개의 시》, 한국문학가 협회상, 문교부 문예상 등이 고꾸라져 있었다. 그 자신의 허물들이었다. 서릿발처럼 돋아난 소금의 결정들은 여전히, 살갗을 후벼왔다. 그 시린 아픔은 오히려, 싸늘한 전율과 희열로 엄습해 왔다.
개펄의 쩍쩍 갈라진 틈새에서 파란 인광 하나가 번득이는 것을 발견했을 때도 그런 순간이었으리라. 쥐약 먹은 쥐를 먹은 것인가? 개는 파란 별빛을 받으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는 그 파란 인광!
“기억하라. 반드시 갚고야 말리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직 증오만으로 타들어가는 파란 백금 불꽃.”
시퍼런 눈알에 그어지는 붉은 실핏줄, 파란 별빛이 내리는 들판에는 투명한 소금 꽃들이 일제히 돋아나며 번득이고 있었다.
독毒!
그 생명을 앗아가는 칼날의 황홀한 전율. 투명한 극치.
그는 자신의 안, 혈관 속으로 그 독 기운이 뻗쳐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시인이란 자각을 갖게 되었다. 오! 가뭄을 관장하는 귀신의 꿈이여. 내 꿈꾸는 旱魃이여.’
그의 눈은 파란 인광으로 번득였다.
그의 안에서는, 칼날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때가 1975년, 고향의 숲을 떠나 미아로 광야를 방황한지 20여년이 흐른 뒤였다.
마침내 지평선에 도달한 것인가!
홀연히 세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홀연히 세상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가슴에 돋은 칼 한 자루 품고, 자객으로, 테러리스트로……3)
지평선 저편, 절망의 지대는 바로, 그가 딛고 있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 즈음 세상은 딱딱한 각질처럼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굳은 채 썩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사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생명이 없는 것들로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4)
‘모든 어제를 쓰레기의 산더미로 만들면서 내일을 향해서만 달리다가 바로 그 내일이 되면 제 자신이 또한 쓰레기 속에 묻혀 버리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진보 발전이란 종교의 실상이다.’
피라미드처럼 날로 솟아오르는 쓰레기 더미들, 쇠로 된 거대한 무덤들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공룡으로 변신하여, 고층 빌딩 사이를 어슬렁거렸다.5)
‘문명의 역사란 단 하나의 진실, 곧, 인간이란 존재가 無임을 증명하기 위한 가파른 질주였던가? 이제 다 이룰 때가 된 것인가?’
절망의 지대야말로 그의 진정한 무대. 시는 복수의 비수
“세계는 낭떠러지에 있다. 아니 인간 생활 자체가 낭떠러지다.”
그는 회생 불가능한 시신이 다 되어버린 문명에 충격기를 들이대고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보들레르, 보들레르, 썩은 시체를 그윽이 바라보고 있는 보들레르의 눈빛을 그 순간 떠올린 것은 우연이었던가?6)
오늘 이 과수원에도
만발한 사과 꽃들 포플리스로 치장하고 나서서
소싯적 그때처럼 홀려대는 그 소리 기다리고 있건만
벌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다.
아, 활짝 열어만 놓고
아무것도 받아들일 게 없는 그녀들의 자궁
무참한 부끄러움
꽃들이 모두 石女가 되어버린 마을
─ <석녀의 마을>
“지구, 우주의 질서, 나아가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해서 마침내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일종의 공포, 전율을 더하고 싶었다.”
그는 견고하게 굳어져버린, 움직일 줄 모르는, 탄탄하게 짜여진 죽음의 제국 속으로 스며든 테러리스트였다.7)
“현실은 뜯어 고쳐야 한다. 그런 의욕에 있어서는 시인과 혁명가가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혁명가는 제가 뜯어고친 새로운 현실을 지키려고 삼엄한 경비를 배치한다. 그러나 시인은 뜯어고친 그 새로운 현실도 또 뜯어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시인과 혁명가가 동지가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끊임없이 변형하며 변형을 추구해 가는 것이 존재의 본질인 때문이리라.
그러나, 인간은 정착하려하고, 고이려한다. 그리고 썩어간다. 부식되어간다. 말들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채, 다시 틀로 고정되고 만다.
“그러한 세계의 부조리 속에 내가 살고 있다. 누가 나를 이 세계에 보냈는지 알 수 없다.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우연일 뿐이다…… 부조리한 세계 속에 부조리하게 태어난 인간의 이 겹치는 고난-여기까지 생각하면 나의 부조리 의식은 절정에 달한다. 이런 부조리를 나는 도저히 그냥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고 또 치욕적인 일이다.”
그의 시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복수의 비수로 번득이기 시작했다. 절망의 지대야말로 그의 진정한 무대였던 것이다.
처절한 증오로 번득이는 루시의 파란 인광. 의미로 가득 포장되어 있는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는 엑스레이8) 복면을 한 자객의 눈초리로 번득이는 첨예한 달. 복면의 삼손, 도광증적인 도착증에 사로잡혀 칼을 간다. 바늘, 毒!
다만 증오
그 일점을 향해서만 타는
파란 백금 불꽃
일순 루시는 내 혈관을 뚫고 내닫는다.
번뜩이는 칼날의
그 번뜩임처럼 황홀한 전율
─ <루시의 죽음>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복수에는, 기존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절망이 욕망의 에너지이다. 절망이라는 에너지가 바닥이 날 때, 부조리의 세계가 희망이라는 외양을 걸치고 나타나 복수보다 타협의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황량한 사격장에서 그는 언제나 알몸으로 서 있다.
더 이상은 보여줄 게 없는 전부, 그의 맨가슴
여기다 여기 동그랗게 표를 해놓은 심장은 바로 여기 있다.
…중략…
깨끗한 명중, 온갖 고통이 선혈로 꽃피는 그 완벽한 허무의 순간
─ <과 녁>
그 순간은 스스로를 연소시키고 자아를 파괴함으로써 얻어지는 투명한 파멸감과 격정적 전율미였다.
허무. 다시 소금 벌판의 한 가운데를 기어가는 거북
그렇게, <꿈꾸는 旱魃>을 지나 80년대, <풍선심장>, <보물섬의 地圖> 속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는 살얼음진 문명의 등판을 거슬러, 저 마이너스의 지대 속으로 힘겨운 걸음을 지속했다. 치열했던 광기의 살해 충동 등은 어느덧 저 밑으로 침전되었다. 그가 파악한 세계의 허망감과 절망감은 곧 자신의 자화상이요, 이미 그 자신이 절망 그 자체가 되어버린 때문이리라.
그는 저만치 네온사인들이 검은 매연 속에서 흔들리듯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에서 싸락눈이 연신 불꽃을 향해서 꽂히며 자결하고 있었다.
불꽃 속의 싸락눈! 그 끝 없는 허무와 권태의 행위를… 모든 것은 아름다운 소멸의 연속일 뿐이었다.9)
결국 이것이었던가!
존재한다는 것은?
제 스스로가 무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도 가쁘게 질주해왔던 것인가? 결국 인생은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화려한 낭비였던가?
그는 가슴에 돋은 칼을, 흰 달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나……
거북 하나가 파란 별빛을 받으며 허공 속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항복한 자는
두 손을 번쩍 위로 치켜든다.
그리하여 뜻밖에도
하늘을 저 혼자 차지해버린다.
─ <항복에 대하여>
그는 어느덧 자신이 광막한 우주 속을 홀로 떠돌고 있음을 발견했다.
혼자만의 고독한 더듬이로 블랙홀을 찾아가는 자유가 그의 몫인 것이다.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중략…제목만 무슨 주문처럼 살아 있는 옛날 영화 <백색의 공포>
─ <자화상>
완전한 자유. 어떤 궤적으로부터도 해방되는 비상. 무한 속에 던져진 미아의 방황. 그 마지막 당도한 세계는 다시 허무였다.
진짜 모비딕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이렇게 만사를 허옇게 다 지워버리는, 그리하여 공백으로 완성시키는 끔찍한 정채를 드러낸다.
─ <모비딕>
허무의 세계에서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이란 절망을 확인하는 일 뿐이다.10)
“존재는 모두 티끌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슬픔을 값진 보석처럼 노래하는 인간도 있다. 그는 시인이다.
시인은 영구 혁명주의자다. 영구 혁명주의자는 물론 제가 이룩한 혁명을 뒤엎고 또 새로운 혁명을 꿈꾼다. 그렇게 제 자신을 끊임없이 뒤엎기 위한 그 혁명의 다른 이름은 허무다. 시나 영구 혁명이나 허무나, 아, 모두가 한통속이구나.”
지금도 거북 하나가 파란 별빛을 받으며, 우주의 허공 속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이선생의 근황은?
작년부터 이어진 긴 투병인 셈이다. 보다 첨예한 경지로 들어서는 계단이리라.
“세계 전환을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전환기에 자칫 오기 쉬운 느슨함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제까지 견지해 왔던, 긴장을 팽팽하게 지속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어떤 고비를 겪어도, ‘다 깨달았느니라.’ 하는 식으로는 못하겠다. 나는 깨닫지 못한 자로서, 병들어 아픔을 겪으면서 체험하는 세계를, 긴장감을 가지고 표현해 갈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를 열어 갈 것인가는 탐색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첫댓글 이 자료는 제게도 지난날을 뒤돌아볼 시간을 갖게 해 줍니다. 이형기 시인의 시와 함께 행복했던 시간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