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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지명의 유래................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위한 御營廳의 北屯이
도성 북쪽에 설치되어 있던 데서 유래된 동명.
성북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 동부 숭신방에 속.
1894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 東署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이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일제는 한성부를 경기도에 예속시켜
5부8면제 실시.,경성부 숭신면 성북동.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편 축소시키면서
숭신방 ‘숭’ 인창방 ‘인’자를 따서 숭인면.
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가 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에 재편입되어 성북정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
區制度가 실시될 때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
미군정법령 제163호에 의해서
'한국식 동명' 성북동이 되었고,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로
동대문구에서 분리하여 성북구를 설치.
이때 성북동은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1936년 4월 1일부터 경성부를 확장하면서
1961년 6월 12일 토지구획정리사업환지 완료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274호에 의해
성북천에 놓인 雲水橋를 중심으로 도로 남동쪽은
성북동1가, 도로 서쪽은 성북동2가로 나누어졌는데,
그후 성북동2가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이뤄지지 않아
1975년 10월 1일 서울시조례 제979호로 성북동으로 환원.
.....즐거운 성북동 골목길 걷기
서울성곽탐방 1 코스 : 북악산 코스.
성북동 골목길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표적인 빈민거주지로 자리잡았던 지역.
해방 직후에는 ‘성북동 비둘기’로 상징.
현대사 흔적이 깃든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간송미술관 등 미술관과 대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것도 이 지역의 특징이다.
'한성대입구역~ 성북동 골목길~
심우장~숙정문~창의문(4~5시간)
간송미술관이며 골목골목 숨은 찻집이며
밥집, 각 나라 대사들의 거처를 볼 수 있다.
서울성곽지도 동선을 짜서 걸으면 더 즐겁다.
지하철 4호선 삼선교(한성대입구)역에서 시작.
삼선교역 6번 출구에서 이어지는 성북동길 따라
성북초교 옆 골목으로 10분쯤 가면 심우장 가는 길.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 심우장 가는 길’
가파른 골목길(심우장길)이 숨찰 무렵 즈음에
만해가 말년(1933~1944)을 보낸 심우장(尋牛莊).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 선생이
1933년 지은 한옥으로 보기 드문 북향집.
남쪽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지은 북향집.
만해는 일부러 산비탈로 집 방향을 틀었던 것.
만해는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운명
그후로 그의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건너편에 자리잡게 되자
‘일제를 마주할 수 없다’며 심우장을 떠났다.
지금은 성북구가 인수,
만해의 글과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을 전시.
내부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승려
만해의 집필과 투쟁 흔적을 볼수 있다.
마당 너머 한 눈에 들어오는 성북동 전경
낮은 지붕이 마주칠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심우장 주변의 작은 집들은 서민 가옥이고,
멀리 성북동 산자락에는 재벌가가 몰려있다.
심우장 마당 향나무는
만해가 손수 심었단다.
심우장에서 한숨 돌린 후
좁은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성북동 비둘기공원'이 나온다.
196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맞으며
'도시빈민 안식처의 상징' 성북동비둘기 공원.
여기부터 북악산자락의 성곽 따라.,등산로 시작.
1968년 '김신조 사건'으로 인해 전면 통제된 이후
2007년 와룡공원~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 4.3km
구간 전면 개방(신분증을 지참해야 입산이 허가된다)
청와대 뒤편에 수도방위사령부 등이 위치
하절기(4월~10월) 오전 9시~오후3시 입산,
동절기(11월~3월) 오전 10시~오후 3시 허가
성곽 따라 오르면 북쪽으로 삼청각이 보인다.
요정 삼청각은 여야 고위급 인사회동은 물론이고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 막후협상이 이뤄진 장소.
2000년 서울시가 전통문화공연장으로 새로 단장.
공연장과 함께 한식당, 찻집, 놀이마당 등을 갖췄다.
삼청각 지나 30분쯤 산을 오르면 한성 북문인 숙정문.
숙정문은 ‘엄숙하게 다스린다’라는 뜻 이름.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 성곽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
굳게 닫아 두었기에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없다.
다만 가뭄 때는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 지역은 풍수지리학상으로
음기가 강한 곳이었다고 전해지므로
예나 지금이나 여인들이 많이 찾는 곳.
조선시대 구중궁궐 여인들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이곳에서 삼경 달밤에 음기 단련.
성곽길 따라 가다보면 1.21소나무가 나온다.
1968년 1월 21일 이른바 '김신조 사건' 장소다.
북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
총격전이 벌어졌던 곳인데 이때 이곳 소나무에는
15발의 총탄자국이 남아 그후 1.21 소나무라 불린다.
'김신조 루트'는 42년간 미공개
북악산 3산책로 개방 즈음 공개.
이곳은 숲속다리에서 2산책로 윗부분과 연결되는
총 640m 구간으로 오르막과 내리막이 4차례 반복
총 4km 김신조 루트는 2009년 3월 1산책로로 개방.
2산책로는 10월 개방, 3산책로가 열리며 완전 개방.
성곽길 촛대바위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
민족정기말살 일환으로 쇠말뚝을 박았던 곳
촛대바위에서는 주변의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 도심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북악산을 약 2시간쯤 넘으면 내리막길이 나온다.
그곳 따라 내려오다보면 서울의 북소문인 창의문.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라는 뜻말을 담고 있다.
지금 창의문에는 인조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현판
또한 성문의 월단(무지개 모양의 석문)
맨 위에 봉황 한쌍이 아름답게 새겨 있다.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새긴 것.
창의문 바깥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새겨 넣은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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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 성균관대학교 ~ 성북동'
곳곳에 맛집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중음식점 간판들이 입맛을 돋게 한다.
길상사 점심공양
성북동은 시진핑 등 각국 정상이
한국의 전통문화 체험을 위해 찾는
한국가구박물관, 성락원.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은
세계기록유산 지정
훈민정음 해례본 및.
고려청자, 신윤복 풍속도
등을 소장 전시해 관람 가능.
간송 전형필.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 러브스토리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깃든 길상사
독립운동가 시인 만해 한용운 북향집 심우장,
조지훈, 이태준, 박태원,
염상섭, 김광섭, 김용준,
김환기 등 문화예술인들이
교류, 창작활동을 펼친 성북동.
'문화자원의 보고(寶庫)’
또는 ‘지붕 없는 박물관’
성북동은 화제거리가
'무궁무진' 샘솟는 거리.
볼거리 먹거리도 많은 곳.
1960/70년대 국내 3대 요정.,대연각
백석 시인의 연인이었던.,기생 '자야'.
'대연각 1천억 재산'을 길상사에 기부.
"제발 제 시주를 받아주십시요. 스님!~."
"나는 그 시주를 받을 수 없읍니다." - 법정.
'무소유' 법정스님은 10년간 못받겠다며 사양.
'대연각 주인' 김영한 보살은 받아달라고.,간청.
그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길상사로 거듭난.,대연각.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한때, 장안 주지육림 산실이었던 대연각이
지금은 뭇 세인들 마음까지 닦는.,청정도량.
그녀가 운명하기 며칠 전, 기자와 일문 일답.
"왜 그 많은 재산을 길상사에 시주하셨나요?"
" 그 많은 재산도 백석 시인의 시 한줄만 못해."
'나 죽거든 유골은 화장해
흰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길상사 마당에 뿌려주세요.'
1999년 11월 13일 오후에
길상사 경내를 마지막으로 산책.
다음날 108 염주를 목에 건채.,운명
향년 83세 그해 12월 14일에
길상사 마당에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그녀의 유언대로 스님들에 의해 뿌려진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뭇 세인들을 더욱 더 감동하게 했다.
그녀의 육신은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녀의 영혼은 '맑고 깨끗하게' 살아있다.
'침묵의 방' 하루에 600여명 방문.
'시민선방' 하루 1천5백명 찾는다.
시민들도 찾고, 수녀들도 즐겨 명상.
생전에 백석 시인을 평생 그리워한 김영한 보살.
백석 생일 7월 1일에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1997년 2억원을 출연해 창작과 비평사에
'백석문학상'을 제정했고 같은 해 7000여평 대원각
대지와 건물 40여 동 부동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
김영한 보살은 현재 길상사 한쪽에
법명 길상화(吉祥華)로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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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밤낮을 지새워도
못다한 이야기거리들이
발걸음마다 가득한 동네.
최순우 옛집-선잠단지-길상사-
이종석 별장 - 심우장- 수연산방
성북동 총4㎞(3시간 남짓 소요거리)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
6번출구.
성북동 뒷골목 사이에 숨어있는
역사·문화 흔적을 찾아가는 코스.
혜곡 최순우, 만해 한용운, 상허 이태준 등
역사·문화 관련 선인 발자취를 느낄 수 있고
선잠단지, 길상사, 서울성곽, 이태준가옥 등.
역사, 종교, 건축양식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도보관광은 서울 주요관광 명소를
서울문화관광해설사 해설을 들으며
도보로 탐방하는 '관광 프로그램'이다.
도보관광은 인터넷과 모바일 웹
http://dobo.visitseoul.net 에서
예약을 통해 이용(이용료는 무료)
<최순우 옛집>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고 평생을
문화유산 조명에 바친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가옥이며 그의 대표저서 산실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등을 읽거나
구입할 수도 있다( 월요일, 일요일 휴관)
그의 사진 앨범, 유품
전시관을 볼 수 있는 곳.
<길상사>
'1960~80년대까지., 3대 요릿집'
대원각이 탈바꿈하여 사찰이 된 곳.
대원각을 기증한 길상화(본명 김영한).
월북시인 백석과의 러브스토리를 그린 수필
<내사랑 백석>의 저자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무소유> 법정스님이 오랜 기간 머물렀던 공간.
길상사 02-3672-5945
매월 셋째, 넷째 주말에는
'템플 스테이' 체험 프로그램.
<이종석 별장>
마포 젓갈장수에서 시작해
대부호가 된 상인 이종석이
1900년대에 지은 별장이다.
사랑채 비슷한 별채와 안채,
행랑채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대상인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곳.
새우젓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이
왕족의 별장을 매입한 것이라는 설.
우스갯소리처럼 내려오는 말로 성북동에는
‘하늘이 내린 부자’들이 모여 산다고 전한다.
그런 곳에 이종석이 집도 아닌 별장을 지었다.
이종석(1875~1952)은 조선말 마포나루 강상대고
그중에 한 사람으로 마포에서 배를 가장 많이 가졌고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모든 양곡의 유통에도 관여했다.
사재를 털어 현재 송파구 오금동 보인고등학교 전신
보인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조선 말, 한강변 강상대고(江商大賈) 영향력이 짐작간다.
강상대고(江商大賈)란, 한강 마포나루를 중심으로
지역의 부를 쌓고, 노래와 풍물을 통해 삶의 문화를
발전시킨 조선후기 경강상인(京江商人)을 일컫는 말.
.
문득 무더운 여름날에
성북동 별장을 찾았을.,
조선 말, 경강상인 이종석.
.
그당시 그는
성북동 별장에서
한양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해도인(海島人)을
'사대문 안' 양반들이
'섬사람' '뱃놈'이라고
없신 여기었던., 조선 말.
그는 한양 도성 내 속살을
성북동 별장에서 내려다보면서
그들을 향해 코웃음쳤을지 모를 일.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 전문가 아니었을까?'
...........
...........
.
간장이나 소금 만으로는 음식의 깊은 맛을 내기가 어렵다.
그럴 때 서울 사람들은 젓갈. 새우젓을 유난히 많이 사용한다.
특히나 서울은 새우젓을 이용한 요리 가짓수가 새우 수만큼 많다.
김장할 때도 새우젓을 주로 사용한다.
깍두기도 새우젓으로 간을 맞춰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호박볶음을 할 때도 새우젓.
생태를 찔 때도 새우젓을 살짝 얹고,
닭볶음탕도 새우젓으로 양념을 한다.
새우젓 웃더께 푹 끓인 것에
김칫국물 자박자박 부어 만든
칼칼한 찌개를 저녁상에 내는 것.
조선시대
서울 사람
음식 문화.
'새우젓이
이토록 사랑받던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서울음식문화에서 그 연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서울 음식은 짜지도 맵지도 않은 담백한 정도의 간.
또 모양을 작고 예쁘게 만들고 양념을 곱게 다져 쓴다.
규서총서 -"서울 음식은 맛깔스럽고,
알뜰하고, 어여쁜 솜씨”가 있다고 기록.
요리 연구가들이 꼽는 서울의 맛도
자극적이지 않고 달며, 뒷맛이 깔끔.
서울의 입맛에 안성맞춤이었던 새우젓.
서해 섬사람들을
마포로 불러들였던
조선시대 새우젓 도가는
오늘날 서울에서는 옛 추억.
마포종점에서부터 줄지어 있던
점포 가게들은 인근으로 흩어졌고,
마포 전차 종점에서 한강까지 걷던
옛길은 오늘날 자동차들이 내달린다.
강변북로가 굽은 새우등처럼 보이고,
한강 물비린내가 새우젓 도가 냄새 같다.
마포나루, 전철 종점, 그때 그시절 그풍경.
.........마포 새우젓장사 & 이종석..................
"마포 사람들은 맨밥만 먹어도 싱겨운 줄 모른다."
전국 소금배와 젓갈배가 마포나루로 모여들기 때문.
서해안에서 올라온 새우젓장사들로 종일 붐볐던 마포.
'마포 새우젓장사'로 부자가 된 사람이 급증하자
도성 바깥인데도 은행 지점이 두 곳이나 들어섰다.
젓갈과 소금상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마을이 염리동.
젓갈류 보관 옹기를 굽는 동네.,'독막, 동막' 용강동.
김장때 아현동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마포 새우젓 냄새.
전차 화물칸을 따로 만들어
당시 새우젓독을 날랐던 시장이
오늘날, 남대문시장, 동대문 시장.
마포나루에서 소금,젓갈을 대규모로 취급하던
상인들은 '마포염해여각'으로 불렀는데 여각은
부피가 큰 품목을 취급하기에 커다란 보관 시설과
우마차 등 운송수단을 갖춰어야 했기에 규모가 컸다.
................여각(旅閣)................
조선시대 각 연안의 포구에 자리잡고,
지방에서 오는 객상(客商)들을 위해 화물의
도매·위탁판매·보관·운송업 등과 금융업·여관업을
겸하던 상업기관. 특히 지방도시의 화물집산지 역할.
.......................................................................
그래서, 일반 객주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여각.
18세기 이후 경강상인(京江商人)의 전신이 이들.
.............경강상인(京江商人)..................
일반적으로 약칭해 강상(江商)이라고도 한다.
경강 연변에 전국 주요산물이 조운을 통해 집적.
15세기 초부터 많은 상인이 집결해 경제권역을 형성.
경강상인 활동무대였으며 그들의 주요 상행위는
'정부 세곡(稅穀), 양반층 소작료' 임운(賃運)이었다.
그러한 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
그 무렵에 운행 경강선(京江船) 수와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승정원일기'- 1702년(숙종 28)
200∼1,000 석까지 실을 수 있는
배가 300여 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
그들이 1년에 받는 임운(賃運)은 1만석 정도
그것은 서울 곡물 공급에 주요한 위치를 차지.
그러한 점들을 고려해 본다면 곡물 운반에 있어
경강 상인이 차지하고 있던 비중과 그들이 가진
자본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
한강을 이용한 운송과 상업은 조선 후기에
한양이 20만 인구가 넘는 도시로 발전하면서
이러한 발전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경강상인들.
정조 당시.,배다리
경강은 한강 가운데에서도
한성부 주관 광진(廣津)에서
양화진(楊花津)까지 한양 남부를
끼고 흐르는 용산·마포·뚝섬·두모포
등지가 경강상인 근거지로서 상업기지.
새우 젓은 반찬 뿐만 아니라
김치 담그는 조미료로도 인기.
1년 내내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음력 정월 그믐부터 4월 사이 잡은 새우로
담근 풋젓이 살이 연하고 희어서 인기였다.
그중 2월에 담근 것을 동백하젓이라고 했다.
5월의 오젓과 6월의 육젓, 7월 차젓도 별미였다.
8월에 담근 추젓은 잡새우들이 섞여 있어
모두 삭힌 뒤 김장 떄나 다음해 젓국에 썼다.
9~10월의 동백젓, 동짓달의 동젓,
눈처럼 흰 백하젓, 분홍빛 건댕이젓.
.
서울사람은 진한 멸치젓보다
담백한 새우젓을 더 좋아해서
무더위에 지친 여름에는 양념한
새우젓 만으로 입맛을 되찾기도 했다.
경강상인 황포돛대 7척까지 왕래.
농바위 부근., 밤섬의 맑은 모래밭.
아스라히 저녁 짓는 마포나루 연기.
마포 8경의 으뜸
'낙조 속의 돛단배'
'이종석 별장' 일관정
조선 말, 마포강 젓갈장사 대부호 이종석.
1900년 경에 지은 '성북동 별장'이라 한다.
이 가옥은 크게 안채와 행랑채로 만.,구성.
이종석 별장
조선시대 누마루는
양반 신분 만 건축 가능.
1900년 이때는 신분에 따른
건축양식의 제한이 철폐된 듯.
.
1960년 대림산업 이재준 회장 소유를 거쳐
1985년 덕수교회 매입 후, 수련원으로 사용.
........'이종석 별장' 일관정.......
조선 말 마포강 젓갈장사 이종석
1900년에 지은 별장이라고 전한다.
...............................................
조선시대.,혜화문.
성북동 '성북마을~심우장' 가는 길.
성북마을 성곽 아래
심우장으로 가는 길.
<심우장>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이 3·1운동 옥고를 치른 후
주위의 도움으로 마련한 곳이며 만해의
옥중기록, 유품, 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
동절기(12~3월) 휴관
전화 : 02-3675-3401~2
성북동 야경.
................성북동(城北洞)................
조선시대 어영청(御營廳)의 북둔(北屯)이
도성 북쪽에 설치되어 있던데서 유래되었다.
'도성 수비를 위한 성북동은 한성부 동부 숭신방.
1894년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東署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이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일제는 한성부를 격하시켜 경기도에
예속시키면서 5부8면제를 실시하여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이라 칭.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편 축소시키면서
종래 숭신방 ‘숭’자와 인창방 ‘인’자를 따서
숭인면으로 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에 재편입되어 성북정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
區制度가 실시될 때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
미군정법령 제163호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고칠 때 성북동이 되었고,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로
동대문구를 분리하여
성북구를 설치할 때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확장.
실시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1961년 6월 12일 환지가 완료.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274호에 의해 성북천에 놓인
운수교(雲水橋)를 중심으로
도로 남동쪽은 성북동1가,
도로 서쪽은 성북동2가
그후 성북동2가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979호로 다시
성북동으로 환원.
.....................
수연산방(壽硯山房)
우리나라 전통정원 - 성북동.,수연산방(壽硯山房)
.
.
.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248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6번 출구.
지선버스 1111, 2112번, 마을버스 성북03번 환승.
쌍다리 하차. 성북2동 주민센터 옆 골목(이태준길)
당신은 이상과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나요?
정오~오후 10시 30분(평일),
정오~오후10시(주말)
명절에는 휴무.
서울 성북구 성북동., 전통 찻집
원래, 상허 이태준의 고택이었다.
황진이, 왕자호동 등을 집필한.,'이태준'의 고택.
1999년 생외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 수연산방(壽硯山房)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수연산방(壽硯山房)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이태준은 이곳 당호를 '수연산방'이라 명명.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피는 정원>,
<황진이>, <왕자 호동> 등 문학작품.,집필.
그의 수필'무서록'에 그가 이곳에
집 지은 과정과 내력이 쓰여 있다.
이 집은 건물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건넌방, 오른쪽에 안방을 두어
T자형 건물의 안방 앞에는 누마루를 두고
그 뒤편에는 부엌과 화장실을 두어,
공간 기능을 집약시킨 독특한 구성.
누마루는 작은 규모 집에서는
보기 드물게 섬세하고 화려하다.
사랑방 기능을 안채에 집약.
건넌방 앞에 놓인 툇마루는
건넌방보다 바닥을 높이고 '亞'자
난간을 둘러 세심하게 고려한 공간.
'김기림, 정지용과 이상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누마루 풍경이 그려지는.,곳.
상허 이태준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홀로 딴청 피며 정원의 홍시를 탐했으려나?
70년전 문인들의 사랑방에서의 다향에 젖는다.
성북동 수연산방은
구인회(九人會) 산실
......................구인회(九人會) ....................
1933년 8월에 중견작가 9인이 만든 문학 친목단체
김기림·이효석·이종명·김유영·유치진·조용만·이태준·
정지용·이무영 등 9 명의 회원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창립한 후, 곧 이종명·김유영·이효석이 탈퇴.
그 대신 박태원·이상·박팔양이 새로 들어왔고,
그뒤 유치진·조용만 대신 김유정·김환태로 교체.
회원수는 항상 9명이었고
창립할 때는 친목단체였으나
사실은 1920년대 우리나라 문단의
큰 흐름이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반대하는 순수 예술을 지향했다.
그러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이종명·김유영 등은
프롤레타리아 문학과의 공공연한 대결을 주장했지만,
이무렵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일제의 탄압에 따라 퇴조.
한 달에 2,3회의 모임과 문학강연회를 가졌으며,
'박태원 이상' 주도 하에 기관지 '시와 소설' 발행.
.................................................................
.........목차.........
1. '구인회'의 문화 사랑방
2. 누마루에서 상허의 정원을 품다
3. 글로 남은 산방의 옛 정취
1. '구인회'.,문화 사랑방.
.
길가의 언덕을 따라
한옥의 풍경이 들고난다.
성북동 이곳이 금세 오래된
동네임을 실감하게 되는 사랑방.
시인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에서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라고 노래했던가.
그 또한 아득한 옛일.
어느새 성북동은 다시 서울의 예스런 동네다.
'구인회' 문화유적을 찾아 알음알음 모여든다.
몇몇의 카페는 그들이 잠깐씩 다녀가는 쉼터다.
‘테이크아웃 드로잉’은
이미 소문난 문화공간.
2단으로 이루어진 실내는
카페이자 갤러리를 겸한다.
'drawing을
세상에 take out.'
의미의 카페 이름.
카페 ‘일상(日常)’도 있다.
소문난 드립커피 전문점이다.
먼 데서 찾아오는 단골들이 많다.
수연산방에 이르기 전 성북동 길가의 풍경이다.
1930년대에는 수연산방이 그런 역할을 했겠지.
수연산방은 상허(尙虛) 이태준의 고택이다.
그는 월북소설가라 이름이 생경하다.
하지만 그가 쓴 「가마귀」 「달밤」 등은
현대소설의 틀을 확립한 수작이다.
『문장』지의 주간을 지내며 연재한
「문장강화」도 빼놓을 수 없다.
1939년 단행본 후 70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문장론의 교본 구실을 한다.
그는 순수 문학을 표방했던
구인회(九人會) 동인으로 유명
1933년 김기림·이효석·정지용·
이태준 등 9작가 모임.,구인회.
후에 박태원·이상·김유정
등이 가세해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현대문학의 선구자들.
수연산방은
이들이 사랑방 삼아
모인 아지트였을 게다.
때론 진지하게 또 때론
반농 삼아 삶과 문학을
이야기했겠지.
오명근의 소설
「그 이상은 없다」는
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태준의 성북동 시대’라는 제목 아래
정지용과 이상이 티격태격 다투는 모습이다.
그 배경이 수연산방이다.
1930년대 문인들의 풍경을
팩션(Faction)으로 꾸민 책이지만
수연산방의 역할만은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수연산방은 1999년부터 전통찻집을 겸.
상허의 외종손뻘 되는 후손이 운영한다.
하지만 그 고택의 풍모만은 변함이 없다.
솟을대문을 중심에 둔 돌담 고운 집이다.
그 너머에서 상허는 1933년부터 46년까지 살았다.
한때는 월북작가라는 멍에 때문에 이태현가라고 불렸다.
이제는 수연산방 길이름도 이태준길이다.
집집마다 이태준길이라는 주소가 붙는다.
수연산방은
'이태준길의 원류'인
지방 민속자료 제11호.
2. 누마루에서
상허의 정원을
품다.
고택 안은 탐스런 정원을 품었다.
정성스런 손길이 묻어나는 초목들.
이태준의 정성이 가득한 정원이다.
‘작년 봄에 이웃에서 파초 한 그루를 사왔다’고
썼던 수필 「파초」의 큰 파초는 없지만 늙은
감나무와 철나무가 70년 고택의 역사를 말해준다.
우물도 정원 한 틈새를 차지한다.
주변의 화초들이 도란도란하다.
건물은 크게 누마루를 품은
오른쪽의 본채와 왼쪽의 별채,
북카페로 지어진 ‘구인회’로 나뉜다.
본채는 좌식이고 별채는 입식이다.
북카페 구인회는 단체손님 위한 좌식 카페.
본채는 ‘ㄱ’자 형의 가옥 뒤쪽에 방을 덧댄 형식.
두칸 대청마루 중심으로
건넌방과 안방이 있고
안쪽으로 부엌 등이 있다.
찻집으로는 건넌방과 대청마루 그리고
두 공간 앞으로 난 툇마루와 안방이 사용된다.
안방은 본채 바깥으로 튀어나온 누마루로 이어진다.
한향루(閒香樓) 현판이 붙은 누마루는
정원을 품고있어 수연산방의 으뜸 자리.
이곳은 절로 차 한 잔의 풍류가 넘쳐난다.
상허가 자신의 손길이 깃든 정원을 바라보며
창작에 전념, 구인회의 벗들도 예서 모였겠지.
그 운치를 누군들
알아채지 못할까?
이나영과 오다기리 조가 나왔던 영화
'비몽'에서 이나영이 수면치료받던 공간.
예약 없이는 좀체 차지하기 힘든 자리다.
안방과 대청마루, 건넌방에는
몇 안 되는 상허의 유품도 남았다.
그의 책장과 출간 당시 '문장강화'가
아련한 그리움처럼 자리한다.
가족사진도 있다.
일곱 식구가 나란히 찍은 사진이다.
그는 막내딸 소현을 품에 안고서 미소 짓는다.
그의 표정뿐이랴. 가족 모두의 얼굴에 기쁨이 넘친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에게
수연산방에서의 한때는
행복한 시절이었으리라.
꽃병에는 조화 일지언정
홍매화 몇 송이도 피었다.
괜스럽지 않다.
수필 「매화」에 적힌
‘영하 십도가 넘는 날 밤
덩그런 누마루에 그냥 버려두어
수선과 난초는 이미 얼었으나
홍매(紅梅)라도 매화만은 송이마다
꽃술이 총기있는 계집애 속눈썹처럼
또릿또릿해 주인을 반기지 않는가!’
라는 글귀가
그림처럼 스친다.
3. 글로 남은 산방의 옛 정취.
정원 가로질러 이르는 별채는 입식 구조.
한쪽에는 아궁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조각보와 촛대 등 옛 소품들이 어우러졌다.
별채에도 매화 조화를 장식했다.
별채의 앞에는 구인회라는 북카페.
정원을 향해 난 유리창이 공간의 매력.
외딴 별실이라 호젓하고 아늑.
세미나나 모임을 갖기에 좋다.
야외에도 차 마실 공간이 여럿.
봄이나 여름 나절에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한껏 호사를 누릴 수 있겠다.
풋풋한 풀내음을 벗 삼을 수 있겠지.
누마루의 솟은 추녀도 품을 수 있겠지.
수연산방엔 태초의 흔적도
후세에 더해진 흔적도 있다.
이제 산방(山房)이라 불릴 산속은 아니지만
산방의 공간은 변함없이 석류알처럼 꽉 찼다.
사람의 마음이 깊이 밴듯.
상허는 수필 '목수들'에서
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남겼다.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 전에 대어 와서…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아무리 요새
시쳇집이라도 얼마쯤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고 적었다.
그 소망이 담겼나보다.
그의 수필집 『무서록』도
수연산방의 일상을 전한다.
앞서 말한 「파초」나 「매화」
역시 『무서록』에 실린 단편.
'목수들'과 '무서록'을 읽고 찾는다면
수연산방 자취 하나 하나 손끝에 잡힐듯
그것이 아마 상허의 숨결은 아닐는지....
다향이 깃든 수연산방에서
그의 마음을 읽어도 좋으련….
.
수연산방(壽硯山房)
상허 이태준 가옥.,수연산방
.........상허 이태준(李泰俊)..............
호는 상허(尙虛). 강원도 철원 출생. 아버지 이문교(李文敎)
아버지는 개화파 지식인으로 함경남도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
근무한 지방관원이었는데, 당시 한말 개혁파 운동에 가담하였던듯
수구파에 밀려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망명하다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이태준은 어릴때 어렵게 수학.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그 학교의 교원이었던 이병기(李秉岐)의
지도를 받아 고전문학의 교양을 쌓았다. 그런데
학교의 불합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한 결과 퇴교를 당하였다. 1926년 일본 도쿄에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서 수학하다 중퇴 귀국.
1929년 개벽사 기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역임.
1933년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이효석(李孝石)·김기림·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결성하였다.
이어 순수문예지 『문장(文章)』(1939.2∼1941.4.)을
주재하여 문제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여 문단에 크게 기여하였다.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
(1925)를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또, 「아무일도 없소」(東光, 1931.7.)·
「불우선생(不遇先生)」(三千里, 1932.4.)·
「꽃나무는 심어놓고」(新東亞, 1933.3.)·
「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
(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1.)·
「복덕방(福德房)」(朝光, 1937.3.)·
「패강냉(浿江冷)」(三千里文學, 1938.1.)·
「농군(農軍)」(文章, 1939.7.)·「
밤길」(文章, 1940·5·6·7합병호)·
「무연(無緣)」(春秋, 1942.6.)·
「돌다리」(國民文學, 1943.1.)
등이 있다.
그리고
「해방전후(解放前後)」(文學, 1946.8.) 등
일제강점기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썼으며,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은
독자의 호응을 크게 받았다.
그가 취택한 인물들은 가난하고, 무력
우리의 전통적 삶의식을 잘 드러내며
인간미 풍기는 특징으로 되어 있다.
초기작품 「아무일도 없소」에는
신출기자의 취재에 의하여, 3·1운동 당시
대동단(大同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망명한
애국지사의 딸이 생계가 어려워 창녀가 되었고,
그 사실에 충격받은 지사 아내가 자결한다는 내용.
그런데 이러한 비극적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당시대의 세속적인 삶의 궤도는 잘도
돌아간다는 반어적 인식이 제기된다.
이러한 민족의식의 주제는
상당히 많은 편수에 이르고,
장편 「사상(思想)의 월야(月夜)」
(1946)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
소외된 인물들의 현실적 고난과
그 인물의 내면세계의 순수무구함을
드러내어 인간애의 의식을 촉구하는
주옥 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수필집
『무서록(無序錄)』(1944)과 문장론
『문장강화(文章講話)』(1946) 등도
그의 탁월한 문학적 저서로서
크게 공헌한 책들이다.
광복 후 1946년에
월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