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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의 만년설(萬年雪)은, 빙하(氷河) [제2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曰 : 반도(半島) 조선(朝鮮)은 없다]
‘선대인(先大人) 홍양호(洪良浩)’에게 최고(最高)의 찬사(讚辭)를 보내는 바다
2,026년 09월 06일
○ 조선(朝鮮)의 사대부(士大夫)들이 평생(平生) 조정(朝廷)의 관리(官吏)로 조정(朝廷) 또는 임지(任地)에 주재(駐在)하고 왕래(往來)하며 보고 들은 것, 체험(體驗)한 모든 것들을 여러 행태(行態)로 기록(記錄)해 놓은 것이 개인문집(個人文集)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있다.
그 문집(文集) 수량(數量)은, 세는 것을 불허(不許)할 만큼의 많은 문집(文集)이 있다. 대표적(代表的)으로 유명세(有名稅)를 겪는 분들의 문집(文集)은, 번역(飜譯)되기도 해 우리가 볼 수 있으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의, 얼마나 많은 고전(古典) 원문(原文)의 기록(記錄)이 창고(倉庫)에 분류(分類)도 되지 않은 째 쌓여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특히 이 중에서도 변경(邊境)의 관리(官吏)로 재임(在任)하면서, 임지(任地)의 자연환경(自然環境)과 풍속(風俗),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 등에 대한 기록(記錄)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에 의해,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를 복원(復元)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소중(所重)하고, 중요(重要)한 한 부분(部分)을 차지할 것」이라고 단언(斷言)한다.
특히 「조선왕조(朝鮮王朝) 당시(當時)의 변경지방(邊境地方)에 대한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지형지세(地形地勢), 산(山), 강(江), 호수(湖水), 특이지형(特異地形), 방위(方位), 거리(距離), 토산물(土産物), 종족(種族), 부족(部族), 풍속(風俗) 등(等)】를 파악(把握)하는데 소중(所重)하게 사용(使用)될 수 있다」라고 자신(自信)한다.
● 오늘의 게재(揭載) 내용(內容) 또한 「이계집(耳溪集) 2편(篇)」으로, 「그동안의 반도(半島) 땅에서의 역사상식(歷史常識)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기록(記錄)이다.」
「특히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를 깨끗하게 깨뜨릴 수 있는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에 대한 기록(記錄)에서, 최고(最高)의 찬사(讚辭)를 보내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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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耳溪集 5권 / 詩 朔方風謠 [丁酉年, 1777, 正祖 1] : 〔丁酉冬 黜補慶興府使 : 겨울,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임(補任)되었다〕 : 孔州謠三疊(공주요 3첩) 【출척(黜陟) : ‘군주(君主)에게 미움을 받아 한직(閑職)으로, 변방(邊方) 등지(等地)로 쫓겨났다’라는 뜻이다】
《1. 孔州城何處是, 城中人飮豆江水. 東韓地盡瑟海頭, 南去漢陽三千里 : 공주성(孔州城)이 어디더냐, 성안(城內) 사람들 두강(豆江) 물 마시네. 동한(東韓)의 강역이 슬해(瑟海) 어귀에서 다하니, 남쪽으로 한양과 삼천 리 거리라네. 煙火近接女眞村, 風俗猶傳肅愼氏 : 민가【연화(煙火)】는 여진족 부락에 인접하였고, 숙신씨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네. ∼ ∼ 중략(中略).
2. 孔州山立峻嶒, 王跡之所興. 白嶽雄蟠天北極, 四時長留積雪與層氷 : 공주 산 높이 높이 솟아 있으니, 왕업이 흥기한 땅이로다. 백두산(白嶽)이 웅장하게 하늘 북쪽 끝에 서렸으니, 만년설과 겹겹 얼음 사시토록 녹지 않네. 上有天池倒瀉如垂虹. 西爲鴨水北爲混同東爲豆滿流泓澄. 豆滿之江舂撞奔放千里入瑟海, 群山夾水羅絡夭矯如翔騰 : 정상의 천지 물이 무지개 드리우듯 쏟아져 내리니, 서로는 압록강 북으로는 혼동강 동으로는 두만강 되어 깊고 맑게 흐르네. 두만강 물결 성난 기세로 천 리 내달려 슬해 들어갈 제, 뭇 산을 끼고 수라로 이어져 꿈틀꿈틀 마치 날아오를 듯하네. ∼ 중략(中略).》라고 하였으며, 또,
• 耳溪集 5 / 시(詩) 삭방풍요(朔方風謠) 〔丁酉冬, 黜補慶興府使 : 丁酉年(1,777, 正祖 1) 겨울, 출척(黜陟)당하여 慶興府使로 보임되었을 때이다〕 : 《하설가(夏雪歌) : 此地風氣本殊別, 白頭山色四時白, 居民六月猶裘褐 : 이곳 기후 본디 유별나, 백두산 빛깔 사시로 하얗고, 백성들 유월에도 겨울옷 입지요》라고 하였다.
➊ 《東韓地盡瑟海頭, 南去漢陽三千里 : 동한(東韓)의 강역이 슬해(瑟海) 어귀에서 다하니, 남(南)쪽으로 한양(漢陽)과 삼천 리 거리라네》라고 하였고, 《白頭山色四時白, 居民六月猶裘褐 : 이곳 기후 본디 유별나, 백두산 빛깔 사시로 하얗고, 백성들 유월에도 겨울옷 입지요》라고 하였다.
➥ ㈠ 「동한(東韓)」이란, ‘동(東)쪽에 있는 한국(韓國)’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서(西)쪽 한국(韓國)이 있다’라는 뜻도 내포(內包)되어 있고, 이 모두를 합쳐 「한국(韓國)」이 된다.
이는 마한(馬韓)을 서한(西韓)이라고도 불렸다는 고사(古事)가 있으며, 또 서한(西漢)과 동한(東漢)이 있었던 것과 같은데… …이러한 예(例)는 후대(後代)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결국(結局), 동한(東韓)이라고 했다면 서한(西韓) 역시(亦是) 존재(存在)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역사인식(歷史認識)이 될 것 같다.
㈡ 『슬해(瑟海) 어귀에서 남(南)쪽 한양(漢陽)까지는 3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문제(問題)는 “슬해(瑟海)”가 어디냐는 것이다.
➥ 이계집(耳溪集)【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 제2권 / 가요(歌謠) 북새잡요(北塞雜謠) 두만강〔豆江〕: 「豆江四月氷雪消, 松魚始自瑟海至 : 두만강 4월이면 눈과 얼음 녹아내리니, 송어가 비로소 슬해에서 올라오네 江邊家家結大網, 持網赤身入江水 : 강가의 집집마다 큰 그물을 엮어서, 그물 들고 알몸으로 강물 속에 뛰어드네. 嗟爾逐魚愼勿過半江, 半江之外非吾地 : 어허 고기 쫓다가 강 중간은 넘지 말게, 강 저편 절반은 우리 땅이 아니라네」하였다.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주-C001] 북새잡요(北塞雜謠)【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 《이계(耳溪)가 1,777년(정조1) 경흥부사(慶興府使)에 임명되어 재임 중에 저술한 것으로, 함경도 지방의 산수자연과 그곳 백성들의 풍속 및 생활을 노래한 악부시(樂府詩)들로 구성된다. 성진(城津)과 백두산(白頭山), 바다의 장사치[海賈], 유란(幽蘭) 등은 시조를 한역한 것이고, 귀문관[鬼門], 적지(赤池), 서수라(西水羅), 무이보(撫夷堡), 오갈암(烏曷巖) 등은 경흥(慶興) 일대를 다니며 그 감상을 읊은 작품들이다. 또 북녘땅[北地], 소를 몰아[叱牛], 삼 기르기[藝麻], 녹용(鹿茸), 아이가 태어나면[兒旣生], 북쪽 사람들[北人], 발구[跋高車], 수레를 빌려[借車] 등은 경흥지역 백성들의 풍속과 실상을 주제로 읊은 작품들이다. 중략(中略),》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주-D001] 슬해(瑟海)【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드는 경흥 앞쪽의 바다를 일컫는다.’
☛ 슬해(瑟海) : 한자(漢字) 지명(地名)으로 된 지도(地圖)를 보면 : 「러시아(Russia)의 블라디보스토크 앞 해구(海口)를 “슬해(瑟海)”로 표기(標記)」되어있으며, 반도(半島) 두만강(豆滿江)과는 수백(數百) 리(里) 떨어져 있다. 「고전번역원의 주(注)」에서는 경흥(慶興) 앞쪽의 바다를 ‘슬해(瑟海)’라고 했다는 설명(說明)은, 21세기(世紀) 반도학계(半島學界)의 어이없는 해설(解說)일 뿐이다.
“구글어스”를 실행(實行)해 보면 : 한양(漢陽)에서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슬해(瑟海)】까지는 직선거리(直線距離) 2 천리(千里)가 되지 못하니, 돌아간다 해도 겨우 ‘2’ 천리(千里) 정도에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하는 대로 「‘3’ 천리(千里)다」라는 말은,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는 “슬해(瑟海)”가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한양(漢陽)으로부터 거리(距離)로 보면 : 두만강(豆萬江) 앞 바다인 슬해(瑟海)가 경흥(慶興) 앞 바다(海)에서부터 한양가지 ‘3’ 천리(千里)라고 하였다. 거리로 보면 : 「오늘날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가 경흥(慶興)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만주(滿洲) 땅과 그 주변(周邊)의 지명(地名)은 ‘20세기(世紀) 이후(以後)’에 만들어지고, 정착(定着)된 것이기 때문에, 슬해(瑟海)는 전혀 다른 땅에서 찾아야 한다. ➤【‘슬해(瑟海)’에 대해서는 마지막 편에 ‘별도(別途)로 슬해(瑟海) 편을 게재(揭載)’할 예정(豫定)으로 자료(資料) 수집(收集) 중에 있음을 밝힙니다.】
➋ 《煙火近接女眞村, 風俗猶傳肅愼氏 : 민가는 여진족(女眞族) 촌(村)에 인접하였고, 숙신씨(肅愼氏) 풍속(風俗)이 아직도 남아 있네.》라고 하였다.
➥ 「여진촌(女眞村)이지만, 아직도 옛 숙신(肅愼)의 풍속(風俗)을 간직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이는 이곳이 옛 숙신족(肅愼族)의 땅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說明)하고, 반복(反復)한 설명(說明)이지만 : 「숙신족(肅愼族)은 반도(半島)나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존재(存在)한 적이 없다.」
숙신족(肅愼族), 숙신씨(肅愼氏) 이야기는 벌써 수천(數千) 년(年) 전(前)의 역사(歷史)로 읍루(挹婁) 이전(以前)의 종족(種族)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 “숙신족(肅愼族)”은 “산해경(山海經)과 회남자(淮南子)”에서 말해주고 있는데, 「숙신족(肅愼族)은 서방(西方)과 북방(北方)의 서북방(西北方) 땅에서 사는 종족(種族)」이라고 분명(分明)하게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대황(大荒)의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 밖(外)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특히 ‘요지(遼志)’에서는 「냉산(冷山) 동남쪽 ‘1’천(千) 여리(餘里)‘에,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이 있다」라고 밝혔다. 오늘날의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이 아님을 밝혀 놓고 있다. 따라서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숙신족(肅愼族)의 풍속(風俗)이 어떻게 그때까지 풍속(風俗)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세계사(世界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무리에 의해 조선사(朝鮮史)가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것이다.
〈『여진(女眞)의 선대(先代)는, “말갈(靺鞨)이며, 물길(勿吉)이며, 읍루(挹婁)이며, 숙신(肅愼)이다.”』‘숙신족(肅愼族)=숙신씨(肅愼氏)’의 후예(後裔)들이 바로 말갈(靺鞨)이며, 이들이 바로 마자르(magyar)이며, 오늘날의 헝가리(Hungary)의 헝가리인(Hungarian)을 말하는 것이다. 【마자르(magyar)는, 일곱 부족(部族)의 이름 중의 하나다. 凡有七種 : 粟末部, 伯咄部,安車骨部, 拂𣵀部,號室部,黑水部,白山部[隋書, 引用]】오늘날의 “헝가리(Hungary)”는, “헝가리(Magyarország(ˈmɒɟɒrorsaːɡ : 머저로르사,그”)가 공식(公式) 국호(國號)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 옛 숙신(肅愼)과 말갈(靺鞨)의 거점지(據點地)를 알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함에도 불구(不拘)하고 : 「“묻지마, 무작정”으로, 여진(女眞)이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었다거나,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이 있다」라고 하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사서(史書)에 기록(記錄)되지 않은,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에 의해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뒤에 나온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➌ 《白嶽雄蟠天北極, 四時長留積雪與層氷 : 백두산(白頭山)이 웅장하게 하늘 북쪽 끝에 서렸으니, 만년설(萬年雪)과 겹겹 얼음 사시토록 녹지 않네.》하였다… ….
➥ 오늘날의 반도(半島)의 영산(靈山)이라고 하는「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은, 20세기(世紀) 이후(以後)에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곳에 만년설(萬年雪)인 빙하(氷河)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또 이곳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이 하늘 끝에 있나? 그곳 천지(天池)에서 북(北)쪽을 바라보면 그 북(北)쪽으로 또 다른 북(北)쪽 하늘 끝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도 모른다?
「사시(四時)」란 말은, 곧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사계(四季)를 말하는 것으로 “1년 내내”를 말하는데, 바로 ‘만년설(萬年雪) 곧 만년빙(萬年氷)’인 ‘빙하(氷河)’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서북방(西北方)에 있는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벨루하산(Belukha, 山 : 4,506m)”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곳의 빙하(氷河)는 당조(唐朝) 때의 유명(有名) 학자(學者)들에 의해 이미 “한해(瀚海)의 빙하(氷河)”로 표현(表現)되고, 시(詩) 주제(主題)가 되기도 했다.
☛ 오늘날의 반도(半島) 북(北)쪽에 백두산(白頭山)은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 될 수 없다. 20세기(世紀) 이후(以後)에 만들어진 이름일 뿐으로, 「오늘날의 백두산(白頭山)은 빙하(氷河) 곧 만년설(萬年雪)이 쌓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산(山)의 높이가 겨우 ‘2,744’m이기 때문이다.」
➍ 《豆滿之江舂撞奔放千里入瑟海, 群山夾水羅絡夭矯如翔騰 : 두만강(豆滿江) 물결 성난 기세로 천리(千里)를 내달려 슬해(瑟海) 들어갈 제, 뭇 산을 끼고 수라(水羅)로 이어져 꿈틀꿈틀 마치 날아오를 듯하네》하였다.
➥ 이러한 기록(記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학계(學界)는 “슬해(瑟海)”를 : 「㈠ 두만강(豆萬江) 하구일대(河口一帶)의 바다를, ㈡ 단천군(端川郡) 동해(東海) 연안(沿岸) 바다를 ㈢ 또는 해삼위(海蔘衛)라고 했다는 블라디보스토크 연안일대(沿岸一帶)를 슬해라고 했다」라고 한다.
이것을 위의 문장(文章) 설명(說明)에 대입(代入)하면 :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가 단천군(端川郡) 동해연안(東海沿岸)이 되기도 하고, 또는 블라디보스토크 연안(沿岸) 일대(一帶)로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가 만들어지는 웃기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 곧 「두만강(豆萬江)도, 슬해(瑟海)도,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뜻이다. 확실(確實)하게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가 “맘대로, 멋대로 옮겨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곧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이래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없어져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묻지 마”다. ‘반국가적(反國家的)’이란 말의 뜻을 새겨야 한다. 【슬해(瑟海)에 대해서는, 마지막 편(篇)에 ‘슬해(瑟海)’ 편(篇)을 별도(別到)로 게재(揭載)할 예정(豫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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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耳溪集 5권, 詩 / 朔方風謠 : 丁酉冬 黜補慶興府使[정유(丁酉 : 1,777, 正祖 1) 겨울,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임되었을 때이다]
《朔風行 : 昨日風今日風, 朝朝暮暮號怒聲何雄 : 어제도 바람 오늘도 바람, 아침저녁마다 성내며 울부짖는 소리 어찌 그리 웅장한지. 一月二十九日風, 一日不風天濛濛 : 한 달에 스무아흐렛날 바람이 불고, 하루 불지 않는 날엔 하늘이 희끄무레➊. 揚沙走石相撞擊, 屋瓦翻飛飄半空 : 모래 날리고 돌 구르며 서로 부딪혀대고, 지붕 기와 까뒤집혀 공중에 날아다니네➋. 樹木摧殘矮短仍拳曲, 江邊一帶山皆童 : 수목들 꺾이고 다쳐 왜소하고 구부정하니, 강변 일대 산 모두 벌거숭이 되었네. 厥土惟有赤柳黃楡生, 棺槨棟椽安得柏與松 : 이 땅엔 능수버들 느릅나무만 자라니, 관곽과 서까래에 쓸 측백과 소나무 어찌 구할까➌. 厥俗大戒在失火, 家家曲突刳木立煙筒. : 이곳 풍속은 실화를 크게 경계하니, 집집마다 굴뚝 구부리고 나무 파서 연통 세웠네. 行人道上不能頂戴笠, 塵埃撲目迷西東 : 길 가는 사람들 머리에 갓 쓰고 있지 못할 지경이니, 먼지가 눈을 때려 동서 구분키 어렵다➍. 流凘滿江雪助威, 掀山碾壑來隆隆 : 유빙(流氷)이 강에 가득한데 눈이 위세 보태고, 산 뒤흔들고 골짝 때려치며 거세게 불어오네. 중략(中略).》라고 하였다.
➥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경흥부사(慶興府使)로 3년(年)을 보내면서 “경흥(慶興)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에 대한 특징(特徵)을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描寫)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하고 있는 특징(特徵)이 「“반도(半島) 경흥(慶興)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으로 특히, ➞ ‘특이(特異)한 자연환경(自然環境) 변화(變化)’를 말하고 있으며, ➞ 경흥(慶興) 땅에 자라고 있는 나무 종류(樹種)」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어…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경흥부사(慶興府使)로 3년(年) 동안 있었던 “경흥(慶興)” 땅이 “조선반도(朝鮮半島)냐? 중원대륙(中原大陸) 북변(北邊)의 땅이냐?”」하는 것을 결정(決定)지을 수 있는 아주 중요(重要)한 대목이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는, 홍국영(洪國榮)의 득세(得勢)로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3년(年)을 보냈는데, 경흥(慶興)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 곧 풍토(風土), 백성(百姓)의 삶을 시(詩)로 묘사(描寫)한 ‘북새잡요(北塞雜謠), 삭방풍요(朔方風謠)’등을 완성(完成)하였다.”라고 전해진다.】
필자(筆者) 역시(亦是)도, 자판(字板)을 두드리면서 가슴설레는데, 과연(果然) 결과(結果)는 어떻게 나올 건가?
➊ 《昨日風今日風, 朝朝暮暮號怒聲何雄 : 어제도 바람 오늘도 바람, 아침저녁마다 성내며 울부짖는 소리 어찌 그리 웅장한지. 一月二十九日風, 一日不風天濛濛 : 한 달에 스무아흐렛날 바람이 불고, 하루 불지 않는 날엔 하늘이 희끄무레(濛濛)》하였는데… …,
➥ ‘반도(半島) 대한민국(大韓民國)’ 최고(最高)의 ‘엘리트(Elite) 층(層)’이라고 자칭(自稱)하는 ‘박사(博士) 출신(出身)의 교수(敎授), 학자(學者)’들에게 물어보자!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 경흥(慶興) 땅의 자연환경적(自然環境) 특징(特徵)을 말할 때 : 「一月二十九日風, 一日不風天濛濛 : 한 달에 스무아흐렛날 바람이 불고, 하루 불지 않는 날엔 하늘이 희끄무레하다》라고 표현(表現)할 정도(程度)의 악천후지대(惡天候地帶)인가?
「경흥(慶興) 땅」에 대한 기후(氣候), 지리(地理), 특징(特徵)에 대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 어디에서도 위와 같은 내용(內容)을 찾지 못했다.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 및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역시(亦是) 마찬가지였다.
➥ 그러나 서방(西方), 서북방(西北方) 땅, 사막지대(沙漠地帶)와 또 인접(隣接)한 땅에서의 계절(季節)이 바뀔 때 : 연례적(年例的)으로 벌어지는 연례행사(年例行事)와 같은 일이라고 하였다. 곧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경흥(慶興) 땅’은,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위 경흥(慶興)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➋ 《揚沙走石相撞擊, 屋瓦翻飛飄半空 : 모래 날리고 돌 구르며 서로 부딪혀대고, 지붕 기와 까뒤집혀 공중에 날아다니네》 : 이 구절(句節)은 누가 보아도 “온대(溫帶)의 사계절(四季節)이 뚜렷한 땅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큰 사막지대(沙漠地帶)’와 접(接)해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자연환경(自然環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연현상(自然現象)은, 초대형(超大型) 태풍(颱風)에서나 가능(可能)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대형(超大型) 태풍(颱風)은, 경흥(慶興)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해마다 발생(發生)하는 땅이 아니다」라는 거다.
위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을 보면,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계절(季節)이 바뀔 때 연례적(年例的)으로 벌어지는 자연현상(自然現象)인 모래폭풍(暴風)을 묘사(描寫)한 것이다.
《바람의 속도(風速) “강도 3은 33~44m, 강도 4는 44~54m, 강도 5는 초속 54m 이상” 중에서 어디에 속해야 “모래가 날려, 눈을 뜰 수 없으며, 모래에 맞아 얼굴이 아프고, 돌이 구르고, 지붕 기와가 까 뒤집혀 하늘을 날고”… …하는 정도(程度)라면 말이다.》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땅」은, 이러한 특이기후대(特異氣候帶)에서 빠져 있어 아주 다행(多幸)인 곳이다.》곧, 이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의 경흥(慶興)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말하고 있다.
☛ ➌ 《厥土惟有赤柳黃楡生, 棺槨棟椽安得柏與松 : 이 땅엔 능수버들 느릅나무만 자라니, 관곽과 서까래에 쓸 측백과 소나무 어찌 구할까》하였는데… …,
이러한 옛 기록(記錄)을 보면서 필자(筆者)가 강조(强調)하고픈 것은 : 바로 친일잔재(親日殘在) 곧 친일청산(親日淸算)을 기필코 이뤄 내야 한다고 주장(主張)하는 바다.
아울러 “위 구절(句節)”에서 말하는 “경흥(慶興)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은,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의 경흥(慶興) 땅이 아니다」라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가 된다.
➥ 《「조선반도(朝鮮半島)=한반도(韓半島)’의 “경흥(慶興)” 땅의 “기본수종(基本樹種)”이 바로 “참나무와 소나무”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 곧 《「경흥군(慶興郡)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출처(出處) : 북한지역정보넷] : 조선반도(朝鮮半島) 경흥(慶興) 땅에서는 ➠ 기본 수종이 참나무와 소나무가 많으며, 송이버섯 등이 많이 산출되며, 여름철에는 남동풍,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있고, 풍속(風俗)은 연평균 3.1m/s 정도이다. [출처(出處) : 북한지역정보넷]》 : 얼마나 기막힌 이야긴가!
➥ 이렇게 조선사(朝鮮史)는 서세(西勢)와 일제(日帝)에 의해 대대적(大大的)으로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었다는 것이 증명(證明)되고 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이나 북한(北韓)은 근본적(根本的)으로 그 체계(體系)가 전혀 달라 적대관계(敵對關係)에 놓여 있으나, 오직 똑같은 분야(分野)가 바로 사학계(史學界)다.
이 모두가 강제침탈(强制侵奪), 강제병합(强制倂合), 강제통치(强制統治)에 야합(野合)하고, 부역(附逆)한 매국노(賣國奴)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들의 제자(弟子)들로, 후배(後輩)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또 이들로부터 사사(師事) 받았기 때문에, 그 사관(史觀) 곧 일제(日帝)가 만들어 놓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언제쯤 이러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배척(排斥)하고, 그 원흉(元兇)들을 처벌(處罰)할 수 있을까? 모두는 국민(國民)들의 선택(選擇)만이 남아 있다.
☛ 「버드나무(柳), 느릅나무(楡)」 ; 특히 ‘느릅나무(楡)는,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길가에 심어 길을 지키는 이정표(里程標) 역할(役割)을 차지할 정도(程度)로 “사막지대(沙漠地帶)와 특화(特化)된 수종(樹種)”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程度)다. 특히 고서(古書)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당시(當時)의 몽념(蒙恬)과 40만(萬) 대군(大軍), 감독관(監督官)이었던 태자(太子) 부소(扶蘇)‘가 쌓은 만리장성(萬里長城) 축조(築造) 과정(過程)에서 유관(楡關) 곧 느릅나무로 성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곧 큰 사막지대(沙漠地帶)이며, 특히 길을 잃지 않도록 느릅나무를 심어 이정표(里程標)을 대신(代身)하였다. 그래서… …,
조선사(朝鮮史)와 연계(連繫)되어 있는 유관(楡關)【림유관(臨楡關)】은, 산해관(山海關)으로 역사적(歷史的)으로 이어졌고, 이곳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길(道路)을 찾을 수 있는 유일(唯一)한 이정표(里程標)로, 연행록(燕行錄)에서도 요동(遼東), 요서(遼西), 산해관(山海關) 주변(周邊)에 아름드리 느릅나무(楡) 고목(古木)이 즐비하였다고 하였다.
• 조선사(朝鮮史)가 잠시 길을 잃고, 잊어버리고, 세인(世人)들로 버림을 받았지만 : 기필코 진실(眞實)된 조선사(朝鮮史)는, 찬란(燦爛)하게 빛을 발할 것임을 확신(確信)하는 바다.
➤ 결단(決斷)하건대 : 위에서 말하고 있는,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는, 홍국영(洪國榮)의 득세(得勢)로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3년(年)을 보낸 변경(邊境) 땅은, 결단(決斷)코 ‘조선반도(朝鮮半島)=한반도(韓半島)’ 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 아래의 설명(說明)을 보면서 반도사학(半島史學)의 헛빨짓을 재구성(再構成)해 보자. 아래의 것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학계(學界) 설명(說明)이다.
•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 《경흥도호부는 ➤「고려 시대 공주(孔州)」로 불리던 옛터에서 출발해, 조선 태조 때 경원부가 설치되고 세종 때 공주 인근을 분리해 공성현을 만든 뒤 1437년 경흥군, 1443년 경흥도호부로 승격된 행정구역입니다. 따라서 공주는 경흥도호부의 전신이자 행정구역 개편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어요》라고 하였다.
• 「孔 州 之 地」 / 공성(孔城)ㆍ광성(匡城). 새로 개척한 공험진에는 남쪽 지역의 백성들이 이주하였는데 민지(閔漬)가 지은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에는 5,000호(戶)가 백성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임언(林彦)이 지은 표문에는 532정호(丁戶)가 충원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세주 기록에 따르 윤관이 쌓은 9성은 이주된 백성 호수에 따라 대주(大州), 중주(中州), 소진(小鎭)으로 구분되는데, 공험진은 규모가 작은 소진이었다. 『고려사』 지리지 세주에는 ➊「공험진이 공주(孔州), 광주(匡州), 선춘령(先春嶺) 동남쪽 지역, 백두산(白頭山) 동북 지역, 소하강(蘇下江) 강변 등의 지역에 자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공험진에 내외 방어소를 두었고, ➋ 두만강 북쪽 700리에 공험진이 있었다고 해석된 기록이 있습니다.
•『영주청벽기』에는 ➌ 선춘령 동남, 백두산 동북 또는 소하강변에 공험진이 있었다는 등 위치가 여러 방향으로 제시됩니다.
•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 공험진내방어소(公嶮鎭內防禦所) :《輿地勝覽云:“久爲女眞所據。高麗尹瓘逐女眞,設砦爲公嶮鎭內防禦所。” 此於《高麗史》末有考,不知何所據也。《高麗史ㆍ地理志》,公嶮鎭闕其所在,而鄭麟趾註其下曰:“一云孔州,一云匡州。一云在先春嶺東南、白頭山東北,一云在蘇下江邊。” 豈《勝覽》因此,➍ 旣置公嶮鎭於豆滿江北七百里之地,而又於此牽就以成文也歟?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이르기를 : “오래도록 여진의 점령지가 되었는데, 고려(高麗) 때 윤관(尹瓘)이 여진을 몰아내고 성채(城砦)를 설치하여 공험진내방어소(公嶮鎭內防禦所)로 삼았다.” 하였는데, 이 일은 《고려사》에서는 상고할 수 없으니 무엇에 근거하였는지 모르겠다. 고려사 지리지(地理志) 공험진에 그 소재는 기록하지 않고, 정인지(鄭麟趾)가 그 아래에 주를 달기를 “일명 공주(孔州)라고도 하고 일명 광주(匡州)라고도 하며, 선춘령(先春嶺)의 동남쪽, 백두산(白頭山)의 동북쪽에 있다고도 하고, 또는 소하강(蘓下江) 가에 있다고도 한다.” 하였으니,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여기에 기인하여, ➞ 공험진을 이미 두만강 북쪽 700리 땅에 두고 또 여기에서 끌어대어 글을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하였으니, 본래는 두만강 이북 700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나타낸 것이다.
☛ 반도사학(半島史學)은, 「공험진(公險鎭)【孔州之地 : 孔城 : 匡城】」의 위치(位置)를 「공험진(公嶮鎭) : 지금의 함경도에 있는 ➞ 마운령과 마천령 사이 내지 함흥시 대덕리산성ㆍ상대리산성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라고 그 주석(註釋)에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사(朝鮮史) 원문(原文)에서 말하고 있는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 700리(里)를 아예 무시(無視)하고, 지들 멋대로 1,000리(里)를 강제(强制), 남하(南下)시킨 것이다.
그러고도 자신(自身)들에게 험한 짓(?)이 돌아올까 하여 슬며시 : 「선춘령(先春嶺)의 동남쪽, 백두산(白頭山)의 동북쪽에 있다고도 하고, 또는 소하강(蘓下江) 가에 있다고도 하는 말도 있다」라는 식(式)으로 얼버무리고 있다.
☛ 「공험진(公嶮鎭)」을 검색해 보면 / 공험진(公嶮鎭) : 《지금의 함경도에 있는 마운령과 마천령 사이 내지 함흥시 대덕리산성ㆍ상대리산성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 공험진은 고려 시대 윤관이 여진족을 무찌르고 개척한 9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다. 윤관은 공험진의 선춘령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를 세웠다고 하고, 《세종실록》 〈지리지〉의 〈경원도호부〉에 세종이 김종서에게 이 비석을 찾아볼 것을 명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에도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지역이고 그 이북은 중국 영토라는 개념이 있었던 듯하다.》라고 하였다.
「공험진(公險鎭)」은 :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의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만약(萬若), 좁디좁은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와 그 북방(北方) 일부(一部)’」을 포함(包含)한 땅에서 5,000년(年)이라면 : 어떻게 지명(地名)의 위치(位置) 하나도 제대로 모를 수가 있겠는가?
더더구나 수십만(數十萬) 대군(大軍)을 출정(出征)시켜 ‘700리(里), 1 천리(千里)’ 땅을 초토화(焦土化)시키고, 점령(占領)하여 개척(開拓), 진지(陣地)를 구축(構築), 남부(南部)의 백성(百姓)들 5,000호(戶)를 이주(移住)시켰다면 인구(人口)로 보면 수만(數萬)의 백성(百姓)들을 공험진(公險鎭)에 투입(投入)했다는 말이 되는데, 바로 이곳이 뒤에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가 되는 땅이다. 「그러함에도 그 위치(位置)를 몰라 “700-1,000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추정(推定)한다.”」라는 말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라는 말과 같은 이야기로, 기가 막힌 이야기다.
결국(結局),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는, 두만강(豆萬江) 이북(以北) 700리(里) 지역(地域)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씨알’이 먹히지 않는 이유(理由)는, “반도(半島)의 경흥(慶興) 땅”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두만강(豆萬江) 이북(以北)은 조선(朝鮮)의 영토(領土)가 아니다」라고 해서, 1,000리를 남하(南下)시켜 「함경도(咸鏡道)에 있는 마운령(摩雲嶺)과 마천령(摩天嶺) 사이, 내지 ‘함흥시 대덕리산성ㆍ상대리산성에 위치해 있다.’라고 추정(推定)한다.」라면서 ‘국가(國家)와 민족(民族)’ 앞에서 ‘아첨(阿諂) 쇼(演技)’를 벌이고 있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은 위에서 보듯이… …모든 것이 전형적(典型的)인 일제(日帝)의 성향(性向)과 너무도 닮아, 축소지향적(縮小指向的)이며,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창작(創作)되어 있다.
• 《윤관(尹瓘) 장군(將軍)과 함께 20만(萬) 대군(大軍)이 출정(出征)하여 개척(開拓)한 700∼1,000리(里) 땅은, 두만강(豆萬江) 이북(以北)이라고 하였으며, 공험진(公險鎭)은 그중에서도 가장 북(北)쪽에 설치(設置)했다》라고 전(傳)해지는데… …「무슨 얼어 죽을 마천령(摩天嶺)과 마운령(磨雲嶺) 사이에 있을 수가 있나? 그것도 추정(推定)이라니??? 이런 얼어 죽을?」
☛ 「두만강(豆萬江)이 ‘지’ 멋대로 남(南)과 북(北)으로 왔다 갔다」할 수 있나?
- 반도조선(半島朝鮮)이든, 대륙조선(大陸朝鮮)이든, 이건 하나 꼭 지적(指摘)하고 싶다. -
《일본(日本)이나 중국(中國)은, 그 넓은 땅을 두고서도 이웃한 인접(隣接) 나라의 땅을 욕심(欲心)내어 정권(政權)과 학계(學界)가 은밀(隱密)히 야합(野合), 남의 나라(他國) 땅도 ‘지’ 들 땅이라고 난리(亂離), 호들갑을 떨며, “역사적(歷史的)으로 우리나 영토(領土)다”를 꾸준히 주장(主張)하여 분쟁화(紛爭化)시키고 있음에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오직 평화(平和)만을 사랑하는 평화(平和)를 위한, 국가(國家)나 학자(學者)님들은 너무나, 너무도 평화(平和)를 사랑하는 민족(民族)이라서, 오직 평화(平和)와 평화(平和)를 위해서 “지” 땅도 양보(讓步)의 미덕(美德)을 위해서… …양보(讓步)해서 ‘1’ 천리(千里) 땅도 미련(未練) 없이 내주는 민족(民族)이었다고… …누가 말했나? “머저리”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한반도(韓半島)요, 조선반도(朝鮮半島) 땅이다. “틀린 말인가? 맞는 말인가?”
▣ 여기서 또 하나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해보자. 바로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에 대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기막힌 이야기다.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 [出處 : 한국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 마운령 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는, 함경남도 리원군의 마운령에 서 있었다.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는 “16세기 말에 발견되어 17세기 초 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 고려 윤관의 비로 소개”하였으나, “1,929년에 최남선이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 만덕산 산중에 파묻혀 있던 것을 찾아낸 후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고증하였다.” 중략(中略). 비석은 1,929년 최남선이 현지 조사로 확인한 뒤 함흥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신라의 관제와 사회 조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라고 해설(解說)하고 있는데… …,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16세기(世紀)∼17세기(世紀)의 한백겸(韓百謙)이 한자(漢字)를 몰라서, 그것이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인 줄 모르고, 그저 윤관(尹瓘)의 비(碑)라고 기록(記錄)해 놓았다」라는 것은… …「또 하나 AD 1,929년(年) 그것을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발견(發見), 고증(考證)했다」라는 말은,
일제(日帝)와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 조작(造作)한 것이다. 17세기(世紀) 이후(以後) 많은 사대부(士大夫)가 군주(君主)의 명(命)을 받고, 마운령(磨雲嶺)을 넘고, 마천령(摩天嶺)을 넘고, 넘어 북막(北幕)의 관리(官吏)로 그곳 땅을 헤집고 다닌 것은 뭐냐? 하는 것이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눈을 눈이고, 많은 조선(朝鮮) 사대부(士大夫) 관리(官吏)들의 눈은 눈(眼)이 아닌 눈(雪)이었는가?” 최남선(崔南善)은 귀신(鬼神)인가? 땅속에 묻혀 있는 비석(碑石)을 찾아내게? 이래서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하필(何必)이면,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고, AD 1,929년(年)인가?」 일제(日帝)가 최남선(崔南善)을 이용(利用)한 건가? 아니면 일제(日帝)에 부역(附逆)한 건가?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수 있는 대목은 : 《1,928년 10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라는 사실(史實)이다.
그리고 AD 1,929년(年),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發見), 고증(考證)하게 되는 것이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이 확정(確定)되는데, 중요(重要)한 대목을 담당(擔當)한 것이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보낸 유학생(留學生) 출신으로, 「1919년 3 · 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제에 체포되어 2년 8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라는 것으로 볼 때, 옥고(獄苦)를 치르면서 일제(日帝)에 항복(降伏), 전향(轉向)한 것으로 사료(思料)되며, 이는《1,928년 10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라는 것으로 확인(確認)된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분명(分明)한 반민족행위자(反民族行爲者)다.
그래서 AD 1,926년(年)에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발표(發表)했다고 하는데, 이게 또 웃기는 것이 “일본어(日本語)로 쓴 것을, 뒤에 조선어(朝鮮語)로 번역(飜譯)되었다는 것이다” 참 황당무계(荒唐無稽)하기도 하고… …참 할 말이 없는 인물(人物)이다.
➤➤➤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역시(亦是),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조작품(造作品)”을 찍어 내는데 중요(重要)한 역할(役割)을 담당(擔當)한 인물(人物)이라는 사실(事實)이다.」 이런 인물(人物)을 “민족적(民族的)”으로… …하면서 찬사(讚辭)를 보내는 듯한 “이 나라” 학자(學者)들의 행위(行爲)는 이해불가(理解不可)하며, 해괴망측(駭怪罔測)하고, 파렴치(破廉恥)한 짓이다. 【Naver, N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최남선(崔南善)’을 검색(檢索)하면 : 년도(年度) 별로 행적(行績)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參考) : 고려사 96, 열」9 [제신] 윤관(尹瓘) : 12월에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임하여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여 파견하였다. 을유일에 윤관과 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하였다. 군사는 모두 17만이었는데 20만이라고 일컬었다. 병마판관 최홍정(崔弘正)·황군상(黃君裳)을 정주(定州)와 장주(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을 속여서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장차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은 와서 명을 들으라"라고 하였다. 추장이 이를 믿고 고라(古羅) 등 400여 명과 함께 오니, 이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복병을 출동시켜 이를 섬멸하였다. …(中略)…
을미일에 윤관은 5만 3000명을 이끌고 정주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 김한충(金漢忠)은 3만 6700명을 이끌고 안륙수(安陸戍)로 나가고, 좌군병마사 문관은 3만 3900명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갔다. 우군병마사 김덕진은 4만 3,800명을 이끌고 선덕진(宣德鎭)과 안해(安海)·거방(拒防) 두 수 사이로 나가고,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원흥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 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陶) 등은 수군 2600명을 이끌고 도린포(道麟浦)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지나서 반나절을 행군하자 여진은 그 군사의 위엄이 매우 장대함을 보고 모두 도망쳐 달아나 가축들만 들에 널려 있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이 동음성(冬音城)으로 들어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자 윤관은 병마검할(兵馬鈐轄) 임언과 최홍정에게 정예병을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니 (적들이) 패하여 달아났다. …(중략)…】하였으며,
【고려사절요 7, 예종(문효대왕) 1 정해 2년 12월 : (병신일에) 중군은 고사한(高史漢) 등 35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우군은 광탄(廣灘) 등 32촌을 격파하여 290급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좌군은 심곤(深昆) 등 31촌을 격파하여 950급을 베었다. 윤관은 대내파지부터 37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다. 녹사 유영약(兪瑩若)을 보내어 승리를 알리니 왕이 기뻐하며 유영약에게 7품직을 주고, 좌부승지·병부낭중 심후(沈侯)와 내시·형부원외랑 한교여(韓皦如)에게 명하여 조서를 내려 장려하고 위무하였으며 윤관·오연총 및 여러 장수들에게 격려하고 위로하였으며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윤관은 또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어 땅의 경계를 확정하고,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를 보내어 터를 보아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城) 950칸을 쌓아 영주(英州)라 이름하였고 화곶산(火串山) 아래에 992칸을 쌓아 웅주(雄州)라 이름하였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칸을 쌓아 복주(福州)라 이름하였으며, 궁한이촌(弓漢伊村)에 670칸을 쌓아 길주(吉州)라 이름하였다. 또 호국인왕(護國仁王)과 진동보제(鎭東普濟) 두 절을 영주성 안에 창건하였다.】라고 하였다.
➥ 《이런 땅이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 땅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위에서 말하고 있는 땅(地)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과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지칭(指稱)하고 있다.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에서는, 위와 같은 조건(條件)을 충족(充足)시킬 수 없다. 좁디좁은 땅이기 때문이다.」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의 ‘50’배(倍)도 넘는 그 땅에서의 일을, 일개(一介) 하나의 성(省)에 불과(不過)한 그 땅에서의 역사(歷史)는, 논(論)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더더구나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는, 그 역사(歷史) 기록(記錄) 자체(自體)가 없다.
생각해 보라. AD 1,910년(年) 전후(前後)의 문맹율(文盲率)이 90% 정도(程度)였다는 이야기는, 몇 명의 관리(官吏)들이 모두를 노예(奴隸)처럼 다스렸다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➍ 《行人道上不能頂戴笠, 塵埃撲目迷西東 : 길 가는 사람들 머리에 갓 쓰고 있지 못할 지경이니, 먼지가 눈을 때려 서동(西東)도 구분키 어렵다》라고 하였는데… …,
「이와 같은 자연환경(自然環境)이 연례적(年例的)으로 발생(發生)하는 곳은 서북방(西北方) 사막지대(沙漠地帶)다. 또는 그에 인접(隣接)한 곳이다.」 동북방(東北方)의 하북성(河北省)이나 동북삼성(東北三省) 또는 그 이북(以北) 땅에서는 특별(特別)한 경우(境遇)를 제외(制外)하고는, 연례적(年例的)으로 발생(發生)하지 않는다.
➥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같은 문중(門中)인 홍국영(洪國榮)의 득세(得勢)로 미움을 받아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3년(年)을 보냈는데, 임지(任地)인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및 인접(隣接)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 곧 풍토(風土)나 종족(種族), 백성(百姓)들의 피곤(疲困)한 삶을 시(詩)로 묘사(描寫)한 내용(內容)이 바로 위에서 설명(說明)한 것이다.」
문제(問題)는,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경흥부사(慶興府使)로 3년(年)을 보낸 경흥(慶興) 땅이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 땅이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위의 글을 보면 : 「경흥(慶興)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에 대한 특징(特徵)을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描寫)해 주고 있는데,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의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가 중원대륙(中原大陸) 서북방(西北方)과 북방(北方) 땅의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흥(慶興) 땅에서 자생(自生)하는 나무 종류(樹種)를 보면 ;
➀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 경흥(慶興) 땅(地)에서 자생(自生)하고 있는 나무 종류(樹種)는 : ‘소나무와 참나무’라고 설명(說明)하는데… …,
➁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3년(年) 동안 재임(在任)한 경흥(慶興) 땅의 수종(樹種)’은 : ‘버드나무(柳)와 느릅나무(楡)’밖에 없어, ‘소나무나 측백’ 등의 자재(資材)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다. 이러고도 반도학계(半島學界)는, 남한(南韓) 땅 이곳저곳을 파헤치며, 옛 백제(百濟)의 유적(遺蹟)이니, 옛 신라(新羅)의 유적(遺蹟)이니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것을 증거(證據)할 수 있는 유적(遺蹟)이나 유물(遺物)은 발견(發見)된 적이 없다.
또 단군조선(檀君朝鮮)이나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것은, 한국(韓國)의 78개 나라의 것은, 왜(倭)의 것은… …흔적(痕迹)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당연(當然)한 것이, 「이 땅【韓半島 : 朝鮮半島】에는 옛 조선(朝鮮)의 그 어떤 나라도 둥지를 뜬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 답답한 사람들이다.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의 동북방지대(東北方地帶)」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이질적(異質的)인 요소(要素)들이 너무 많아, 비교(比較)한다거나 인용(引用) 또는 언급(言及)하는 것조차 가능(可能)하지 않기 때문이다.》
➤ 반복(反復)되는 설명(說明)이지만 :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경흥부사(慶興府使)로 3년(年)을 보낸 경흥(慶興) 땅이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 땅이 아니었다」함은, 바로 〈오늘날의 중원대륙(中原大陸) 땅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강토(疆土)’였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라는 점이다.
○ 위와 같은 결과(結果)를 보면서도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외치는 반도학계(半島學界)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참으로 난감(難堪)한 문제(問題)다.
「오늘은 아닐지라도 결국(結局)은 국민(國民)들의 선택(選擇)이 올 날이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希望)을 품어보자.
2026년 09월 06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조선사(朝鮮史)를 해설하기 위해 필요 자료를 찾다보면 : 너무 많은 친일부역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 토착 반도인들은 무엇이었을까? 를 생각케 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조선이나 왜나 그게 그거 아냐?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임란(壬亂) 때의 각 지방에서의 관군(官軍)이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승승장구 한양을 점령했다는 것도 반도조선사에서는 도무지 이해불가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미 한양이 점령당하고, 서경까지도 점령당한 뒤에야 각 지방에서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왕사의 명으로 조선의 군대가 이곳 저곳에서 갑자기 뛰어 나오는 것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아마도 임란의 정확한 전쟁사는 모조리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많겠죠.
* 이계 홍양호의 문집을 원문과 번역본을 대조해가며 체크하다 보니 시간은 좀 걸릴지라도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많습니다.
이 분의 기록을 보면 ; 조선왕조는 반도 땅에 둥지를 튼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반도 땅도 조선의 영역권에 속해 있을지라도, 황성을 반도에 두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며, 반도의 자체 역사는 기록이 없으니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백두산불함론"하면 대표적으로 최남선 선생이라고 하는데... ...이 분의 행적을 보면... ...참... ...답답한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일본어로 백두산불함론을..... ...그러나 결국 반도 땅으로 회귀하죠.
그 뒤에 여러 사람들이 이것을 조선어(언문)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니.. ....참 기막힌 일입니다.
한반도 땅에서,
북한산, 마운령..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이 있다라고 하여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하나하나 고찰하다보면 황당한 일을 겪게 됩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누구와 관계없이 한문으로 기록을 했는데, "한백겸' 같은 분은 똑같은 비석을 보고, '윤관의 비'라고 하고, 최남선은 수백년 뒤에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고증했다라고 하니 얼마나 황당한 이야깁니까.
이러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닌 : 반도조선을 입증한다는 대부분의 것들이 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윤관의 개척한 땅도 마찬가지죠.
두만강 이북 700리, 천리가 갑자기 1천리를 남하하여 함경도 두만강 이남에 만들어지도 합니다.
그리고는 추측한다거나 추정한다고 두리뭉실 말하는 것을 보면 : 5000년 조선왕조는 모두기 문맹으로, 언어도 없어 금수처럼 살았다는 애기가 됩니다.
* '이계 홍양호', 선대인의 문집 기록에 대해서는 2-3회 더 게재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워낙 흥미로운 기록이 많아 독자분들에게도 좋은 정보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덥더니... ...비록 햇볕은 따갑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고 그늘에 오면 아주 시원한 느낍이 드네요.
그동안 노트북으로 작업하다가... ...27인치 모니터와 데스크탑으로 작업을 하니 시원시원하게 잘 돌아가네요.
회원 여러분들에게 더 좋은, 진실을 향한 우리 역사를 갈구하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