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기억하는 조선 왕족 이구(李玖)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1957년 크리스마스 파티장에서다. 당시 잘나가던 이 건축회사는 크리스마스 무도회를 매년 고급 호텔에서 화려하게 열었다. 각국에서 모여든 100여 명의 선남선녀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열정과 멋스러움을 한껏 뽐내는 파티였다.
이구는 1957년 6월 MIT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아이엠 페이에 막 입사한 때였다. 줄리아를 보자마자 이구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됐다. 한참 지켜보던 이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줄리아에게 춤을 신청했다. 그들은 함께 춤을 추었다. 줄리아에게는 의례적인 춤이었지만, 이구의 마음은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이구는 곧바로 데이트를 신청했다.
“집에 데려다 줘도 되나요?”
줄리아의 대답은 차가웠다.
“남자 친구가 곧 데리러 올 거예요.”
상심한 이구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내내 혼자 눈길을 걸었다. 사실 그 즈음 줄리아에게 남자 친구는 없었다. 결혼을 약속했던 청년에게 실연을 당한 그는 남자에게 실망해 결혼하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줄리아의 나이는 34세를 넘어서고 있었다. 마침 친한 친구에게서 편지가 날아왔다. 꽤 많은 유산을 상속받고 스페인으로 이주한 친구가 그곳에 호텔을 짓고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해 온 것이다. 줄리아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스페인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아파트와 가구들을 세놓는다는 광고문을 사무실 벽에 붙였다.
얼마 후 처음 그의 아파트를 보러 온 사람이 있었다. 그의 광고문을 보고 찾아온 첫 번째 방문객, 이구였다! 아파트를 잠시 둘러본 그는 함께 식사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버스를 타고 차이나타운으로 나가 함께 밥을 먹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별다른 기억은 없다. 이구는 줄리아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26세 청년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이어진 것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였다. 그들과 함께 버스에 타고 있던 두세 명 청소부들이 우크라이나 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모님 때 우크라이나에서 이민 온 줄리아에게 우크라이나 말은 모국어였지만,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구가 “저건 우크라이나 말”이라고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당신이 어떻게 우크라이나 말을 알아요?”
미지의 나라 동양에서 온 이 남자가 우크라이나 말을 할 줄 안다고? 이구가 처음 미국 유학 왔을 때 룸메이트가 우크라이나인이었고, 이구는 룸메이트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우크라이나 말을 익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막연히 우크라이나계 남자를 만나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줄리아, 그가 한국과 일본의 피가 섞인 우크라이나 말을 할 줄 아는 동양 남자와 결혼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다음 날 토요일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들은 함께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보았고, 이구는 줄리아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첫 데이트였고, 이후 그들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운명의 시작이었다.
줄리아가 이구의 부모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를 만난 것은 1958년 3월 무렵이었다. 아들 졸업식을 보기 위해 미국에 왔던 그들은 1년 계획으로 뉴욕에 머물고 있었다. 한 달치 월급을 털어 정장을 사 입고 진달래를 든 채 남자 친구의 부모를 만나러 갔다. 진달래가 한국 꽃인 줄은 전혀 몰랐다. 이구와 줄리아를 이어 준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영친왕 부부가 출국하는 날, 배웅하러 공항에 갔을 때 일렬로 서서 배웅하는 20~30여 명의 일본 귀족들을 만났다. 이구는 이미 그들에게 줄리아를 자신의 약혼녀로 소개해 놓고 있었다. 이구가 줄리아에게 말했다.
“우린 결혼할 거야(We?l get married).”
언니를 만난 줄리아가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내가 약혼을 했대!”
1958년 8월 두 사람의 약혼이 언론에도 보도됐다.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자 줄리아는 아이엠 페이에서 조그마한 건축 잡지사로 직장을 옮겼다. 어쨌든 그는 평민이고, 이구는 왕족이었다. 왕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됐지만, 그 왕자는 백마를 타지도 않았고, 자동차도 없고, 돈도 없었다. 그래도 결혼을 결심한 뒤 그들은 정말 행복했다. 이구는 예의 바르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보다 여덟 살 연하였지만, 이구는 정신적으로 성숙했다. 그들을 이어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끈은 건축과 예술이었다.
1958년 10월 25일, 운명의 결혼식 날이다. 물론 그녀도 모르게 가장 좋은 날짜인 축일을 선택해 정해 놓은 날이었다. 토요일이었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웨딩드레스는 줄리아가 직접 디자인했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우크라이나 식으로 치렀다. 신혼여행은 록 포인트라는 항구로 갔다. 비가 내리고 추웠지만, 행복했다. 결혼 후 이구는 아이엠 페이 회사에서 계속 일을 했고, 줄리아 역시 계속 직장에 다녔다.
두 사람은 8시쯤 집에 돌아와 저녁시간을 함께 보냈고, 주말엔 함께 청소를 하고 쇼핑도 했다. <히로시마 내 사랑> 같은 영화들을 봤고 발레, 오페라, 오케스트라 공연들을 함께 보러 다녔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건축가였다. 이구는 아버지 영친왕을 몹시 사랑했다. 회사 일로 하와이에 머물 때 영친왕 부부가 찾아왔다. 이때 이미 영친왕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저녁을 먹고 나면 매일 밤 함께 산책했다. 줄리아는 영친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꿈같은 세월은 영원하지 않았다. 1963년 초 미국 시민권을 얻은 이구는 15년 만에 일본 땅을 다시 밟았다. 1950년 8월 미국으로 건너올 때 그는 일본과 한국 어느 나라에서도 여권을 내주지 않아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입국했었다. 시민권을 얻자마자 이구는 회사에 한 달 휴가를 내고 당장 일본으로 가려고 했다. 또 다른 운명의 시작이었다.
● 1963년부터 1973년까지 10년 동안 살았던 낙선재 앞에서. |
그들이 일본에 갔을 때 영친왕은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 머물고 있는 곳도 궁궐이 아닌 전형적인 일본 가옥이었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만났고, 이구가 태어났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앞에서 천황 가족들과 기념촬영도 했다(이구는 얼마 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이구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한일협정을 위해 도쿄에 머물고 있던 김종필을 통한 연락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한다는 전언이었다. 그들은 애초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 없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운명과 엄청난 시련을 맞게 될지 그때는 몰랐다.
1963년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초대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대대적인 카퍼레이드와 함께 환영을 받았다. 제일 먼저 국립묘지를 방문하고, 낙선재로 가서 순종의 왕비인 윤비를 만났다. 처음 본 낙선재는 믿을 수없이 아름다웠다. 그들은 국빈 대접을 받으며 닷새 동안 반도호텔에서 묵었다. 영친왕 귀국문제를 놓고 정부와 협상을 벌이던 그들은 일본을 거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이구가 줄리아에게 갑자기 일본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해 11월 22일로 영친왕 귀국날짜가 잡혔다면서 이구 혼자 떠났다. 한두 주 후면 돌아올 거라 믿었는데, 아무 연락이 없었다. 12월 20일쯤 되어서야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파트를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줄리아는 한국으로 향했다.
박정희 정부는 그들에게 낙선재에서 살라고 했다. 정부는 그들을 선거에 이용하려 했고, 이씨 황실은 황세손인 이구를 내세워 황실재산 문제를 비롯해 산적한 과제들을 풀려고 했다. 무엇보다 그들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황실 문중은 그들 사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구에게 끊임없이 여자들을 소개시킨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줄리아에게 자세한 상황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일 바쁘게 지내는 이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줄리아는 나름대로 자선단체들을 방문하고, 고아원을 돌면서 사회복지 활동을 했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 10년이 지나갔다. 이구와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시어머니 이방자 여사와도 갈등을 빚었으니 고통과 인내의 세월이었다. 이구는 급기야 화랑을 경영하던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1974년 두 사람은 별거를 시작했고, 1979년 이구는 다시일본 여자를 만났다. 1982년 변호사를 통해 이혼장이 날아들었다. 직접 이구를 만나 이야기해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 후 줄리아는 이구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1995년까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장애인들과 함께 옷을 디자인하고 만들며 바쁜 날들을 보냈다. 그러면서 한시도 이구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줄리아는 지금까지도 이구와의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구의 장례식을 몰래 지켜보는 줄리아. |
필자가 줄리아 여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하와이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그와 연락이 닿는 것은 쉽지 않았다. 83세의 고령인 줄리아는 양로원에서 자원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삶을 영화화하겠다며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전화로 간청했다. 하와이에 가겠다고 했더니 뜻밖에도 그가 한국으로 오겠다고 했다.
줄리아와의 첫 만남은 매우 강렬했다. “당신은 왜 영화를 만들려고 합니까?”라는 그의 질문과 함께 석 달간의 긴 인터뷰가 시작됐다. 이것 또한 운명일까? 줄리아가 한국에 머물고 있는 사이,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구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먼발치서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줄리아는 이제 여한이 없다고 되뇌었다.